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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28.

푸코 - 고고학과 계보학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 Judith Revel, Le Vocabulaire de Foucault, Ellipses, 2002.
    
 
* 고고학(考古學, Archéologie)
 
 
1. ‘고고학이라는 용어는 푸코 저작의 제명에 세 번 등장한다. 1963년의 임상의학의 탄생. 의학적 시선에 대한 하나의 고고학, 1966년의 말과 사물. 인간과학들에 대한 하나의 고고학, 1969년의 지식의 고고학이 그것들로서, 이 용어는 1970년대 초까지 철학 연구의 방법론을 특징짓는다. 하나의 고고학은, 어떤 역사적 장의 재구축이 문제일 경우, 푸코가 주어진 특정 시대의 일반적 지식 담론의 출현 조건을 얻기 위해 (철학적, 경제적, 과학적, 정치적 등) 다양한 차원을 실제로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어떤 역사’(histoire)가 아니다. 진화의 관점에서 관념의 역사를 연구하는 대신, 따라서 푸코는 어떤 특정 시기에 출현한 새로운 대상의 구성으로부터 다양한 국지적 지식들이 결정되는 방식, 나아가 이러한 지식들이 자신들 사이에 대응되고 또 수평적인 방식으로 하나의 정합적인 인식론적 배치를 그려내는 방식을 기술하기 위해 정확한 역사적 절단들(découpages), 특히 고전주의와 19세기 초 사이의 절단에 집중한다.
 
 
2. 고고학이라는 용어가, 그것이 다양한 지식들이 단순히 그 변양들로 간주되는 어떤 진실한 인식론적 구조를 작동시켰다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푸코와 구조주의적 경향 사이의 동일시를 초래했다면, 이 용어에 대한 푸코의 해석은 사실 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말과 사물의 부제가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관건은 인간과학에 대한 고고학 자체가 아닌 하나의 고고학을 수행하는 것이다. 고고학의 관건은 다양한 담론적 사건들 곧 국지적 지식들을 권력에 연결시키는 메커니즘에 대한 (일반적인 계열적 기술이라기보다는) 수평적 단절에 관련된다. 이러한 연결은 물론 전적으로 역사적인 것으로, 특정한 탄생일을 갖는다. 또한 이 경우 목표는 전적으로 바닷가에 그려진 모래 얼굴처럼”(말과 사물) 그 사라짐의 조건에로 겨냥되어 있다.
    
 
3. ‘고고학’(archéologie)라는 말에서 우리는 동시에 아르케(archè), 곧 시작, 원리, 인식대상의 출현이라는 관념 및 아카이브(archive) 곧 이러한 대상의 기록이라는 관념을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아카이브가 과거의 죽어버린 흔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고고학이 실제로 겨냥하는 것은 현재이다. “만약 내가 이런 일을 한다면, 이는 오늘의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목적에서입니다.”(권력에 대한 대화(1978)) 지식의 대상들이 갖는 역사성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실은 주어진 특정 담론성(discursivité)의 체제 그리고 특정 권력의 배치에 대한 우리 자신의 동시적 귀속을 문제 삼는 작업이다. 1970년대 초에 있었던 계보학개념에 의한 고고학이라는 용어의 포기는 우리 자신의 담론 체제가 갖는 역사적 결정 작용에 대한 (현재를 향해 있는) 수직적(verticale) 분석에 의해 담론성의 수평적’(horizontale) 독해를 이중화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 르네상스 이후 현재(1966?)까지의 서구 앎의 인식론적 단절
 
르네상스
고전주의
근대
현대?
16세기
~17세기중반
17세기 중반
~18세기말
18세기말/
19세기 초부터~
니체? 프로이트?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푸코?
유사성 類似性
ressemblance/
resemblance
재현작용 再現
(=표상작용 表象)
représentation/
representation
역사 歷史
(=인간人間
=경험적초월적
이중체)
histoire/history
언어 작용?
langage/
language
-
존 레이(John Ray, 1627-1705)
자연/
博物學(=自然史)
histoire naturelle
조르주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
생명/
生物學
biologie
다윈/프로이트?
심리학정신의학?
psychologie
psychanalyse
-
윌리엄 페티 (Sir William Petty, 1623-1687)
/
分析
analyse de la richesse
중농주의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
노동/
政治經濟學
économie politique
마르크스/뒤르켐?
사회학?
sociologie
-
 
클로드 랑슬로
(Claude Lancelot, 16151695)
낱말/一般文法
grammaire
générale
포르루아얄
 
프란츠 보프(Franz Bopp, 17911867)
언어/文獻學
philologie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문학과 신화분석?
    
 
 
계보학(系譜學, généalogie)
 
 
1. 1966말과 사물의 출간 직후부터, 푸코는 인간과학의 고고학이라는 자신의 기획을 하나의 구조주의적 작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니체적 계보학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푸코는 니체에 관한 자신의 텍스트에서 계보학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계보학은 무한한 목적론 및 관념적 의미화 작용의 초역사적 전개’, 역사적 이야기의 단일성, 기원에 대한 연구에 대립되는 하나의 역사적 탐사이다. 계보학은 반대로 모든 단조로운 목적론의 바깥에 존재하는 사건의 일회성(singularité des événements)’을 추구한다. 따라서 계보학은 다양성과 분산 작용, 사건과과 시작이라는 우연으로부터 작업한다. 어떤 경우에도 계보학은 역사의 연속성을 재확립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하지 않으며, 반대로 각각의 고유성 속에 나타나는 사건들을 복원하고자 노력한다.
    
 
2. 계보학적 접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다. “그것[계보학]은 또한 평범한 의미의 어떤 실증주의가 아니다. 실제로 계보학은 국지적이고 단절되어 있고 자격을 박탈당했으며 정당화되지 못한 지식을 작동시킨다. 계보학은 이러한 지식을 검열하고 위계를 설정하며 참다운 인식의 이름으로 질서 지워준다고 말하는 단일한 이론적 심급에 반대한다. [...] 따라서 계보학은 보다 주의 깊은 혹은 보다 정확한 과학의 특정 형식에 대한 실증주의적 호소가 아니다. 계보학은 매우 정확한 의미에서 ()과학(antisciences)이다.”(콜레주 드 프랑스 197617일 강의) 계보학적 방법론은 따라서 역사적 지식을 탈주체화하려는, 다시 말해 역사적 지식에 담론의 질서에 반하는 투쟁과 반대의 능력을 부여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이는 계보학의 임무가 단순히 과거 안에서 고유한 사건의 흔적들을 추적하는데 그치지 않으며, 나아가 오늘 사건의 가능성이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계보학]은 우리를 오늘의 우리로 만든 우발성(偶發性, contingence)으로부터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존재하고 행동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추출해낸다.”(계몽이란 무엇인가?)
    
