2014. 2. 21.

maurice blanchot

 
 
File:MauriceBlanchot.jpg


 

 

모리스 블랑쇼 Maurice Blanchot, 1907-2003

 


 

 

* 그린비 모리스 블랑쇼 선집, 1-11

1.『죽음의 선고』 2.『문학의 공간』 3.『도래할 책』 4.『기다림 망각』 5.『무한한 대화』 6.『우정』 7.『저 너머로의 발걸음』 8.『카오스의 글쓰기』 9.『정치평론 1953-1993』 10. 『하느님』 11.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 모리스 블랑쇼, 「목가」, 민희식 옮김, 『문학사상』, 1980년 5월호.

* 모리스 블랑쇼, 「자라나는 죽음」, 민희식 옮김, 『한국문학』, 1980년 11월호.

* 바타유ㆍ블랑쇼ㆍ베케트, 『C. 신부/죽음의 선고/말론은 죽다』, 안태용 옮김, 금성출판사, 1983

* 모리스 블랑쇼, 『아미나다브』, 하동훈 옮김, 범한 출판사, 1984.

* 모리스 블랑쇼, 「내가 상상한 미셸 푸코」, 김현 옮김, 󰡔외국문학󰡕, 제25호, 열음사, 1990년 겨울호.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옮김, 책세상, 1990.

* 모리스 블랑쇼, 「또마, 알 수 없는 사람」, 최윤정 옮김, 『작가세계』, 1990년 가을호.

* 모리스 블랑쇼, 『미래의 책』, 최윤정 옮김, 세계사, 1993.

* 모리스 블랑쇼, 「내 죽음의 순간」, 우종녀 옮김, 『현대비평과 이론』 14호, 1997년 가을/겨울호.

* 모리스 블랑쇼ㆍ장 뤽 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박준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 미셸 푸코, 심재상 옮김, 「바깥의 사유」, 김현 편,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文學과知性社, 1989.

* 에마누엘 레비나스,『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박규현 옮김, 동문선, 2003.

* 박준상, 「블랑쇼의 문학론」,『프랑스철학과 문학비평』, 문학과지성사, 2008.

* 울리히 하세ㆍ윌리엄 라지,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최영석 옮김, 앨피, 2008.

* 김성하, 「모리스 블랑쇼의 중성과 글쓰기, 역동적 파노라마」, 『처음 읽는 프랑스현대철학』, 동녘, 2013.

 

 

‘언어와 존재의 일치’ - 파르메니데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주부/술부 - 주어/술어 - 주체/속성 - 명사/동사ㆍ형용사

 

 

현전(現前, présence)/재현ㆍ표상(再現ㆍ表象, représentation, 언어ㆍ기호의 정보전달 기능)

 



1) 헤겔 - 언어와 존재의 일치. ‘언어만이 존재를 결정할 수 있다.’
2) 블랑쇼 - 언어와 존재의 불일치. ‘바깥은 언어의 한계이다.’(218-219)


 


밤, 또 다른 밤(l'autre nuit): 헤겔적인 밤, 곧 낮(le jour)의 결여 혹은 낮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적 단계로서의 밤이 아니다. 망각, 단절, 중성, 의식을 가진 자로 정의되는 ‘나’의 포기, 역동적인 중성의 무(無, le rien)는 무아(無我, le moi sans moi). 탈주체화, 타자화. 죽음의 사건.

 

 

비개인 - 비인칭(l'impersonnel) - 익명성(l'anonymat/anonymité)

 

 

중성적인 것(le neutre) - 중성화/무력화(la neutralisation): 역동적 중성 운동

 

 

실존(實存, existence, 어느 누구도 아닌 여기-지금의 ‘나’, 現存在, Dasein) - 탈존(脫存, ex-sistence, ‘나’ 바깥과 관계맺음의 사건) - 외존(外存, ex-position, 자신 바깥ㆍ외부에서 존재함, 즉 하나의 탈존 형태, 타인을 향해 존재함, 타인과의 관계 내에 존재함)

 

 

* 박준상, 『바깥에서.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 인간사랑, 2006.

