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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7.

le rid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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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젊은이들의 실제 모습이다. 젊은이들은 편협한 교리를 주창하고 실행하며, 피와 비명과 소요와 잔인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전 유럽이 젊음을 믿었고 전 유럽이 젊음을 몰아붙여 정치와 국가적 사안에 관여하게 했다."(시오랑의 말, 203)


"내게 부족했던 것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지식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지식이 , 플로베르가 말했을 법한, 인류의 내용을 파악하는, 역사적 상황의 '혼'으로 파고드는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한 소설을 통해서, 위대한 한 소설을 통해서 그 당시 체코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결정을 감내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소설 한 권이 쓰인 적 없다. 바로 이것이, 그 어떤 것도 위대한 소설의 부재를 메워 줄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경우 중 하나이다."(226)


"온통 들썩이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젊은 [에메] 세제르의 한 편의 시 <귀향 수첩>(1939)이다. 검둥이들이 사는 서인도제도의 한 섬으로 검둥이 하나가 귀환한다.(세제르는 흑인이라고 하지 않고 일부러 검둥이라고 말한다.) 어떤 낭만도 없이, 어떤 이상도 없이, 이 시는 거칠게 '우리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한다. 아, 그렇다. 정말 서인도제도에 사는 흑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17세기에 아프리카에서 그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디에서 온 걸까? 그들은 어떤 부족에 속해 있었던 것일까?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는 잊혀 버리고 말았다. 처형되었다. 배의 화물칸에 몸을 싣고 떠난 긴긴 여정에 의해, 시체, 비명, 눈물, 피, 자살, 암살 사이에서 처형된 것이다. 지공을 통과한 이 여정 이후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망각만이, 본질적이고 토대가 되는 망각만이 남았을 뿐.

망각의 잊을 수 없는 충격은 노예의 섬을 꿈의 극장으로 변모시켰다. 실제로 마르티니크인들이 그들 고유 삶을 상상하고, 그들의 존재론적 기억을 창조할 수 있던 것은 전적으로 꿈에 의해서였으니까. 망각의 잊을 수 없는 충격은 민담 작가들을 정체성을 탐구하는 시인들의 반열로 끌어올렸으며, 나중에 그들의 환상과 광기와 더불어 숭고한 구전 유산을 소설가들에게 물려줬다. 이 소설가들을, 나는 좋아했다."(228-229)


 



 

2012. 9. 19.

불공정은 불가피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니체전집 7)>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6. [...] 너는 모든 가치 평가에서 관점주의적인 것을 터득해야만 했다 - 지평의 이동, 왜곡 그리고 표면상의 목적론과 관점주의적인 것에 속하는 모든 것 그리고 대립된 가치들과 관계하는 약간의 우둔함, 찬성과 반대와 함께 항상 지불되는 지적 희생도 터득해야만 했다. 모든 찬성과 반대 속에 포함된 필연적인 불공정[불공평]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그 불공정은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그 삶 자체를 관점주의적인 것과 그 불공정에 의해 제약되는 것으로 터득해야 했던 것이다.
- 18쪽


31.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에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 들어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순수하게 논리적인 본성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주 소박한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이 목표에 접근하는 단계라는 것이 있다면,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은 상실될 것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가장 이성적인 인간도 때로는 다시 본성을, 즉 만물에 대한 자신의 비논리적 기본 입장을 필요로 한다.

32.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삶의 가치에 관한 모든 판단은 비논리적으로 발전해온 것이므로 공정하지 못하다. 판단의 순수하지 못함은, 첫째 재료가 나타나는 양식에, 즉 극히 불완전한 점에 있으며, 둘째 재료에서 총계가 구성되는 양식에 있으며, 셋째는 재료의 모든 개별 부분이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이며, 더욱이 이런 순수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가 다시 필연적이라는 점에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의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왜냐하면 모든 혐오는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유익한 것을 얻고자 원하고 유해한 것을 회피하는 감정 없이 그 무엇을 하고자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충동 그리고 목표의 가치에 대한 인식적인 평가가 없는 충동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 54-56쪽





<미셸푸코> - 이광래

       
"Le sens historique, tel que Nietzsche l'entend, se sait perspective, et ne refuse pas le systeme de sa propre injustice."

"니체가 이해한 바의 역사적 감각은 자신이 관점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불공정한 체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 "Nietzsche, la Généalogie, l'Histoire", Dits et ecrits I, p.1018; 미셸 푸코, 「니체, 계보학, 역사」, 이광래 옮김, 이광래 지음, <<미셸 푸코: ‘狂氣의 역사’에서 ‘性의 역사’까지>>, 민음사, 1989, 350쪽.




***



이 세계의 다양한 관점들을 가로지르는 '절대 관점, 보편 관점이 없는' 혹은 달리 말해 '신이 죽은' 이 세계 안에서, 이른바 모든 '포스트주의'의 도덕성은 어떤 관점의 우월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자, 바로 그 정신에 입각하여 자신의 이론마저도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며 따라서 부당하고 불공정한 체계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 있다.
이제까지 스스로를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해왔던 모든 이론들은 사실상 그렇게 스스로를 믿고 주장할 뿐인 무수한 가능한 관점들 중 단 하나인데, 그들은 이렇게 보통 말한다.
"다른 모든 이론들은 단지 관점에 불과하다. 진리인 내 이론만 빼고!"
이른바 '포스트주의들'은 바로 이 점에 대해 스스로를 배제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단연 탁월한 도덕성을 보여준다.
나는 이렇게 '하나의 논리가 자신의 주장을 - 사실은 모든 이론이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성실히 적용시키는 행위'를 '논리의 윤리성'이라 부른다.

2012. 7. 28.

유럽적인, 너무나 유럽적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니체전집 7)>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475. 유럽인과 여러 국가의 파멸 - [...] 동양적인 구름층이 유럽 위에 무겁게 덮여 있었던 중세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가혹한 개인적인 압박 하에서도 계몽과 정신적 독립의 깃발을 고수하고 동양에 맞서 유럽을 방언한 것은 유대의 자유사상가, 학자 그리고 의사들이 었다. 좀더 자연적이고 합리적이며 적어도 비신화적인 세계 해석이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과 지금 우리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화에 의한 계몽과 연결하는 문화의 고리가 단절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노력에 신세진 것이 적지 않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서방을 동양화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고 한다면, 유대민족은 근본적으로 서구를 다시 서양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서양화하는 것이란 특정한 의미에서는 유럽의 과제와 역사를 그리스적인 것을 계승하는 것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 382쪽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니체전집 8)>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김미기



87.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을 배우는 것 - [...]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훌륭하게 유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훌륭하게 그리고 점점 더 훌륭하게 글 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설령 그가, 잘 쓰지 못하는 것이 국민적 특권처럼 취급되는 독일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더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은 동시에 더 훌륭하게 사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것은 항상 전할 가치가 더 큰 것을 창안해내고 그것을 실제로 전할 수 있다는 것 ; 이웃 나라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고 우리의 언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우며 또한 재산은 모두 공유 재산이 되고 자유인에게 모든 것이 개방되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 그리고 마침내 지구의 모든 문화를 인도하고 감독한다는 저 위대한 임무가 훌륭한 유럽인의 손에 쥐어질, 아직도 여전히 먼 미래의 일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 그 반대의 것, 즉 훌륭하게 쓰고 잘 읽는 법 - 이 두 가지 덕은 함께 성장하고 함께 감퇴한다 - 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실제로 어떻게 여전히 더 민족주의적으로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는 셈이다: 즉 그는 이 세기의 질병을 증가시키는 사람이며 훌륭한 유럽인의 적이자 자유정신의 적이다.
- 286-287쪽.


서양철학사 3천년의 제1대 사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 탈레스 / 김인곤



8. 파르메니데스

8. 단편 2. 프로클로스(DK28B2)

자, 이제 내가 말할 터이니, 그대는 이야기(mythos)를 듣고 명심하라,
탐구의 어떤 길들만이 사유를 위해 있는지.
그 중 하나는 있다(estin)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길로서,
페이토(설득)의 길이며(왜냐하면 진리를 따르기 때문에),
[5]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 라는, 그리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라는 길로서,
그 길은 전혀 배움이 없는 길이라고 나는 그대에게 지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있지 않은 것을
그대는 알게 될 수도 없을 것이고(왜냐하면 실행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지적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9. 단편 3. 클레멘스/플로티노스(DK28B3)

... 왜냐하면 같은 것이 사유함을 위해 또 있음을 위해 있기 때문에. (클레멘스 『학설집』VI.23 / 플로티노스 『엔데아데스』 V.1.8)

12. 단편 6. 심플리키오스(DK28B6)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은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을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그렇지 않으니까. 이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나는 그대에게 명한다. 왜냐하면 그대를 탐구의 이 길로부터 우선 <내가 제지하는데> 그러나 그 다음으로는 죽어야 하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5] 머리가 둘인 채로 헤매는 (왜냐하면 그들의 가슴 속에서 무기력함이 헤매는 누스를 지배하고 있기에) 그 길로부터 [그대를 제지하기에]. 그들은 귀먹고 동시에 눈먼 채로, 어안이 벙벙한 채로, 판가름 못하는 무리로서, 이끌려 다니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있음과 있지 않음이 같은 것으로, 또 같지 않은 것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모든 것들의 길이 되돌아가는 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117)

13. 단편 7. 플라톤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DK28B7)

그 이유는 이렇다. 이것, 즉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 결코 강제되지 않도록 하라. 오히려 그대는 탐구의 이 길로부터 사유를 차단하라. 그리고 습관이 [그대를] 많은 경험을 담은 이 길로 [가도록], 즉 주목하지 못하는 눈과 잡소리 가득한 귀와 혀를 사용하도록 강제하지 [5] 못하게 하라. 다만 나로부터 말해진, 많은 싸움을 담은 테스트를 논변으로 판가름하라. (1-2행: 플라톤 『소피스트』 237a, 258d / 2-6행: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학자들에 대한 반박』VII. 111)

14. 단편 8. 심플리키오스(DK28B8)