 
3. 계보학은 (계보학이라는 용어가 채택되기 이전의) 최초의 텍스트들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푸코 작업의 일관된 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푸코는 실상 계보학의 세 가지 가능한 영역을 지적한 바 있다. 우리 자신을 인식의 주체로 구성하게 해주는 진리와 우리의 관계, 우리 자신을 타인들에 대하여 행동하는 주체로 구성하게 해주는 권력과 우리의 관계, 우리 자신을 윤리적 행위의 주체로 구성하게 해주는 도덕과 우리의 관계라는 세 영역으로 구성된 우리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ontologie historique de nous-mêmes). “이 세 영역 모두는, 조금은 혼돈된 방식이긴 했지만, 광기의 역사에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진리의 축을 임상의학의 탄생지식의 고고학에서 연구했습니다. 나는 감시와 처벌에서는 권력의 축을, 성의 역사에서는 도덕의 축을 발전시켜 보았습니다.”(윤리의 계보학에 관하여. 진행 중인 작업의 개관)
 
 

2013. 11. 5.

‘새로움’과 ‘근대성’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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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근대성’의 고고학
 
“여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도다.”
—단테, 『새로운 인생』
1 새로움, 근대성
 
‘새로움’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있어 온 하나의 보편적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말, 단어는 자신만의 역사를 갖는다. 역사적으로 오늘 우리가 현대 한국어로 새로움이라 일컫는 바의 개념이 이른바 ‘근대성’의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근대성이라 부르는 것과 새로움이라 부르는 것 양자 모두는 ‘특정한 시대적・지역적 기원을 갖는’ 하나의 고유명사적 측면을 갖는다. 이 글은 이렇게 오늘 우리의 일상과 엄밀한 학문적 담론에서 사용되는 ‘새로움’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코젤렉・야우스의 개념사 및 푸코의 고고학・계보학 등을 방법론으로 하여 서양 사유 체계의 역사 안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보통 근대성, 현대성, 모더니티, 때로는 모데르니테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사실은 여러 일본어 번역어들을 단순히 우리말 음가로 읽은) 이들 용어는 - 영어의 경우 - ‘modernity’를 옮긴 말이다. 이는 물론 형용사 modern의 명사형으로, 영어 형용사 modern은 라틴어 modernus에서, 명사 modernity는 modernitas에서 왔다. 현존하는 기록에 따르면, 대략 4~5세기경 라틴어 형용사 modernus가 처음 등장한 후 무려 천여 년의 시간이 지난 13세기에야 명사형 modernitas가 나타난다. 이러한 격차는 이 용어가 생성된 이래 그다지 큰 중요성을 갖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한편 라틴어 형용사 modernus는 어원학적으로 ‘곧’, ‘방금’ 등의 의미를 갖는 부사 modo에서 온 것이다. modernus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4~5세기의 로마인들에게 이 용어는 ‘가까운’ ‘최근’ 시기, 곧 그리스도교 공인・국교화 이전의 ‘이교도적’이 아닌 ‘그리스도교적 최근’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이후 14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와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나타난, 그리고 이후에 프랑스인들에 의해 ‘르네상스’(Renaissance, 新生, 復活)라 불린 용어의 의미는 다름 아닌 ‘다시 태어나는 것’ 곧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주체는 우선 이탈리아인, 그리고 이후의 프랑스인 혹은 ‘유럽인’이었으며, 그리스・로마의 휴머니즘을 새롭게 오늘 되살리는 것, 그리하여 ‘새롭게 태어난’ 이탈리아, 곧 넓게 말하면 1453년 오스만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이후 새롭게 대두된 ‘유럽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르네상스적 새로움이란 새로운 ‘유럽’의 (재)탄생 혹은 ‘발명’이다. 이후 일본인들이 ‘신구(新舊)논쟁’이라 번역한 17세기 말 프랑스의 ‘고대인들과 근대인들의 논쟁’(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새롭게 독해되어야 한다. 이른바 ‘신구논쟁’의 대표자는 구파의 라브뤼예르와 부알로, 그리고 신파의 페로와 퐁트넬이다. 이들은 각기 당시 ‘고전주의적’ 이상의 두 측면, 곧 ‘정신을 과거의 모방으로 몰아대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호’와 ‘정신을 미래로 이끌고 가는 이성에 대한 기호’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들 중 구파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모범이 되는 고대인들을 능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신파는 현대인들은 고대 이래 모든 인류의 지적 유산을 이어받은 존재들이므로, 결국 고대인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신파의 주장은 『고대인과 근대인의 평행선』(Parallè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 1688~1692)을 쓴 신파의 대표자 페로(Charles Perrault, 1628~1703)가 1687년 1월 26일 프랑스의 아카데미 회원들 앞에서 낭송한 다음과 같은 시 안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무릎을 굽히지 않고 고대인을 바라본다.” 신구논쟁의 승리자는 신파 곧 근대파였다. 그리고 이들 신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정신은 다름 아닌 ‘인간 정신의 진보라는 법칙’이다. “과학에 있어서 우리는 고대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근대인이 고대인보다 더 멀리 보고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궁극적 이유는 인간 정신의 진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18세기는 다름 아닌 계몽주의와 진보의 시대이며, 이런 면에서 신구논쟁은 ‘18세기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2 근대 —‘새로운 시대’와 ‘진보’
 
“옛것들은 폐기되었다.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 더 새로운 것과 경쟁한다.”
—로렌츠 폰 슈타인, 『프랑스의 도시 체제』


