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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5.

두두




 
 
 
 
 
 
***
 
 
 
 

 
 
그대와 산
- 서시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
 
 
 
 
 
 
아이와 강
 
 
 
아이 하나 있습니다
강가에
 
 
아이 앞에는 강
아이 뒤에는 길
 
 
 
 
 
***
 
 
 
"제발 내 시 속에 와서 머리를 들이밀고 무엇인가를 찾지 마라. 내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것은 없다. 이우환 식으로 말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읽으라. 어떤 느낌을 주거나 사유케 하는 게 있다면 그곳의 존재가 참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현상이 참이기 때문이다. 내 시는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길이고,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참되다)의 세계이다. 모든 존재가 참이 아니라면 그대도 나도 참이 아니다.
 

통상적으로 모든 시는 의미를 채운다. 의미는 가득 채울수록 좋다. 날이미지시는 의미를 비운다.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비운다. 그러나 걱정 마라 언어의 밑바닥은 무의미가 아니라 존재이다. 내가 찾는 의미는 그곳에 있다. 그러니까 바닥까지 다 비운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존재를 통해서 말한다.

원천적으로 주관의 개입 없는 시 쓰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주관의 개입 없는 시란 존재하지도 않는다. 모든 시에서의 주관은 어디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날이미지시에도 주관이 개입한다. 그러나 그 주관은 현상에 충실한 현상의 의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날이미지시의 주관은 현상화된 주관이며 날이미지시는 주관까지도 현상화하는 시다.

날이미지시를 읽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선 존재의 편에 서라. 그리고 시 속의 현상을 몽상하라. 날이미지의 시 세계는 돈오의 세계가 아니다.

오해하지 마라. 나는 환유로 시를 쓰고 있지 않다. 환유로 시를 쓰고 있지 않고 환유를 축으로 하는 언어 즉 환유적 언어 체계로 쓰고 있다. 환유를 중심으로 하는 언어의 변두리에는 다른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끝없이 투명해지고자 하는 어떤 욕망으로 여기까지 왔다. 여기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나 아닌 것을 비우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되어 있음은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두두시도 물물전진을 곁에 두고 있으랴."(뒤표지, 시인의 유고)
 
 
 
 
 
 
 
 

2012. 9. 19.

만남 - 구광본

 
 
 
 
 








구광본, 강, 1987





 



만남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내가 하염없이 걷고 있을 때였죠





그대는 물방울을, 땀을 뚝뚝 흘리며 방파제 위에 올라섰습니다 내가 하염없이 걷고 있던 여름 한낮 그대는 바다에서 물질해 온 해산물 한아름 안고 땡볕 아래 물방울 뚝뚝 떨어뜨리며 나타났던 것이죠

그대 보는 순간,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기쁘게 땀흘려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땀을 흘려 젖은 솜바지꼴이 되기가 일쑤였으나 기쁘게 땀흘려 본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대, 물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그대 온몸의 땀방울에 목을 축이고 싶었읍니다 흠뻑 젖고 싶었습니다

 
놀라왔습니다









 
 

잎 피는 길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였습니까
ㅡ 만해

 

그대가 오는 길 내가 가는 길
비가 오고 또 우리 앞에 놓인
천둥과 먹구름의 시절
가시에 찔려 내 몸은 빛납니다
강둑 따라 손 잡은 이파리들
쓰러지지 않는 저 나무 짚고 오세요


그대 찢어진 이마에 피는 꽃잎,
그대가 내어놓은 불빛입니다
가지 않은 길은 이제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물소리 깊어지고 험해질수록
뜨거운 그대 입김에 젖는 나는
온몸으로 툭툭 잎 피어요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
오랜 날이 지나서야 알았네
갈대가 눕고 다시 일어나는 세월,
가을빛에 떠밀려 헤메기만 했네

 
한철 깃든 새들이 떠나고 나면
지는 해에도 쓸쓸해지기만 하고
앝은 물에도 휩싸이고 말아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











 







2012. 9. 2.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강원대 불문과 정승옥 선생님께서 매주 자신의 글(시를 제외한 아래의 글은 모두 정승옥 선생님의 것)과 함께 보내주시는 시, 이번 주는 내가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 오랫만에 다시 읽으니, 가슴과 머리로 함께 읽게 된다. 아름답다.




