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8.

러셀의 기술이론

 

* 거짓말쟁이의 역설 - 위키백과


철학과 논리학에서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 Paradox)은 자기모순적 명제를 지칭한다.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말들은 자기모순적인데, 그 이유는 정확히 참 또는 거짓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이 문장은 거짓이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이 문장이 참이라면, 문장 내용에 의해 이 문장은 거짓이어야 한다.


2) 반대로 이 문장이 거짓이라면, 역시 문장 내용에 의해 이 문장은 반드시 참이 되어야 한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다음처럼 하나의 문장이 아닌, 여러 개의 문장으로 구성할 수도 있다.


이 다음 문장은 참이다. 이 앞의 문장은 거짓이다.


에피메니데스와 에우불리데스


크레타 사람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기원전 6세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모든 크레타 섬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이다.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종종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같은 용어로 여기거나, 서로 혼동해서 쓰기도 하지만, 이 둘은 같은 용어가 아니다. 에피메니데스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노리고 글을 썼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이것이 모순된다는 것도 아마도 후세에서야 발견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문장은 문장이 거짓일 경우에는 역설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크레타 섬 사람들 중 진실을 말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 문장은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알려진 거짓말쟁이의 역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우불리데스(Eubulides)의 역설이다. 에우불리데스가 에피메니데스의 글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에우불리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남자가 자기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것은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집합 이론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러셀의 역설로 알려진 이 역설을 1901년에 발견하였다. 이 역설은 ‘자신을 원소로 가지지 않는 모든 집합을 원소로 포함하는 집합에 자기 자신도 원소로 포함되는지 여부를 고려할 때’ 발생한다. 1) 만약 이 집합에 자신을 원소로 포함한다면, 집합의 정의에 따라 자신은 원소가 되지 않아야 한다. 2) 반대로 만약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면, 역시 집합의 정의에 따라 자신도 원소가 되어야 한다.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은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1901년 발견한 논리적 역설로 프레게의 논리체계와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naïve set theory)이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다. “특정 영역의 개체의 수는 그 개체의 하등계급 수보다 작다”는 칸토어의 법칙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M이라는 집합을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하자. 다시 말해, A가 M의 원소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A가 A의 원소가 아닌 것으로 한다.칸토어의 공리체계에서 위와 같은 정의로 집합 M은 문제없이 잘 정의된다. 여기서 M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는가?란 질문을 던져본다. 만약 포함한다고 가정하면 그 정의에 의해 M은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 반대로 M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에도 역시 그 정의에 의해 M은 자신에 포함되어야 한다. 즉 "M은 M의 원소이다"라는 명제와 "M은 M의 원소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둘 다 모순을 도출하여 맞다 혹은 그르다 중에 어떤 답으로 답할 수 없다.”


프레게의 공리체계에서 M은 "자신을 정의하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not fall under its defining concept)"라는 개념(concept)에 해당한다. 따라서, 프레게의 체계 역시 모순을 낳는다. 한편 논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러셀 자신이 그의 역설을 예로 설명한 것이 세비야의 이발사이야기이다.


만약 세비야에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이의 이발만을 해주는 이발사가 있다고 하자. 이 이발사는 이발을 스스로 해야 할까?


만약 스스로 이발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전제에 의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야 하고, 역으로 스스로 이발을 한다면, 자신이 자신을 이발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바로 러셀의 역설과 동일한 문제에 걸리는 것이다.


알프레드 타르스키


알프레드 타르스키(Alfred Tarski)는 스스로를 다시 참조하지 않는 문장들도 조합할 경우 스스로를 다시 참조하면서 역설적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논하였다. 이러한 조합의 한 예는 다음과 같다.


1) 2번 문장은 참이다.


2) 1번 문장은 거짓이다.