... 길에 관한 이야기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있다라는. 이 길에 아주 많은 표지들이 있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라는.
[5]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에. 그것의 어떤 생겨남을 도대체 그대가 찾아낼 것인가?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자라난 것인가? 나는 그대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라고 말하는 것도 사유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필요가
[10] 먼저보다는 오히려 나중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자라나도록 강제했겠는가? 따라서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 해야 한다. 또 확신의 힘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도대체 어떤 것이 그것 곁에 생겨나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디케(정의)는 족쇄를 풀어서 생겨나도록 소멸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15] 오히려 꽉 붙들고 있다. 이것들에 관한 판가름은 다음의 것에 달려 있다. 있거나 아니면 있지 않거나이다. 그런데 필연(아낭케)인 바 그대로, 한 길은 사유될 수 없는 이름 없는 길로 내버려두고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길이 아니므로) 다른 한 길은 있고 진짜이도록 허용한다는 판가름이 내려져 있다. 그런데 있는 것이 나중에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그것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20] 왜냐하면 생겨났다면 그것은 있지 않고, 언젠가 있게 될 것이라면 역시 있지 않기에. 이런 식으로 생성은 꺼져 없어졌고 소멸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가 균일하기에. 또 여기에 조금도 더 많이 있지도 않고(그런 상태는 그것이 함께 이어져 있지 못하도록 막게 될 것이다), 조금도 더 적게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전체가 있는 것으로 꽉 차있다.
[25] 이런 방식으로 전체가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있는 것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속박들의 한계들 안에서 부동(不動)이며 시작이 없으며 그침이 없는 것으로 있다. 왜냐하면 생성과 소멸이 아주 멀리 쫓겨나 떠돌아다니게 되었는데, 참된 확신이 그것들을 밀쳐냈기 때문이다. 같은 것 안에 같은 것이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놓여 있고
[30] 또 그렇게 확고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강한 아낭케(필연)가 그것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한계의 속박들 안에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미완결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결핍된 것이 아니며, 만일 결핍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 결핍된 것일 테니까. 같은 것이 사유되기 위해 있고 또 그것에 의해 사유가 있다.
[35] 왜냐하면 있는 것 없이 ([사유가] 표현된 한에서는 그것에 의존하는데) 그대는 사유함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왜냐하면 있는 것 밖에 다른 아무 것도 있거나 있게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모이라(운명)가 바로 이것을 온전하고 부동의 것이게끔 속박하였기에 그러하다. 이것에 대해 모든 이름들이 붙여져왔다, 가사자들이 참되다고 확신하고서 놓은 모든 이름들이,
[40] 즉 생겨나고 있음과 소멸되어감, 있음과 있지 않음, 그리고 장소를 바꿈과 밝은 새깔을 맞바꿈 등이. 그러나 맨 바깥에 한계가 있기에, 그것은 완결된 것, 모든 방면으로부터 잘 둥글려진 공의 덩어리와 흡사하며, 중앙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똑 같이 뻗어나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45] 저기보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크다든가 조금이라도 더 작다든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같은 것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만한 있지 않은 것이란 있지 않고, 또한 있는 것은 있는 것 가운데 더 많은 것이 여기에, 그리고 더 적은 것이 저기에 있게 될 길이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것은 전체가 불가침이기에. 왜냐하면 모든 방면으로부터 자신과 동등한 것으로서, 한계들 안에 균일하게 있기에.
[50] 여기서 나는 그대를 위한 확신할 만한 논변과 사유를 멈춘다. 진리에 관해서, 그리고 이제부터는 가시적인 의견들을 배우라, 내 이야기들의 기만적인 질서를 들으면서. 왜냐하면 그들은 이름 붙이기 위해 두 형태를 마음에 놓았는데, 그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래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점에서 그들은 헤맸던 것이다.
[55] 그리고 그들은 형체에 있어 정반대인 것들을 구분하였고 그것들 서로 간에 구분되게 표지들을 놓았다. 즉 한편에는 에테르에 속하는 타오르는 불을, 부드럽고, 아주 가벼우며, 모든 방면에서 자신과 동일하되, 다른 하나와 동일한 것이 아닌 [불을 놓았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저것도, 그 자체만으로 정반대인 어두운 밤도, 조밀하고 무거운 형체인 [밤도 놓았다].
[60] 이 배열 전체를 그럴듯한 것으로서 나는 그대에게 설파한다. 도대체 가사자들이 그 어떤 견해도 그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1-52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145-146 /
50-61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주석』 38-39)

27. 콘포드 단편. 플라톤

그런 부동(不動)의 것은, 전체로서 그것에 대한 이름이 ‘있음(to einai)’이다.
( 『테아이테토스』 180e)




         
* 프리드리히 니체,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니체전집 3.유고(1870~1873년)』,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1.



파르메니데스의 시각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성질들을 서로 비교하여, 이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것들이 아니라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그가 빛과 어둠을 비교하면, 두 번째 특성은 오직 첫 번째 성질의 부정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긍정적 성질과 부정적 성질을 구별하려고 했으며, 자연의 전 영역에서 이 대립을 다시 발견하고 명시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사용된 그의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예를 들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얇은 것과 두꺼운 것,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같은 몇 가지 대립들을 채택했으며, 이들을 전형적인 대립인 빛과 어둠으로 분류했다. 밝은 것에 상응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었으며, 어두운 것과 일치하는 것은 부정적인 성질이었다. 예를 들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선택하면, 가벼운 것은 밝은 것에 해당했고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선택하면, 가벼운 것은 밝은 것에 해당했고 무거운 것은 어두운 것의 편에 속했다. 따라서 무거운 것은 그에게는 단지 가벼운 것의 부정에 지나지 않았으며, 가벼운 것은 긍정적 성질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부터 이미 감각의 간섭을 차단하면서 추상적-논리적 절차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산출된다. 무거운 것은 사실 우리의 감각에 긍정적 성질로 와 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르메니데스는 무거운 것을 부정적으로 낙인찍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흙을 불과 대립시키고, 차가운 것을 따뜻한 것과 대립시키고, 두꺼운 것을 얇은 것과, 여성적인 것을 남성적인 것과 그리고 수동적인 것을 능동적인 것과 대립시켜 이들 모두를 오직 부정의 형식으로만 표시했다. 그래서 그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의 경험세계는 두 개의 분리된 영역, 즉 - 밝고 불과 같고 따뜻하고 가볍고 얇고 능동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을 지닌 - 긍정적 성질들의 영역과 부정적 성질들의 영역으로 나뉜다. 후자의 성질들은 오직 다른 긍정적 성질들이 결여되어 있는 영역을 어둡고, 흙과 같고, 차갑고, 무겁고, 두껍고, 여성적이고 수동적인 성질들로 표현한다. 그는 ‘긍정적’과 ‘부정적’이라는 표현 대신에 ‘존재적’과 ‘비존재적’이라는 확고한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이와 함께 아낙시만드로스와는 모순되는 명제, 즉 우리의 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비존재적인 것도 포함하고 있다는 공식에 이르렀다. 우리는 존재자를 세계의 밖에서 그리고 우리의 지평 너머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바로 앞에, 도처에 그리고 모든 생성 속에는 존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활동 중이다(396~397쪽).

파르메니데스는 공동으로 작용하는 두 개의 대립을 탐색했다. - 이 대립들의 욕망과 증오는 세계와 생성을 구성하고, 존재자와 비존재자 그리고 긍정적 성질들과 부정적 성질들을 구성한다 - 그리고 그는 갑자기 부정적 성질인 비존재자의 개념에 불신의 눈길을 보내면서도 거기에 매달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하나의 성질일 수 있는가? 또는 더 근본적으로 질문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즉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낼 수 있고 또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인 유일한 인식의 형식은 ‘A는 A다’라는 동어반복(同語反覆, Tautologie)이다. 그런데 바로 이 동어반복적 인식이 그에게 가차 없이 다음과 같이 외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

그는 갑자기 엄청난 논리적 죄악이 자신의 삶을 압박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부정적 성질들, 간단히 말해 비존재가 존재한다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표현하면 ‘A≠A’라고 아무 주저 없이 가정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이러한 공식을 세운다는 것은 완전히 도착된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 그는 모든 인간 광기의 저편에서 세계의 비밀에 이르는 열쇠, 즉 하나의 원리를 발견했다. 그는 이제 존재에 관한 동어반복적 진리라는 확고하고 가공할 만한 손에 이끌려 사물들의 심연으로 들어간다(401~402쪽. 인용자 강조).

그[파르메니데스]는 이제 경악할 만한 추상적 개념들의 목욕탕에 들어갔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원한 존재 속에 있어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그것이 있었다’ 또는 ‘그것은 있을 것이다’라고 서술될 수 없다. 존재자는 생성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자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생성될 수 있다는 말인가? 비존재로부터란 말인가? 그렇지만 비존재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산출할 수 없다. 존재자로부터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존재자가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소멸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생성처럼, 즉 모든 변화, 증가, 감소와 같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의 명제가 일반적으로 타당하다. ‘과거에 존재했다’ 또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다’라고 서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존재자에 대해서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서술될 수 없다. 존재자는 분할될 수 없다. 그것을 분할할 수 있는 제2의 힘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존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도대체 어느 곳으로 움직인다는 말인가? 존재자는 무한히 크지도 또 무한히 작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성된 것이며,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주어진 무한성이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자는 제한[한정]되어 있고, 완성되어 있고, 부동(不動)적이고, 마치 하나의 공처럼 어느 곳에서나 균형을 이루고 어느 지점에서나 완성된 형태로 부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공간은 두 번째 존재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수의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을 분리시키기 위해서는 그 자체의 존재자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하나의 가정이다. 따라서 오직 영원한 통일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제 파르메니데스가 예전에는 풍부한 의미의 사상들을 통해 그 실존을 파악하려고 시도했던 생성의 세계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이 생성 일반을 보고 있으며 또 자신의 귀가 생성 일반을 듣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이제 그의 명법은 이렇게 말한다. “저 우둔한 눈을 따르지 말라, 메아리처럼 울리기만 하는 저 귀 또는 혀를 믿지 말라, 오직 사유의 힘만으로 확인해보아라!” 이로써 그는 인식기관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수행했다. 그것이 설령 불충분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추상적 개념들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 즉 이성과 감각을 마치 두 개의 분리된 능력인 것처럼 예리하게 떼어놓음으로써 지성 자체를 파괴했으며, 완전히 그릇된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조장했다. 그런데 이 분리는 특히 플라톤 이래 마치 하나의 저주처럼 철학을 억누르고 있다. 모든 감각적 지각은 오직 착각만을 제공할 뿐이라고 파르메니데스는 판단한다. 그리고 이 지각들의 주된 기만은 그것들이 비존재자 역시 존재하며 또 생성 역시 하나의 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위장한다는 점이다. 경험적으로 알려진 세계의 다수성과 다양성, 이 세계의 성질들의 변화, 이들의 상승과 하강에서의 질서는 단순한 가상과 공상으로서 가차 없이 폐기처분되었다. 이것에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감각에 의해 기만당하고 꾸며진 그래서 철저하게 가치 없는 이 세계에 쏟는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처럼 그렇게 전체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개별적인 것에서는 자연 탐구자이기를 그만둔다. 현상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시들어버리고, 이 감각의 영원한 기만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증오심이 일어난다. 진리는 이제 내용이 다 빠져버려 창백하기 짝이 없는 일반성들 속에서만, 즉 아무것도 규정해주지 않는 말들의 빈 껍데기 속에서만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거미줄로 이루어진 집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바로 이런 ‘진리’의 곁에 이제 철학자가 앉아 있다. 마치 하나의 추상적 개념처럼 핏기 없이 온통 공식들의 거미줄에 갇혀 있는 것처럼. 그렇지만 거미들은 제물의 피를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적 철학자는 바로 이 제물의 피를 증오한다. 그에 의해서 희생된 경험의 피를(403~405쪽).




 
*** 



나는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와 '비존재(결여)' 사이, 혹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사이에 설정한 이러한 이른바 '본질적' 구분을 '서양철학사 3천년의 제1대 사건'이라 부르겠다.






파르헤시아, 아시아류

 


<희랍문학사> - 마틴 호제 / 김남우
       
고대의 후반에 구희극은 본질적으로 정치극이었다. 희극 작가들은 고위층 인사, 그러니까 페리클레스 정도 되는 지도자급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실명을 언급해가며 그 사람됨이나 잘못, 악덕을 낱낱이 고발하는 등, 전대미문의 일을 벌였다. 고대의 문학은 이런 유의 공격을 정쟁에 비방 선전문을 도입했던 정치적 출판물로부터 배워왔다.