‘가까운 시대’를 뜻하는 근대(modern)라는 말은 상대적 개념이다. 곧 보는 자의 위치에 따라 원근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서력 51세기인들은 ‘우리’처럼 가령 18~19세기를 근대로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49~50세기 혹은 45~50세기를 ‘근대’로 규정할 것이며, 여하튼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 ‘우리의 근대’인 17~18세기는 더 이상 근대가 아닌 ‘중세’ 정도로 규정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가령 15세기인들은 자신들이 중세의 말기 혹은 르네상스 초기를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러한 시대 규정은 모두 사후적(事後的)인 역사 기술적(歷史記述的, historiographic) 개념이다. 이제 이런 의문이 생긴다. 이른바 ‘우리의’ 근대는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그리고 그들에게 ‘근대’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어떤 특징을 갖는 것이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근대 곧 ‘가까운 시대’라는 용어・개념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앞에서 잠시 살펴본 것처럼, 개념사적 혹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오늘 ‘우리의’ 근대는 단적으로 ‘유럽의’ 근대이다. 그렇다면 유럽에서 근대라는 용어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바로 그런 뜻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일까? 가령 우리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책에는 라틴어든 프랑스어든 ‘근대’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19세기 일본인들에 의해 ‘신구논쟁’으로 번역된 논쟁의 신파 곧 ‘근대인들’(les Modernes)이 기원한 용어 moderne은 프랑스어의 경우 1361년부터 사용되지만, 명사형 modernité는 1823년에야 나타난다. 이는 근대와 근대성이라는 용어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사상적 중요성을 부여받은 것이 이른바 ‘근대’의 일임을 말해 준다. ‘계몽주의의 완성자’이자 ‘근대 철학을 종합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저술에도 modern이라는 독일어는 등장하지 않으며, 다만 이에 상응하는 하나의 새로운 개념 곧 ‘새로운 시대’(neue Zeit)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하버마스가 코젤렉을 인용하며 말하고 있듯이, 이 “새로운 시대가 근대이다.”
 
 
칸트는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 1744~1803)에 관한 저술 「헤르더의 인류 역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들」(1785)에서 이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끊임없는 진보’(Fortschritts)로 규정하면서, 이를 인류의 목적이자 역사의 필연이라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헤르더와 칸트의 ‘진보’는 단순한 ‘새로움’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 이상의 것이다. 옛것과 새것은 늘 있어 왔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새로움’은 단지 새로울 뿐만 아니라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이다. 누구에게 더 좋은가? 이 새로움은 ‘인류에게’ 더 좋은 것이다. 이렇게 칸트는 데카르트의 무시간적(사실은 가톨릭적)이고 개별적인 ‘나’를 시간적・역사적(개신교적)인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이 인류의 진보는 우연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일종의 섭리 곧 역사적 필연으로 이해된다. “인류 일반의 목적은 끊임없는 진보이며, 이 목적의 완성은 간단하지만 모든 면에서 유용한—우리가 섭리의 목적에 맞게 우리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목표에 관한 이념이다.” 이러한 역사적 필연의 관념은 인간 정신의 법칙이며, 기본적으로 그 근거를 과학의 진보에서 찾는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역사적 진보의 관념은 서구 18세기 계몽주의의 근본적 사상이었다.
 
 
코젤렉은 개념사의 기념비적 명저 『지나간 미래』에서 현대 한국어・일본어로 ‘역사(歷史)’라고 번역되는 독일어 Historie가 Geschichte로 변화하는 과정을 상세히 그려 준 바 있다. 전자는 그리스어의 어원 그대로 ‘이야기’의 뉘앙스가 강하며, 후자는 헤겔적 의미로 이해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자신이 실현하는 역사철학의 대상으로서의 역사 개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대략 1750년 이래 150여 년 동안 일어난 이중적 과정, 곧 한편으로는 neue Zeit[새로운 시대]라는 두 단어가 결합되면서 하나의 복합개념으로 변화한 Neuzeit[근대] 혹은 그 형용사형 neuzeitlich[근대적]로 변화하는 과정,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적으로 당시까지 복수로 사용되던 Geschichten이 대표단수화된 형태인 Geschichte로 대체되는 과정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이 진보의 “역사철학이야말로 근대 초기를 과거로부터 단절시키면서 새로운 미래와 더불어 우리의 근대를 열었던 장본인이다.” 코젤렉의 표현대로 “근대는 과거 전체에 세계사적 질을 준다. 그와 함께 그때그때의 역사의 새로움은 새로운 것으로 성찰되면서 진보적으로 전체역사를 요구했다. 역사를 세계사로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은 당연했다. (……) 시대의 특성은 바로 진보의 지평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시대의 진단과 지나간 시대의 분석이 서로 연결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세계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과업을 완수한 것이 헤겔(G. W. F. Hegel, 1770~1831)이다. “현대[근대]의 개념을 발전시킨 최초의 철학자는 바로 헤겔이었다. 그러므로 막스 베버에 이르기까지는 자명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문제시되고 있는 현대성[근대성]과 합리성 사이의 내면적 관계가 무엇의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이해하고자 한다면, 헤겔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 헤겔은 1807년 『정신현상학』에서 ‘우리의 시대’를 이렇게 기술한다. “어쨌든 우리의 시대가 탄생의 시대이며 새로운 시기를 향한 여명기임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정신은 지금까지의 일상세계나 관념세계에 결별을 고하고 이를 과거의 품속에 묻어 버린 채 바야흐로 변혁을 이룩할 찰나에 이르러 있다. 정신은 한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는 전진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마치 오랫동안 조용히 자양분을 섭취하며 차츰 성장을 거듭해온 태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는 최초의 숨결로 질적 도약을 이루어 신생아가 태어나듯이, 자기도야를 지속해온 정신도 또한 천천히 그리고 소리 없이 새로운 형태를 무르익게 하면서 앞서간 지금까지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개개의 부분들을 순차적으로 허물어 버리는 바, 이렇게 동요하는 조짐은 다만 간간히 엿보이는 징후 정도로 내비쳐질 뿐이다. (……) 점진적 와해작용이 한순간에 새로운 양상을 드러내면서 번갯불처럼 새로운 세계의 상(像)을 단숨에 추어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역사적 전망을 기술한다.’라는 독일적인 철학적 근대성[현대성]의 기획은 역사철학적 보편사(普遍史, allgemeine Geschichte)에 대한 요구로 수렵되었다.
 
3 근・현대 예술 —‘새로움의 전통’
 
“보들레르의 근대적 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발명하려는 사람이다.”
—푸코, 「계몽이란 무엇인가?」


예술사가 곰브리치에 따르면 18세기 말 19세기 초 화가들은 ‘개인적・서정적 환상’의 세계 안으로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그리고 이는 예술, 특히 회화의 영역에 나타난 참으로 ‘근대적인’ 과거와의 단절인데, 이는 “이것이야말로 전통과의 단절이 가져온 가장 뚜렷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제 미술가들은 오직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 놓는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었다.” 곰브리치는 그 시초로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그림 「태고적부터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 1794)」를 들면서 다음처럼 말한다. “블레이크는 환상에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 세계를 그리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지했다. (……) 이렇게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였다.” 전통과의 단절이 블레이크로 하여금 객관적・물질적・외적 세계 바깥의 개인적・심리적・내적 세계의 묘사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예술관이 의식적으로 프랑스적인 미학적 근대성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가 1863년 발표한 「근대적 삶의 화가(Le Peintre de la Vie Moderne)」에 이르러서다.
 