타르스키는 이러한 '거짓말쟁이의 순환(liar cycle)' 문제를 “하나의 문장이 다른 문장의 참/거짓을 참조할 때, 의미상 더 높도록 하여” 해결하였다. 참조되는 문장은 '대상 언어(object language)'의 일부가 되며, 참조하는 문장은 목표 언어에 대한 '메타 언어(meta-language)'의 한 일부로 간주된다. 의미 계층(semantic hierarchy)의 더 높은 '언어들(languages)'에 있는 문장들은 '언어(language)' 계층에 있는 낮은 순위의 문장들을 참고해야 하며, 순서를 거꾸로 바꾸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시스템이 자기 참조가 되는 것을 막는다.
 
 
 
 
 
 
 
* 도올 김용옥, 『중용 한글역주』, 통나무, 2011.
 
 
 
 
 
 
통서: 인문주의 혁명의 여명



존재론의 역사



종교는 본시 존재론(存在論)이 아니다. 존재론이란 존재 일반에 관한 논(로고스, logos), 혹은 존재자에 관한 논을 의미하지만, 이때 “존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존재에 관한 어떠한 논의도 생산적인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서양철학사의 전통에서는 존재를 “~는 있다”라는 사태로 접근하지 않고, 항상 “~이다”라는 사태로 접근하는 성향이 있다. “~이 있다”라는 사태는 너무도 즉각적이고 완정한 사태이며, “존재”라는 수식이나 규정을 따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말에서 “존재”라는 말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서양철학의 개념이 일본사람들의 역어(譯語)를 통하여 우리말로 편입된 것이다.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유명한 명제로부터 출발하여 있는 것, 즉 존재를 불생(不生)ㆍ불멸(不滅)ㆍ불변(不變)ㆍ부동(不動)의 연속충실체(連續充實體)로서 규정하고, 유(有)를 비유(非有)ㆍ생성(生成)에 대립시켰다. 플라톤은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이어받아 참으로 있는 것으로서의 “이데아”론을 성립시켰고, 생성의 세계를 엮어 넣으려는 생물학적 성향의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존재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제1실체를 일체의 질료적 한정을 갖지 않는 순수형상(純粹形相)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변역(變易)의 가능성을 포함하지 않는 “부동(不動)의 사동자(使動者)”, 즉 하나님으로 간주함으로써, 존재(esse)와 본질(essentia)이 하나님에 있어서는 일치한다고 하는 모든 중세 스콜라철학적 사유를 개창하였다. 그러니까 존재의 문제는 “있다”라고 하는 소박한 현실을 떠나 “무엇이 참으로 있는 것인가?”라는 진리의 문제로 비약하게 된다. 그런데 “참으로 있는 것”은 항상 “있는” 것들을 부정하게 되므로, 진리의 존재란 있는 것들을 넘어서서 있는 것이 된다. 그 넘어서서 있는 것들의 궁극에 항상 하나님이 있게 되고, 따라서 존재론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논이 되고 만다. 결국 존재론은 “~ 있다”가 아니라, “진정한 존재는 하나님이다”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중세신학을 지배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었다.



존재론(ontology, ontologia)이라는 용어가 서양에서 고대로부터 사용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온톨로기아”라는 말은 17세기 독일 스콜라철학적 논리학자인 고클레니우스(Rudolf Goclenius, 1547-1628)의 용례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哲學辭典』, 1613). 비스한 시기의 칼로비우스(Abraham Calovius, 1612–1686)는 온톨로기아(ontologia)를 메타피지카(metaphysica)라는 말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게 사용하였다. 독일 근대 데카르트학파의 사상가인 클라우베르크(Johannes Clauberg, 1622~1665)는 존재론이란 말 대신에 존재지(存在智, ontosophia)라는 말을 만들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보편학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온톨로기아”를 철학적 술어(philosophical term)로서 정립한 사람이 18세기 초 독일의 합리주의를 대변한 철학자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와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garten, 1714~1762)이었다. [...] 볼프에 의하면 존재론의 방법은 연역적이며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가 말한 충족이유율을 만족시킨다. 우주는 존재들의 총합이며, 그 개개 존재들은 모두 지성이 명석판명한 관념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의심할 바 없는 제1원리로부터 연역된 존재들에 관한 진리는 모두가 필연적 진리이다. 따라서 존재론은 세계의 우연적 질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볼프의 존재론은 현상계와 유리된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론은 칸트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22~25).



