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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1.

이해되지 않으려는 의지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이해되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말로 - 음성을 통해서건, 혹은 쓰여진 문자를 통해서건 - 무언가를 표현할 때, 우리는 이 표현이 이해되어질 수 있으며 또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가다머에 의하면 표현이란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위한 표현(Darstellung für jemanden)’(GW, I. 114)이며, 그런 한에서 모든 표현은 - 그것이 표현인 한 - 이해되어지기를 의욕한다(vgl. GW. I, 480, 485, u. II, 76). 그러므로 모든 해석학적 현상의 배후에는 개별성 간에 ‘서로를 이해하려는 좋은 의지(gute Wille, einander zu verstehen)’가 자리잡고 있다. [...] 반면 이해되어지기를 원하지 않는 표현도 있고, 통일성 속으로 소멸되기를 거부하는 개별성도 있다. 언젠가 니체는 “이해되어진다는 것은 매우 모욕스러운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 니체에게 있어서 이해의 위기는 니체라는 이름의 천재적인 개별성이 운명적으로 겪어야 하는 정신적 고독을 의미한다. 천재 내지 초인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이해와 동일에로의 - 형이상학적으로 좋은 -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젠가 브레히트가 인상적으로 표현했듯이 ‘홀로 걷는 자의 위험’(Gefahr der Einzelganger)이다. 이 위험을 니체는 긍정하고 즐긴다. 왜냐하면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즉 통일되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니체라는 개별성의 ‘권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해로의 좋은 의지(guter Wille zum Verstehen)와 이해되지 않으려는 의지(Wille zum Nichtverstandenwerden)가 교차하는 곳, 전체성에로의 ‘귀속Zuordung’(GW. I, 462)과 이 귀속을 거부하는 개별서이 충돌하는 곳 - 바로 여기서 철학적 해석학과 해체주의 간의 논쟁이 시작된다."


 
- 김창래, 「통일과 해체의 이율배반 -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대한 이른바 있을 법하지 않은 논쟁의 불가피성에 대하여」,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철학연구』 vol. 24 no. 1, 2001, 66-68쪽.
 

2014. 2. 28.

aletheia - pythagoras, platon

 
 
 
 
 
 
 
* W.K.C. 거스리, 『희랍철학입문.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0.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피타고라스 교설의 핵심은 인간 혼의 불멸성과 인간으로서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의 육신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육화(肉化ㆍ化身, incarnation)을 통한 혼의 진행에 관한 믿음이었다. 이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피타고라스학파의 금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곧 동물의 살을 먹는 것에 대한 금기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먹는 짐승이나 새 안에 어쩌면 나의 할머니의 영혼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혼의 윤회가 가능하고 흔히 있는 일이라면, 모든 생물이 동족이며, 이와 같은 자연의 동족관계는 피타고라스학파의 또 하나의 교설을 이룬다. 이 교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확대되는데 그 이유는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생물의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로 전체로서의 우주가 하나의 생명체라고 믿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이오니아학파와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점에 있어서도 아낙시만드로스나 아낙시메네스에게는 낯선 것, 곧 합리적 근원에서 유래했다기보다는 신비적인 종교적 근원에서 유래한 함축적 의미를 알았다. 그들은 우주는 무한량의 공기 혹은 숨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것이 전체에 스며들어가 생명을 준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개개의 살아있는 생명체에 생명을 주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아낙시메네스에 의해 이론적으로 설명된 이러한 통속적인 믿음의 잔재에서 이제 하나의 종교적 교훈이 이끌어내어진다. 사람의 숨 혹은 생명은 무한하고 신적인 우주의 숨 혹은 생명과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우주는 하나이며 신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여럿이며 각기 다르고 또 사멸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적인 부분, 곧 혼은 사멸하지 않는 것이고, 그 불멸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람의 혼은 신적인 혼이 잘려나가 사멸하는 육신 안에 갇힌 것으로, 신적인 혼의 파편 혹은 불꽃이다.
 
 
사람은 이리하여 하나의 삶의 목표, 곧 육신의 더러움을 털어버리고 순수한 정신이 되어 자신이 본질적으로 속하는 보편적[우주적 universal] 정신과 다시 결합하는 목표를 갖는다. 혼이 스스로를 완전히 정화할 수 있기 전까지는, 혼은 이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 감으로써 계속해서 일련의 윤회를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정해진 출생의 순환이 완결되지 않는 한, 개체성이 유지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가 신적인 것과의 재결합[合一]에 의한 자신의 적멸(寂滅)임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믿음을 피타고라스학파는 다른 신비주의 종파와 나누어 갖고 있었는데, 특히 신화적인 오르페우스(Orpheus)의 이름으로 가르친 사람들과 그러하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것은 정화 및 신적인 것과의 결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에 관한 부분이다. 그때까지 순결은 종교적 의식에 의해 그리고 시체들을 피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금기들을 기계적으로 준수하는 것에 의해 추구되어 왔다. 피타고라스 역시 이러한 금기의 많은 부분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자기만의 방식, 곧 철학자의 방식을 더하였다.
 
