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6.

유럽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 하이데거적 어원학의 오류



"로마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람들이 말한 것이 모두 다 옳은 건 아니야."(147)
- 안똔 빠블로비치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오종우













<동일성과 차이> - 마르틴 하이데거 / 신상희
       
필로소피아라는 말은 우리의 서양적-유럽적 역사의 가장 내적인 근본 특징을 규정해주기도 한다. 흔히 듣게 되는 <서양적-유럽적 철학>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동어반복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철학이 그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적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은 그 본질의 근원에 있어서, 스스로를 전개하며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그리스 정신 문화를, 그것도 오직 그리스 정신 문화만을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

철학이 그 본질상 그리스적이라는 명제는, 서양과 유럽이 - 그리고 오직 서양과 유럽만이 - 가장 내적인 역사의 진행 과정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철학적>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아니다. 이것은 여러 학문들의 발생과 지배에 의해 증명된다. 왜냐하면 제 학문들은 가장 내적인 서양적-유럽적 역사 과정, 즉 철학적 역사과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오늘날 지구상의 인간의 역사에 특별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77-78).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한길그레이트북스 026)> - 에드문트 후설 / 이종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럽인에 속하는 다른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인 '학문'이나 '철학'이라는 특수한 문화형태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상론한 바에 따라, 새로운 철학을 근원적으로 건립한 것은 근대유럽의 인간성(Menschentum)을 근원적으로 건립하는 것이며, 게다가 중세의 인간성이나 고대의 인간성인 이제까지의 인간성에 대항해서 근대의 새로운 철학을 통해 그리고 바로 이 철하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자기를 혁신하려는 인간성인 근대유럽의 인간성을 근원적으로 건립하려는 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의 위기는 철학적 보편성의 분과들인 근대학문 모두의 위기를 뜻하며, 이것은 유럽 인간성의 문화적 삶이 지닌 의미심장함 전체, 즉 그의 실존(Existenz) 전체에서 맨 처음에는 잠재적이지만 점차 더욱더 두드러지게 드러난 유럽 인간성 자체의 위기이다(73).


철학 즉 학문은 인간성 그 자체에 '타고난 본래의' 보편적 이성이 계시(Offenbarung)되는 역사적 운동(historische Bewegung)일 것이다. / 만일 오늘까지도 여전히 완결되지 못한 [근대철학의] 운동이 진정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정확히 성취되는 진행에서 일어난 완전한 실현상태로서 입증되었다면, 혹은 만약 이성이 사실상 그 자신에 대해 자기에게 고유한 본질적 형식 즉 정합적인 필증성 통찰을 통해 계속 발달하고 필증적 방법을 통해 자기자신에 의해 규제되는 보편적 철학의 형식에서 충분히 자각하면서 형성되었다면, 이러한 것은 현실적일 것이다. 이것에 의해 비로소 유럽 인간성이 가령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단순한 경험적인 인간학적 유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이념을 자신 속에 갖고 있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그밖의 인간을 유럽화하는(Europaeisierung)하는 각본은 세계의 의미에 속하지 않는 절대적 의미의 지배를 그 자체로 표명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가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78).


유럽에는 - [유럽 이외의] 다른 모든 인간집단 역시 - 유용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도외시하더라도, 어쨌든 그들이 정신적으로 자기를 보존하려는 불굴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를 끊임없이 유럽화(europaeisieren)하려는 동기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종류의 어떤 것이 있다. / 반면 우리들[유럽인]은, 만역 우리가 스스로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예를 들어 우리 자신을 결코 인도화(印度化)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 유럽의 인간성에는 본래 타고난 어떤 완전한 모습(Entelechie)이 있으며 , 이 완전한 모습은 유럽의 형태들의 변화를 철저히 지배하고 이 형태의 변화에다 어떤 영원한 극(極)으로서의 이상적 생생활형태나 존재형태로 발전하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느낀다(그리고 이것이 매우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이 느낌은 충분히 정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432).


정신적으로 유럽은 출생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떤 지방에 있는 지리적인 것 - 비록 이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 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국가 또는 그 국가를 구성하는 개별적 인간이나 인간들 집단의 정신적 출생지를 뜻한다. 그거은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의 고대그리스 도시국가이다. 이 도시국가에서 그들의 환경세계에 대한 개별적 인간들의 새로운 종류의 태도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시종일관 수행한 결과 체계적으로 완결된 문화형태로 신속하게 성장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정신적 산물이 출현하였는데,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철학'이라고 불렀다. 이 말을 근원적 의미에서 올바로 번역해보면, 바로 보편적인 학문, 세계 전체에 관한 학문 즉 모든 존재자의 전체적 통일성에 관한 학문을 뜻한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곧바로 전체에 관한 관심 그리고 이와 동시에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생성작용과 이 생성작용 속에 있는 존재에 관한 물음은 존재의 보편적 형식들과 영역들에 따라 특수화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단 하나의 학문인 철학은 다양한 개별과학들로 분파되었다. / 그러므로 모든 학문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철학이 출현한 것에서 나는, 이 사실이 아무리 역설적으로 들리더라도, 정신적 유럽의 근원적 현상(Urphaenomen)을 보게 된다(433-434).