칸트의 존재론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이러한 볼프의 존재론을 그의 선험철학으로 대치시켰다. 그러나 칸트의 선험철학은 존재론이라기보다는 인식론적 탐색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며, 그의 선험철학은 비록 선험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상계의 질서 밖으로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현상계(現象界, 감성感性의 대상)와 가상계(可想界, 오성悟性의 대상)의 구별은 플라톤적 실재론과 유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플라톤의 실재론적 관념론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가상계를 오성이 인식하는 참 대상이라고 생각한 것은 플라톤의 오류이다. 인간의 오성은 오히려 감성계에만 적응되는 것이다.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라는 것도 감성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계의 궁극적 근거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자체도 현상계와 연속적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단지 물자체는 불가지(不可知)의 대상일 뿐이다. 물자체가 순전한 가구(假構)일 수는 없다.
 
 
칸트에게 있어서 존재론은 선험적[=초월적] 분석론(Transcendental Analytic)으로 통섭되는 것이다. 칸트는 볼프가 말하는 특수형이상학인 신학과 심리학과 우주론은 선험적[=초월적] 변증론(Transcendental Dialectic)에 귀속시키고 일반형이상학인 존재론은 선험적 분석론으로 귀속시켰다. 따라서 존재론은 선험적 분석론의 주제인 오성의 인식과 관계할 뿐이다. 오성은 감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감성의 한계 내에서 주어지는 대상에만 한정되는 것이다. 오성의 원칙들은 현상을 해명하는 규칙일 뿐이다. 전통적으로 존재론이 마치 사물일반의 종합적인 선천지식을 체계적 이론의 형태로서 제공하는 대단한 이론인 양 떠벌이지만, 이제 소위 존재론이라는 과시적 명칭은 ‘순수 오성의 한갓[된] 분석론’이라는 겸손한 이름으로 대신되어야만 하는 것이다(『순수이성비판』, B303). 따라서 존재론은 사물일반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구체적 대상들과 관계하는 것이다. 칸트의 존재론은 현상론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이성의 이상으로서의 최고존재인, 하나님의 관념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도 선험적 분석론에 국한되는 겸손한 존재론의 근거 위에서 그 불가능성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존재(存在)는 현존(現存)과 혼동될 수 없다. 그 무엇이 현존한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그 말은 항상 종합적(=경험적) 판단이다.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proof)이란 하나님이라는 개념 그 자체로부터 연역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하나님이란 개념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존재론적 증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중세기로부터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완전한 존재(a perfect being)는 반드시 존재성을 포괄하는 모든 술어를 소유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완전한 존재라면 존재성을 술어로서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가 하나님의 필연적 속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26~27).
 