구희극의 이러한 특성은 분명 구희극 안에 녹아든 사회적 관습에 기인한다. 조롱극이나 가면극 등의 전통에 5세기 아테네의 공공생활이 가진 또 하나의 원리가 추가되었던 것이다: 시민들이 가진 언론의 자유, 즉 '직설(파르헤시아, parrhesia)'(Scarpat 1964년)이 그것이다. 정치적 희극이라 단정할 만한 흔적이 5세기 중반 이전에는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신랄한 정치적 풍자가 아티카 지방에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시기에 비로소 유행하였고, 이것이 희극에 가능성을 제공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155)


기원전 1세기에는 언어적 준거를 다시 규정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이때에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의 아티카 방언이 문장연습의 모범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아티카풍은 우선 로마에서 활동한 희랍 출신 수사학 선생들이 로마의 학생들에게 적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Gelzer 1978년). 아티카풍을 내세운 수사학 선생들은 소아시아의 수사학 학교에서 배우는 언어와 문장을 '아시아류'라고 깎아내렸다. 옥타비아누스가 패배한 안토니우스를 '아시아놈'이라고 낙인찍어 버린 것에 고무되어 희랍문학에서 아티카풍이라는 개념이 급작스럽게 유행하였다.

기원전 30년 이래로 로마에서 모여 호라동하던 희랍 출신 변론술 선생들은 이런 흐름에 이끌려 아티카풍의 수업을 마련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이름만으로나마 전해지는 바, 시킬리아 섬의 칼레악테 Kaleakte 출신 카이킬로스 Kaikolios 는 <아티카풍과 아이사류의 차이에 관하여 Tini diapherei ho Attikos zelos tu Asianu >와 아티카풍에 관한 저작을 지었다고 한다 [...] 이 모든 저작들은 하나같이 따라해봄직한 아티카풍의 문장연습본을 중심으로 씌어져 있다

기원후 1세기를 거치며 아티카풍은 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문자로 기록되는 모든 영역에서 복고풍이 일었으며 이로써 일상언어와 갈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리는 문학사적으로 커다란 결과를 가져온다. 옛것을 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강제 때문에 작가들이 아티카풍을 참고할 수 있도록 돕는 뜻에서 사전류들이 만들어졌다.

[...]

과거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보면 아티카풍은 기껏해야 교육제도의 전반적 보수주의적 경향의 한 부분이며 경직된 사고를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더 이상 문화적 내지 정치적 중심이 존재하지 않던 희랍 언어권에서 아티카풍과 그 교육기관은 남부 프랑스에서 유프라테스강 지역에 걸쳐 여기저기 살고 있는 희랍어를 아는 지배 계층의 문화적 공통분모로서 500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공통 분모로 인해서 문화적, 인종적 차이는 쉽게 무시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생활 구어와, 문학어 즉 '배운 사람들의 언어'는 점점 더 확연히 달라졌다. 하지만 아티카풍의 엄격한 규준과 교육제도의 엄격한 규율이 문학어를 통한 상호교통을 보증하였으며 또한 문학어를 쓰는 사람들의 규합을 가능케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아티카풍은 로마제국의 안정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272-274).


* 맺는말


희랍문학은 언제 끝맺는가?


529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폐교시킨다. 530년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는 몬테가시노에 수도원을 설립한다. 제국의 동방에서도 서방에서처럼 단절이 존재하는가? 이제 '비잔틴 문학'은 희랍의 양식과 전통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희랍세계의 정신적 중심은 이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된다. 파울루스 실렌타리우스는 논노스의 맥을 잇는 시인이라 하겠다. 563년 1월 6일 '소피아 성당'이 대대적인 수리 공사 후에 새롭게 봉헌되었을 때 그는여섯 소리걸음으로 축제의 시를 지었다. <소피아 성당 소묘>라는 시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379).




러셀의 기술이론

 

* 거짓말쟁이의 역설 - 위키백과


철학과 논리학에서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 Paradox)은 자기모순적 명제를 지칭한다.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말들은 자기모순적인데, 그 이유는 정확히 참 또는 거짓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이 문장은 거짓이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이 문장이 참이라면, 문장 내용에 의해 이 문장은 거짓이어야 한다.


2) 반대로 이 문장이 거짓이라면, 역시 문장 내용에 의해 이 문장은 반드시 참이 되어야 한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다음처럼 하나의 문장이 아닌, 여러 개의 문장으로 구성할 수도 있다.


이 다음 문장은 참이다. 이 앞의 문장은 거짓이다.


에피메니데스와 에우불리데스


크레타 사람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기원전 6세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모든 크레타 섬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이다.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종종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같은 용어로 여기거나, 서로 혼동해서 쓰기도 하지만, 이 둘은 같은 용어가 아니다. 에피메니데스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노리고 글을 썼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이것이 모순된다는 것도 아마도 후세에서야 발견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문장은 문장이 거짓일 경우에는 역설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크레타 섬 사람들 중 진실을 말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 문장은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알려진 거짓말쟁이의 역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우불리데스(Eubulides)의 역설이다. 에우불리데스가 에피메니데스의 글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에우불리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남자가 자기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것은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집합 이론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러셀의 역설로 알려진 이 역설을 1901년에 발견하였다. 이 역설은 ‘자신을 원소로 가지지 않는 모든 집합을 원소로 포함하는 집합에 자기 자신도 원소로 포함되는지 여부를 고려할 때’ 발생한다. 1) 만약 이 집합에 자신을 원소로 포함한다면, 집합의 정의에 따라 자신은 원소가 되지 않아야 한다. 2) 반대로 만약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면, 역시 집합의 정의에 따라 자신도 원소가 되어야 한다.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은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1901년 발견한 논리적 역설로 프레게의 논리체계와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naïve set theory)이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다. “특정 영역의 개체의 수는 그 개체의 하등계급 수보다 작다”는 칸토어의 법칙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M이라는 집합을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하자. 다시 말해, A가 M의 원소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A가 A의 원소가 아닌 것으로 한다.칸토어의 공리체계에서 위와 같은 정의로 집합 M은 문제없이 잘 정의된다. 여기서 M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는가?란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포함한다고 가정하면 그 정의에 의해 M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 반대로 M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에도 역시 그 정의에 의해 M은 자신에 포함되어야 한다. 즉 "M은 M의 원소이다"라는 명제와 "M은 M의 원소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둘 다 모순을 도출하여 맞다 혹은 그르다 중에 어떤 답으로 답할 수 없다.”


프레게의 공리체계에서 M은 "자신을 정의하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not fall under its defining concept)"라는 개념(concept)에 해당한다. 따라서, 프레게의 체계 역시 모순을 낳는다. 한편 논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러셀 자신이 그의 역설을 예로 설명한 것이 세비야의 이발사이야기이다.


만약 세비야에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의 이발만을 해주는 이발사가 있다고 하자. 이 이발사는 이발을 스스로 해야 할까?


만약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전제에 의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야 하고, 역으로 스스로 이발을 한다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바로 러셀의 역설과 동일한 문제에 걸리는 것이다.


알프레드 타르스키


알프레드 타르스키(Alfred Tarski)는 스스로를 다시 참조하지 않는 문장들도 조합할 경우 스스로를 다시 참조하면서 역설적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논하였다. 이러한 조합의 한 예는 다음과 같다.


1) 2번 문장은 참이다.


2) 1번 문장은 거짓이다.


타르스키는 이러한 '거짓말쟁이의 순환(liar cycle)' 문제를 “하나의 문장이 다른 문장의 참/거짓을 참조할 때, 의미상 더 높도록 하여” 해결하였다. 참조되는 문장은 '대상 언어(object language)'의 일부가 되며, 참조하는 문장은 목표 언어에 대한 '메타 언어(meta-language)'의 한 일부로 간주된다. 의미 계층(semantic hierarchy)의 더 높은 '언어들(languages)'에 있는 문장들은 '언어(language)' 계층에 있는 낮은 순위의 문장들을 참고해야 하며, 순서를 거꾸로 바꾸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시스템이 자기 참조가 되는 것을 막는다.
 
 
 
 
 
 
 
* 도올 김용옥, 『중용 한글역주』, 통나무, 2011.
 
 
 
 
 
 
통서: 인문주의 혁명의 여명



존재론의 역사



종교는 본시 존재론(存在論)이 아니다. 존재론이란 존재 일반에 관한 논(로고스, logos), 혹은 존재자에 관한 논을 의미하지만, 이때 “존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존재에 관한 어떠한 논의도 생산적인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서양철학사의 전통에서는 존재를 “~는 있다”라는 사태로 접근하지 않고, 항상 “~이다”라는 사태로 접근하는 성향이 있다. “~이 있다”라는 사태는 너무도 즉각적이고 완정한 사태이며, “존재”라는 수식이나 규정을 따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말에서 “존재”라는 말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서양철학의 개념이 일본사람들의 역어(譯語)를 통하여 우리말로 편입된 것이다.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유명한 명제로부터 출발하여 있는 것, 즉 존재를 불생(不生)ㆍ불멸(不滅)ㆍ불변(不變)ㆍ부동(不動)의 연속충실체(連續充實體)로서 규정하고, 유(有)를 비유(非有)ㆍ생성(生成)에 대립시켰다. 플라톤은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이어받아 참으로 있는 것으로서의 “이데아”론을 성립시켰고, 생성의 세계를 엮어 넣으려는 생물학적 성향의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존재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제1실체를 일체의 질료적 한정을 갖지 않는 순수형상(純粹形相)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변역(變易)의 가능성을 포함하지 않는 “부동(不動)의 사동자(使動者)”, 즉 하나님으로 간주함으로써,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이 하나님에 있어서는 일치한다고 하는 모든 중세 스콜라철학적 사유를 개창하였다. 그러니까 존재의 문제는 “있다”라고 하는 소박한 현실을 떠나 “무엇이 참으로 있는 것인가?”라는 진리의 문제로 비약하게 된다. 그런데 “참으로 있는 것”은 항상 “있는” 것들을 부정하게 되므로, 진리의 존재란 있는 것들을 넘어서서 있는 것이 된다. 그 넘어서서 있는 것들의 궁극에 항상 하나님이 있게 되고, 따라서 존재론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논이 되고 만다. 결국 존재론은 “~ 있다”가 아니라, “진정한 존재는 하나님이다”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중세신학을 지배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었다.