 
피타고라스 교설의 첫째 원리라 할 수 있을 자연의 동족관계설은 고대 신앙의 잔재이며, 마법적인 ‘함께 느낌’의 관념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둘째 원리는 합리적이고 전형적으로 희랍적인 것이다. 연구의 진정한 대상으로서의 형상 혹은 구조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강조,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한도 혹은 한정(限度, 限定, peras, limit) 관념의 강조가 그것이다. 만약 희랍인들의 독특한 점이 ‘(환상적이고 모호하며 일정한 형태가 없는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지적이며 확정적이고 측정 가능한 것’에 대한 그들의 선호라면, 피타고라스야말로 헬라스 정신의 가장 앞 선 주창자였다. 확신에 찬 도덕적 이원론자로서 피타고라스학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계열을 제시했다. 좋은 것에는 빛, 단일성, 남성, 한정 혹은 한도가 온다. 나쁜 것에는 어둠, 다수성, 여성, 한정되지 않은 것 혹은 한도지어지지 않은 것(無限定者, to apeiron, the unlimited)이 온다.
 
 
피타고라스의 종교는 일종의 범신론을 구체화한 것이다. 세계는 신과 같으며, 따라서 세계는 선하고, 하나의 단일한 전체이다. 만일 세계가 선하고 살아있고 하나의 전체라면, 이는 세계가 한정되어 있으며(peperasmenon, limited), 자신의 상이한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질서(kosmos, order)가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충만하고 유능한 삶은 조직화(organization) 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이를 개개의 생물에서 볼 수 있으며, 우리가 이를 유기체(organism)라 일컫는 것은 그것이 각기 자신의 모든 부분을 정돈하여 전체를 살려가는 목적에 종속시키고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그리스어 organon은 연장, 도구의 뜻이다). 세계가 좋은 것이고 살아 있는 것이라고 불리는 것은 물론, 하나의 단일한 전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세계가 정해진 한계 혹은 한도를 가지며 따라서 그렇게 조직화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세계 현상의 규칙성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낮과 밤이 그리고 계절들이 제 때에 맞추어 변함없이 질서 속에서 이어진다. 선회하는 별들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영원하고 완전히 원형인 운동을 보인다. 요컨대, 세계는 하나의 코스모스(kosmos)라 불릴 수 있는 것인데, 이 단어는 질서, 적절함, 아름다움의 관념들이 결합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피타고라스는 세계를 이러한 이름으로 부른 첫 번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천성이 철학자여서 만일 우리가 (본질적으로 우리와 동족관계에 있는) 살아 있는 우주와 동일하게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옛날의 종교적 규율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우주의 방식을 연구하고 우주가 어떤 것이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생활을 우주가 드러내주는 원리에 한층 더 가깝게 부합시켜 이끌어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물론, 우리를 우주에 한층 더 근접시켜 줄 것이다. 우주가 하나의 코스모스 혹은 질서 정연한 전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도 하나의 작은 코스모스이다. 우리는 대우주의 구조적 원리를 재현하는 작은 유기체이다. 그리고 이들을 관통하는 우주의 구조적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형상과 질료의 요소를 발전시키고 조장한다. 코스모스(kosmos)를 연구하는 학자는 자신의 혼 역시 코스모스적인(kosmios) 것이 된다. [...] 피타고라스 자신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수(數, numbers)였다(54-58쪽)
 
 
* 비율(比率, proportion).
  
 
 
 
 
 
 
테트락티스(tetraktys)
 
 
 
 
 
 
 
 
 
 
 
 
 
 
 
 
 
* 탈레스 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005.
 
 
23. 헤로도토스(DK14A1)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처음으로 한 사람들이다. 즉 사람의 혼은 불사적이며 몸이 소멸할 때면 그때마다 태어나는 다른 동물 속으로 들어가고, 육지나 바다에서 살거나 날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거쳐 윤회하고 나면, 태어나는 사람의 몸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혼의 윤회(periēlysis)가 3,000년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한다. 헬라스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앞서서, 어떤 이들은 나중에 이 이야기를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이용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만 기록하지 않는다.(『역사』 II. 123)
 
* 프리맨은 헤로도토스가 혼의 전이설을 이집트인들의 설로 여긴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이집트의 종말론에서 이 지상의 삶은 또 다른 세상에서의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위한 짧은 준비 기간이며, 되돌아옴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966, 78쪽). KRS도 혼의 옮겨감(metempsychōsis)이란 것은 이집트의 기록이나 작품에서 확인되지 않음을 지적한다(KRS 220쪽).
 
 
 
24. 포르퓌리오스(DK14A8a)
 
 
[...] 그[피타고라스]는 말하기를, 우선 혼은 죽지 않는다고, 그 다음으로 혼은 다른 동물들로 옮겨간다고, 게다가 일어났던 일들은 어떤 주기에 따라 언젠가 다시 일어나며,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혼을 지니고 태어나는 모든 것을 동족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실로 피타고라스가 이런 교의(dogma)들을 처음으로 헬라스에 전해준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의 생애』 19)
 
 
2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K21B7)
 
 
그[크세노파네스]가 그[피타고라스]에 대해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언젠가 그는, 개가 심하게 맞고 있을 때, 곁을 지나가다가 불쌍히 여겨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멈추어라. 매질하지 마라. [나의] 친구인 사람의 혼이니까. [그 개가] 짖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 혼을 알아보았다’라고 말이다.”(『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VIII. 36)
 
 
(176-179쪽)
 
 
 
 
 
***
 
 
 
* W.K.C. 거스리, 『희랍철학입문.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0.
 