 

 

- “독서는 알지 못한다. [...] 독서는 받아들이며 듣는 것이지, 판독하고 분석하는 힘이 아니며, 발전하여 나아가거나 폭로하여 되돌아가는 힘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독서는 이해가 아니다. 그저 따라간다. 이 놀라운 무지(無知).”(『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52; IC, 320)

 

 

- 페르디낭 드 소쉬르, “그 자체에 놓여 있는 사유란 아무 것도 필연적으로 규정된 것이 없는 모호한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 미리 정해진 관념이란 있을 수 없으며, 언어의 출현 이전에 아무 것도 분명하지 않다.”(137)

 

 

- 프리드리히 니체, “이제 우리는 사물들 안에서 부조화와 문젯거리를 읽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 형식 내에서만 사유하기 때문이다 - 그에 따라 ‘이성’의 ‘영원한 진리’를 믿게 되는 것이다(예를 들어 주어ㆍ술어 등). 만일 우리가 언어의 구속(sprachlichen Zwange) 내에서 사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유하기를 그친다. 우리는 그러한 한계를 한계로 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에 정확히 도달하였다.”(137-138)

 

 

- 모리스 메를로-퐁티, “단어는 대상들과 의미들을 나타내는 단순한 기호이기는커녕 사물들에 거주하고 의미들을 운반한다. 따라서 말하는 자에게 말은 이미 형성된 사유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138)

 

 

- 스테판 말라르메, “사물을 그리지 말고 사물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그릴 것. / 거기서 시는 단어들로 구성되어서는 안 되고 지향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모든 말들은 감각(sensation) 앞에서 지워져야만 하네.”(169)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헤겔, “언어는 매순간 죽음을 가져온다. 이러한 생각은 [...] 단어(개념)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 이루어지는 - 이해라는 것이 하나의 살해와 같다는 헤겔의 생각에 연결된다. [...] 여기서 살해는 우리가 단어, 언어를 사용해 한 존재자existant를 규정(재현, 표상)하면서 그 생생한 살아 있는 현전(現前)을 파괴하는 행위, [...] - 그 존재자를 일반적 표상으로 전환시켜 직접적ㆍ일회적으로 주어졌던 그 현전을 부재로 돌리는 - 행위이다. 언어를 바탕으로 주어졌던 현전을 부재로 돌리는 것은, 즉 언어를 통해 한 존재자를 규정(동일화)해서 파악한다는 것은 그 존재자에게서 그것이 생생하게 주어졌던 시간과 공간을 탈취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해는 살해이다.”(206-207)

 

 

- 알렉상드르 코제브, “‘이 개’(le chien)라는 단어는 발설되자마자 그 단어가 가리키고 있는 바로 이 개(눈 앞에서 짖고 있는 이 하연 개 또는 검은 개)를 그 존재의 지주인 여기 지금으로부터 떼어놓고 즉시 ‘하나의 어떤 개’, ‘일반적인 개’, ‘네발짐승’ 또는 ‘동물’로 동일화ㆍ일반화시킨다. 그러한 과정이 바로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과정이다.”(207)

 

 

* 지워지는 글쓰기, 침묵의 글쓰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나아가 ‘우리’ 자신인 사건(‘내’가 공간으로 열리는 탈존, 그리고 타인으로 열리는 외존) 자체가 침묵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지 않은가?”(14)

 

 

외존, “이 말은 자신 바깥에 놓임, 자신 바깥과의 관계 내에 존재함, 즉 탈존의 한 양태를 표현한다. 즉 이 말은 탈존과 동근원적이며, 둘 모두는 어원상 인간존재의 근본 조건인 ‘나’ 바깥ex에 놓임sistere을, 즉 나 바깥과의 관계 하에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탈존이라는 의미에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주 타인이라는 바깥과의 관계에서의 인간 존재 양태를 가리킨다. 즉 외존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 바깥으로 나감, 타인을 위해 자신을 드러냄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15)

 

 