 
‘근대적 화가의 삶’을 다룬 이 에세이에서 보들레르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다음처럼 두 가지로 나눈다. 근대성[현대성]이란 “일시적인 것, 순간적인 것, 우연한 것으로 예술의 반을 이루고, 나머지 반을 이루는 것은 영원한 것, 불변의 것이다.”(35쪽) 이는 각기 ‘영원하고 불변적인 요소’와 ‘상대적이고 상황적인 요소’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대성이란 ‘역사적인 것 안에서 유행이 포함할 수 있는 시적인 것을 유행으로부터 끌어내는 것,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영원한 것을 끌어내는 것’이다.(34~35쪽) 이런 ‘근대적 삶의 화가’ 혹은 ‘근대성의 화가’는 ‘우연성이 함축하고 있는 영원성을 암시하는 모든 것의 화가’이다.(26쪽) 또한 이 화가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사람이다. 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새로운 어떤 것에 직면한 어린아이들의 고정되고 동물같이 황홀경에 빠진 시선이다.(30쪽) 우연성과 찰나, 유행, 그리고 현재의 화가는 오늘을 그린다. 그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영원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연성과 찰나, 유행과 현재에서 찾는다. 이런 의미에서 이 ‘우연성의 화가’는 ‘댄디’이자 ‘세계인’이며, 무엇보다도 하나의 ‘예술가’이다.(28~29쪽) 이 예술가의 댄디즘은 하나의 정열이다. 이 정열은 무엇보다도 ‘관습이라는 외적 한계 안에 억눌려 있는 자신으로부터 하나의 독창성(originalité)을 만들어 내려는 모든 열정적인 욕구’이자, ‘정신주의’와 ‘금욕주의’를 통한 일종의 자기숭배(culte de soi-même), 자기 수련, 자기도야, 곧 하나의 영웅주의이다.(51~55쪽) 보들레르의 댄디는 예술 안에서 자기 자신을 매일매일 새롭게 발명해 내는 자이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이제 철학적・미적 근대성은 전통과의 단절, 새로운 것의 숭배라는 관념 자체를 자신의 주된 이념으로 삼게 된다. 그 이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것은 인류와 예술이 진보하거나 인간의 복지・행복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이런 새로운 것 자체에 대한 숭배는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전통’을 창조했다. 새로운 것은 전통과 단절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것에 대한 선호’라는 서구 근대 이래의 역사, 이미 보들레르 이후로도 150년이 지난 역사는 이러한 태도 자체를 ‘또 하나의’ 전통으로 확립시켰다. 로젠버그는 이미 1959년에 이 새로운 것 자체에 대한 숭배의 태도가 이미 새로움의 전통(tradition of the new)을 구성했다고 보았다. 로젠버그는 유구한 역사를 갖는 새로움에 대한 서구의 철학적・미학적・정치적 전통은 단순한 미학적・정치적 제도만이 아닌, 인간 자체의 전면적 혁신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누구든 (예술을) 창조하려는 자는 곧 자신이 스스로를 창조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회화, 정신의학, 정치적 행동을 막론하고, 자기 변형(self-transformation) 및 타인의 변형은 우리 세기의 가장 급진적 관심을 구성해 왔다.”
 
4 나가면서 —‘새로움의 추구’라는 자기의 테크놀로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오르한 파묵, 『검은 책』


보들레르의 근대성 혹은 새로움에 대한 규정이 보여 주는 특징들 중 하나는 그것이 더 이상 인식되는 대상에 한정된 것이 아닌, 인식하는 자 자신, 곧 주체에 관련되는 규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형성, 곧 주체의 자기 형성에 관련되는 제반 규정들을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규제적(prescriptive)’ 원칙들이라 불렀다. 이 규제적 원칙들은 스스로 자신에 대해 부과하는 원칙들로서, 그 목적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일정한 규칙 혹은 금기, 제한을 가함으로써 주체가 스스로를 지금의 자기와는 다른 존재로 변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의 자기 변형을 위한 규제적 테크닉은 푸코에 의해 자기의 테크놀로지 혹은 주체화 양식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자기의 테크놀로지(technologie de soi)는 글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기 위한 테크놀로지, 방법론을 지칭하는 것이며, 주체화(subjectivation)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주체가 끊임없이 변형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위에서 우리가 극히 간략한 형태로 일별해 온 새로움에 관한 ‘서양’의 관념들은 특히 르네상스 및 ‘근대’ 이래 탄생한 하나의 특수한 역사적・문화적 강조점을 갖는 일련의 담론들로
구성된다. 르네상스와 근대 초기에, 새로움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속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점차로 인간 사회의 보편적 역사라는 ‘진보적’ 관점에 의해 수렴되는 동시에, 그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존재이자 그러한 진보를 위해 행동하는 주체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된다. 헤겔과, 특히 보들레르 이후로 새로움은 사회와 주체 자신의 발명이라는 이중적 작업에 연관된다. 이와 동일한 정신 안에서 탄생한 이른바 서양의 ‘근현대’ 예술은 작품의 창조인 동시에 그러한 작품을 창조하는 주체 자신의 창조를 지향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자기 심화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것 자체에 대한 추구로 변형된다. 로젠버그는 이를 새로움의 전통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 새로움의 전통에서 모든 창조 작업은 창조하는 자 자신의 발명을 포괄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과 보들레르 이래의 모든 서양 근현대 예술 혹은 사유는 자신의 발명을 포함하는 행위가 된다. 이는 정확한 의미에서 푸코가 말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 혹은 주체화에 해당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주체화 과정은 하나의 진리 놀이로서, 이 놀이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창조의 대상, 곧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새로움의 전통을 포함하여, 이러한 모든 전통을 아는 오늘의 우리는 한 사회 안에 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또다시 우리만의 주체화를 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주체화의 양식은 또 다른 질문의 양식으로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질 수밖에 없다.
 