 
 
 
플라톤
 
 
그래서 완전하고 영구적인 본(本)의 존재가 가정되면 그리고 또 일단 그것이 가정되었으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현상들에 우리가 어떤 실재성을 귀속시키든 그 실재성은 초월적인 형상(形相, εἶδος, eidos, form; from εἴδω, eidō, 'I see')들의 실재성에 제한된 정도에 있어서 그것들이 관여하는 덕택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언제 저 영원한 형상들을 알게 되었기에, 이를테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보이는 생물들이 어떤 형상들에 속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또 어떤 실행된 행위가 좋음(善)이나 아름다움에 관여하는 것인지 알아보고 또 언급할 수 있는가? 이 점에 있어서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학파의 가르침의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측면을 발전시키고 확실히 했다. 나는 앞서 확대와 옹호가 필요한 또 다른 소크라테스의 옹호는 ‘자신의 (魂, Ψυχή, psychē, soul or breath of life)을 보살피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는데, 플라톤이 땅에 얽매인 인간의 마음과 초월적 이데아들의 세계 사이의 다리를 보게 된 것은 혼의 본성에 관한 종교 개혁가들의 이론에 있어서였다. 보통의 희랍인의 믿음에 있어서는 앞서 내가 말했듯이 육신이 소멸하게 되면 이제 정처가 없어진 단지 망령에 불과한 혼은 - 호메로스가 표현했듯이 ‘연기처럼’ - 슬며시 빠져나와 마음도 힘도 없는 창백하고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는데, 마음과 힘은 혼이 신체적 기관들에 부여된 결과로서 또 같이 혼에 주어진 것이었다. 강풍이 불 때 죽는 것이 아마도 특히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죽던 날에 장난스럽게 친구들의 그러한 믿음을 나무란 바 있다.) 그들이 그렇게 믿게 된 것은 강풍이 혼을 잡아채서는 이 지상의 사방으로 흐트러뜨리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와 믿음의 상황에 있어서는 이 육신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며 육신을 희생하고서라도 보살펴야만 되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단언에 대해 친구들이 이를 좀처럼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플라톤은 이러한 스승의 확신을 지지하여, 혼은 본질에 있어서 영원한 세계에 속하는 것이지 일시적인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피타고라스 교설의 진리를 재차 확인했다. 혼은 지상에서의 여러 차례에 걸친 삶을 살았고 그 지상에서의 삶에 앞서 그리고 삶과 삶 사이에 육신을 떠나있는 동안 초월적인 실재를 바라볼 기회를 가졌었다. 육체적인 죽음은 혼에게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삶의 회복이다. 육신은 감옥과 무덤에 비유되고, 혼은 이 지상에서의 삶에 앞서 친히 지내던 이데아(ἰδέα, idéa, notion or pattern)들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기 위해서 이 육체로부터 풀려나오길 원한다. 이데아설은 혼은 불멸성에 대한 믿음 - 또는 적어도 혼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한 믿음 -과 존립여부를 같이 한다. 이데아설은 배움, 이승에서의 지식획득을 상기(想起, ἀνάμνησις, anamnesis, reminiscence)의 한 과정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지각하는 사물들이 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보편적인 것과 완전한 것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처음으로 우리 안에 심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참된 실재들에 대한 직관을 이미 했기 때문에 이 지상에 있어서의 이들 실재의 연약하고 불완전한 영상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과거에 이미 알았으나 혼이 육신의 물질적인 불순물에 오염됨으로 말미암아 망각(妄覺, Λήθη, Lēthē)해 버렸던 것을 상기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설의 기본적인 가정은 불완전한 것이 제 혼자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것의 인식에 이르도록 이끌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물도 둘이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같은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같다’는 말의 참된 의미에 대해 규정할 수 있는 하나의 관념을 우리의 정신 혹은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얻게 된 것은 단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지팡이나 우리가 긋게 되는 선에 대한 검토 혹은 비교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물리적 접근 역시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성(이성, nous)이 한때 가졌었고 따라서 지금은 지성 속에 잠재해 있는 완전한 지식을 되찾는 일에 오직 지성만이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식의 획득에 있어서의 감각의 역할이다. 그것은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은 모든 지식은 사실상 상기의 결과이므로 철학자가 일단 감각적 지각에 의해 출발하게 된다면, 그는 혼을 [플라톤의 경우에는 지성을] 자유롭게 혼으로 하여금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완전한 형상들에 대한 앎을 다시 갖도록 하기 위하여 가능한 육신은 무시하게 될 것이고 또 육신의 욕망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철학은 ‘죽음 위한 준비’인데, 이는 철학이 하는 일이 혼으로 하여금 죽음을 면치 못하는 구조의 한계 속으로 다시 한 번 되돌아가는 저주로부터 풀려나 이데아의 세계에 영원히 머물도록 적응시켜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혼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인식 가능성에 대한 플라톤의 궁극적 설명으로서 『파이돈』 전체에 퍼져 있는데, 이 책에서 이러한 견해는 물론 문답 형식으로 상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끝부분에서는 신화라는 상징적 언어로 설명되어 있다. 다른 대화편 『메논』에서도 상기설을 논리적인 것으로 다루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경우에 상기설이 내포하고 있는 종교와 철학의 결합은 소크라테스가 이 대화편에서 처음에 철학을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애쓰는 남녀 사제(司祭)들’이 주장하는 교리로서 언급할 때 시사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플라톤 철학의 이 측면은 퍽 많은 대화편에 있어서 대미를 장식하곤 하는 일종의 관례적 장치로서의 대신화(大神話)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대의 신화는 『국가ㆍ정체(政體)』 말미의 에르(Er) 신화이다. 이곳에는 혼의 전체 역사, 곧 혼의 육신으로의 연속적 환생이 혼이 지상에서 사는 삶과 삶 사이에 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며 또 혼이 마침내 정화(淨化, κάθαρσις, katharsis, catharsis, purification or cleansing)되었을 때, 어떻게 혼이 윤회(輪廻, reincarnation)에서 벗어나게 되는지가 기술되어 있다. 우리가 저 세상에서 본 진리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 신화에서 혼이 막 육신으로 재탄생할 즈음에 어쩔 수 없이 망각(妄覺, Λήθη, Lēthē)의 강물을 마시게 된다는 이야기로 설명되고 있다. 혼은 불볕더위의 물도 없는 들판을 방금 건너야만 했던 터라 물을 마시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이 때 혼은 유혹을 물리치는데 있어서 자신이 나타내 보이는 힘에 의해 [이승에 있어서] 자신이 수행한 철학의 정진(精進) 정도를 드러내 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혼이건 - 육신에서 벗어나 진리와의 영원한 교섭 속에 있게끔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 한 - 모두가 적어도 조금씩은 망각의 강물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 이 망각의 주제는 희랍에 있어서의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즉 신화와 종교 의식에 있어서도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플라톤이 전설의 자료를 자신의 의도대로 사용하는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아마도 육신이라는 장애물에 의한 오염의 실제적 영향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 표현이었을 것이다(126-130쪽).
 