존재론(ontology, ontologia)이라는 용어가 서양에서 고대로부터 사용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온톨로기아”라는 말은 17세기 독일 스콜라철학적 논리학자인 고클레니우스(Rudolf Goclenius, 1547-1628)의 용례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哲學辭典』, 1613). 비스한 시기의 칼로비우스(Abraham Calovius, 1612–1686)는 온톨로기아(ontologia)를 메타피지카(metaphysica)라는 말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게 사용하였다. 독일 근대 데카르트학파의 사상가인 클라우베르크(Johannes Clauberg, 1622~1665)는 존재론이란 말 대신에 존재지(存在智, ontosophia)라는 말을 만들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보편학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온톨로기아”를 철학적 술어(philosophical term)로서 정립한 사람이 18세기 초 독일의 합리주의를 대변한 철학자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와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garten, 1714~1762)이었다. [...] 볼프에 의하면 존재론의 방법은 연역적이며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가 말한 충족이유율을 만족시킨다. 우주는 존재들의 총합이며, 그 개개 존재들은 모두 지성이 명석판명한 관념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의심할 바 없는 제1원리로부터 연역된 존재들에 관한 진리는 모두가 필연적 진리이다. 따라서 존재론은 세계의 우연적 질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볼프의 존재론은 현상계와 유리된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론은 칸트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22~25).



칸트의 존재론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이러한 볼프의 존재론을 그의 선험철학으로 대치시켰다. 그러나 칸트의 선험철학은 존재론이라기보다는 인식론적 탐색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며, 그의 선험철학은 비록 선험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상계의 질서 밖으로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현상계(現象界, 감성感性의 대상)와 가상계(可想界, 오성悟性의 대상)의 구별은 플라톤적 실재론과 유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플라톤의 실재론적 관념론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가상계를 오성이 인식하는 참 대상이라고 생각한 것은 플라톤의 오류이다. 인간의 오성은 오히려 감성계에만 적응되는 것이다.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라는 것도 감성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계의 궁극적 근거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자체도 현상계와 연속적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단지 물자체는 불가지(不可知)의 대상일 뿐이다. 물자체가 순전한 가구(假構)일 수는 없다.
 
 
칸트에게 있어서 존재론은 선험적[=초월적] 분석론(Transcendental Analytic)으로 통섭되는 것이다. 칸트는 볼프가 말하는 특수형이상학인 신학과 심리학과 우주론은 선험적[=초월적] 변증론(Transcendental Dialectic)에 귀속시키고 일반형이상학인 존재론은 선험적 분석론으로 귀속시켰다. 따라서 존재론은 선험적 분석론의 주제인 오성의 인식과 관계할 뿐이다. 오성은 감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감성의 한계 내에서 주어지는 대상에만 한정되는 것이다. 오성의 원칙들은 현상을 해명하는 규칙일 뿐이다. 전통적으로 존재론이 마치 사물일반의 종합적인 선천지식을 체계적 이론의 형태로서 제공하는 대단한 이론인 양 떠벌이지만, 이제 소위 존재론이라는 과시적 명칭은 ‘순수 오성의 한갓[된] 분석론’이라는 겸손한 이름으로 대신되어야만 하는 것이다(『순수이성비판』, B303). 따라서 존재론은 사물일반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구체적 대상들과 관계하는 것이다. 칸트의 존재론은 현상론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이성의 이상으로서의 최고존재인, 하나님의 관념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도 선험적 분석론에 국한되는 겸손한 존재론의 근거 위에서 그 불가능성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존재(存在)는 현존(現存)과 혼동될 수 없다. 그 무엇이 현존한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그 말은 항상 종합적(=경험적) 판단이다.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proof)이란 하나님이라는 개념 그 자체로부터 연역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개념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존재론적 증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중세기로부터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완전한 존재(a perfect being)는 반드시 존재성을 포괄하는 모든 술어를 소유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완전한 존재라면 존재성을 술어로서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가 하나님의 필연적 속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26~27).
 
 
하이데가의 존재론



아주 쉽게 한 예를 들어보자! 누가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도올 김용옥은 존재한다. 도올 김용옥은 『여자란 무엇인가』를 썼다. 도올 김용옥은 사과를 먹고 있다.” 이 말에서 김용옥에 관한 속성은 둘일 뿐 셋이 될 수가 없다. 도올 김용옥이 존재한다는 것은 도올 김용옥이라는 개념에 아무 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따라서 존재는 술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술어들의 빈 ‘자리’일 뿐이다. 하나님의 현존(現存)이 하나님의 본질 속에 있을 수는 없다. ‘가장 실재적인 존재’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에, 그 존재가 현존한다는 것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개념의 밖으로 나와야(herausgehen) 한다. 감관의 대상의 경우에는, 대상이 경험의 법칙에 따라 나의 어떤 지각과 연결될 때에 이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가장 ‘실재적인 존재’라는 개념은 순수 사고(pure thought)의 대상일 뿐이며, 우리는 그들의 실재를 인식하는 수단이 전혀 없다. 순수 사고의 객관은 전적으로 선천적으로 인식될 뿐이며, 현존이란 경험을 통해서만 확립되어지기 때문이다. 경험의 통일성을 벗어나는 어떠한 존재도 우리가 정당화할 길이 없는 가정에 머물고 만다. 모든 존재론적 명제는 종합적(경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칸트의 존재론은 하이데가의 다자인(Dasein, 現存在)의 존재론으로 발전된다. 하이데가는 철학의 출발점을 데카르트처럼 ‘나(I)’라는 유아론(唯我論)적 실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나의 의식이 지각된 세계를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인식론도 유아론적 성격이 있다. 하이데가는 ‘나’라는 실체적 존재를 버리고 “거기에 있다”라는 의미에서 ‘다자인’을 새로운 철학적 어휘로서 제시한다. 하이데가는 “~이다”에서 “~있다”로 철저히 귀환한 것이다. ‘거기에 있는’ 다자인은 이미 세계 속에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세계 내의 존재이다. 다자인과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In-der-Welt-Sein)은 결국 같은 의미가 된다. 다자인이 타존재들과 구분되는 것은 존재하면서 자기의 존재,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다자인은 ‘존재론에 앞서는(pre-ontological)’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다자인은 세계 안에 이미 던져진 존재(被投性, Geworfensein)이다. 자기 및 자기 이외의 것을 이미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미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므로 이러한 의미에서는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는(entwerfen), 즉 미래를 계획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이 던져져 있으면서 미래를 계획하고 ‘본래적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실존의 전정한 모습이다(27~28).
 
 
럿셀의 기술(記述) 이론



여태까지 대강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의 골자를 살펴보았지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존재론의 과제가 존재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을 때는, 그 논의가 항상 ‘있는 것’을 초월하여 현적(玄寂)한 공리(空理)로 달아나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존재’를 운운할 필요가 없다. 횡거(橫渠, 1020 ~ 1077)의 말대로 태허(太虛)가 곧 기(氣)라는 것을 알면, ‘없음’은 있을 수가 없다(無無). 그렇다고 없음에 대한 있음이 불생불멸불변의 동일성을 지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있는 것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변하는 것이다. 지성무식(至誠無息)이다. 서양의 철학전통에는 근원적으로 파르메니데스적인 존재론만 있고,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존재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알츠하이머 목사님의 경우 “예수가 누구여”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의 신앙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예수라는 고유명사는 존재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신앙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반드시 기술(記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술은 궁극적으로 존재를 해체시킨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다”라는 명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은 단 한 사람이며, 따라서 그것은 한정된 기술(definite description)이다. 그리고 이 문장의 주어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고유명사로서 인식될 수는 없다. 이 기술구(句)는 한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특유한 속성으로써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고유명사적인 어떤 존재를 지칭하지 않는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한(韓) 모인지 오(吳) 모인지를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이순신이다”라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러나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시끄러운 공기의 떨림일 뿐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는 없지만, 무엇을 지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순신 본인을 눈앞에서 곧 바로 지시할 수는 없다. 이순신은 우리의 직접 감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집에 지금 3살 짜리 어린 아들이 있다고 하자. 이 아들은 나를 알아본다.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 그리고 딴 집 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를 ‘도올’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그에게 있어서 ‘도올’은 나를 지시하는 고유명사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똑 같은 말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도올’이라고 부를 때는, 실상 세 살 먹은 아들이 ‘도올’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고유명사이지만 실상 외연만 있고 의미가 없는 순수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라는 고유명사는 수없는 기술의 축약태이다. 그들은 나를 실제로 만난 적도 없고, 나를 세 살 난 아들이 지시하는 것처럼 직접 감관에 의하여 지시해본 적도 없다. ‘KBS에서 『논어』를 강의한 사람’이라든가, ‘MBC 라디오 어느 시간에 어느 코미디언이 흉내를 내는 사람’이라든가, ‘머리를 깎고 한복을 입은 철학자’라든가,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라든가 하는 수없는 기술구들이 ‘도올 김용옥 선생’이라는 말 속에 축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순결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순결한 고유명사는 그것 자체로 어떤 대상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색한 문법이 되고 만다. 따라서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도올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서양언어의 신택스(syntax, 統辭論)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도올’이 축약된 기술구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기술구로 바꾸어질 때 비로소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럿셀이 말하는 ‘기술(記述)의 이론(the theory of description)’이다.
 
 
이 럿셀의 기술이론은 주어-술어 형식의 서구적 언어에서 파생되는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The golden mountain does not exist)”라고 말했는데, 만약 누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What is it that does not exist?)”라고 묻게 된다면, 나는 “그것은 황금산이다(It is the golden mountain)”라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외견상 매우 자연스러운 대답 같지만,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나는 존재하지 않는 황금산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꼴이 되고 만다. 황금산은 결코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구이며, 그 기술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면 ‘존재’를 운운할 필요가 없게 된다.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실제로 다음과 같은 기술구로서 바꾸어 표현될 수 있다.



“‘x가 금으로 되어 있으며 또 산 같이 생겼다’라는 진술이 x가 c일 때는 참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참이 아닌 그러한 c는 없다



There is no entity c such that 'x is golden and mountainous' is true when x is c, but no otherwise.”
 
 
이렇게 바꾸어 표현하면 ‘황금산’이라는 주어적 존재자는 사라지고 만다.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는 진술도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라는 실체의 존재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제가 아니다.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는 진술은 “‘x가 『논어한글역주』를 썼다’라는 명제함수가 ‘x는 c이다’라는 진술과 항상 동일한 사태라는 것을 참이게 만드는 그러한 c의 값이 있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때, ‘존재’는 기술된 것에 대해서만 주장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분석되고 보면 변항(變項)의 최소한 하나의 값에 의하여 참이 되는 명제함수의 한 케이스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존재는 근원적으로 해소되고 만다. 고유명사에 대해서도 존재를 말할 수 없으며 기술구에 대해서도 그 기술구를 고유명사로 확정시키는 대상적 실체는 사라지고 만다. ‘이러이러한 것(the so-and-so)’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진술을 올바로 분석하면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문구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번쇄하고 하찮게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서구인들이 그 얼마나 수천 년을 통하여 허구적인 논리적 구성물의 존재성의 핍박 속에서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그 반박을 위하여 그 얼마나 치열한 논리적 열정에 철학적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경복과 감탄 속에서 되새겨 보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 이러한 ‘존재성의 해소’야말로 『중용』을 읽는 이들의 마음가짐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려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여”라고 반문하는 알츠하이머 목사님은 진실한 신앙인으로서의 본래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그 얼마나 생소한 고유명사였을까? 대한민국의 우매한 생령의 거개가 ‘예수’를 존재자로서 믿는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 존재자가 그들의 실존의 내면으로 융합되는 상황이 과연 몇 케이스나 있을까? ‘예수’라는 고유명사의 어색함, 그 존재자의 허구성은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위선적 인격의 분열로 그들을 휘몰아가고 있지 아니 한가? 그리하여 모든 정치적ㆍ민족적ㆍ민생적 분열을 조장하고 있지 아니 한가?
 
