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7.

송상현의 시






* 임진왜란 발발 직후 동래성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 숙종 연간에 그린 것을 1760년(영조 36) 변박이 다시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육군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선발대는 거의 2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반면 부산진의 조선군 병력은, 기록에 따라 600명에서 1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어느 쪽이든 중과부적의 상황이었다. 정발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맹하게 분전했지만 성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월14일 부산진을 돌파한 일본군은 이튿날 동래로 밀려들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산진 함락 소식을 듣고 성 안팎의 방어 태세를 정비하고, 인근의 양산·울산 지역의 병력까지 불러들여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동래성으로 들어왔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성 바깥에서 협공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북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이윽고 일본군은 성을 포위한 뒤, 남문 밖에 목패를 세웠다. 목패에는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不戰則假我道)”는 글귀를 써 놓았다. 송상현은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死易假道難)”고 응수했다고 한다.
싸움이 시작된 지 반나절 만에 성은 함락되었다. 적군이 성안으로 밀려오는 와중에도 송상현이 조복(朝服·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에 입던 예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자, 일찍이 동래에 드나들며 송상현에게 후대를 받았던 일본군 부장 평성관(平成寬)은 그를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송상현은 그의 피신 권유를 거부하고 순절했다. 죽기 직전 그가 부친에게 보내려고 남겼다는 시를 보면 마음이 아리다.
“달무리처럼 포위당한 외로운 성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역비 한국학 연구총서 14)>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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