 
 

2012. 7. 28.

러셀의 기술이론

 

* 거짓말쟁이의 역설 - 위키백과


철학과 논리학에서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 Paradox)은 자기모순적 명제를 지칭한다.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말들은 자기모순적인데, 그 이유는 정확히 참 또는 거짓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이 문장은 거짓이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이 문장이 참이라면, 문장 내용에 의해 이 문장은 거짓이어야 한다.


2) 반대로 이 문장이 거짓이라면, 역시 문장 내용에 의해 이 문장은 반드시 참이 되어야 한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다음처럼 하나의 문장이 아닌, 여러 개의 문장으로 구성할 수도 있다.


이 다음 문장은 참이다. 이 앞의 문장은 거짓이다.


에피메니데스와 에우불리데스


크레타 사람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기원전 6세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모든 크레타 섬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이다.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종종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같은 용어로 여기거나, 서로 혼동해서 쓰기도 하지만, 이 둘은 같은 용어가 아니다. 에피메니데스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노리고 글을 썼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이것이 모순된다는 것도 아마도 후세에서야 발견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문장은 문장이 거짓일 경우에는 역설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크레타 섬 사람들 중 진실을 말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 문장은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알려진 거짓말쟁이의 역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우불리데스(Eubulides)의 역설이다. 에우불리데스가 에피메니데스의 글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에우불리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남자가 자기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것은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집합 이론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러셀의 역설로 알려진 이 역설을 1901년에 발견하였다. 이 역설은 ‘자신을 원소로 가지지 않는 모든 집합을 원소로 포함하는 집합에 자기 자신도 원소로 포함되는지 여부를 고려할 때’ 발생한다. 1) 만약 이 집합에 자신을 원소로 포함한다면, 집합의 정의에 따라 자신은 원소가 되지 않아야 한다. 2) 반대로 만약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면, 역시 집합의 정의에 따라 자신도 원소가 되어야 한다.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은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1901년 발견한 논리적 역설로 프레게의 논리체계와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naïve set theory)이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다. “특정 영역의 개체의 수는 그 개체의 하등계급 수보다 작다”는 칸토어의 법칙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M이라는 집합을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하자. 다시 말해, A가 M의 원소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A가 A의 원소가 아닌 것으로 한다.칸토어의 공리체계에서 위와 같은 정의로 집합 M은 문제없이 잘 정의된다. 여기서 M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는가?란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포함한다고 가정하면 그 정의에 의해 M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 반대로 M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에도 역시 그 정의에 의해 M은 자신에 포함되어야 한다. 즉 "M은 M의 원소이다"라는 명제와 "M은 M의 원소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둘 다 모순을 도출하여 맞다 혹은 그르다 중에 어떤 답으로 답할 수 없다.”


프레게의 공리체계에서 M은 "자신을 정의하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not fall under its defining concept)"라는 개념(concept)에 해당한다. 따라서, 프레게의 체계 역시 모순을 낳는다. 한편 논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러셀 자신이 그의 역설을 예로 설명한 것이 세비야의 이발사이야기이다.