 
앞서 칸트가 “우리 사유의 대상이 개념에 실재성을 귀속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그 개념의 밖으로 나와야 한다”(『순수이성비판』 B629)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논의의 관점에서 보아도 너무도 정당한 것이다. 하느님은 전지ㆍ전능의 일체만유(一切萬有)를 포섭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만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존재자의 개념은 무제약적인 것(the unconditioned), 무한한 것(the unlimited) 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제약적이고 무한한 것 “밖으로 나갈” 길이 없다. 우리가 그 밖으로 나가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무제약적이고 무한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기 나무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나무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제약되고 한정될 때 비로소 나무는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칸트의 존재론에 의하면 존재를 술부에 귀속시키는 모든 명제는 종합적이다. 존재는 오성의 판단의 대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반드시 우리의 지각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순수 사유의 대상에 대해서는 그것의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 “전지자(全知者)”는 “부분적으로 안다”라는 우리의 현실적 경험의 인식으로부터 추상되어 그 극한점으로서 “모든 것을 안다”라고 상정된 것이다. 이것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순수사유의 대상이며, 경험의 한계를 타파하는 자유로운 순수이성의 장난이다. “부분적으로 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상으로 인식 가능한 것이지만 “만유일체의 모든 것에 능하다”라는 것은 경험에서 상대적으로 추론된 논리적 구성일 뿐이다. 따라서 “전지ㆍ전능자”라고 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체험세계에 대하여 상대적인, 절대자로서 상정된 논리적 구성물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적 구성물은 존재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둥근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우리는 “둥근 사각형”에 존재성을 부여할 수 없지만, 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둥근 사각형이 주어의 자격도 가질 수 없지만, “둥근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우리의 일상언어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둥근 사각형이 의미를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존재성과 의미성의 충돌을 해결하고 있는 학설이 바로 럿셀의 기술 이론인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다”라는 한국어 문장에서는 우리는 존재의 문제를 찾을 길이 없다. “전능하다”에서 “하다”는 “있다”를 내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장을 영어로 바꾸어 놓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God is omnipotent.” 이 명제는 두 개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God)과 전능(omnipotent)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전능은 “is”라는 연결사(copula, 계사繫辭)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칸트의 말대로 이 연결사는 단지 하나님과 전능을 연결시키는 연결사일 뿐이며, 이 연결사가 하나님의 개념에 새로운 속성을 첨가하지는 않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God is omnipotent.”라는 문장에서 전능이라는 속성을 제거하면 “God is.”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말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깨비방망이처럼 “하나님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인도유러피안어족의 말에 있어서는 “이다”와 “있다”가 항상 혼동되게 마련이다. 중국어에서는 “上帝全能”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며 양자를 연결하는 be 동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上帝全能”이라는 명제를 놓고 존재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럿셀은 기술 이론을 발표하면서, “플라톤의 『테아에테투스』로부터 시작된 존재에 관한 2천 년 동안의 뒤죽박죽된 대가리 속의 엉크러짐을 다 풀어버렸다(This clears up two millennia of muddle-headedness about 'existence,' beginning with Plato's Theaetetus)”라고 시원하게 일성(一聲)을 갈(喝)했지만, 사실 그것은 『테아에테투스』의 문제라기보다는 서구 언어에 내장된 문제이며, 『테아에테투스』의 인식론을 왜곡시킨 중세기독교의 독단의 문제일 것이다. 아마도 알츠하이머 목사님이 “예수가 누구여”라고 말한 것은 일생을 통하여 억지로 주입된 어색한 인도 유러피언어적 언어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매우 자연스러운 모국어의 본질로 회귀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God is omnipotent”라는 말에서 “God”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omnipotent”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is”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God is omnipotent.”라는 명제는 근원적으로 존재를 나타내는 명제일 수가 없다. 단지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만 최종적으로 남을 뿐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전능하다”라는 판단은 순수이성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오성의 범주를 적용하면 이율배반에 빠진다(선험적 변증론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따라서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전칭적인 명제들은 실천이성의 영역 속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중용』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사태는 『중용』에 내재하는 암묵적 체계 속에서는 결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이분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8~34).
 
 
형용사니 동사니 명사니 하는 개념규정 자체가 서구 언어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과연 그 개념지도를 가지고 한문을 문법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지 나는 알 바 없다(41).
 
 
종교란 개인이 자신의 고독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Religion is what the individual does with his solitariness.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78)
 
 
서양언어, 특히 서양종교에 세뇌된 언어의 용례 때문에 이러한 유교적 본래용법의 함의가 심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얻는단 말인가? 비밀만 지켜진다면 기분이 좀 경감되는 느낌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죄인과 죄사함의 주체가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용』의 ‘자성(自成)’(스스로 이루어 나갈 수밖에 없고) ‘자도(自道)’(스스로 길지워 나갈 수밖에 없다)의 투철한 논리이다. 『중용』은 이러한 논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군자의 길과 소인의 길은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에게는 오직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259~260).

       




 

* 도올 김용옥, 『중용 한글역주』, 통나무, 2011.



나의 구원

 




<중용한글역주> - 김용옥
  

   
서양언어, 특히 서양종교에 세뇌된 언어의 용례 때문에 이러한 유교적 본래용법의 함의가 심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얻는단 말인가? 비밀만 지켜진다면 기분이 좀 경감되는 느낌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죄인과 죄사함의 주체가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용』의 ‘자성 自成’(스스로 이루어 나갈 수밖에 없고) ‘자도 自道’(스스로 길지워 나갈 수밖에 없다)의 투철한 논리이다. 『중용』은 이러한 논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군자의 길과 소인의 길은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에게는 오직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259~260






영혼, 육체의 감옥

 





<감시와 처벌> - 미셸 푸코 / 오생근



"영혼은 육체의 감옥이다."(62)




***




 
피타고라스 혹은 플라톤, 구약 혹은 예수 이래 '서양'을 구성한 문명 도식이었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말을 뒤집은 푸코의 결정적 한 마디.

2012. 7. 27.

there's no philosophy without philology




 


문헌학, 어학 없는 철학, 학문이란 없다.
- 그 언어의 문법과 용례를 벗어나는 '해석'이란, 미안하게도, 그냥 '오역'이다.




* there's no philology without philosophy.

마찬가지로 철학 없는 어학과 문헌학도 어불성설이다.
- 철학이 없다는 것은 '자신'에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어떤 입장이 '정말' 당연한 줄 아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
<논술과 철학 강의 2> - 김용옥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 김용옥



2012. 7. 26.

유럽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 하이데거적 어원학의 오류



"로마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람들이 말한 것이 모두 다 옳은 건 아니야."(147)
- 안똔 빠블로비치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오종우













<동일성과 차이> - 마르틴 하이데거 / 신상희
       
필로소피아라는 말은 우리의 서양적-유럽적 역사의 가장 내적인 근본 특징을 규정해주기도 한다. 흔히 듣게 되는 <서양적-유럽적 철학>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동어반복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철학이 그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적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은 그 본질의 근원에 있어서, 스스로를 전개하며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그리스 정신 문화를, 그것도 오직 그리스 정신 문화만을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

철학이 그 본질상 그리스적이라는 명제는, 서양과 유럽이 - 그리고 오직 서양과 유럽만이 - 가장 내적인 역사의 진행 과정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철학적>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아니다. 이것은 여러 학문들의 발생과 지배에 의해 증명된다. 왜냐하면 제 학문들은 가장 내적인 서양적-유럽적 역사 과정, 즉 철학적 역사과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오늘날 지구상의 인간의 역사에 특별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77-78).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한길그레이트북스 026)> - 에드문트 후설 / 이종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럽인에 속하는 다른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인 '학문'이나 '철학'이라는 특수한 문화형태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상론한 바에 따라, 새로운 철학을 근원적으로 건립한 것은 근대유럽의 인간성(Menschentum)을 근원적으로 건립하는 것이며, 게다가 중세의 인간성이나 고대의 인간성인 이제까지의 인간성에 대항해서 근대의 새로운 철학을 통해 그리고 바로 이 철하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자기를 혁신하려는 인간성인 근대유럽의 인간성을 근원적으로 건립하려는 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의 위기는 철학적 보편성의 분과들인 근대학문 모두의 위기를 뜻하며, 이것은 유럽 인간성의 문화적 삶이 지닌 의미심장함 전체, 즉 그의 실존(Existenz) 전체에서 맨 처음에는 잠재적이지만 점차 더욱더 두드러지게 드러난 유럽 인간성 자체의 위기이다(73).


철학 즉 학문은 인간성 그 자체에 '타고난 본래의' 보편적 이성이 계시(Offenbarung)되는 역사적 운동(historische Bewegung)일 것이다. / 만일 오늘까지도 여전히 완결되지 못한 [근대철학의] 운동이 진정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정확히 성취되는 진행에서 일어난 완전한 실현상태로서 입증되었다면, 혹은 만약 이성이 사실상 그 자신에 대해 자기에게 고유한 본질적 형식 즉 정합적인 필증성 통찰을 통해 계속 발달하고 필증적 방법을 통해 자기자신에 의해 규제되는 보편적 철학의 형식에서 충분히 자각하면서 형성되었다면, 이러한 것은 현실적일 것이다. 이것에 의해 비로소 유럽 인간성이 가령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단순한 경험적인 인간학적 유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이념을 자신 속에 갖고 있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그밖의 인간을 유럽화하는(Europaeisierung)하는 각본은 세계의 의미에 속하지 않는 절대적 의미의 지배를 그 자체로 표명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가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78).


유럽에는 - [유럽 이외의] 다른 모든 인간집단 역시 - 유용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도외시하더라도, 어쨌든 그들이 정신적으로 자기를 보존하려는 불굴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를 끊임없이 유럽화(europaeisieren)하려는 동기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종류의 어떤 것이 있다. / 반면 우리들[유럽인]은, 만역 우리가 스스로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을 결코 인도화(印度化)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 유럽의 인간성에는 본래 타고난 어떤 완전한 모습(Entelechie)이 있으며 , 이 완전한 모습은 유럽의 형태들의 변화를 철저히 지배하고 이 형태의 변화에다 어떤 영원한 극(極)으로서의 이상적 생생활형태나 존재형태로 발전하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느낀다(그리고 이것이 매우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이 느낌은 충분히 정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432).


정신적으로 유럽은 출생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떤 지방에 있는 지리적인 것 - 비록 이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 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국가 또는 그 국가를 구성하는 개별적 인간이나 인간들 집단의 정신적 출생지를 뜻한다. 그거은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의 고대그리스 도시국가이다. 이 도시국가에서 그들의 환경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간들의 새로운 종류의 태도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시종일관 수행한 결과 체계적으로 완결된 문화형태로 신속하게 성장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정신적 산물이 출현하였는데,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철학'이라고 불렀다. 이 말을 근원적 의미에서 올바로 번역해보면, 바로 보편적인 학문, 세계 전체에 관한 학문 즉 모든 존재자의 전체적 통일성에 관한 학문을 뜻한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곧바로 전체에 관한 관심 그리고 이와 동시에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생성작용과 이 생성작용 속에 있는 존재에 관한 물음은 존재의 보편적 형식들과 영역들에 따라 특수화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단 하나의 학문인 철학은 다양한 개별과학들로 분파되었다. / 그러므로 모든 학문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철학이 출현한 것에서 나는, 이 사실이 아무리 역설적으로 들리더라도, 정신적 유럽의 근원적 현상(Urphaenomen)을 보게 된다(433-434).