“그[블랑쇼]가 말하는 휴머니즘은 자기결정력, 즉 자아ㆍ주체 바깥의 인간의 영역을 가리키는 단수성(單數性, singularité)에 대한 탐색이다. 여기서 단수성은 어떤 인간의 본질을 가정하지 않는 탈존(실존), 즉 “즉각적이며 직접적인 형태로 현전하는, 따라서 즉각 사라지는 부재”로 돌아가고 있기에 시간적(순간적) 현재에 기입된 탈존의 양태이다. [...] 그 현전은 동일화하는 의식에 떠오르는 하나의 표상이 아니며, ‘나’와 타자의 만남의 기표signifiant로써 관계(사이 관계, 관계 사이)를 알리는 표시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 부분으로써, 함께 있음être-avec의 기표로서 마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념의 바깥에서(따라서 그것은 본질이 배제된 현전이다), 함께 있음의 장소로서, ‘나’와 타자가 서로 접근하는 장소로서 현시(現示, présentation)된다(表象représentation과는 다른 현시). 그 현전은 인간의 이념을 전해주고 의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되찾을 수 있는 표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 너머 또는 의식 이하에서 직접 주어진 감각적 현시로서,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의 열림을 알려주며 타인과의 관계와 함께-있음이 ‘나’의 실존적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기표이다. / 그 현전, 본질 없는 현전, 인간의 현전(또는 타자의 현전)을 블랑쇼는 ‘그 le Il’ 또는 ‘그 누구 le On’라고 부른다(‘그’와 ‘그 누구’는 블랑쇼에게서 동의어이다. “이 누군가는 형성 없는 그, 우리가 일부분을 이루어 소속되어 있는 그 누구이다. 그러나 누가 그 누구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가?”) ‘그’ 또는 ‘그 누구’는 함께-있음과 소통의 장소를, ‘나’와 타자가 관계 가운데 놓이지만 양자 중 하나에 귀속되지 않는 ‘우리’의 장소를 만든다.”(27-28)

 

 

“그에게서 ‘작품’ 자체, 언어 자체, 또는 ‘글쓰기’는 어떤 움직임, [...] 표류의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은 문자로 씌어진 책 내부에서 발견되고 분석될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결합을 넘어서 ‘책 바깥에서’,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소통을 통해, 다시 말해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작품의 공동구성co-constitution de l'œuvre을 통해 전개된다.”(29)

 

 

“왜 바깥(le dehors)에서 문학이 유래하며 문학은 궁극적으로 바깥을 향해 나아가는가, 왜 그리고 어떻게 바깥은 글 읽는 자와 글 쓰는 자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장소인가, 왜 바깥으로 향해 있는 작품은 바깥을 위해 결국 사라져 가는가? [...] 그러한 물음들이 주어질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바깥이 문학 이전 그리고 문학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바깥은 문학 이전에, 문학 바깥에서, 문학 너머에서 문제가 된다. “문학을 문학 자체 내에서 긍정하고자 하는 사람 자는 아무 것도 긍정하지 못하게 된다. 문학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사람은 문학을 벗어나 있는 것만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문학이 무엇인가를 찾은 사람은 문학 이하의 것만을, 또는 더 나쁘게 문학 그 너머의 것만을 찾은 것이다.”(33-34)

 

 

“바깥은 문학의 모든 언어와 문학 작품 이전에 군림하는 완전한 바깥(pur Dehors)이다. 완전한 바깥은 이 현실의 세계로, 그리고 보다 이상적이고 본래적인 또 다른 세계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자가 추방당해 있는 공간이다. 바깥의 경험은 “삶으로부터 추방되어, 경계선 바깥으로 내몰려, 추방 가운데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된 채” 존재하는 경험이다. 블랑쇼에게 바깥의 체험을 겪는 자의 대표적인 예는 카프카이며, 카프카에게 “예술은 다만 이전의 치명적인 숙명에 대한 해석ㆍ왜곡ㆍ심화에 지나지 않는다.”(34)

 

 

“바깥의 경험은 불행의 경험, 어떤 불행이(그것이 육체적이든 사회적이든) 현상의 수준에서, 세계와의 관계에서 다시 번역되는 데에서 오는 경험이다. 즉 그것은 어떤 육체적ㆍ사회적 고통(블랑쇼의 소설화된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과 같이, 가령 ‘나’의 죽음으로의 접근ㆍ타인의 죽음의 체험ㆍ병의 체험ㆍ사회로부터의 배제와 추방이 가져오는 고통)이 존재(세계에서 존재함)의 불가능성의 자각에 따르는 고통으로 덧나는 체험이다. 그것은 세계와의 관계, 즉 유의미성에 의해, 의미의 친숙함에 의해 보장되는 관계의 결렬을 가져온다. 그 결렬은 어떤 고통과 함께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 결렬은 또 다른 결렬, 자아와 자신 사이의 결렬, 즉 자아(le moi)의 파기를 야기한다.”(35-36)

 

 

