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8.

앎과 인식 - 자기 변형

 




<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 이승철

       
"내가 '앎'(savoir)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을 '인식'(connaissance)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의 것은 주체가 그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로 인해, 아니 차라리 알기 위해 주체가 행하는 노동에 의해 스스로 변형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인식은 알 수 있는 대상을 증식시키고 그것들이 가진 명증성을 발전시키며 그 합리성을 이해하게 만드는 과정으로, 그러한 연구를 수행하는 주체는 늘 같은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구별을 '앎의 고고학'이라는 나의 생각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한 전제로서 사용해왔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역사적 기원 속에서 인식의 구성, 다시 말해 확고한 주체와 확고한 대상 영역간의 관계의 구성에 대해 이해하는 것, 즉 그 구성을 가능케 하는 '앎의 운동' 속에서 인식의 운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작업은 서양인들이 가졌던 이러한 경험의 방식들을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즉 명확하고 대상화된 일련의 사물들을 알아가는 동시에 스스로를 고정되고 확정된 조건 속에 놓인 주체로 구성하는 되는 그런 경험들 말이지요. 예를 들자면 합리적 주체로 구성됨으로써 광기에 대해 아는 것, 노동하는 주체로 구성됨으로써 경제학에 대해 아는 것, 법과 관련하여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주체로 구성됨으로써 법에 대해 아는 것 등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앎'의 대상 속에는 주체 자신이 항상 연루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자각에서 시작해서 나는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한계-경험들(limite-experiences)을 (광기, 죽음, 범죄 등과 같은) 인식의 대상으로 환원하는가를 알고자 노력했습니다."(72~73)


"간단히 말해, 휴머니즘은 제도를 건드리지 않고 이데올로기 체제를 바꾸기를 원하지요. 그리고 개혁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 체계를 건드리지 않고 제도만 바꾸기를 원합니다. 반면에, 혁명적 실천은 의식과 제도를 동시에 뒤흔드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228~229)


"어떤 판단이 선악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을 때, 그것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용어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최종적 구분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한 경우, 사람들은 개인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해로운지의 문제로 되돌아오지요. 이것은 서양인들의 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이원론을 잘 보여줍니다."(233)


"내 생각에, 다른 체계를 상상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여전히 기존 체계의 한 부분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234)


"나는 경험 대신에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미래 사회는 아마도 마약, 섹스, 공동체적 삶의 경험과 다른 의식, 다른 개인성 형식들을 통해 구체화될 겁니다. 만약 19세기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유토피아를 통해 분명해졌다면, 아마 20세기의 진정한 사회주의는 경험들을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236)


"만약 당신이 공적 제도를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 다른 방식으로 더 효과적으로 수행되는 - 제도로 대치하려 한다면, 당신은 이미 지배구조에 흡수된 것입니다."(237)



1978년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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