무엇보다도 양측 [동양과 서양] 철학자들의 태도나 그들의 보편적 관심 방향은 확실히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들은 서양이든 동양이든 세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관심은 양측에서, 따라서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동양]철학들의 경우에도 역시 - 어떤 종류의 직업적인 생활상 이해관계 방식에 따라 작용하는 곳이거나, 일반적 유산이 그 속에서 세대로부터 세대로 이어지면서 전승되거나 혹은 명백한 동기를 지니고서 계속 발전되는 직업적 공동체로 이끄는 곳 어디에서나 - 보편적 세계인식으로 이끈다. / 그러나 오직 그리스인의 경우에만 우리는 순수한 이론적 태도라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형태에 관한 보편적(우주론적)인 생활상의 이해관계를 발견하게 된다(438-439).


그리스-유럽의 학문(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철학'이다) - 이것은 이와 동등하게 평가된 동양의 철학들과 원리적으로 구별된다 - 을 보다 깊게 이해해기 위해서는 유럽의 학문에 앞서서 그러한 철학들을 창조하였던 실천적-보편적 태도를 좀더 상세하게 고찰하고, 이러한 태도를 종교적-신화적 동기와 종교적 신화적 실천은 자연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성에 - 그리스철학과, 이와 동시에 학문적 세계고찰이 출현하고 발전하기 이전에 - 함께 속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또한 본질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필연성이다(444).


만일 그리스로부터 창조되었고 근대에 와서도 계속 형성된 학문적 사고방식으로 교육받은 사람이 참으로 인도나 중국의 철학과 과학(천문학, 수학)을 논의하고, 따라서 인도나 바빌로니아, 중국을 유럽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전도된 것이고 하나의[또 다른] 의미왜곡이다(446).


나 역시 '유럽의 위기'는 길을 잘못 들어선 합리주의(sich verirrende Rationalismus)에 뿌리가 있다는 점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합리성 자체가 악이라든가. 인간성의 실존(Existenz) 전체에서 부차적인 사소한 의미라는 견해를 뜻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논의한 그 높은 [차원의] 진정한 의미의 합리성은 그리스철학의 고전적 시대에 이상(理想)이었던, 본원적으로 그리스적 의미의 합리성이다. [...] 오래되었지만 훌륭한 정의(定義)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 심지어 파푸아인 역시 사람이지 동물은 아니다(453-454).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 위르겐 하버마스 / 이진우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탄생된 민주적 헌법 민족국가는 이제까지 세계사적으로 성공한 유일한 정체성의 구성체였다. 이 구성체는 일반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의 계기들을 아무런 강제없이 서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공산당은 민족국가적 정체성을 대변할 수 없었다. 만약 더 이상 민족의 토대 위에 있지 않다면, 오늘날 보편주의적 가치지향성은 도대체 어떤 토대 위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나토로 결정화되는 대서양적 가치공동체는 국방장관들의 선전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아데나우어나 드골의 유럽은 단지 통상연합의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를 제공할 뿐이다. 공동시장으로서의 유럽에 대한 반대로서 최근의 좌파적 지식인들은 전혀 다른 초안을 기획하고 있다.


[...] / 결연히 서양 합리주의의 유산을 받아들이는 이 전혀 다른 서양적 정체성에 관한 꿈은, 국제 연합이 '제2의 미국혁명'이라는 깃발 아래 초기 모더니즘의 환상들로 후퇴하는 시점에서 형성된다. 예전의 국가소설에서 그려진 질서의 유토피아들 속에서는 이성적 생활형식들이 자연의 기술적 지배와 사회적 노동력의 무자비한 동원과 기만적인 공생관계를 맺었다. 행복과 해방을 이렇게 구너력과 생산과 동일시한 것이 처음부터 현대와 자기이해를 혼란시켰다. 즉 현대(성)에 대한 2백년 간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


스스로 야기한 체계적 강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의 비전을 경제성장, 군비경재, '낡은 가치들'의 갈등적 결합에 대립시킬 때에만, 노후한 유럽은 다시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생존 자체를 위해 시장에서 또는 우주에서의 국제적 경쟁력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체계적 강요들이 응축되어 있는 일상적 확실성 중의 하나이다. 마치 힘의 놀이에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회적-다윈주의적 유희규칙이 아닌 것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세력 확장과 간섭을 다른 사람의 세력 확장과 간섭을 들어 정당화한다. 현대적 서양은 이러한 심성이 이성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세계를 위한 정신적 전제조건과 물질적 토대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니체 이래로 실행되고 있는 이성비판의 진정한 핵심이다. 서양이 아니라면 누가 자신의 전통으로부터 비전을 지닌 통찰과 에너지와 용기를 길어낼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은 체제보존과 체제고양이라는 맹목적 강요의 - 이미 오래전부터 형이상학적이 아닌 - 초생물학적 전제조건들로부터 심성을 형성하는 힘을 얻어내기 위해 필요할지도 모른다.

- 422-423








"제가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 이른바 제가 '서양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라고 이름붙인 부분인데요, 탈 오리엔탈리즘-옥시덴탈리즘적 시각에서 보편성, 합리성, 근대성의 문제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에서 하이데거의 철학 관념에 대한 비판을 다루어 보고 싶습니다. 하이데거는 철학 자체를 그리스어 philosophia와 동일시하고 그 내용과 형식을 본질적으로 모두 그리스적인 것으로 보며 따라서 철학은 오직 그리스와 그 전통을 받은 그리스-로마-유럽적 사유에서만 가능하다는 관점을 명시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다룬 것이 <철학, 그것은 무엇인가>와 <철학입문>입니다. 이 책들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은 오직 그리스 철학이며 이말은 사실상 동어반복(Tautologie)이고 따라서 한국철학은 한국 그리스 철학이라는 말처럼 처음부터 형용모순(contradictio in adjectio)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이러한 관념이 하이데거의 위대성(저는 이십세기 전반기의 위대한 몇 명의 철학자를 고르라면 하이데거와 비트켄슈타인, 러셀과 화이트헤드를 고르겠습니다)이자 한계라고 봅니다.
위대성이라는 부분은 그가 모든 동시대의 서구인들이 느끼고 있지만 다만 파편적으로만 사유하고 있는 것을 명시적인 명제의 형태로 정식화 했다는 점, 그리고 한계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논증이 기본적으로 한 개념의 의미 혹은 본질을 그 개념의 어원학적 분석의 결과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곧 이러한 어원학적 논증은 기본적으로 언어학적 논증이며, 언어학적 논증은 근본적으로 그 언어가 유통되고 작동하는 문화권내에서만 타당한 논증입니다. 물론 저는 어원학적 분석이나 탐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개념의 의미 혹은 이른바 '본질'을 그 개념의 어원학 분석과 100% 동일시하려는 태도는 한 마디로 오류입니다.
이는 어원학적 곧 궁극적으로 문화적인 단어의 개념 분석을 통해서 보편학을 정립하겠다는 시도로서 근본적으로 자기 모순적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어원학적 분석이 다름 아닌 보편성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하이데거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 철학과 존재, 존재자, 보편성 그리고 근대성 및 합리성 등의 개념은 모두 얽혀 있는 존재들입니다.
결국 하이데거의 논증은 서양에 동양의 道에 완벽히 합치하는 개념이 없으므로 서양철학은 道學 혹은 철학이 아니라는 어느 중국학자의 말과 완전히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최근의 사상가들 거의 모두를 비롯하여 20세기까지의 모든 서양철학자들은 19세기 중반에 아편전쟁에 패하기 전까지의 중국학자들과 동일한 오류에 빠져있습니다.
양자는 모두 자신들의 지역적인 특수한 개념들과 사건, 역사만을 다루면서 그것을 인류 전체에 대해 타당한 것으로 가정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단순한 무지로서, 마르크스의 말대로, 무지는 논증이 아닙니다.
문제는 번역과 개념사 혹은 계보학의 문제를 끌어들이는데, 바로 보편과 철학, 합리성, 근대성 등의 개념 자체가 바로 서구어를 번역한 19세기 일본어라는 사실에서 그러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러한 서구적 보편성과 보편성 자체를 동일시하는 태도, 방금 말씀 드린대로 하이데거가 정식화한 바로 이 태도가 오늘날 참다운 보편성의 정립에 방해가 되고 있으며, 그러한 논변의 철학적 오류를 지적하여 참다운 다문화적 전지구적 글로컬한 복수/다수의 분산적 보편성, 탈경계적 보편성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 제가 쓰고자 하는 논문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잘못된 태도를 '하이데거적 어원학에만 호소하는 오류' 혹은 간단하게 줄여서 '하이데거적 어원학의 오류'라 이름 붙이고, 이를 '서구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라 명명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제가 십여년 전부터 논문에서 종종 밝혀온 생각인데, 이번 기회를 빌어 논문의 제목도 처음부터 <'서구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 하이데거적 어원학의 오류>로 정하여 이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2012. 7. 23.

근세조선정감 上








 
박제형 / 이익성


"정감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책은 철종이 즉위하던 때부터 시작되었고 중점은 대원군의 인물됨과 그의 시정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수정의 서문을 보면 "일본인 궁천씨가 나에게 조선정감 두 권을 보이면서 서문을 청하는데, 곧 이순이 짓고 배차산이 평한 것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정감은 원래 상하 두 권으로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권은 국내에서는 볼 수 없고, 역자의 과문인지는 모르나 일본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므로 정감 저자가 기록한 연대는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알 수가 없다."

- 이익성의 <역자해제>, 4쪽

"조선 근대사에 대한 서적을 얻어 읽을 수가 없다."(朝鮮近代之史 不可得而讀, 119쪽)

- 배차산의 <근세조선정감 서>의 첫문장(11쪽)



***


내가 조사한 바로는 이 책은 '근세'와 '근대'라는 말이 사용된 최초의 국내 문헌이다.

modern의 일어 번역 '신한어'인 '근세'라는 말은 니시 아마네의 1784년 저작 <<백일신론>>에 처음 보이고, 역시 같은 용어를 번역한 '근대'는 오히려 그보다 1년 빠른 1873년 아리마사학교에서 나온 영일사전 <<영화장중자전>>에 처음 나온다.

우선, '근세'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최초의 우리나라 문헌으로은 - 물론 다른 글에서도 앞으로 더 나올 수도 있지만 - 1886년 발간된 이 책이 최초로 보인다.

더욱이 이 글이 발간될 당시 함께 수록된 배차산의 <서문>에는 '근대'라는 말조차 나온다! - 우리말 번역본에 부록으로 실린 원문 119쪽에 나온다.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하여 인터넷에서 찾으니 모두 절판인데 오직 교보에만 아직도 있었다. 당장 주문하여 읽는 중인데 이런 뜻밖의 큰 수확을 얻었다.