“세계의 상실과 자아의 상실의 동근원성(同根源性), 그것을 블랑쇼는 다시 카프카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이 일반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데, 적어도 카프카에게서만은 그렇다. 왜냐하면 예술이 카프카가 그러한 것처럼 세계 ‘밖에’ 존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예술은 내밀성도 없고 휴식도 허락하지 않는 이 바깥의 깊이를, 우리가 신과조차, 우리의 죽음과조차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의 관계도 맺지 못할 대, 솟아나는 그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러한 불행’에 대한 의식이다. 예술은 스스로를 상실한 자, ‘나’라고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자, 같은 움직임에 의해 진리를 상실한 자, 추방에 처해진 자[...]의 상황을 묘사한다.” 바깥의 경험은 이해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현상, 존재에 이르지 못하며 단순한 비존재-완전한 무(無)-도 아닌 현상과 관계한다.”(36-37)

 

 

“바깥의 경험은 또한 중성적인 것(le Neutre)에 대한 경험이다. 중성적인 것은 [...] 나타난 대로의 현상과 거기서 도려내어 얻을 수 있는 인식 사이의 공백(차이, 하지만 무해한 차이가 아니라 언제나 고통을, 추방의 고통을 수반하는 차이)에 기입된다. 중성적인 것은 인식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같은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동일자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인식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것도 아니다. 중성적인 것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면, [이는 그것이] 항상 미결정적인 것(l'indéterminé)이라는 의미에서이다. [...] 바깥의 경험은 어떤 진정한 실존의 발견하기 위해 거쳐 가야만 하는 어떤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우리가 의지로 도달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바깥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나아가 우리가 거기에 함몰되는 것이다. 바깥의 경험은 말하자면 수동성의 경험이다. [...] 그[블랑쇼]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바깥이 항상 의지에 의해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깥이 중성적인 것으로 부과된다는 것, 그것은 현상의 주어짐의 근원적 무차별성을, 현상은 원칙적으로 현상에 대한 동일화(현상을 동일자로 환원시킴, 간단히 말해 존재에 대한 결정)를 초과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바깥은 존재에 대한 결정에 앞선다. 따라서 세계가 오직 존재에 대한 - 현실적(도구적) 수준에서 또는 이상적(정신적) 수준에서의 - 결정으로부터 유지될 수 있다면, 바깥은 세계의 ‘근원’이다.”(37-38)

 

 

“바깥의 경험에서 어떤 인간 공동의 영역이,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실존적 조건으로의 함께-있음이 발견된다. [...] 바깥의 경험 내에서의 함께-있음, 그것을 소통의 어떤 급진적 양태와 공동체에 대한 블랑쇼의 성찰은 부각시키고 있다. 그 성찰은 바깥이 인간들 사이의 한께-있음이 이루어지는 소통이 장소라는 것을 말한다.”(39)

 

 

밤, 또 다른 밤의 경험. “또 다른 밤의 경험에서, 즉 바깥의 경험에서 [...] 비롯되는 나의 부재는 자아가 완전히 영사막으로 변형되는(devenir-écran absolu du moi ) 데에, 다시 말해 자아가 그 자신과 연결되는 능동적 의식이 차단되는 데에, 절대적 수동성 내에 침몰당하는 데에 있다. 자아가 완전히 영사막으로 변형됨, 그것은 세계가 의미가 부재하는 모상ㆍ빈 껍데기ㆍ시뮬라크르로 변형되는 사건에 따라 나오는 경험이다. 세계가 시뮬라크르로 변환되는 사건, 즉 세계가 완전히 어둠으로 묻히는 사건, 그 사건에 대한 경험이 바로 바깥의 경험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깥의 경험은 또한 중성적인 것의 경험, 의미가 부재하는 이미지의 경험, 의미의 불가능성의 경험이다(세계 내의 사물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열린다는 - 탈존한다는 -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54-55)

 

 

“내가 타자에 의해 위협받고 억압당하는 [...] 불행한 관계에서 나는 그에게 변증법적이자 비변증법적인 항의contestation로 단호히 저항해야만 한다. 블랑쇼는 다시 이렇게 쓴다. “그에 따라서 당연히 타인의 살기 돋친 의지가 나를 그의 게임에로 이끌며 나를 그의 공모자로 만드는데, 바로 이 때문에 항상 두 종류의 언어가, 두 종류의 요구가 있어야만 한다. 하나는 변증법적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비변증법적이다. 하나, 거기서는 부정성(la négativité)이 과제가 되며, 또 다른 하나, 거기서는 중성적인 것(le neutre)이 존재와 비존재 위로 솟아오른다.””(109)