만약 세비야에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의 이발만을 해주는 이발사가 있다고 하자. 이 이발사는 이발을 스스로 해야 할까?


만약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전제에 의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야 하고, 역으로 스스로 이발을 한다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바로 러셀의 역설과 동일한 문제에 걸리는 것이다.


알프레드 타르스키


알프레드 타르스키(Alfred Tarski)는 스스로를 다시 참조하지 않는 문장들도 조합할 경우 스스로를 다시 참조하면서 역설적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논하였다. 이러한 조합의 한 예는 다음과 같다.


1) 2번 문장은 참이다.


2) 1번 문장은 거짓이다.


타르스키는 이러한 '거짓말쟁이의 순환(liar cycle)' 문제를 “하나의 문장이 다른 문장의 참/거짓을 참조할 때, 의미상 더 높도록 하여” 해결하였다. 참조되는 문장은 '대상 언어(object language)'의 일부가 되며, 참조하는 문장은 목표 언어에 대한 '메타 언어(meta-language)'의 한 일부로 간주된다. 의미 계층(semantic hierarchy)의 더 높은 '언어들(languages)'에 있는 문장들은 '언어(language)' 계층에 있는 낮은 순위의 문장들을 참고해야 하며, 순서를 거꾸로 바꾸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시스템이 자기 참조가 되는 것을 막는다.
 
 
 
 
 
 
 
* 도올 김용옥, 『중용 한글역주』, 통나무, 2011.
 
 
 
 
 
 
통서: 인문주의 혁명의 여명



존재론의 역사



종교는 본시 존재론(存在論)이 아니다. 존재론이란 존재 일반에 관한 논(로고스, logos), 혹은 존재자에 관한 논을 의미하지만, 이때 “존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존재에 관한 어떠한 논의도 생산적인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서양철학사의 전통에서는 존재를 “~는 있다”라는 사태로 접근하지 않고, 항상 “~이다”라는 사태로 접근하는 성향이 있다. “~이 있다”라는 사태는 너무도 즉각적이고 완정한 사태이며, “존재”라는 수식이나 규정을 따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말에서 “존재”라는 말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서양철학의 개념이 일본사람들의 역어(譯語)를 통하여 우리말로 편입된 것이다.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유명한 명제로부터 출발하여 있는 것, 즉 존재를 불생(不生)ㆍ불멸(不滅)ㆍ불변(不變)ㆍ부동(不動)의 연속충실체(連續充實體)로서 규정하고, 유(有)를 비유(非有)ㆍ생성(生成)에 대립시켰다. 플라톤은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이어받아 참으로 있는 것으로서의 “이데아”론을 성립시켰고, 생성의 세계를 엮어 넣으려는 생물학적 성향의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존재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제1실체를 일체의 질료적 한정을 갖지 않는 순수형상(純粹形相)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변역(變易)의 가능성을 포함하지 않는 “부동(不動)의 사동자(使動者)”, 즉 하나님으로 간주함으로써,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이 하나님에 있어서는 일치한다고 하는 모든 중세 스콜라철학적 사유를 개창하였다. 그러니까 존재의 문제는 “있다”라고 하는 소박한 현실을 떠나 “무엇이 참으로 있는 것인가?”라는 진리의 문제로 비약하게 된다. 그런데 “참으로 있는 것”은 항상 “있는” 것들을 부정하게 되므로, 진리의 존재란 있는 것들을 넘어서서 있는 것이 된다. 그 넘어서서 있는 것들의 궁극에 항상 하나님이 있게 되고, 따라서 존재론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논이 되고 만다. 결국 존재론은 “~ 있다”가 아니라, “진정한 존재는 하나님이다”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중세신학을 지배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었다.



존재론(ontology, ontologia)이라는 용어가 서양에서 고대로부터 사용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온톨로기아”라는 말은 17세기 독일 스콜라철학적 논리학자인 고클레니우스(Rudolf Goclenius, 1547-1628)의 용례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哲學辭典』, 1613). 비스한 시기의 칼로비우스(Abraham Calovius, 1612–1686)는 온톨로기아(ontologia)를 메타피지카(metaphysica)라는 말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게 사용하였다. 독일 근대 데카르트학파의 사상가인 클라우베르크(Johannes Clauberg, 1622~1665)는 존재론이란 말 대신에 존재지(存在智, ontosophia)라는 말을 만들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보편학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온톨로기아”를 철학적 술어(philosophical term)로서 정립한 사람이 18세기 초 독일의 합리주의를 대변한 철학자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와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garten, 1714~1762)이었다. [...] 볼프에 의하면 존재론의 방법은 연역적이며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가 말한 충족이유율을 만족시킨다. 우주는 존재들의 총합이며, 그 개개 존재들은 모두 지성이 명석판명한 관념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의심할 바 없는 제1원리로부터 연역된 존재들에 관한 진리는 모두가 필연적 진리이다. 따라서 존재론은 세계의 우연적 질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볼프의 존재론은 현상계와 유리된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론은 칸트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22~25).