이런 때 나는 - 가령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아무도 지나지 않는 어느 시골의 낡은 무덤 안 창고에서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희극편> 양피지를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러한 작업에 바보같은 그러나 행복한 스릴과 보람을 느낀다.

물론 이보다 이른 근세 혹은 근대의 용례가 박영효 등이 1884년 경부터 적은 국한문 혼용체 혹은 한글일기, 김옥균 혹은 서광범, 박영교 등의 글에 등장할 수도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이런 조사 작업은 국내에서는 이전에 - 글자 그대로 - 아무도 수행한 적이 없는 작업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용례가 등장할 수 있고, 그러한 용례가 보여주는 의미상의 차이에 따라 moderne의 일어 번역어인 근대와 근세의 국내 수용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


2012. 7. 21.

21. 니체유고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21. 유고(1888년 초~1889년 1월 초)』,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4.

 
14 [100]
진정한 그리스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다 :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무언가가 변했다.
  
20[73]
앞을 보라! 뒤돌라보지 말라!
늘 근거들로 향하면
몰락한다
  
20[110]
그대가 우상을 파괴했다는 것이 아니라 :
그대가 그대 안에 있는 우상숭배자를 파괴했다는 것,
이것의 그대의 용기인 것이다
 

22[14]
모든 가치의 전도
안티크리스트. 그리스도교 비판의 시도
비도덕주의자. 가장 숙명적인 종류의 무지인 도덕에 대한 비판.
우리, 긍정하는 자. 허무주의 운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비판.
디오니소스. 영원회귀의 철학.
 

22[24]

I. 그리스도교로부터의 구원 : 안티크리스트
II. 도덕으로부터의 구원 : 비도덕주의자
III. ‘진리’로부터의 구원 : 자유 정신
IV. 허무주의로부터의 구원 :
 

23[2]
예술적 잉태에서 방출되는 힘과 성교에서 방출되는 힘은 동일한 것이다 : 오로지 한 종류의 힘만이 존재한다.
 

[24 = W II 9c. D 21. 1888년 10월~11월]
 

24[1] 고통마저 자극제로 작용하는, 넘쳐흐르는 삶의 느낌으로서의 주신제의 심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우리의 염세주의자들도 오해했던 비극적 감정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열쇠를 내게 주었다. 비극은 쇼펜하우어가 의미한 그리스인들의 염세주의를 입증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비극은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한 극도의 대립물이다. 삶에 대한 긍정, 심지어 삶의 가장 낯설고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대한 긍정, 자신의 최고 유형의 희생을 통해 제 고유의 무한성에 환희를 느끼는 삶에의 의지. - 이것을 나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나는 비극 시인의 심리에 이르는 진정한 다리로 파악했다. 공포와 동정을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고, 감정의 격렬한 방출을 통해 위험한 아펙트(Affekt)에서 자기를 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 그런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이었다 : 오히려 공포와 동정을 넘어서서 생성과 창조에 대한 영원한 기쁨을 즐기기 위해서, 자기의 공포와 자기의 동정을 자기 밑에 두기 위해서 ......
 


[25 = W II 10b. W II 9d. Mp XVII 8. D 25. W II 8c. 1888년 12월~1889년 1월 초]
 
  
25[7]. 5. 나는 그 어느 것도 다른 식이기를 바라지 않음며, 되돌리기도 바라지 않는다 - 나는 그 어떤 것도 달리는 원할 수가 없다 ...... 운명애 Aamor fati ...... 그리스도교마저 필수적이 된다 : 최고의 형식, 그 가장 위험한 형식, 삶에 대한 부정 안에 있는 가장 유혹적인 형식이 비로소 자신의 최고의 긍정에 도전한다 -



  

20. 니체유고

19. 니체유고

프리드리히 니체, <<유고(1885년 가을~1887년 가을): 원래 나는 나를 어느 정도 나 자신에게서 보호해주고>>, 이진우 옮김, 니체전집 19, 책세상, 2005.

 
1[115] 모든 것의 해석적 성격. / 사건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난 것은 해석하는 존재에 의해 한 무리의 현상들이 해석되고 종합된 것이다.
  
1[120] 동일한 텍스트가 무한히 많은 해석들을 허용한다. 하나의 ‘올바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1[125] - “그것은 이러저러하다”를 “그것은 이러저러하게 되어야만 한다”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1[191] 주의. 결국 그리스 도시 전체가 개인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1[240] 반성은 여전히 순진의 표시일 수 있다.
 

1[247] 어찌하여 인간은 이처럼 신(神)으로 쇠약해져서 인간에게 소외되었는가.
 

2[77] 우리의 가치들이 사물 안으로 투입되어 해석되었다. / ‘그 자체’에는 도대체 의미가 있는 것인가?? / 의미란 필연적으로 관계-의미와 관점이 아닌가? / 모든 의미는 힘에의 의지다(모든 관계-의미들은 힘에의 의지로 해체된다).
 

2[85] 어떤 사물의 속성들은 다른 ‘사물들’에 대한 효과들이다 : 다른 ‘사물들’을 빼고 생각하면, 사물은 아무런 속도 갖지 않는다. 즉, 다른 사물들이 없으면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물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2[108] 세계는 “흐르는 강 속에” 있다. 무엇인가 형성되는 것으로서, 거듭해서 새롭게 연기되는 거짓으로서. 이 거짓은 결코 진리에 다가가지 못한다 : - 왜냐하면 ‘진리’는 없기 때문이다.
 

2[116] 저 자기 인식은 겸손이다-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감사다-왜냐하면 우리는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117] 도덕적 자기 해석은 세계부정으로 끝난다(그리스도교 비판). / 세계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 : 모든 해석은 성장 또는 몰락의 징후다.
 

2[148] 힘에의 의지는 해석한다 [...] 실제로 해석은 그 무엇인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 자체다. (유기체적 과정은 해석을 전제한다.)
 

2[149] ‘물 자체’는 ‘의미 자체’, ‘뜻 자체’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사실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실이 있기 위해서는 항상 의미가 먼저 투입되어야 한다. / “그것은 무엇인가?”는 다른 무엇에 의해 파악된 의미-정립이다. ‘본질’, ‘실재’는 관점주의적인 것이며, 이미 다수를 전제한다. 그 밑바탕에는 항상 “그것은 나에게 (우리에게, 살아있는 만물 등에게) 무엇인가?”가 놓여 있다.
 

2[161] 나는 도덕적 가치 감정 비판을 감행한 사람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2[165] 근본문제 : 이러한 믿음의 전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도덕에 대한 믿음의 전능은? / (-그것은 삶의 근본 조건들 자체가 도덕을 위해 잘못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폭로된다 : 동물 세계와 식물 세계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 ‘자기 보존’ : 이타주의적 원칙과 이기주의적 원칙의 화해에 대한 다윈의 관점. / (이기주의 비판, 예를 들면 라 로슈푸코) / 생리적 번영이나 잘못됨, 또한 보존 및 성장 조건들에 관한 의식을 드러내주는 것인 징후와 기호 언어로서 도덕적 판단들을 이해하려는 나의 시도 : 점성술의 가치들에 관한 해석 방식. 편견들. 본능들은 이 편견들에게 넌지시 가르쳐준다(인종, 공동체, 청년기 또는 쇠퇴와 같은 다양한 단계 등등에 관해.) /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유럽적 도덕에 적용하면 : 우리의 도덕적 판단들은 쇠퇴, 에 대한 불신의 징후들이며, 염세주의의 준비다. / 우리가 모순을 실존 속에 투입해 해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결정적 중요성 : 모든 다른 가치들의 배후에는 저 도덕적 평가들이 명령하면서 서있다. 그것들이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무엇에 따라 측정하는가? 그리고 인식은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 나의 주요 명제 : 도덕적 현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 현상들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 있을 뿐이다. 이 해석조차 도덕 바깥에 근원을 갖고 있다.
 

2[167] 인과성의 부정. 모든 것에 각각 책임을 지우지 않고 또 그 어떤 것의 운명을 지탱하는 실을 너무 짧게 잡지 않기 위하여. ‘우연’은 실제로 존재한다.
 

2[168] 도덕-발전의 경향. 모든 사람은 다른 어떤 교의와 사물의 평가보다 그 자신이 잘 극복할 수 있는 교의와 사물의 평가가 유효하기를 바란다. 따라서 모든 시대의 약자와 평범한 자의 근본 경향은 좀더 강한 자를 약하게 만들고 끌어내리는 것이다 : 도덕적 판단의 주요 수단. 약자에 대한 강자의 태도는 낙인찍혀 있다. 좀더 강한 자의 좀더 고귀한 상태는 나쁜 별명을 얻는다. / 소수에 대한 다수의 투쟁, 희귀한 자에 대한 통상적인 자의 투쟁, 강자에 대한 약자의 투쟁.
 

2[170] 도덕적 판단이 이미 얼마나 많은 선회를 해왔으며, 또 얼마나 여러 번에 걸쳐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악’이 ‘선’으로 개명되었는지에 관한 지식과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이동들 중의 하나에 대해 나는 ‘도덕의 도덕성’이라는 대립을 가지고 --- / 또한 양심도 자신의 영역을 뒤바꾸었다 : 무리(群衆)의 양심 가책이 있었다 // 언뜻 개인적 책임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양심도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여전히 무리-양심인가.
 

2[172] ‘존재’ - 우리는 이에 관해 ‘산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표상도 갖고 있지 않다. - 다시 말해 죽은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2[174] 사람들은 사물들 속에서 자신이 집어넣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다시 발견하지 못한다.
 

2[182] 도덕은 본질적으로 개인을 넘어서 또는 개인의 노예화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지속시키는 수단이다.
 

2[184] 나의 문제 : 인류는 이제까지 도덕뿐만 아니라 자신의 도덕성에서 어떤 해를 입었는가? 정신 등등에서의 훼손
 

2[185] “우리 비도덕주의자들”
 

2[190] 도덕적 가치 평가는 해석이며, 일종의 해석하는 방식이다. 해석 자체는 특정한 생리적 상태들과 또한 지배적 판단들에 관한 특정한 정신적 수준의 징후다. 누가 해석하는가? - 우리의 정념들이.
 

* 2[191] 나의 주장 : 도덕적 가치 평가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 도덕적 감정-충동을 “왜?”라고 물음으로써 저지해야 한다는 것. “왜?”와 도덕 비판에 대한 이 열망은 바로 정직의 고상한 감각으로서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는 것. 우리의 정직, 즉 우리를 기만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 : “왜 안 되지?” -어떤 법정 앞에서?- 기만당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정복과 착취에 대한 주의, 삶의 정당 방어 본능. // 이것이 너희에 대한 나의 요구다 - 그 요구들은 너희 귀에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 : 너희가 도덕적 평가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 너희가 여기서 비판이 아닌 예속을 요구하는 도덕적 감정-충동을 “왜 예속을?”이라는 질문으로 저지해야 한다는 것. 너희가 “왜?”와 도덕 비판에 대한 이러한 열망을 지금 너희가 갖고 있는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너희가 너희 시대를 명예롭게 만드는 가장 고상한 정직의 형식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2[192] 감정: 너희는 해야만 한다! 위반함에 있어서의 불안 - 질문: “누가 거기서 명령하는가? 우리는 거기서 누구의 분노를 두려워하는가?”
 