 

 

“변증법적-비변증법적 항의를 블랑쇼는 ‘거부refus’라는 말로 대신한다. 변증법적-비변증법적 항의 또는 거부는 어떤 평등과 소통의 요구를 표현한 말이 된다. 힘 있는 말인 동시에 무력한 말. [...] 그 말은 자아의 말인 동시에 또한 세계를 상실한, 자아를 박탈당한 자의 말, 다만 중얼거리기만(murmurer) 하는 어느 누군가(quelqu'un)의 말이다. 거부는 따라서 어떤 법의 비호 아래 아직 모일 수 없는 자들의 말, 그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공통의 독트린ㆍ조직ㆍ기관을 갖지 못한 자들의 말이다. 아직 말하지 못하는,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의 말이다.”(113)

 

 

“블랑쇼가 말하는 나와 타자 사이의 공동체는 어떤 가시적 공동체, 어떤 조직과 기관에 기초한 뭐라고 명할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공동체 없는 공동체(communauté sans communauté), 이름 없는 공동체 또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communauté inavouable)이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를 이루는 자들은 나와 어떤 이념, 어떤 기준, 어떤 목표를 공유하는 자들이 아니다. 이 공동체는 어떤 전체성 하에 나의 복수형으로 추상화될 수 있는 자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동체 없는 공동체는 어떤 사회적ㆍ국가적ㆍ정치적ㆍ이념적 집합체-그것이 제도에 따라 정착된 것이든 아니든-와도 동일시될 수 없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는 모든 정치적 이념과 모든 현실적인 정치적 계기들(모든 정체(政體)의 구성과 그 당위성, 정치권력의 구성과 해체, 정치적 저항세력의 조직과 그 당[위]성)에 대해 전-근원적이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현실) 정치와 결부된 의식 수준에서의 문제들(이념ㆍ법ㆍ도덕)에 대해 중성적이며(즉 그것은 이러한 이념ㆍ법ㆍ도덕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정치 너머의, 그 이하의 인간들 사이의 급진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타자의 현전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115-116)

 

 

“이중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나와 타인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고독’과 관계없지 않은 그 분리로부터, 나와 타인이 서로를 부르고, ‘우리’라는 함께-있음의 양태에 기입되면서 양자는 자아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함께-있음 가운데, 나와 타인은 제3의 인물troisième personne이라는 공동의 지위에 속한다. 그 공동의 지위를 지정하는, 타자의 현전과 마주하는 비인칭적ㆍ익명적 탈존을 블랑쇼는 ‘그le Il’(또는 ‘그 누구le On’)라고 부른다. ‘그’는 나도, 타인도, 제3자도 아니며, 그 모두의 타자, 그 모두에게 제3의 인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Autre를 제시한다. “타자Autre, 즉 그le Il, 그러나 제3의 인물이 어떤 [구체적인] 제3의 인물이 아니고 중성적인 것을 발효시키고 있는 한에서.” ‘그’는 탈존의 공유가 이루어지는 관계 내에서의 사건을, ‘우리’ 또는 ‘공동-내의-존재’로 열리는 사건을 의미한다.”(119)

 

 

“바깥의 경험은 결국 자아 바깥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예를 들어 병ㆍ고독의 경험, 사회로부터의 추방의 경험)]에 대한 공유의 경험이다. [...] 자신의 존재를 의식으로, 사유로, 언어로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있는가? 상징체계로서의 언어를 바탕으로 의식과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 세계가 문화[文化, 社會, 人爲?]의 세계라면, 바깥은 또한 문화의 세계 바깥이며 바깥의 경험은 문화 바깥의 경험이다. 그렇다고 바깥의 경험은 있을 수 없는 순백의 자연(그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고 그곳으로의 회귀를 꿈꿀 수도 없다)에 대한 경험이 아니며, 문화(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 사이의 균열ㆍ틈ㆍ단절에 들어가는,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경험이다.”(128-129)

 

 