칸트의 존재론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이러한 볼프의 존재론을 그의 선험철학으로 대치시켰다. 그러나 칸트의 선험철학은 존재론이라기보다는 인식론적 탐색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며, 그의 선험철학은 비록 선험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상계의 질서 밖으로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현상계(現象界, 감성感性의 대상)와 가상계(可想界, 오성悟性의 대상)의 구별은 플라톤적 실재론과 유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플라톤의 실재론적 관념론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가상계를 오성이 인식하는 참 대상이라고 생각한 것은 플라톤의 오류이다. 인간의 오성은 오히려 감성계에만 적응되는 것이다.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라는 것도 감성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계의 궁극적 근거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자체도 현상계와 연속적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단지 물자체는 불가지(不可知)의 대상일 뿐이다. 물자체가 순전한 가구(假構)일 수는 없다.
 
 
칸트에게 있어서 존재론은 선험적[=초월적] 분석론(Transcendental Analytic)으로 통섭되는 것이다. 칸트는 볼프가 말하는 특수형이상학인 신학과 심리학과 우주론은 선험적[=초월적] 변증론(Transcendental Dialectic)에 귀속시키고 일반형이상학인 존재론은 선험적 분석론으로 귀속시켰다. 따라서 존재론은 선험적 분석론의 주제인 오성의 인식과 관계할 뿐이다. 오성은 감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감성의 한계 내에서 주어지는 대상에만 한정되는 것이다. 오성의 원칙들은 현상을 해명하는 규칙일 뿐이다. 전통적으로 존재론이 마치 사물일반의 종합적인 선천지식을 체계적 이론의 형태로서 제공하는 대단한 이론인 양 떠벌이지만, 이제 소위 존재론이라는 과시적 명칭은 ‘순수 오성의 한갓[된] 분석론’이라는 겸손한 이름으로 대신되어야만 하는 것이다(『순수이성비판』, B303). 따라서 존재론은 사물일반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구체적 대상들과 관계하는 것이다. 칸트의 존재론은 현상론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이성의 이상으로서의 최고존재인, 하나님의 관념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도 선험적 분석론에 국한되는 겸손한 존재론의 근거 위에서 그 불가능성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존재(存在)는 현존(現存)과 혼동될 수 없다. 그 무엇이 현존한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그 말은 항상 종합적(=경험적) 판단이다.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proof)이란 하나님이라는 개념 그 자체로부터 연역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개념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존재론적 증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중세기로부터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완전한 존재(a perfect being)는 반드시 존재성을 포괄하는 모든 술어를 소유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완전한 존재라면 존재성을 술어로서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가 하나님의 필연적 속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26~27).
 
 
하이데가의 존재론



아주 쉽게 한 예를 들어보자! 누가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도올 김용옥은 존재한다. 도올 김용옥은 『여자란 무엇인가』를 썼다. 도올 김용옥은 사과를 먹고 있다.” 이 말에서 김용옥에 관한 속성은 둘일 뿐 셋이 될 수가 없다. 도올 김용옥이 존재한다는 것은 도올 김용옥이라는 개념에 아무 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따라서 존재는 술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술어들의 빈 ‘자리’일 뿐이다. 하나님의 현존(現存)이 하나님의 본질 속에 있을 수는 없다. ‘가장 실재적인 존재’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에, 그 존재가 현존한다는 것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개념의 밖으로 나와야(herausgehen) 한다. 감관의 대상의 경우에는, 대상이 경험의 법칙에 따라 나의 어떤 지각과 연결될 때에 이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가장 ‘실재적인 존재’라는 개념은 순수 사고(pure thought)의 대상일 뿐이며, 우리는 그들의 실재를 인식하는 수단이 전혀 없다. 순수 사고의 객관은 전적으로 선천적으로 인식될 뿐이며, 현존이란 경험을 통해서만 확립되어지기 때문이다. 경험의 통일성을 벗어나는 어떠한 존재도 우리가 정당화할 길이 없는 가정에 머물고 만다. 모든 존재론적 명제는 종합적(경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칸트의 존재론은 하이데가의 다자인(Dasein, 現存在)의 존재론으로 발전된다. 하이데가는 철학의 출발점을 데카르트처럼 ‘나(I)’라는 유아론(唯我論)적 실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나의 의식이 지각된 세계를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인식론도 유아론적 성격이 있다. 하이데가는 ‘나’라는 실체적 존재를 버리고 “거기에 있다”라는 의미에서 ‘다자인’을 새로운 철학적 어휘로서 제시한다. 하이데가는 “~이다”에서 “~있다”로 철저히 귀환한 것이다. ‘거기에 있는’ 다자인은 이미 세계 속에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세계 내의 존재이다. 다자인과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In-der-Welt-Sein)은 결국 같은 의미가 된다. 다자인이 타존재들과 구분되는 것은 존재하면서 자기의 존재,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다자인은 ‘존재론에 앞서는(pre-ontological)’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다자인은 세계 안에 이미 던져진 존재(被投性, Geworfensein)이다. 자기 및 자기 이외의 것을 이미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미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므로 이러한 의미에서는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는(entwerfen), 즉 미래를 계획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이 던져져 있으면서 미래를 계획하고 ‘본래적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실존의 전정한 모습이다(27~28).
 