 
***




 
 
 
이성복, 1990
 
 
 
 
    
 
 
편지 1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2면)
  
“사랑도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성숙한 사람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아낌없이 주었고 아직도 줄 것이 남아있는데 사랑은 달아나고 있습니다. 시인은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사람이 죽어나가는 세월도 사랑을 놓친 시인을 그곳에서 끌어 내리지 못합니다.
  
헤어진 이제 알게 된 것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만날 수 없는 지금 알게 된 것은 나는 당신을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넋 속에, 살 속에 박힌 사랑의 기억을 어떻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20대 중반인 1975년 초여름 밤, 나도 남해 금산 정상에 앉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 해 4월 어느 새벽, 졸지에 유명을 달리 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절절한 사랑을 해보지 못한 때였던가요.”

 
 
 
 
 
〈편지〉1, 2, 3, 4, 5와 〈그 여름의 끝〉이 실려 있는 이성복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그 여름의 끝》은 “일관되고 절절한 목소리로 사랑과 타는 듯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집입니다(오생근). 그리고 여기에 소개하는 여섯 편의 시는 이 시집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시들입니다. 다섯 편의 〈편지〉는 사랑의 변천과정 마디마디를 담은 편지들이 아니라 사랑이 지나간 뒤, 몸과 마음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주된 情調는 〈쓸쓸함〉입니다. 다섯 편이 같은 맥락의 시이지만 한 편 한 편이 주목할 만한 대목을 갖고 있습니다.
 
 
편지 2
 
 
그렇게 쉽게 떠날 줄 알았지요
그렇게 떠나기 어려울 줄 몰랐습니다
 
 
꽃핀 나무들만 괴로운 줄 알았지요
꽃 안 핀 나무들은 섧어하더이다
 
 
오늘 아침 버스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무슨 삼줄 훑어 놓은 것 같아서
 
 
오랜 후 당신의 숱 많은 고수머리가
눈에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하마 멀리 가지 마셔요
바람 부는 낯선 거리에서 짧은 편지를 씁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3면)
 
 
이뤄진 사랑(“꽃핀 나무들”)은 괴롭고 짝사랑(“꽃 안 핀 나무들”)은 서럽다는 시인의 가름 솜씨가 여간 아닙니다.
 
 
 
 
편지 3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다고 나는 말했지요
전설 속에서처럼 꽃이 피고 바람 불고
십리 안팎에서 바다는 늘 투정을 하고
우리는 오래 떠돌아 다녔지요 우리를 닮은
것들이 싫어서……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가까워졌지요 영락없이 우리에게 버려진 것들은
우리가 몹시 허할 때 찾아와 몸을 풀었지요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염려 마세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4면)
 
 
“어쩔 수 없이”란 말이 이렇게 시리게, 이렇게 쓸쓸하게 읽힌 적이 있을까 싶습니다. 떠나간 사랑이 안부를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당신 생각에 잠 못 이룬다고 유행가 가사를 읊을까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잘 있답니다”라고 답할밖에.
 