무엇보다도 양측 [동양과 서양] 철학자들의 태도나 그들의 보편적 관심 방향은 확실히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들은 서양이든 동양이든 세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관심은 양측에서, 따라서 인도철학이나 중국철학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동양]철학들의 경우에도 역시 - 어떤 종류의 직업적인 생활상 이해관계 방식에 따라 작용하는 곳이거나, 일반적 유산이 그 속에서 세대로부터 세대로 이어지면서 전승되거나 혹은 명백한 동기를 지니고서 계속 발전되는 직업적 공동체로 이끄는 곳 어디에서나 - 보편적 세계인식으로 이끈다. / 그러나 오직 그리스인의 경우에만 우리는 순수한 이론적 태도라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형태에 관한 보편적(우주론적)인 생활상의 이해관계를 발견하게 된다(438-439).


그리스-유럽의 학문(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철학'이다) - 이것은 이와 동등하게 평가된 동양의 철학들과 원리적으로 구별된다 - 을 보다 깊게 이해해기 위해서는 유럽의 학문에 앞서서 그러한 철학들을 창조하였던 실천적-보편적 태도를 좀더 상세하게 고찰하고, 이러한 태도를 종교적-신화적 동기와 종교적 신화적 실천은 자연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성에 - 그리스철학과, 이와 동시에 학문적 세계고찰이 출현하고 발전하기 이전에 - 함께 속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또한 본질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필연성이다(444).


만일 그리스로부터 창조되었고 근대에 와서도 계속 형성된 학문적 사고방식으로 교육받은 사람이 참으로 인도나 중국의 철학과 과학(천문학, 수학)을 논의하고, 따라서 인도나 바빌로니아, 중국을 유럽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전도된 것이고 하나의[또 다른] 의미왜곡이다(446).


나 역시 '유럽의 위기'는 길을 잘못 들어선 합리주의(sich verirrende Rationalismus)에 뿌리가 있다는 점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합리성 자체가 악이라든가. 인간성의 실존(Existenz) 전체에서 부차적인 사소한 의미라는 견해를 뜻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논의한 그 높은 [차원의] 진정한 의미의 합리성은 그리스철학의 고전적 시대에 이상(理想)이었던, 본원적으로 그리스적 의미의 합리성이다. [...] 오래되었지만 훌륭한 정의(定義)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 심지어 파푸아인 역시 사람이지 동물은 아니다(453-454).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 위르겐 하버마스 / 이진우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탄생된 민주적 헌법 민족국가는 이제까지 세계사적으로 성공한 유일한 정체성의 구성체였다. 이 구성체는 일반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의 계기들을 아무런 강제없이 서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공산당은 민족국가적 정체성을 대변할 수 없었다. 만약 더 이상 민족의 토대 위에 있지 않다면, 오늘날 보편주의적 가치지향성은 도대체 어떤 토대 위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나토로 결정화되는 대서양적 가치공동체는 국방장관들의 선전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아데나우어나 드골의 유럽은 단지 통상연합의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를 제공할 뿐이다. 공동시장으로서의 유럽에 대한 반대로서 최근의 좌파적 지식인들은 전혀 다른 초안을 기획하고 있다.


[...] / 결연히 서양 합리주의의 유산을 받아들이는 이 전혀 다른 서양적 정체성에 관한 꿈은, 국제 연합이 '제2의 미국혁명'이라는 깃발 아래 초기 모더니즘의 환상들로 후퇴하는 시점에서 형성된다. 예전의 국가소설에서 그려진 질서의 유토피아들 속에서는 이성적 생활형식들이 자연의 기술적 지배와 사회적 노동력의 무자비한 동원과 기만적인 공생관계를 맺었다. 행복과 해방을 이렇게 구너력과 생산과 동일시한 것이 처음부터 현대와 자기이해를 혼란시켰다. 즉 현대(성)에 대한 2백년 간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


스스로 야기한 체계적 강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의 비전을 경제성장, 군비경재, '낡은 가치들'의 갈등적 결합에 대립시킬 때에만, 노후한 유럽은 다시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생존 자체를 위해 시장에서 또는 우주에서의 국제적 경쟁력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체계적 강요들이 응축되어 있는 일상적 확실성 중의 하나이다. 마치 힘의 놀이에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회적-다윈주의적 유희규칙이 아닌 것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세력 확장과 간섭을 다른 사람의 세력 확장과 간섭을 들어 정당화한다. 현대적 서양은 이러한 심성이 이성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세계를 위한 정신적 전제조건과 물질적 토대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니체 이래로 실행되고 있는 이성비판의 진정한 핵심이다. 서양이 아니라면 누가 자신의 전통으로부터 비전을 지닌 통찰과 에너지와 용기를 길어낼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은 체제보존과 체제고양이라는 맹목적 강요의 - 이미 오래전부터 형이상학적이 아닌 - 초생물학적 전제조건들로부터 심성을 형성하는 힘을 얻어내기 위해 필요할지도 모른다.