 
예술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결국 전통과 놀이하는 자다. 로젠버그의 지적처럼, 오늘 새로움 자체의 추구는 이미 그 자체로 새로움의 전통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움의 전통이 아닌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우리의 그러한 행위마저도 미래에는 또 다른 새로움의 전통이 되어, 또다시 새로운 것에 의해 폐기처분되고 또다시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는 운명인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오늘 우리가 행하는 새로움의 추구가 인간의 보편적 성향임과 동시에 하나의 문화적, 곧 서양적 전통임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서양화된 만큼 이 새로움의 전통이라는 서양의 전통을 따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서, 이러한 새로움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다름 아닌 나의 서양화를 유지하고 가속화하는 행동이 아닐까? 우리는 새로움의 추구에 의해 조건화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인간의 보편성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서양의 것이라고 해서 굳이 따르지 않을 필요가 있을까?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서양의 방식이 자연 그 자체를 인식하는 방법이라고 믿는 것처럼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새로움을 바라보는 방식이 인간이 새로움을 바라보는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방식이라 믿는 것 역시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새로움은 하나의 보편적 범주일 수 있으나, 새로움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구체적 방식이란 늘 역사적이고 문화적이며 궁극적으로 정치적이다. 오늘 우리가 새로움을 바라보는 일반적 방식은 근대 이래 서양의 지배적 관점, 곧 새로움 자체의 영원한 추구이다. 그리고 오늘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또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새로움만을 강박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이 게임의 규칙은 누가 정한 것일까? 인간은 전통과 놀이하는 자다. 그리고 이 놀이는 늘 질문의 형식으로 그에게 되돌아와, 그에게 다른 생각을 낳고,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움의 전통이라는 전통과도 놀이해야 한다. 나는 내 삶 안에서 새로움(의 전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이는 자기와 자기의 관계를 문제 삼는 주체화의 진리 놀이, 자기를 발명하고자 하는, 더 나아가 이제까지의 자기와는 다른 자기를 상상하고, 자기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며, 새로운 놀이의 규칙을 발명하려는 자기의 테크놀로지라는 놀이이다.
 
 
“하나의 놀이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한도에서이다.”(푸코)
 
 
 
 

미셸 푸코의 소쉬르 수용 - 『말과 사물』을 중심으로


 
 
 
 
 
 
 
 
미셸 푸코의 소쉬르 수용
- 『말과 사물』을 중심으로
 
 
1. 들어가면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에 의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수용은 매우 복잡하고도 다양한 층위를 보인다. 푸코에게 소쉬르는 무엇보다도 ‘구조 언어학’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는 광의의 ‘구조주의’의 창시자로서 이해된다. 이의 당연한 귀결로서, 푸코의 소쉬르 혹은 ‘구조주의’ 수용은 주로 1960년대의 시기, 이른바 푸코의 ‘구조주의적’ 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1970년대로 넘어가면 푸코는 방법론의 측면에서 이른바 ‘구조주의적’ 관점을 ‘포기’하고 힘에의 의지로 대변되는 니체적 계보학을 채택한다. 그러나 일견 타당해 보이는 이러한 지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첫째, 푸코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구조주의적 사상가임을 긍정한 적이 없으며, 특히 19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는 자신을 구조주의 사상가로 간주하는 관점에 대한 격렬한 거부의 태도를 보인다. 둘째, 푸코가 1970년대 초 이래 이른바 구조주의적 관점을 명시적으로 포기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가령 에피스테메로 대변되는 이전의 ‘구조주의적’ 관점을 대체하기 위해 푸코가 새로이 제시하는 ‘담론’ 개념 안에는 적어도 그 구성상 ‘일정한 구조주의적 배경’이 존재한다는 지적이 여전히 가능하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문제를 염두에 두고, 푸코에 의한 소쉬르 수용 및 그에 따라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연대기 순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2. 『말과 사물』에 나타난 소쉬르 - 기호론과 기호학



우선 푸코는 자신의 저작에서 소쉬르라는 이름을,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거의 언급 혹은 인용하지 않는다. 가령 푸코의 대표적인 ‘구조주의적’ 저작으로 일컬어지는 1966년의 『말과 사물』에서도 소쉬르라는 이름은 겨우 4회 등장하는 것이 고작이며, 이를 이은 1969년의 『앎의 고고학』에서도 역시 단 1회 등장하는 것으로 그친다. 또 단행본의 형태로 간행되지 않은 푸코의 다양한 저술들을 모은 『말과 글』에도 소쉬르라는 이름은 12회 등장하는데, 특기할 것은 이 12회 중 10회가 1966-1972년의 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나머지 2회는 각기 1977년 및 1983년의 인터뷰에서 ‘단편적으로’ 곧 회고적 시선에 의해 간단히 언급된다는 점이다. 이 1966-1972년의 시기는 방금 위에서 잠시 지적한 것처럼 1966년의 『말과 사물』에서 시작되는 이른바 푸코의 ‘구조주의적’ 시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는 소쉬르라는 이름을 푸코가 직접 언급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며, 같은 『말과 글』의 색인에서 구조 및 구조주의 사항을 찾아보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구조(structure)라는 용어의 경우에는 모두 129회가, 구조주의(structuralisme)라는 용어의 경우에는 모두 32회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거의 대부분의 언급은 양자 공히 1960년대의 이른바 ‘구조주의’의 시기에 압도적으로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렇게 1960년대에 집중되어 있는 소쉬르 및 구조, 구조주의에 대한 푸코의 언급 중 중요한 몇 가지를 선택하여 이들 사유를 바라보는 푸코의 기본적 관점을 정리해보자.



푸코의 출간된 모든 글을 통틀어 소쉬르가 등장하는 최초의 언급은 1966년의 『말과 사물』에서 발견된다. 이 책에서 소쉬르는 모두 3회에 걸쳐 언급되는데, 모두 거의 유사한 특정한 맥락 아래 놓여있다. 우선, 이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우선, 아래의 첫 번째 언급은 좀 길지만 향후의 논의를 위해 전문을 인용할 가치가 있다.