 
 
편지 4
 
 
당신을 맞거나 보내거나 저렇게 무한정 잎을 피워올린 과일나무 둥치*처럼 저희는 쓸쓸합니다 당신이 저희 곁에 오시거든 무성한 저희 잎새를 바라보시기를
 
 
저희 사랑이 꽃필 때 저희 목숨은 시들고 수없이 열매들을 따낸 과일나무처럼 저희 삶은 누추합니다 당신이 저희 곁을 떠나시거든 저희를 닮은 비틀린 나무들을 지켜보시기를
 
 
어두운 곳에서 옷을 벗다 들킨 여인처럼 저희 꿈은 자주 놀란답니다 갑자기 끊긴 아이의 울음처럼 캄캄히 멎은 저희 기도를 기억하시기를, 당신의 먼 길을 저희가 기억하듯이
 
 
*둥치 : 큰 나무의 밑동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5면)
 
 
 
다른 〈편지〉시편들에 비해 〈편지 4〉는 감정이 흐느적거리는 감이 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망가진 모습이 아니라 체면치레하는 멀쩡한 모습을 바라보라고, 딴 곳을 떠돌다가도 비틀린 모습을 만나면 당신 때문에 지쳐버린 나려니 하고 지켜보라고, 예기치 못하게 나를 떠난 당신을 내가 잊지 못하듯이 당신도 “캄캄히 멎은” 우리 기도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멀쩡한 모습 - 지쳐버린 나 - 캄캄히 멎은 우리 기도〉, 〈바라보시기를 - 지켜보시기를 - 기억하시기를〉식의 시의 흐름이 구차하고 거북하게 느껴집니다.
 
 
 
편지 5
 
 
늘 멀리 있어 자주 뵙지 못하는 아쉬움 남습니다 간혹 지금 헤매는 길이 잘못 든 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요 그러나 모든 것이 아득하게 있어 급한 마음엔 한 가닥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이젠 되도록 편지 안 드리겠습니다 눈 없는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가쁜 숨소리를 받으며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6면)
 
 
 
이젠 편지하지 않겠다는 다짐에는 포기의 빛이 스미는 듯하지만 이내 “눈 없는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가쁜 숨소리를 받”습니다. 그리움은 계속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괴로움은 많이 가시고 그리움의 괴로움은 쓸쓸함으로 변색합니다.
 
 
그리움의 쓸쓸함, 쓸쓸한 그리움, 그리움의 간절함, 간절한 그리움.
 
 
쓸쓸함도 그리움도 간절함도 이제 벗어나야 할 멍에가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삶의 조건일 뿐입니다. 이들 때문에 발버둥질칠 게 아니라 이들과 함께 놀 줄 아는 사람이 될 일입니다.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7면)
 
 
 
그 여름 폭풍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나무 백일홍” 뿐 아니라 “나의 절망”입니다. 그리고 둘 다 폭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앞에서 쓸쓸함, 그리움, 간절함과 함께 놀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이제 나의 절망도 장난처럼 끝납니다. 절망도 벗어나야 할 치욕이 아니라 함께 놀아야 할 인간들의 〈반려감정〉임을 이 시는 일깨웁니다.
 
 
시 〈섬〉에서 시인이 왜 “쓸쓸함의 정다움”( 《그 여름의 끝》, 55면)을 이야기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소개]
 
경북 상주 출생으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여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경기고교에 입학하여 당시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원호를 통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때 《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수영의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71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진형준 등과 친분을 쌓았고 1976년 복학하여 황지우 등과 교내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1977년 〈정든 유곽에서〉 등을 《문학과 지성》에 발표, 등단했다. 대구 계명대학 강의 조교로 있으면서 무크지 《우리세대의 문학1》에 동인으로 참가했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평가하는 말로 “철저히 카프카적이고 철저히 니체적이며 철저히 보들레르적”이었던 시인은 1984년 프랑스에 다녀온 후 사상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그리고 논어와 주역에 심취했다. 그리고 낸 시집이 동양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남해금산》이다. 이 시에는 개인적, 사회적 상처의 원인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정제된 언어로 표현되었다. 시인은 보다 깊고 따뜻하며, 더욱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뛰어난 시 세계를 새로이 보여준다. 서정적 시편들로써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그는 우리의 조각난 삶과 서러운 일상의 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바라보면서 비극적 서정을 결정적으로 고양시켜 드러낸다. 이 심오한 바라봄-드러냄의 변증은 80년대 우리 시단의 가장 탁월한 성취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환상소설의 한 장면처럼 납득하기 힘든 상황의 묘사, 이유가 선명하지 않은 절규 등을 담아냈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언어 파괴에 능란하다. 의식의 해체를 통해 역동적 상상력을 발휘, 영상 효과로 처리하는 데도 뛰어나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에 대해 냉소적이라거나 《그 여름의 끝》 이후의 관념성을 비판받기도 했다. 그는 초기 시의 모더니즘 경향에서 벗어나 동양의 형이상의 세계에 심취하였다.
 