“제3의 인물, 즉 나와 타인 모두에게 공동의 타자는 우리가 본 대로 ‘그’(또는 ‘그 누구’)이다. [...] ‘그’는 특정 인물과 일치될 수 없지만 어느 누구라도-아무나-기입될 수 있는 비인칭적 탈존, 동사적 탈존 또는 탈존의 비인칭성, 탈존의 동사성을 가리킨다. 작품이 씌어지고 읽히고 보다 명료하게 드러나는 데에 따라 글쓰는 자의 모든 서술 행위가 하나의 궁극적 관점에서 조망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는 글쓰기 가운데, 즉 비인칭적 언어의 움직임 가운데 놓여 있다. [...] 여기서 글쓰기는 작품을 향해 나아가며, 작품은 의미를 거쳐, 그리고 의미를 넘어서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이에서 말함’(entre-dire)의 형태를 갖는다.”(135-136)

 

 

“하나의 단어는 우리가 그것을 사용할 때마다, 말하거나 쓸 때마다 죽음을 가져온다 - 즉 그것이 가리키는 존재자의 사라짐을 알리고 확인한다. [...] 인간은 단어들의 도움으로 구체적이고 생생한 존재자들을 살해해 의식의 고정된 의미들로 바꾸고, 그에 따라 의식에 기반한 존재, 자유롭지만 고독한 의식적 존재가 된다. [...] 존재자들을 살해한, 존재자들에 죽음을 부과한 인간에게 이제 그 죽음을 견지하고 지탱하는 것, 즉 비현실성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언어는 안정과 불안을 동시에 가져 온다.” [...] 그 과정은 여기 지금 주어졌던 생생했던 것들이 사라지면서 의식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죽은 껍데기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언어로 인해 인간이 비현실성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은, 언어가 단순히 허위 또는 거짓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구체적ㆍ개별적 존재자가 주어지는 시간과 추상적ㆍ일반적 사물(언어가 구성하는 사물)이 주어지는 시간 사이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을, 즉 시간의 시간성을 전개시키고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언어는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시간의 지나감을 통고한다, 언어는 지나간 시간, 사라진 시간을 기억으로, 죽은 껍데기로 보조하는 무덤이다. 또한 언어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그 자신의 최후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증거이다. 언어가 없엇다면 우리에게는 기억이 없었을 것이고 시간의 시간성(시간의 지나감)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끝, 우리의 최후의 죽음(종말)을 에상할 수 없었으리라. 간단히 말해 죽음을 몰랐으리라.”(207-211)

 

 

“인간은 언어의 도움으로만 존재에, 의식의 일반적 존재에 접근할 수 있다. [...] 인간이 언어를 통해 이르게 된 존재는 또한 존재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 안에 비현실성을 담지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 존재는 언어로 포착되는 한 유한성 내에서만 구성되며 언제나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 인간을 언어에 매어 있는 존재로 보았을 때, 존재의 유한성은 인간의 유한성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 의미의 세계는 한계지워진 존재 위에, 즉 존재자들에 대한 살해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존재에 대한 결정(한정)에 따라 형성된다. 의미의 세계는, 인간이 부정의 능력을 가진 자이자 창조자라는 정체성 아래 오성을 부여받은 자로서 고유하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부정하는 자이자 창조하는 자라는 인간의 정체성은 결코 견고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세계를 주정하고 의미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로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 먼저 무 가운데, 언어가 만들어낸 ‘비현실성’ 가운데로 들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말하면서, 언어에 붙들리게 되면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동일성)의 한계를, 부정하는 자이자 창조하는 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떠받치고 잇는 공허를, 즉 자신 내부의 틈ㆍ분열을, 결국 자신의 결정적 유한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할 때, 나는 내가 지적한 것의 실재를 부정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말한 자의 실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212-214)

 

 

“문학은, 정확히 말해, 문학 또한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문학은 의미의 세계에, 자연의 세계와 구별되는 인간적 현실에, 인간이 담론을 통해 구축한 현실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 현실, 의미의 세계로서의 현실은 또한 비현실로서의 현실이다. 그 현실이 갖는 객관성(문화의 세계에서의 객관성, 퓌시스physis의 객관성이 아닌 노모스nomos의 객관성, 즉 담론이 구축한 의미들ㆍ사상思想들의 객관타당성)은, 헤겔이 정확히 본 것처럼, 영원의 지평에서가 아니라, 일정한 시간의, 역사의 지평에서 주어진다. [...] (존재는 언제나 유한성 위에 놓여 있다). 존재(헤겔에서의 존재, 즉 존재의 의미로서의 존재, 간단히 의미ㆍ개념으로서의 존재)가 시간의 어떤 [유한한] 시점에서 결정된다면, 언제나 그 결정은 시간에 따라, 역사에 따라 수정될 수 있고, 나아가 취소될 수도 있다.”(214-215)