“17세기에 출현하는 바와 같은 기호(signe)의 이항배치는 스토아학파 이래, 심지어는 최초의 그리스 문법학자들 이래, 양태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언제나 3원적이었던 구조를 대신하는데, 이 배치는 기호가 그 자체로 이분화되고 이중화되는 재현(une représentation dédoublée et redoublée sur elle-même)을 전제로 한다. [...] 재현은 지시(indication)이자 동시에 출현(apparaître)이며, 대상에 대한 이해 방식이자 자기 발현이기도 하다. 고전주의 시대부터 기호는 재현이 재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재현의 재현성이다(le signe c'est la représentativité de la représentation en tant qu'elle est représentable). [...] 아마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마지막 결과, 기호의 이항 이론(la théorie binaire du signe). 17세기부터 기호의 일반 과학 전체의 근거가 되는 이 이론은 기본적으로 재현의 일반 이론과 깊은 관계가 있다. 기호가 의미하는 것(signifiant)과 의미되는 것(signifié) 사이의 무조건적인 관계(자의적이거나 자의적이지 않은, 자발적이거나 강제적인,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관계)라 해도, 이 관계는 재현이라는 일반적 요소 안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 의미하는 요소와 의미되는 요소는 둘 다 재현됨에 따라서만, (또는 재현되었거나 재현될 수 있음에 따라서만) 그리고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실제로 재현함에 따라서만 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고전주의적 기호의 이론이 ‘관념학’(idéologie)(다시 말해 단순한 감각에서 추상적이고 복잡한 관념에 이르는 재현의 모든 형태에 대한 일반적 분석)의 철학적 정당화 및 근거로 자처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또한 소쉬르가, 일반 기호론(sémiologie générale)의 기획을 재발견하면서, 기호에 대해 일견 ‘심리주의적인’ 것(개념과 이미지의 결합)으로 보일 수 있는 정의를 부여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는 소쉬르가 사실상 기호의 이항적 성격을 사유하기 위해 고전주의적 조건(condition)을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소쉬르는 17-18세기 고전주의 시기의 에피스테메인 재현(再現, représentation), 특히 이 시기의 언어 이론인 포르루아얄(Port-Royal)의 일반문법(Grammaire Générale)과의 관련 하에 조명되어 있다. 푸코는 17-18세기 일반문법의 재현 이론과 소쉬르 기호학 사이에 존재하는 일정한 ‘유사성’을 가정하는데, 이는 인용에서 ‘소쉬르가 기호의 이항적 성격을 사유하기 위해 고전주의적 조건을 재발견했다’는 표현 아래 등장한다.
 
 
소쉬르에 관련된 두 번째 및 세 번째 인용은 17-18세기 고전주의의 일반문법을 잇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이래, 곧 푸코가 말하는 ‘근대’ 이래의 문헌학(文獻學, philologie)과 관련되어 등장한다.


“라스크, 그림, 보프의 등장과 함께 언어는 역사상 처음으로 일군의 음성 요소로서 취급된다. 일반 문법에 의하면 입이나 입술의 소리가 글자(lettre)로 바뀔 때 언어가 탄생한 반면에, 이제부터는 소리가 일련의 서로 구분된 음성(sons)으로 분절되고 분할될 때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 언어의 실체는 이제 온전히 음성적이다. [...] 이제 언어는 다소 막연하면서 실물과 닮은 자의적인 기호, 『포르루아얄의 논리』(Logique de Port-Royal)에서 인물의 초상이나 지도가 직접적이고 명백한 모델로 제시된 기호(signe)가 아니다. 언어는 파동적(vibratoire) 특성을 획득했는데, 이 특성은 언어를 가시적 기호로부터 분리시키고 언어를 음표(note de musique)에 근접시킨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소쉬르는 언어의 역사적 형태들을 넘어 언어(la langue) 일반의 차원을 복원하기 위해, 또한 포르루아얄에서 마지막 관념학자들까지 부단히 이어져 온 사유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은 유구한 기호의 문제를 오랜 망각에서 구해 내기 위해 19세기 문헌학 전반에서 주요한 사건이었던 말(la parole)의 계기를 우회해야 한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4067762

 
 
“[근대의 시기에] 언어의 역사(l'histoire des langues)가 사유될 수 있으려면, 언어를 기원으로까지 단절 없이 연결하는 광범위한 연대기적 연속성에서 언어가 분리되어야 했고, 또한 붙들려 있는 재현의 넓은 공통 평면에서 풀려나야 했다. 이러한 이중의 단절 덕분으로 문법 체계들의 이질성이 고유한 분할선, 각 문법 체계의 내부 변화를 규정하는 법칙, 그리고 전개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행로와 함께 드러났다. [...] 언어(langage)의 범주에서 일반 문법에 언제나 전제되어 있는 그 무한한 파생과 한없는 혼합의 분석이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언어는 결코 내적 역사성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 시간의 질서가 시작된 것이다. [...] 새로운 문법은 직접적으로 통시적이다. 언어(langage)와 재현 사이의 단절에 의해서만 실증성이 성립될 수 있었을 뿐인 만큼, 어떻게 통시적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가? 언어들(langues)의 내부 구조, 즉 언어들이 기능하기 위해 허용하고 배제하는 것은 오직 말(mots)의 형식에 의해서만 다시 파악될 수 있었으나, 말의 형식이 갖는 법칙은 이전의 상태, 일어날 수 있는 변화, 결코 일어나지 않는 변형과 관련될 경우에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확실히 언어에 의해 재현되는 것으로부터 언어가 단절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언어(langage)가 출현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언어는 역사 속에서만 다시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소쉬르는, 일반 문법의 방식으로, 두 관념 사이의 연결에 의해 기호를 정의하는 일종의 ‘기호론’(sémiologie)을 재구성하게 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재현에 대한 언어(langage)의 관계를 복원함으로써만 문헌학의 통시적 사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상의 논의를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과 사물』에서 푸코에 의해 수행되는 16세기 이래 서구 사유에 나타난 인식론적 단절, 혹은 에피스테메의 변천에 관련된 이해가 요청된다. 푸코는 16세기 이래 『말과 사물』이 저술된 20세기 중반까지의 서구 사유에는 오직 ‘두 번의 단절을 통한 세 개의 지층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지식 고고학적 지층의 에피스테메는 유사성(ressemblance)으로 이는 16세기 이래 17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르네상스의 시기를, 두 번째 지층의 에피스테메는 재현(représentation)으로 이는 이후 18세기 중후반 경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가정되는 고전주의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지층의 에피스테메는 역사(histoire)로서 이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이래 『말과 사물』이 저술된 1966년까지도 ‘여전히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가정되는 근대의 시기이다. 그리고 『말과 사물』은 이러한 16세기 이래 서구 지식의 고고학적 지층 형성 및 변형의 과정을 언어ㆍ노동ㆍ생명이라는 세 가지 분야에서 상세히 논구하는 책이다. 본 논문의 주제가 되는 언어의 경우, 푸코에 따르면,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와 단절하고 고전주의를 연 사람은 랑슬로이며, 다시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와 단절하고 새로운 근대의 시기를 연 사람은 보프이다. 그리고 랑슬로와 보프에 의해 단절된 세 시기는 각각 그 시기 지식의 일반적 가능 조건을 규정하는 ‘인식론적 배치 혹은 장’ 곧 에피스테메(épistémè)의 지배를 받는다. 이를 도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르네상스
고전주의
근대
16세기 초~17세기 중반
17세기 중반
~18세기 중후반
18세기 말/19세기 초~
유사성 ressemblance
재현 représentation
역사 histoire
-
포르루아얄/클로드 랑슬로
(Claude Lancelot, 1615–1695)
일반문법
프란츠 보프
(Franz Bopp, 1791–1867)
문헌학