 
하이데가의 존재론



아주 쉽게 한 예를 들어보자! 누가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도올 김용옥은 존재한다. 도올 김용옥은 『여자란 무엇인가』를 썼다. 도올 김용옥은 사과를 먹고 있다.” 이 말에서 김용옥에 관한 속성은 둘일 뿐 셋이 될 수가 없다. 도올 김용옥이 존재한다는 것은 도올 김용옥이라는 개념에 아무 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따라서 존재는 술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술어들의 빈 ‘자리’일 뿐이다. 하나님의 현존(現存)이 하나님의 본질 속에 있을 수는 없다. ‘가장 실재적인 존재’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에, 그 존재가 현존한다는 것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개념의 밖으로 나와야(herausgehen) 한다. 감관의 대상의 경우에는, 대상이 경험의 법칙에 따라 나의 어떤 지각과 연결될 때에 이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가장 ‘실재적인 존재’라는 개념은 순수 사고(pure thought)의 대상일 뿐이며, 우리는 그들의 실재를 인식하는 수단이 전혀 없다. 순수 사고의 객관은 전적으로 선천적으로 인식될 뿐이며, 현존이란 경험을 통해서만 확립되어지기 때문이다. 경험의 통일성을 벗어나는 어떠한 존재도 우리가 정당화할 길이 없는 가정에 머물고 만다. 모든 존재론적 명제는 종합적(경험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칸트의 존재론은 하이데가의 다자인(Dasein, 現存在)의 존재론으로 발전된다. 하이데가는 철학의 출발점을 데카르트처럼 ‘나(I)’라는 유아론(唯我論)적 실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나의 의식이 지각된 세계를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칸트의 인식론도 유아론적 성격이 있다. 하이데가는 ‘나’라는 실체적 존재를 버리고 “거기에 있다”라는 의미에서 ‘다자인’을 새로운 철학적 어휘로서 제시한다. 하이데가는 “~이다”에서 “~있다”로 철저히 귀환한 것이다. ‘거기에 있는’ 다자인은 이미 세계 속에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세계 내의 존재이다. 다자인과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In-der-Welt-Sein)은 결국 같은 의미가 된다. 다자인이 타존재들과 구분되는 것은 존재하면서 자기의 존재,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다자인은 ‘존재론에 앞서는(pre-ontological)’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다자인은 세계 안에 이미 던져진 존재(被投性, Geworfensein)이다. 자기 및 자기 이외의 것을 이미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미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므로 이러한 의미에서는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는(entwerfen), 즉 미래를 계획하는 존재이다. 이와 같이 던져져 있으면서 미래를 계획하고 ‘본래적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실존의 전정한 모습이다(27~28).
 
 
럿셀의 기술(記述) 이론



여태까지 대강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의 골자를 살펴보았지만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존재론의 과제가 존재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을 때는, 그 논의가 항상 ‘있는 것’을 초월하여 현적(玄寂)한 공리(空理)로 달아나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존재’를 운운할 필요가 없다. 횡거(橫渠, 1020 ~ 1077)의 말대로 태허(太虛)가 곧 기(氣)라는 것을 알면, ‘없음’은 있을 수가 없다(無無). 그렇다고 없음에 대한 있음이 불생불멸불변의 동일성을 지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있는 것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변하는 것이다. 지성무식(至誠無息)이다. 서양의 철학전통에는 근원적으로 파르메니데스적인 존재론만 있고,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존재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알츠하이머 목사님의 경우 “예수가 누구여”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의 신앙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예수라는 고유명사는 존재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신앙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반드시 기술(記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술은 궁극적으로 존재를 해체시킨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다”라는 명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은 단 한 사람이며, 따라서 그것은 한정된 기술(definite description)이다. 그리고 이 문장의 주어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고유명사로서 인식될 수는 없다. 이 기술구(句)는 한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특유한 속성으로써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고유명사적인 어떤 존재를 지칭하지 않는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한(韓) 모인지 오(吳) 모인지를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이순신이다”라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러나 “거북선을 만든 사람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시끄러운 공기의 떨림일 뿐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는 없지만, 무엇을 지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순신 본인을 눈앞에서 곧 바로 지시할 수는 없다. 이순신은 우리의 직접 감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집에 지금 3살 짜리 어린 아들이 있다고 하자. 이 아들은 나를 알아본다.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 그리고 딴 집 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를 ‘도올’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그에게 있어서 ‘도올’은 나를 지시하는 고유명사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똑 같은 말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도올’이라고 부를 때는, 실상 세 살 먹은 아들이 ‘도올’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고유명사이지만 실상 외연만 있고 의미가 없는 순수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라는 고유명사는 수없는 기술의 축약태이다. 그들은 나를 실제로 만난 적도 없고, 나를 세 살 난 아들이 지시하는 것처럼 직접 감관에 의하여 지시해본 적도 없다. ‘KBS에서 『논어』를 강의한 사람’이라든가, ‘MBC 라디오 어느 시간에 어느 코미디언이 흉내를 내는 사람’이라든가, ‘머리를 깎고 한복을 입은 철학자’라든가,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라든가 하는 수없는 기술구들이 ‘도올 김용옥 선생’이라는 말 속에 축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순결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순결한 고유명사는 그것 자체로 어떤 대상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색한 문법이 되고 만다. 따라서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도올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서양언어의 신택스(syntax, 統辭論)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도올’이 축약된 기술구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기술구로 바꾸어질 때 비로소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럿셀이 말하는 ‘기술(記述)의 이론(the theory of description)’이다.
 