 

  

 

“작가와 독자의 소통과 동시에 생성하는 작품은 책 바깥에서 퍼지는 단어들의 부재의 순간적(시간적) 울림을 자신에게 고유한 공간, 즉 ‘문학의 공간espace littéraire’으로 만든다(단어들이 음악이 됨,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의 공간화). 그 공간, 즉 책의 바깥은 중성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어들이 사물들을 동일화(재현)하는 구성적 기능이 중단될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중성적인 것은 ‘이것’ 또는 ‘저것’으로, ‘이것이 아님’ 또는 ‘저것이 아님’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 따라서 비존재로서의 존재이다). 중성적인 말(바깥의 말)은 사물의 부재를 포착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중성적인 말은 연장되어 있는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시간으로서 사물의 부재의 현전(작품에서 사물들이 단어의 부재에 부응하면서 부재로 돌아가는 순간에 나타나는 현전)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 사물의 부재 가운데 작품에서 ‘그’(‘그 누구’)가 현시된다. 사물의 부재는, 즉 작품에서 단어의 부재는 단순한 무로 돌아가지 않고 ‘그’를 현시하며, ‘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작품에서 ‘그’는 언어의 바깥에, 언어에 매개되지 않은 어떤 신비로운 현전이 아니라, 언어적 형태를 통해, 즉 목소리(시선-언어)를 통해 나타난다. [...] 하나의 문학에 대한 긍정(작품에 대한 긍정)은 또 다른 하나의 문학에 대한 궁극적 부정(책에 대한 부정)으로 귀착된다. 문학은 문학 자체를 향해, 즉 사라짐을 향해 가고 있다(“문학은 문학 자체를 향해, 즉 사라짐이라는 문학의 본질을 향해 가고 있다.”)”(282-284)

 

 

“언어가 더 이상 사물들과 세계를 통제하지 못하고 인간의 힘의 한계만을 가리키고 있는, 그러한 시간과 장소에서조차 또 다른 언어는 타인을 향해 열려 있고,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연다. 그 또 다른 언어, 즉 타인과 관계를 여는 언어, 사물들과 세계를 관리ㆍ통제하는 능동적 언어에 앞서는 언어, 능동적 언어의 한계에서조차 타인을 향해 있는 언어가 시(詩)이며, 언어의 조건으로서의 언어, 모든 언어의 밑바닥을 이루는 언어, 모든 언어의 구원으로서의 언어이다. 그 또 다른 언어는 목소리 또는 절규이다. 문학은 그 언어를 현시하고, 목소리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침묵의 절규가 들리게 한다. 거기에 모든 종류의 휴머니즘이, 즉 타자와의 소통에 대한 최후의 긍정이 있다. ‘우리’는, ‘그’ 또는 ‘그 누구’는 삶과 죽음의 접경에서, 그러나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 죽음의 편에서가 아니라 삶의 편에서 절규한다.”(296)

 

 

* 박준상, 「옮긴이 해설」, 모리스 블랑쇼/장 뤽 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문학과지성사, 2005.

 

 

“블랑쇼의 사유는 20세기에 그 극점에 다다랐던 서양의 모든 잠재력과 근대성의 모든 힘이 쇠진되어 가는 장소에서 전개된다. [...] 블랑쇼에게서 [...] 근대성을 뒷받침했던 이념적 지주들(예를 들어, 인간의 주체성, 신, 예술의 자율성과 절대성, 예술가의 천재ㆍ내면성, 공동체의 이념)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 블랑쇼는 근대성의 환상, 한마디로 말해 인간의 힘ㆍ능력의 확신에 대한 환상이 깨져나가는 장소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건조하고 냉정하게, 다른 한편으로는 단호하고 열정적으로, 어떻게 주체의 최고 주권(이성의 사유능력의 최고주권)이 주체의 사라짐으로, 변증법적으로 구성된 개념적 절대 존재가 존재의 바깥으로,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강조한 예술가의 고유성ㆍ절대성이 예술가의 주변성(예술가의 세계로부터의, 또한 작품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어떻게 세계 변혁의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단순히 타자의 발견으로 귀결되는가를 말한다.”(92-95)

 

 

“블랑쇼가 강조하는 것은 ‘관계’이지 관계의 한 항인 ‘타자’가 아니다. 즉 그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나’와 타자 사이의 일방적 비대칭성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97)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