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7.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중용한글역주> - 김용옥



       
1-2.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도가 만약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데서 계신戒愼하고, 들리지 않는데서 공구恐懼한다.


-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도를 닦는다는 것은 남들이 보든 말든, 듣든 말든 나 홀로 항상 계신하며 두려움을 갖는 것을 말한다. 결국 '중용'이란 내 존재의 내면의 심화이다(240~241).

1-3. 숨은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처럼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를 삼가한다.



- <<중용>>에서는 '숨은 것'과 '미세한 것'이 궁극적인 긍정적 가치로서 언급되고 있다. 숨음과 드러남, 미세함과 나타남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통섭되는 것이다. 숨음처럼 잘 드러남이 없고, 미세함처럼 잘 나타남이 없다. 따라서 구태여 드러낼 필요가 없고 나타낼 필요가 없다. 숨어 있고, 미세한 곳에서 인간 본래 모습의 최대치를 발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천명을 가장 바르게 드러내는 정도이다. [...] '은미隱微함'이 곧 '홀로있음愼獨'이다. 인간의 고독은 인간의 축복이다. 인간은 고독 속에서 성장하고 하늘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홀로 있을 때, 우주의 그 어느 누구도 나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은미한 디테일이 다 수도修道의 대상이 될 때, 그때를 삼가해야 하는 것이다. 삼가함은 신중함이다. 삼가함은 자기 절제며, 자기 발견이며, 자기 주체의 심화과정이다. 그것은 쉼이 없이 전개되는 주체의 심화과정ever-deepening process이다. 겉으로 드러나고 나타나는 '나댐'의 과정이 아니라, 자기 주체의 내면으로 한없이 침잠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그 검은 바다 속 수 천 미터 아래로 잠수해 내려가는 잠수부의 고독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신독'이다.


'신독' 사상은 <<주역>>의 대과大過 괘卦의 상전象傳에도 이런 말로 나타나고 있다: "군자는 위기의 상황에서 홀로 서도 두려움이 없으며, 세상을 등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답답함이 없다." 그리고 <<대학>>에서는 '성의誠意'의 맥락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뜻을 성실하게 한다" 즉 마음의 지향성을 바르게 갖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의 감정을 기만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악취를 싫어하듯 악을 미워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듯 선을 사랑하는 그 진정성을 보지保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자겸自謙'이라 불렀다. <<대학>>에서는 일차적으로 "신기독愼其獨"의 의미를 "홀로 있을 때의 감정을 신중히 한다"는 뜻으로 풀었다. <<중용>>의 신독사상이 훨씬 더 포괄적인 존재론적 함의를 지니고 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독'은 개인의 내면적 사태이므로 사회적 결과에 의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일체의 공리주의적 윤리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 주희장구 朱熹章句


'은'은 어두운 곳이다. '미'는 미세한 사건이다. '독'이라고 하는 것은 타인들은 알지 못하지만 자기만 홀로 아는 어떤 경지를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서 세미細微한 사건들이 그 형체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정태에서 동태로 바뀌어가는 그 미묘한 갈림길을 타인들은 알 수가 없지만, 나는 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즉, 천하의 사태가 현저하게 드러나고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이 이보다 더함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항상 계구하고 여기에 더욱 삼가함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욕人欲이 싹트려고 하는 것을 미리 막아서, 그것이 은미한 가운데 자라나서, 도로부터 멀어지는데 이르지 않도록 방비하는 것이다(242~246).

14-3. 윗자리에 있을 때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아니 하며, 아랫 자리에 있을 때는 윗사람을 끌어내리지 아니 한다.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 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


- 윗자리, 아랫자리라는 외적 상황성을 극복하는 실존의 본질태는 '정기正己'이다. 즉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정기'는 곧 나의 실존적 상황의 책임을 타인에게 구하지 않는 것이다. 곧 '불구어인不求於人'이다.


공자는 일찍이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자기에게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 구한다."(15-20). 이러한 논리를 구극적으로 밀고 들어가면, 타의 궁극은 곧 종교적 '타자'가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존재의 책임이나, 실존적 상황의 원인을 나라는 존재 이외에서 구하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용>>의 심오한 논리이다.


[...]


공자나 [공자의 손자이자, <<중용>>의 저자인] 자사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원초적 '하늘天'의 개념은 분명히 남아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 근원을 인격적 하느님이라는 존재자에게 구하지 않는다. 여기서 자사에게 새롭게 등장하는 종교적 개념은 '천지天地의 종교Tian-Ti Cosmos Religion'이다. 우선 이 천지의 종교에 있어서는 기존의 여하한 인격적 개념도 거부된다. '천명天命'의 '천天'은 이미 인격적 존재자가 아니며, 더더욱 신인동형神人同形적 투영일 수 없다. 인간의 종교적 감정은 특정한 '존재자'로부터 '천지'라는 대생명의 전체의 장으로 확대된다. 하느님이 근원적으로 탈존재화脫存在化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전체의 장場의 축약태로서 마이크로코스모스적인 존재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우주적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타자the Other라는 객체가 소실된다. 이것이 '정기불구어인正己不求於人'이라고 하는 의미의 본질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에게 타자화된 욕망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는 자사의 사상은 '신독' 사상의 궁극적 귀결처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나 기타 여하한 신비주의도 이구동성으로 '절대적 타자Absolute Other'를 말한다. 그러나 자사는 나 존재로부터 모든 타자를 절대적으로 무화無化시킨다. 나의 존재의 책임은 천天이나 인人이나를 막론하고 모든 타자에게 전가의 기회를 단절하고 나 스스로 걺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용>>이야말로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극상의 신비를 논구하고 있는 것이다(391~395).


* 22-1. 주희장구.



타인의 성性이든 사물의 성性이든 그것이 결국 다 나의 성性이다(542).


33-2.


"시詩는 말한다: "물고기 물에 잠겨 깊게 꼭꼭 숨어 있네. 그렇지만 물이 맑아 너무도 밝게 잘 보여라!" 이와 같이 내면을 숨길 길이 없으므로 군자는 안으로 살펴보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그 마음의 지향하는 바가 미움 살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범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군자의 훌륭한 점은 오로지 타인들이 보지 못하는 그 깊은 내면에 있는 것이로다!"


- 자사 논의의 핵심은 군자의 지적 통합판단이나 도적적 정직성은 결국 사회적인 승인으로써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 홀로의 내면적 판단에서 우러나오는 고독한 실존의 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629~630).


33-3.


"시詩는 말한다: "그대 방에 홀로 있을 따라도 하느님께 비는 제단 있는 저 구석에서 남이 안 본다고 부끄러운 짓을 하지는 말지어다."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이어 자기를 뽐내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공경하고,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켜도 사람들이 믿음을 준다."(630).




33-4


- <<순자>> <불구> 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군자는 지극한 덕을 구현하기 때문에,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심중을 모든 사람들이 헤아릴 줄 알고, 구태여 은혜를 베풀지 않아도 그에게 친밀하게 가까이 가려하며, 진노를 보이지 않아도 그의 위엄을 존중한다. 대저 사람들이 와 같이 그의 명을 따르는 이유는 그가 신독을 실천하기 때문이다."(633)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