 
이 럿셀의 기술이론은 주어-술어 형식의 서구적 언어에서 파생되는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The golden mountain does not exist)”라고 말했는데, 만약 누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What is it that does not exist?)”라고 묻게 된다면, 나는 “그것은 황금산이다(It is the golden mountain)”라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외견상 매우 자연스러운 대답 같지만,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나는 존재하지 않는 황금산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꼴이 되고 만다. 황금산은 결코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구이며, 그 기술이 적절하게 이루어지면 ‘존재’를 운운할 필요가 없게 된다.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실제로 다음과 같은 기술구로서 바꾸어 표현될 수 있다.



“‘x가 금으로 되어 있으며 또 산 같이 생겼다’라는 진술이 x가 c일 때는 참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참이 아닌 그러한 c는 없다



There is no entity c such that 'x is golden and mountainous' is true when x is c, but no otherwise.”
 
 
이렇게 바꾸어 표현하면 ‘황금산’이라는 주어적 존재자는 사라지고 만다.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는 진술도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라는 실체의 존재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제가 아니다. “『논어한글역주』의 저자는 존재한다”라는 진술은 “‘x가 『논어한글역주』를 썼다’라는 명제함수가 ‘x는 c이다’라는 진술과 항상 동일한 사태라는 것을 참이게 만드는 그러한 c의 값이 있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때, ‘존재’는 기술된 것에 대해서만 주장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분석되고 보면 변항(變項)의 최소한 하나의 값에 의하여 참이 되는 명제함수의 한 케이스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존재는 근원적으로 해소되고 만다. 고유명사에 대해서도 존재를 말할 수 없으며 기술구에 대해서도 그 기술구를 고유명사로 확정시키는 대상적 실체는 사라지고 만다. ‘이러이러한 것(the so-and-so)’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진술을 올바로 분석하면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문구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번쇄하고 하찮게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서구인들이 그 얼마나 수천 년을 통하여 허구적인 논리적 구성물의 존재성의 핍박 속에서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그 반박을 위하여 그 얼마나 치열한 논리적 열정에 철학적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경복과 감탄 속에서 되새겨 보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 이러한 ‘존재성의 해소’야말로 『중용』을 읽는 이들의 마음가짐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려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여”라고 반문하는 알츠하이머 목사님은 진실한 신앙인으로서의 본래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그 얼마나 생소한 고유명사였을까? 대한민국의 우매한 생령의 거개가 ‘예수’를 존재자로서 믿는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 존재자가 그들의 실존의 내면으로 융합되는 상황이 과연 몇 케이스나 있을까? ‘예수’라는 고유명사의 어색함, 그 존재자의 허구성은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고 위선적 인격의 분열로 그들을 휘몰아가고 있지 아니 한가? 그리하여 모든 정치적ㆍ민족적ㆍ민생적 분열을 조장하고 있지 아니 한가?
 