- 422-423








"제가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 이른바 제가 '서양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라고 이름붙인 부분인데요, 탈 오리엔탈리즘-옥시덴탈리즘적 시각에서 보편성, 합리성, 근대성의 문제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에서 하이데거의 철학 관념에 대한 비판을 다루어 보고 싶습니다. 하이데거는 철학 자체를 그리스어 philosophia와 동일시하고 그 내용과 형식을 본질적으로 모두 그리스적인 것으로 보며 따라서 철학은 오직 그리스와 그 전통을 받은 그리스-로마-유럽적 사유에서만 가능하다는 관점을 명시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다룬 것이 <철학, 그것은 무엇인가>와 <철학입문>입니다. 이 책들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은 오직 그리스 철학이며 이말은 사실상 동어반복(Tautologie)이고 따라서 한국철학은 한국 그리스 철학이라는 말처럼 처음부터 형용모순(contradictio in adjectio)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이러한 관념이 하이데거의 위대성(저는 이십세기 전반기의 위대한 몇 명의 철학자를 고르라면 하이데거와 비트켄슈타인, 러셀과 화이트헤드를 고르겠습니다)이자 한계라고 봅니다.
위대성이라는 부분은 그가 모든 동시대의 서구인들이 느끼고 있지만 다만 파편적으로만 사유하고 있는 것을 명시적인 명제의 형태로 정식화 했다는 점, 그리고 한계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논증이 기본적으로 한 개념의 의미 혹은 본질을 그 개념의 어원학적 분석의 결과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곧 이러한 어원학적 논증은 기본적으로 언어학적 논증이며, 언어학적 논증은 근본적으로 그 언어가 유통되고 작동하는 문화권내에서만 타당한 논증입니다. 물론 저는 어원학적 분석이나 탐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개념의 의미 혹은 이른바 '본질'을 그 개념의 어원학 분석과 100% 동일시하려는 태도는 한 마디로 오류입니다.
이는 어원학적 곧 궁극적으로 문화적인 단어의 개념 분석을 통해서 보편학을 정립하겠다는 시도로서 근본적으로 자기 모순적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어원학적 분석이 다름 아닌 보편성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하이데거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 철학과 존재, 존재자, 보편성 그리고 근대성 및 합리성 등의 개념은 모두 얽혀 있는 존재들입니다.
결국 하이데거의 논증은 서양에 동양의 道에 완벽히 합치하는 개념이 없으므로 서양철학은 道學 혹은 철학이 아니라는 어느 중국학자의 말과 완전히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최근의 사상가들 거의 모두를 비롯하여 20세기까지의 모든 서양철학자들은 19세기 중반에 아편전쟁에 패하기 전까지의 중국학자들과 동일한 오류에 빠져있습니다.
양자는 모두 자신들의 지역적인 특수한 개념들과 사건, 역사만을 다루면서 그것을 인류 전체에 대해 타당한 것으로 가정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단순한 무지로서, 마르크스의 말대로, 무지는 논증이 아닙니다.
문제는 번역과 개념사 혹은 계보학의 문제를 끌어들이는데, 바로 보편과 철학, 합리성, 근대성 등의 개념 자체가 바로 서구어를 번역한 19세기 일본어라는 사실에서 그러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러한 서구적 보편성과 보편성 자체를 동일시하는 태도, 방금 말씀 드린대로 하이데거가 정식화한 바로 이 태도가 오늘날 참다운 보편성의 정립에 방해가 되고 있으며, 그러한 논변의 철학적 오류를 지적하여 참다운 다문화적 전지구적 글로컬한 복수/다수의 분산적 보편성, 탈경계적 보편성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 제가 쓰고자 하는 논문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잘못된 태도를 '하이데거적 어원학에만 호소하는 오류' 혹은 간단하게 줄여서 '하이데거적 어원학의 오류'라 이름 붙이고, 이를 '서구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라 명명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제가 십여년 전부터 논문에서 종종 밝혀온 생각인데, 이번 기회를 빌어 논문의 제목도 처음부터 <'서구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 하이데거적 어원학의 오류>로 정하여 이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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