 
럿셀의 기술(記述) 이론



여태까지 대강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의 골자를 살펴보았지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존재론의 과제가 존재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을 때는, 그 논의가 항상 ‘있는 것’을 초월하여 현적(玄寂)한 공리(空理)로 달아나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존재’를 운운할 필요가 없다. 횡거(橫渠, 1020 ~ 1077)의 말대로 태허(太虛)가 곧 기(氣)라는 것을 알면, ‘없음’은 있을 수가 없다(無無). 그렇다고 없음에 대한 있음이 불생불멸불변의 동일성을 지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있는 것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변하는 것이다. 지성무식(至誠無息)이다. 서양의 철학전통에는 근원적으로 파르메니데스적인 존재론만 있고,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존재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알츠하이머 목사님의 경우 “예수가 누구여”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의 신앙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예수라는 고유명사는 존재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신앙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반드시 기술(記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술은 궁극적으로 존재를 해체시킨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다”라는 명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은 단 한 사람이며, 따라서 그것은 한정된 기술(definite description)이다. 그리고 이 문장의 주어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고유명사로서 인식될 수는 없다. 이 기술구(句)는 한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특유한 속성으로써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고유명사적인 어떤 존재를 지칭하지 않는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한(韓) 모인지 오(吳) 모인지를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이순신이다”라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러나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시끄러운 공기의 떨림일 뿐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는 없지만, 무엇을 지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순신 본인을 눈앞에서 곧 바로 지시할 수는 없다. 이순신은 우리의 직접 감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집에 지금 3살 짜리 어린 아들이 있다고 하자. 이 아들은 나를 알아본다.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 그리고 딴 집 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를 ‘도올’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그에게 있어서 ‘도올’은 나를 지시하는 고유명사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똑 같은 말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도올’이라고 부를 때는, 실상 세 살 먹은 아들이 ‘도올’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고유명사이지만 실상 외연만 있고 의미가 없는 순수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라는 고유명사는 수없는 기술의 축약태이다. 그들은 나를 실제로 만난 적도 없고, 나를 세 살 난 아들이 지시하는 것처럼 직접 감관에 의하여 지시해본 적도 없다. ‘KBS에서 『논어』를 강의한 사람’이라든가, ‘MBC 라디오 어느 시간에 어느 코미디언이 흉내를 내는 사람’이라든가, ‘머리를 깎고 한복을 입은 철학자’라든가,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라든가 하는 수없는 기술구들이 ‘도올 김용옥 선생’이라는 말 속에 축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순결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순결한 고유명사는 그것 자체로 어떤 대상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색한 문법이 되고 만다. 따라서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도올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서양언어의 신택스(syntax, 統辭論)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도올’이 축약된 기술구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기술구로 바꾸어질 때 비로소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럿셀이 말하는 ‘기술(記述)의 이론(the theory of description)’이다.
 
 
이 럿셀의 기술이론은 주어-술어 형식의 서구적 언어에서 파생되는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The golden mountain does not exist)”라고 말했는데, 만약 누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What is it that does not exist?)”라고 묻게 된다면, 나는 “그것은 황금산이다(It is the golden mountain)”라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외견상 매우 자연스러운 대답 같지만,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나는 존재하지 않는 황금산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꼴이 되고 만다. 황금산은 결코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구이며, 그 기술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면 ‘존재’를 운운할 필요가 없게 된다.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실제로 다음과 같은 기술구로서 바꾸어 표현될 수 있다.



“‘x가 금으로 되어 있으며 또 산 같이 생겼다’라는 진술이 x가 c일 때는 참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참이 아닌 그러한 c는 없다



There is no entity c such that 'x is golden and mountainous' is true when x is c, but no otherwise.”
 
 
이렇게 바꾸어 표현하면 ‘황금산’이라는 주어적 존재자는 사라지고 만다.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는 진술도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라는 실체의 존재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제가 아니다.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는 진술은 “‘x가 『논어한글역주』를 썼다’라는 명제함수가 ‘x는 c이다’라는 진술과 항상 동일한 사태라는 것을 참이게 만드는 그러한 c의 값이 있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때, ‘존재’는 기술된 것에 대해서만 주장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분석되고 보면 변항(變項)의 최소한 하나의 값에 의하여 참이 되는 명제함수의 한 케이스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존재는 근원적으로 해소되고 만다. 고유명사에 대해서도 존재를 말할 수 없으며 기술구에 대해서도 그 기술구를 고유명사로 확정시키는 대상적 실체는 사라지고 만다. ‘이러이러한 것(the so-and-so)’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진술을 올바로 분석하면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문구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번쇄하고 하찮게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서구인들이 그 얼마나 수천 년을 통하여 허구적인 논리적 구성물의 존재성의 핍박 속에서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그 반박을 위하여 그 얼마나 치열한 논리적 열정에 철학적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경복과 감탄 속에서 되새겨 보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 이러한 ‘존재성의 해소’야말로 『중용』을 읽는 이들의 마음가짐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려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여”라고 반문하는 알츠하이머 목사님은 진실한 신앙인으로서의 본래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그 얼마나 생소한 고유명사였을까? 대한민국의 우매한 생령의 거개가 ‘예수’를 존재자로서 믿는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 존재자가 그들의 실존의 내면으로 융합되는 상황이 과연 몇 케이스나 있을까? ‘예수’라는 고유명사의 어색함, 그 존재자의 허구성은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위선적 인격의 분열로 그들을 휘몰아가고 있지 아니 한가? 그리하여 모든 정치적ㆍ민족적ㆍ민생적 분열을 조장하고 있지 아니 한가?
 
