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7.

칸트 - 역사철학





<칸트의 역사철학> - 칸트 / 이한구



       
* 임마누엘 칸트,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역사는 이러한 현상들[인간 행위]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러한 현상들의 원인이 아무리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역사에서 인간 의지의 자유가 발휘되는 과정을 긴 안목으로 고찰해 본다면 우리는 그 속에 어떤 규칙적인 진행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21~22)

제1명제. 생명체의 모든 자연적 소질은 언젠가는 완전하게, 그리고 목적에 맞게 발현되도록 결정되어 있다.”(25)

제9명제. 인류의 완전한 시민적 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는 자연의 계획에 따라서 보편적 세계사를 편찬하려는 철학적 시도는 가능한 것으로서, 또 이런 자연의 의도에 공헌하는 것으로서 간주되어야만 한다.”(40)

* 임마누엘 칸트, 「헤르더의 인류 역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들」,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인류 일반의 목적은 끊임없는 진보이며, 이 목적의 완성은 간단하지만 모든 면에서 유용한 - 우리가 섭리의 목적에 맞게 우리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 목표에 관한 이념이다.”(73)

* 임마누엘 칸트, 「추측해 본 인류 역사의 기원」,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완전성을 향한 진보로서의 인류의 운명”(83)

“우리는 중국의 경우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중국은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 적어도 몇 번 예측하지 못한 외침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 강력한 적대국을 갖지 않았으므로 모든 자유를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인류가 현재 누리고 있는 수준의 문화에서도 전쟁은 그 인류 문화를 계속 진보하게 하기 위한 불가결한 수단이다.”(92)


* 임마누엘 칸트, 「만물의 종말」,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원주 2) 항상 반계몽주의적 현인들(혹은 철학자들)은 선을 지향하는 인간성의 자연적 경향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 없이 인류가 사는 이 세계를 완전히 경멸적으로 제시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적대적이고 부분적으로 혐오스러운 비유에 몰두해왔다. (1) 이 세상은 어떤 수도승이 바라보듯이, 여관(여인숙)이다. 그곳에서 인생이란 여행 동안에 그 곳에 머물렀던 모든 사람들은 다음 사람에 의해 곧 대체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이 세상은 교도소[감옥]이다. 이 견해는 바라문교, 티베트인 및 다른 동양의 현자들(심지어 플라톤까지도)이 강한 애착을 느꼈던 견해인데, 천상의 세계에서 추방되어 지금은 인간의 영혼이나 동물의 영혼이 타락한 정신의 징벌과 정화를 위한 장소가 곧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3) 이 세상은 정신 병원이다. 이 곳에서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파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온갖 종류의 깊은 슬픔을 야기시키며, 무엇보다 그의 기술과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한다. (4) 마지막으로, 이 세상은 다른 세상으로부터의 모든 오물이 집결하는 똥구덩이이다. 이 마지막 평가가 어떤 의미에서는 원초적이다.”(100~101)

신비주의. [...] 이로 인해 최고선이란 허무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즉 신성과의 융합을 통해, 따라서 자신의 개성을 파괴시킴에 의해 신성의 심연으로 몰입됨을 느끼는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노자(老子)의 괴이한 교의가 나타난다. 이러한 상태를 예감하기 위해 중국의 철학자들은 어두운 방에서 눈을 감고 허무를 명상하려고 한다. 이것으로부터 범신교(티베트와 동방의 여러 민족의)가 나타나고, 이 범신교의 승화에서 스피노자주의가 그 후에 나타난다. 이것들 모두는 인간의 영혼은 신성으로부터 나왔다는 (그리고 끝내는 신성 안으로 다시 함몰된다는) 고대의 유출설(Emanationssystem)과 자매 관계에 있다. 이것들 모두는 사람들이 결국 영원한 휴식-만물의 축복된 종말이라고 그들이 믿는-을 향유하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이런 관념이야말로 사실 사람들의 오성이 해체되고 모든 사유 자체가 종말을 고하는 관념인 것이다.”(106~107)

* 임마누엘 칸트, 「다시 제기된 문제: 인류는 더 나은 상태를 향해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는가?」(칸트, 『학부간의 논쟁』 중 제2부 ‘철학부와 법률학부 간의 논쟁’),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인류가 (전체적으로) 더 나은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에 관한 자연사(앞으로 새로운 인간 종족이 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가 아니라 도덕사(Sittengeschichte)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인류라는 개념은 유개념(singulorum)에 따른 인류가 아니라, 지상에서 사회를 이루고 민족으로 나뉘어 살아가고 있는 인간 전체(universorum)로서의 인류를 의미한다.”(113~114)

“3. 우리가 미래에 관해서 미리 알고자 하는 것에 관한 개념의 분류

세 가지 경우를 우리는 예측할 수 있다. 즉 인류가 사악한 상태로 계속 퇴보하고 있거나, 도덕적 성향에 있어서 더 나은 상태로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거나, 혹은 피조물들 가운데에서 현재의 도덕적 단계에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지 상태는 동일한 점의 주위를 궤도로 하여 영원한 회전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우리는 첫 번째 주장을 도덕적 공포주의로, 두 번째 주장을 행복주의로 부를 수 있다. (이 두 번째 주장은 또한 진보의 목표를 멀리 있는 것으로 간주할 경우 천년기설(Chiliasmus)이라 할 수 잇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 번째 주장은 기계주의[아브라데주의]라 할 수 있다.”(116)

“인류는 항상 더 나은 것으로의 진보 과정에 있어왔으며 또 앞으로도 계속 진보해 나갈 것이다.”(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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