 
앞서 칸트가 “우리 사유의 대상이 개념에 실재성을 귀속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그 개념의 밖으로 나와야 한다”(『순수이성비판』 B629)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논의의 관점에서 보아도 너무도 정당한 것이다. 하느님은 전지ㆍ전능의 일체만유(一切萬有)를 포섭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만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존재자의 개념은 무제약적인 것(the unconditioned), 무한한 것(the unlimited) 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제약적이고 무한한 것 “밖으로 나갈” 길이 없다. 우리가 그 밖으로 나가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무제약적이고 무한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기 나무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나무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제약되고 한정될 때 비로소 나무는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칸트의 존재론에 의하면 존재를 술부에 귀속시키는 모든 명제는 종합적이다. 존재는 오성의 판단의 대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반드시 우리의 지각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순수 사유의 대상에 대해서는 그것의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 “전지자(全知者)”는 “부분적으로 안다”라는 우리의 현실적 경험의 인식으로부터 추상되어 그 극한점으로서 “모든 것을 안다”라고 상정된 것이다. 이것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순수사유의 대상이며, 경험의 한계를 타파하는 자유로운 순수이성의 장난이다. “부분적으로 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상으로 인식 가능한 것이지만 “만유일체의 모든 것에 능하다”라는 것은 경험에서 상대적으로 추론된 논리적 구성일 뿐이다. 따라서 “전지ㆍ전능자”라고 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체험세계에 대하여 상대적인, 절대자로서 상정된 논리적 구성물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적 구성물은 존재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둥근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우리는 “둥근 사각형”에 존재성을 부여할 수 없지만, 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둥근 사각형이 주어의 자격도 가질 수 없지만, “둥근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우리의 일상언어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둥근 사각형이 의미를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존재성과 의미성의 충돌을 해결하고 있는 학설이 바로 럿셀의 기술 이론인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다”라는 한국어 문장에서는 우리는 존재의 문제를 찾을 길이 없다. “전능하다”에서 “하다”는 “있다”를 내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장을 영어로 바꾸어 놓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God is omnipotent.” 이 명제는 두 개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God)과 전능(omnipotent)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전능은 “is”라는 연결사(copula, 계사繫辭)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칸트의 말대로 이 연결사는 단지 하나님과 전능을 연결시키는 연결사일 뿐이며, 이 연결사가 하나님의 개념에 새로운 속성을 첨가하지는 않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God is omnipotent.”라는 문장에서 전능이라는 속성을 제거하면 “God is.”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말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깨비방망이처럼 “하나님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인도유러피안어족의 말에 있어서는 “이다”와 “있다”가 항상 혼동되게 마련이다. 중국어에서는 “上帝全能”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며 양자를 연결하는 be 동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上帝全能”이라는 명제를 놓고 존재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럿셀은 기술 이론을 발표하면서, “플라톤의 『테아에테투스』로부터 시작된 존재에 관한 2천 년 동안의 뒤죽박죽된 대가리 속의 엉크러짐을 다 풀어버렸다(This clears up two millennia of muddle-headedness about 'existence,' beginning with Plato's Theaetetus)”라고 시원하게 일성(一聲)을 갈(喝)했지만, 사실 그것은 『테아에테투스』의 문제라기보다는 서구 언어에 내장된 문제이며, 『테아에테투스』의 인식론을 왜곡시킨 중세기독교의 독단의 문제일 것이다. 아마도 알츠하이머 목사님이 “예수가 누구여”라고 말한 것은 일생을 통하여 억지로 주입된 어색한 인도 유러피언어적 언어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매우 자연스러운 모국어의 본질로 회귀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God is omnipotent”라는 말에서 “God”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omnipotent”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is”도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God is omnipotent.”라는 명제는 근원적으로 존재를 나타내는 명제일 수가 없다. 단지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만 최종적으로 남을 뿐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전능하다”라는 판단은 순수이성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오성의 범주를 적용하면 이율배반에 빠진다(선험적 변증론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따라서 감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전칭적인 명제들은 실천이성의 영역 속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중용』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사태는 『중용』에 내재하는 암묵적 체계 속에서는 결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이분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8~34).
 
 
형용사니 동사니 명사니 하는 개념규정 자체가 서구 언어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과연 그 개념지도를 가지고 한문을 문법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지 나는 알 바 없다(41).
 
 
종교란 개인이 자신의 고독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Religion is what the individual does with his solitariness.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78)
 
 
서양언어, 특히 서양종교에 세뇌된 언어의 용례 때문에 이러한 유교적 본래용법의 함의가 심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을 얻는단 말인가? 비밀만 지켜진다면 기분이 좀 경감되는 느낌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인간에게서 죄인과 죄사함의 주체가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용』의 ‘자성(自成)’(스스로 이루어 나갈 수밖에 없고) ‘자도(自道)’(스스로 길지워 나갈 수밖에 없다)의 투철한 논리이다. 『중용』은 이러한 논리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군자의 길과 소인의 길은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에게는 오직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259~260).

       




 

* 도올 김용옥, 『중용 한글역주』, 통나무,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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