 
앞서 칸트가 “우리 사유의 대상이 개념에 실재성을 귀속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그 개념의 밖으로 나와야 한다”(『순수이성비판』 B629)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논의의 관점에서 보아도 너무도 정당한 것이다. 하느님은 전지ㆍ전능의 일체만유(一切萬有)를 포섭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만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존재자의 개념은 무제약적인 것(the unconditioned), 무한한 것(the unlimited) 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제약적이고 무한한 것 “밖으로 나갈” 길이 없다. 우리가 그 밖으로 나가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무제약적이고 무한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기 나무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나무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제약되고 한정될 때 비로소 나무는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칸트의 존재론에 의하면 존재를 술부에 귀속시키는 모든 명제는 종합적이다. 존재는 오성의 판단의 대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반드시 우리의 지각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순수 사유의 대상에 대해서는 그것의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 “전지자(全知者)”는 “부분적으로 안다”라는 우리의 현실적 경험의 인식으로부터 추상되어 그 극한점으로서 “모든 것을 안다”라고 상정된 것이다. 이것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순수사유의 대상이며, 경험의 한계를 타파하는 자유로운 순수이성의 장난이다. “부분적으로 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상으로 인식 가능한 것이지만 “만유일체의 모든 것에 능하다”라는 것은 경험에서 상대적으로 추론된 논리적 구성일 뿐이다. 따라서 “전지ㆍ전능자”라고 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체험세계에 대하여 상대적인, 절대자로서 상정된 논리적 구성물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적 구성물은 존재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둥근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우리는 “둥근 사각형”에 존재성을 부여할 수 없지만, 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둥근 사각형이 주어의 자격도 가질 수 없지만, “둥근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우리의 일상언어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둥근 사각형이 의미를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존재성과 의미성의 충돌을 해결하고 있는 학설이 바로 럿셀의 기술 이론인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다”라는 한국어 문장에서는 우리는 존재의 문제를 찾을 길이 없다. “전능하다”에서 “하다”는 “있다”를 내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장을 영어로 바꾸어 놓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God is omnipotent.” 이 명제는 두 개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God)과 전능(omnipotent)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전능은 “is”라는 연결사(copula, 계사繫辭)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칸트의 말대로 이 연결사는 단지 하나님과 전능을 연결시키는 연결사일 뿐이며, 이 연결사가 하나님의 개념에 새로운 속성을 첨가하지는 않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God is omnipotent.”라는 문장에서 전능이라는 속성을 제거하면 “God is.”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말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깨비방망이처럼 “하나님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인도유러피안어족의 말에 있어서는 “이다”와 “있다”가 항상 혼동되게 마련이다. 중국어에서는 “上帝全能”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며 양자를 연결하는 be 동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上帝全能”이라는 명제를 놓고 존재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럿셀은 기술 이론을 발표하면서, “플라톤의 『테아에테투스』로부터 시작된 존재에 관한 2천 년 동안의 뒤죽박죽된 대가리 속의 엉크러짐을 다 풀어버렸다(This clears up two millennia of muddle-headedness about 'existence,' beginning with Plato's Theaetetus)”라고 시원하게 일성(一聲)을 갈(喝)했지만, 사실 그것은 『테아에테투스』의 문제라기보다는 서구 언어에 내장된 문제이며, 『테아에테투스』의 인식론을 왜곡시킨 중세기독교의 독단의 문제일 것이다. 아마도 알츠하이머 목사님이 “예수가 누구여”라고 말한 것은 일생을 통하여 억지로 주입된 어색한 인도 유러피언어적 언어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매우 자연스러운 모국어의 본질로 회귀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God is omnipotent”라는 말에서 “God”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omnipotent”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is”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God is omnipotent.”라는 명제는 근원적으로 존재를 나타내는 명제일 수가 없다. 단지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만 최종적으로 남을 뿐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전능하다”라는 판단은 순수이성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오성의 범주를 적용하면 이율배반에 빠진다(선험적 변증론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따라서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전칭적인 명제들은 실천이성의 영역 속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중용』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사태는 『중용』에 내재하는 암묵적 체계 속에서는 결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이분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8~34).
 
 
형용사니 동사니 명사니 하는 개념규정 자체가 서구 언어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과연 그 개념지도를 가지고 한문을 문법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지 나는 알 바 없다(41).
 
 
종교란 개인이 자신의 고독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Religion is what the individual does with his solitariness.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78)
 
 
서양언어, 특히 서양종교에 세뇌된 언어의 용례 때문에 이러한 유교적 본래용법의 함의가 심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얻는단 말인가? 비밀만 지켜진다면 기분이 좀 경감되는 느낌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죄인과 죄사함의 주체가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용』의 ‘자성(自成)’(스스로 이루어 나갈 수밖에 없고) ‘자도(自道)’(스스로 길지워 나갈 수밖에 없다)의 투철한 논리이다. 『중용』은 이러한 논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군자의 길과 소인의 길은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에게는 오직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259~260).

       




 

* 도올 김용옥, 『중용 한글역주』, 통나무,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