2[197] 신앙이 없는 사람과 무신론자, 그렇다! - 불신으로부터 신앙과 목적을, 그리고 종종 순교를 준비하는 뿌리 뽑힌 자의 괴로움과 열정 없이 : 세상은 대체로 신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상적이고 자애롭고 인간적인 척도에 따라 진행되지도 않는다는 통찰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푹 삶아졌고 냉담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부도덕하고 신적이지 않으며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우리는 세계를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숭배의 의미에서 해석했다. 세계는 우리가 믿었던 바의 가치가 없다 :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만들었던 위로의 마지막 거미줄은 우리에 의해 찢어졌다. 역사가 자신의 무의미성을 알게 되고 그 자체에 싫증나게 된다는 점이 바로 전체 역사의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실존에 피곤해짐, 더 이상 원치 않음에 대한 이러한 의지, (이러한 반대 의지의 표현으로서의) 자의(恣意), 자기 안녕, 주체의 붕괴. - 쇼펜하우어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이것이 최고의 경의로써 존중되기를 바랐다. 그는 그것을 도덕이라 명명했고, 모든 자기희생적 행위가 --임을 포고했다. 그는 예술이 만들어내는 무관심한 상태에서 혐오의 완전한 해방과 만족을 위한 준비를 인식하기를 바람으로써 예술의 가치를 보장한다고 믿었다.
 

2[200] 마찬가지로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다 :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교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교와 너무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과 너무 가까이 살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그리스도교로부터 성장했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기를 금지하는 것은 우리의 엄격하고 사치스러운 경건함 자체다.
 

2[203] 그러나 모든 사람은 “도덕이 여기 있다. 도덕은 주어져 있다!”라는 주요 사안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모두 정직하게, 무의식적으로, 부단히 자신들이 도덕이라 부르는 것의 가치를 믿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도덕의 권위 하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 도덕의 가치! 바로 이 가치를 의심하는 어떤 사람이 발언권을 갖는 것을 그들은 허용할 것인가? 그는 단지 이런 측면에서만 도덕의 추론, 추론 가능성, 심리적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마음을 쓰는가?
 

2[205]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어서 다른 것을 침범하지 않는 이기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 따라서 너희가 말하는 ‘허용된’ ‘도덕적으로 무관심한’ 이기주의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나를 장려한다”, “생명은 항상 다른 생명의 비용으로 살아간다”. -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직 자신의 정직에 이르는 첫걸음을 떼지 않은 것이다.
 

4[7] - “질병은 사람을 개선한다” : 모든 세기에 걸쳐 만나게 되는, 그것도 현자의 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민중의 입을 통해서도 만나게 되는 이 유명한 주장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그 타당성과 관련해 한번쯤 이렇게 질문해도 될 것이다 : 도덕과 질병 사이에는 혹 인과적 결속이 있는 것인가? ‘인간의 개선’, 크게 보면, 예컨대 지난 세기에 이루어진 유럽인의 부인할 수 없는 온화함, 인간화, 순화 - 그것은 혹 오랫동안의 은밀하고 무시무시한 고통, 잘못됨, 궁핍, 쇠약의 결과인가? ‘질병’이 유럽인들을 ‘개선’했는가? 또는 달리 물으면 : 우리의 도덕성은-중국인들의 도덕성과 비교될 수 있는 유럽에서의 우리의 민감한 현대적 도덕성-생리적 퇴보의 표현인가? ...... ‘인간’이 화려하고 강렬한 유형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역사의 모든 부분은 금방 갑작스럽고, 위험하고, 폭발적인 성격을 취한가는 점을 쉽게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인간성이 나빠진다. 어쩌면 다르게 나타나고자 하는 그런 경우에는, 심리학을 심층에 이르도록 추진하고 또 거기서 일반적인 명제를 발견하고자 하는 용기나 섬세함이 결여돼 있을 것이다. ‘어떤 인간’이 더욱더 건강하고, 더욱더 강하고, 더욱더 부유하고, 더욱더 생산적이고, 더욱더 모험적일수록 그는 ‘더욱더 부도덕’해진다. 대체로 그것에 몰두해서는 안 되는! 곤혹스러운 생각! 그렇지만 우리가 그 생각과 함께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얼마나 놀라워하며 미래를 바라보게 될 것인가!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요구하는 바로 그것보다-인간화, 인간의 ‘개선’과 증대하는 ‘문명화’보다- 우리로 하여금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덕성보다 값비싼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사람들은 덕성으로 인해 지구를 병원으로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의 간병인이다”라는 말은 마지막 결론의 지혜일 것이다. 물론 : 사람들은 무척 열망했던 ‘지상에서의 평화’를 가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또한 ‘서로에게 마음에 듦’은 적어질 것이다! 그만큼 적은 아름다움, 용기, 자만, 모험, 위험! 사람들에게 지상에서 살아가는 목적이 되어줄 만한 그런 ‘작품’들은 그만큼 적어질 것이다! 아! ‘행위들’은 이제 전혀 없다! 존립해 있고 시간의 파도에 씻겨 나가지 않은 모든 위대한 작품과 행위들 - 가장 심오한 이성으로 볼 때 그것들은 모두 위대한 부도덕성이지 않은가? ......
 

* 5[10]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뭔가 낯선 것을 알려진 것, 익숙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 첫 번째 기본 원칙 : 우리가 익숙해진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수수께끼,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 낯설게 만드는 것에 대한 감정의 둔화 :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의심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 탐색은 인식하는 사람의 제일 본능이다 : 물론 규칙의 확인으로써 ‘인식된’ 것은 전혀 없다! -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의 미신 : 그들이 고수할 수 있는 곳, 즉 현상들의 규칙성이 단축시키는 정식들의 적용을 허용하는 곳에서 그들은 무엇인가가 인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안정성’을 느낀다. 그러나 지적 안정성의 배후에는 두려움의 진정(鎭靜)이 있다 : 그들은 규칙을 원하는데, 그것은 규칙이 세계에서 두려움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학문의 배후 본능이다. / 규칙성은 묻는(즉, 두려워하는) 본능을 잠들게 한다. “설명한다”는 사건의 규칙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칙’에 대한 믿음은 자의적인 것의 위험성에 대한 믿음이다. 법칙을 믿으려는 선한 의지는 학문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특히 민주 시대에)
 

5[22] 근본 해법 : 우리는 이성을 믿는다. 그러나 이성은 잿빛 개념들의 철학이다. 언어는 온갖 천진난만한 편견들 위에 건립되었다. / 그런데 우리는 불화와 문제들을 사물 속에 집어넣고 읽어낸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언어적 형식으로만 사유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이성’의 ‘영원한 진리’를 믿는다(예컨대 주어, 술어 등등. / 만약 우리가 언어적 속박을 받지 않고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중단할 것이다, 우리는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하나의 한계를 한계로서 보게 된다. / 이성적 사유는 우리가 던져버릴 수 없는 도식에 따른 해석이다.
 

5[50] 5) 소크라테스부터는 병의 징후로서,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준비로서의 그리스 철학.
 

5[70] 힘에의 의지와 그것의 변형들 (이제까지의 도덕에의 의지는 하나의 학파였다)
 

5[87] 인류의 위에 있는 어떤 인간으로 말하자면,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다. / 몽테스키외.
 

5[89] 우리 시대가 (유럽) 최고의 인간 유형이라는 커다란 오류에 대항하여. 오히려 : 르네상스-인간은 더 고귀했을 것이고,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다. 아마 우리는 상당히 아래쪽에 있을 것이다 : ‘이해’는 최고의 힘을 말해주는 기호가 아니라 쓸모 있는 피로의 표시일 것이다. 도덕화 자체는 ‘퇴폐’다.
 

6[15] 의미를 사물 속에서 구하지 말고 : 의미를 집어넣어라!
 

7[1] ‘본질’은 없다 : ‘변하는 것’ ‘현상적인 것’이 유일한 존재방식이다.
 

7[2] 진리와 오류의 가치 / 어떤 예술가는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거기서 시선을 돌려 뒤를 돌아보는데, 그의 진지한 견해는, 사물에서 가치 있는 것은 우리가 색체와 형태, 소리, 사상에서 얻는 그림자 같은 나머지라는 것이다. 그는 사물이나 인간이 더 섬세해지고 더 엷어지고 더 묽어지면, 그만큼 그들의 가치는 커진다고 믿는다 : 현실적일수록, 그들의 가치는 더 커진다. 이것이 플라톤주의다 : 그러나 플라톤주의는 방향을 돌리면 더욱 대담하다 : - 그것은 현실성의 정도를 가치 정도에 따라 쟀고 이렇게 말했다 : ‘이념’이 많을 수록 존재가 더 많아진다. 그는 ‘현실’ 개념을 돌려서 이렇게 말했다 : “너희가 현실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며, 우리가 ‘이념’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가까이> 진리에 접근한다”. -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은 최고의 개명(改名)이었다 : 그리고 이를 그리스도교가 수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놀라운 사실을 보지 못한다. 플라톤은 곡예사로서, 그는 곡예사였다, 실제로 존재보다 가상을 선호했다 : 다시 말해, 진리보다 거짓과 창작을, 실제로 있는 것보다 비현실적인 것을, - 그러나 그는 가상의 가치를 너무 확신했기 때문에 ‘존재’ ‘원인성’과 ‘선함’, 진리라는 속성들, 간단히 말해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나머지 모든 속성들을 그것에 부여했다. / 가치 개념 자체는 원인으로 생각되었다 : 첫 번째 통찰. / 이상(理想)에 속하는 모든 속성이 증여되고, 명예가 수여되다 : 두 번째 통찰
 

7[3] <제3장. 진리에의 의지> [...] C. 새로운 것공포를 일으킨다 : 다른 한편, 새로운 것을 새롭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포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 경악은 약화된 공포다. / 낯익은 것은 신뢰를 불러 일으킨다 / ‘진실한’ 것은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 관성은 외부의 어떤 인상에도 우선 동일화를 시도한다 : 다시 말해서 인상과 기억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반복을 원한다. / 공포구분, 비교를 가르친다. / 판단 속에는 의지(그것은 그러그러해야 한다)가 일부 남아 있고 쾌락의 감정이 일부 남아있다(긍정의 즐거움 :) / 주의. 비교원래 활동이 아니라 동일하게 취급하기다! 판단은 원래 어떤 것이 이러이러하다는 믿음이 아니라, 어떤 것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의지다. / 주의. 고통은 가장 거친 형태의 판단(부정하는). / 쾌락은 긍정 / ‘원인과 결과’의 심리학적 발생에 관하여
 

8[7] 거짓에 대한 즐거움은 예술의 어머니, 두려움과 감성은 종교의 어머니, 우리는 금지된 것
을 얻으려고 애쓴다Nitimur in vetitum와 호기심은 학문의 어머니, 잔인함은 비-이기주의적 도덕의 어머니, 후회는 사회적 평등 운동의 기원, 힘에의 의지는 정의의 기원, 전쟁은 (양심과 명랑함과) 정직성의 아버지, 주인의 권리 / 가족의 기원으로서. 불신은 정의와 관조의 뿌리
 



* 미셸 푸코 : <<비정상인들>>, 이 매력적인 텍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