이제 이러한 일반적 이해의 틀에 따라, 앞서 살펴본 소쉬르 관련 언급들을 검토해보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소쉬르(1857-1913)는 생몰연대나 대표작인 유고 편집본 『일반언어학강의』(1916)가 출간된 시기로 볼 때, 일견 ‘근대’에 속하는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푸코에 의해 고전주의와의 유사성이 강조되어 있다. 푸코에 따르면, 소쉬르의 기호학은 - 근대의 역사문헌학이 아닌 - 고전주의의 기호론과 더 많은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푸코는 자신이 『말과 사물』을 작성하던 1966년 당시를 ‘여전히 근대의 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기’로 바라본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쉬르는 그 생몰시기 전체가 오직 근대에만 속하는 인물이다. 더욱이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이 한 시대의 모든 지식에 작용하는 무의식적 상수 곧 인식 가능조건임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관점은 더욱 강화된다. 그런데도 소쉬르는 근대가 아니라, 고전주의와 더 큰 연관성을 갖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 답은 푸코가 『말과 사물』을 저술한 근본 의도에서 찾아야 한다. 『말과 사물』을 면밀히 검토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 비록 푸코가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 이 책에서 푸코가 말하는 ‘두 개의 단절에 의한 세 개의 지층’ 구분은 사실상 ‘앞으로 도래할 세 번째 인식론적 단절에 의한 네 번째 지층’을 준비하고 있으며, 『말과 사물』 자체가 이런 도래할/도래해야 할 ‘미래의 인식론적 단절’을 준비하기 위해 저술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소쉬르는 다름 아닌 ‘언어의 영역에서 이러한 미래의 세 번째 단절을 결정적으로 예비한 인물들 중 하나’로 푸코에 의해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3. 『말과 사물』에 나타난 구조주의


그러나 소쉬르에 대한 이상의 언급은 『말과 사물』에서 보이는 구조주의에 대한 언급과의 연관성 아래 조명될 경우에만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앞서 밝힌 것처럼, 『말과 사물』에는 구조주의라는 용어가 단 2회만 언급되어 있지만, 그 함축은 결정적이다. 우선, 첫 번째 언급은 앞서 소쉬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전주의와의 연관성이라는 맥락에서 나타난다.
 
“[근대가 시작되는] 19세기에 지식의 대상은 존재의 고전주의적 충만(充滿)이 침묵하게 된 바로 거기에서 형성된다. / 역으로 새로운 철학의 공간은 고전주의적 지식의 대상들이 해체되는 자리에서 곧바로 나타나게 된다. [...] 이런 식으로 근대의 철학적 성찰의 두 가지 중요한 형태가 정립된다. 첫 번째 형태는 논리학(logique)과 존재론(ontologie)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고, 형식화(formalisation)의 경로를 따라 나아가며, 새로운 견지에서 마테시스(mathesis)의 문제에 마주친다. 두 번째 형태는 의미 작용과 시간의 관계를 검토하고, 완결되지 않고 어쩌면 결코 완결되지 않을 베일 벗기기를 기도하며, 해석(interprétation)의 주제와 방법을 다시 부각시킨다. 그때 철학에 제기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아마 이 두 가지 성찰 형식 사이의 관계와 관련될 것이다. 물론 이 관계가 과연 가능한가, 어떻게 이 관계의 근거가 마련되는가를 말하는 것은 고고학에 속하지 않지만, 고고학은 이 관계가 맺어지는 영역, 에피스테메의 어느 장소에서 근대 철학이 통일성을 찾아내려고 하는가, 지식의 어떤 지점에서 근대 철학이 가장 넓은 영역을 발견하는가를 지정할 수 있는데, 그 장소는 해석을 통해 밝혀지는 유의미한 것과 (명제 이론 및 존재론의) 형식적인 것이 합류할지 모르는 곳이다. 고전주의적 사유의 본질적인 문제는 이름(nom)과 질서(ordre) 사이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즉 분류학(taxinomie)이라 할 수 있는 명명법(nomenclature)을 발견하는 것, 또는 존재의 연속성에 대해 투명할 기호 체계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사유가 기본적으로 문제시하게 되는 것은 의미가 진실의 형식 및 존재의 형식과 맺는 관계이다. 즉 우리 성찰의 창공에는 존재론인 동시에 의미론일 담론(아마 접근 불가능할 담론)이 군림한다. 구조주의는 새로운 방법론이 아니라, 근대적 지식에 눈을 뜨고 불안해하는 의식이다.”


달리 말하면, 고전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근대가 시작되던 19세기에 서구의 지식은 새로운 배치를 얻게 되는데, 이 배치는 형식화해석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근대 지식의 관건은 이 양자가 맺는 관계 설정에 대한 것이 된다. 근대의 지식은 의미가 진실의 형식 및 존재의 형식과 맺는 고전주의적 관계를 의문시하며 성립되었는데, 그 결과 ‘우리의’ 곧 ‘근대의’ 지식은 의미론과 존재론이 만나는 지점에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근대 지식들 중 하나가 구조주의라는 것이다. 구조주의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다음처럼 이어진다.


“근대적 사유에서 해석의 방법은 형식화의 기법과 대립한다. 즉 전자는 언어 아래에서, 그리고 언어 없이 언어로 말해지는 것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언어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자 하고, 후자는 모든 잠재적 언어를 통제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의 법칙에 의해 모든 잠재적 언어를 위로부터 지배하고자 한다. 해석하기와 형식화하기는 우리 시대의 두 가지 중요한 분석 방식이 되었다. [...] 사실 해석과 형식화는 두 가지 상관적인 기법인데, 이 기법들에 공통된 토대는 근대의 문턱에서 구성된 언어의 존재에 의해 형성된다. 언어의 결정적 격상은 대상화로 인한 언어의 격하를 보상하는 것으로서, 언어가 모든 말에 내포된 순수한 인식 행위에서, 그리고 우리의 각 담론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언어를 인식의 형식에 대해 투명하게 만들거나, 언어를 무의식의 내용에 깊히 박히게 하거나 해야 했다. 사유의 형식주의와 무의식의 발견 쪽으로, 러셀과 프로이트 쪽으로 나아가는 19세기의 두 갈래 흐름은 이 사실로 명확히 설명된다. 또한 이 두 방향을 서로 근접시키고 교차시키려 하는 경향, 예를 들어 모든 내용에 앞서 우리의 무의식에 부과되는 순수한 형식을 밝히려는 시도, 더 나아가 경험의 토대, 존재의 의미, 우리의 모든 인식에 바탕으로 구실하는 경험의 지평을 우리의 담론으로 이르게 하려는 노력 또한 이 사실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구조주의와 현상학의 고유한 경향과 함께, 구조주의와 현상학의 공통의 장소를 규정하는 일반적인 공간이 발견된다.”


앞서 말한 근대적 지식의 근본적 배치는 해석과 형식화라는 대립적이면서도 상관적인 두 기법, 분석 방식에 의해 구성된다. 고전주의의 ‘질서’(ordre)는 일반성 자체(‘일반’문법의 ‘일반’) 곧 무한(infini)을 전제로 하는 ‘담론’(discours)의 재현작용으로 이해되는데, 이를 파괴하고 성립된 근대 지식은 - 더 이상 담론의 재현작용이 아닌 - 스스로를 인식의 한정된 대상이자 주체로 구성하는 경험적-초월적 이중체(doublet empirico-transcendental), 곧 역사를 갖는 ‘유한한’ 인간의 지식이다. 이것이 근대의 여명 곧 18세기 말에 성립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인간학, 곧 유한성의 분석론(analytique de la finitude)다. 푸코에 따르면, 이후 근대적 지식은 19세기 이후 러셀과 프로이트, 곧 사유의 형식주의와 무의식의 발견 쪽으로 나아간다. 이 대립적인 동시에 상관적인 두 방향을 결합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20세기의 대표적인 두 사유’인 구조주의현상학이다.


4. 『말과 사물』 시기의 소쉬르와 구조주의
 
푸코의 이러한 인식은『말과 사물』이 발간된 1966년 전후의 각종 대담, 논문 등에서 보다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다. 동시기의 소쉬르 및 구조주의에 대한 푸코의 언급은 근본적으로 소쉬르와 그로부터 기원하는 구조주의가 17-18세기 고전주의적 ‘기호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말과 사물』의 주장을 확장ㆍ심화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은 담론이 침묵하는 곳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자, 이제 소쉬르, 프로이트, 후설 이래로 인간 인식의 가장 핵심부에서 의미(sens)와 기호(signe)의 문제가 다시금 등장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우리는 기호와 의미, 그리고 기호의 담론이라는 거대한 문제의 이 같은 회귀가 고전주의와 근대성을 구성했던 우리 문화 내에서 발생한 일종의 중첩은 아닌가, 혹은, 이제까지 우리 문화에서 인간의 질서와 기호의 질서는 늘 양립 불가능한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회귀가 인간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케 해주는 하나의 표지가 아닌지 자문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탄생한 기호로 인해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 중 최초의 인물이었던,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는 달리 말해, 무엇보다도 우선 니체가, 그리고 이후의 소쉬르(구조주의), 프로이트(정신분석), 후설(현상학)가 자신의 모태인 근대 지식 내부의 균열을 보여주는 선구적 인물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들은 근대가 파괴되고 도래해야 할 이후의 시기를 고지해주는 자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푸코의 논거는 16세기 이래 서구의 사유에서 인간과 언어는 한 번도 양립 가능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기호와 담론이 부각되면서 인간이 인식의 대상으로 정립될 수 없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인간은 무한한 재현 작용이라는 언어ㆍ기호 메커니즘의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근대에 오면, 언어와 담론의 재현 기능이 부차적인 위치로 밀려나면서, 스스로를 인식의 대상이자 주체로 구성하는 인간이 탄생한다. 그런데 이제 니체, 소쉬르, 프로이트, 후설 이래로 서구 사유의 에피스테메 내부에 근대적 인간이 종말을 고할 것임을 알려주는 표지 혹은 균열이 생겨났다. 소쉬르적 의미의 구조 혹은 체계란 무엇보다도 - 마치 고전주의의 재현 작용처럼 - 작동하는 것, 기능하는 것, 곧 일종의 메커니즘이다.
 
5. 나가면서 - 소쉬르, 근대적 주체의 파괴자
 
이제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푸코가 앞서 『말과 사물』과 관련하여 작성하였던 도표를 다음처럼 확장해볼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
고전주의
근대
현대?
16세기 초~17세기 중반
17세기 중반
~18세기 중후반
18세기 말/19세기 초~
1950년 이후?
1966년 이후?
유사성 ressemblance
재현 représentation
역사 histoire
언어? langage
-
포르루아얄/클로드 랑슬로
(Claude Lancelot, 1615–1695)
일반문법
프란츠 보프
(Franz Bopp, 1791–1867)
문헌학
니체? 프로이트?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푸코?
언어학, 문학, 신화분석?
 
 
이를 통해, 이른바 ‘근대의’ 사유에서, 소쉬르로부터 유래하는 ‘구조주의’가 갖는 결정적인 철학적 의미가 드러난다. 소쉬르로부터 유래하는 구조주의는 멀리는 광의의 ‘근대’를 연 것으로 평가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곧 주체로부터, 가까이는 협의의 ‘근대’를 결정적으로 성립시킨 칸트의 인간학에 이르는 이른바 근대적 사유를 지탱해왔던 인간 개념 자체를 파괴한다. 구조주의는 근대 주체의 근본성과 기원성의 부정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이다. “주체는 하나의 발생ㆍ형성ㆍ역사를 갖는 것이며, 기원적인 것이 아니다”(le sujet a une genèse, le sujet a une formation, le sujet a une histoire; le sujet n'est pas originaire). 1960년대 중반 푸코가 동시대 프랑스 지식인들과 함께 받아들였던 소쉬르와 그로부터 유래하는 구조주의는 그가 자신의 철학적 주적(主敵)으로 설정했던 근대 인간학적 주체를 파괴하는 강력한 무기이자, 도래해야 할 미래의 에피스테메의 가능조건을 드러내주는 분석 도구에 다름 아니다.
 
 
 
 
참고문헌

 
I. 푸코

 
- MC: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MC], Gallimard, 1966.
- DEQ: Dits et Ecrits, Quarto, Gallimard, 2001.
- 'Michel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1966), DEQ I.
- 'Entretien avec Michel Foucault'(1976/1977), DEQ II.

 
II. 그 외


-「체계에의 정열 - 푸코의 레비스트로스 수용」, 한국기호학회,『기호학연구』(제24집), 2008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