 
1989년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1991년 프랑스 파리에 다시 갔다. 다른 삶의 방법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시인은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와 함께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테니스. 시인에게 마치 애인과도 같은 테니스는 그에게 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삶을 보다 즐겁게 만들었다. 2007년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나무인간 강판권〉등으로 제5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예스 24〉에서)
 
 
[참고문헌]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1994
,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1994
,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 〈정든 유곽에서〉, 문학과지성사, 1996(시선집)
,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2003
,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열림원, 2003(절판)
 
 
이성복,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산문집), 문학동네, 2001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아포리즘), 문학동네, 2001
 
이성복 외, 〈사랑으로 가는 먼 길〉(이성복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4(절판)
《작가세계》(58), 〈이성복 특집〉, 세계사, 2003, 가을
 
 
 

2012. 7. 28.

아, 네오블레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살림지식총서 118)> - 김헌
       
"내 손으로 직접 네오블레를 쓰다듬을 수 있다면."

- 아르킬로코스, 조각글, 118



"이제 진정 이를 알라. 네오블레는
다른 놈이 가져가라지.
에라, 익을 대로 익어
처녀의 꽃봉오리는 벌써 시들었다.
예전에 있던 우아함마저.
물릴 줄 모르는
[...] 미친 년, [...] 끝을 보여주는군.
지옥에나 떨어져라.
[...] 그럴 순 없지
내 어찌 그런 여자를 취해서
이웃의 웃음거리가 되겠는가?

- 아르킬로코스, 조각글, 196





* [...]: 파피루스가 손상되어 읽을 수가 없는 부분.
- 61~62





이 반전, 혹은 이 흔한 러브스토리 ...




***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살림지식총서 118)> - 김헌
       
헤시오도스는 시인의 힘, 뮤즈의 탄생을 뮤즈의 가르침에 따라 노래한다.

[...]

인간들과 신들의 왕 제우스와 기억을 관장하고 보증하는 기억의 신 므네모쉬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딸들이 바로 뮤즈다. 태초로부터 처음 혼돈의 신 카오스가 있었고, 그로부터 나온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낳고, 그와 동침하여 아들 여섯과 딸 여섯을 낳는다.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 하늘의 덮개 코이오스, 높은 곳을 달리는 휘페리온과 크리오스, 이아페토스 그리고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여섯 아들이며, 테이아, 동물의 안주인 레아, 기억의 여인 므네모쉬네, 포이베, 테튀스 그리고 이치의 신 테미가 있다. 이 가운데 시간 크로노스는 모든 동물을 다스리는 레아를 아내로 맞아 하데스, 포세이돈, 헤스티아스, 데메테르, 헤라를 낳고 마지막으로 제우스를 낳는다. 막내 제우스가 고모뻘 되는 므네모쉬네와 결합하여 아홉의 뮤즈 여신들을 낳은 것이다.


헤시오도스가 소개하고 있는 아홉 뮤즈들에게 후대의 고대 로마인들은 전통에 따라 음악과 시가, 학문의 여러 장르들을 맡겨준다. '소문과 명성'의 클레이오에게 역사를, '아름다운 기쁨' 에우테르페에게 아울로스(피리) 연주와 그 합창 서정시를, 지팡이와 웃는 가면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한 '축제'의 탈레이아에게 목가(牧歌)와 희극을, 슬픈 가면과 운명의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한 '노래와 춤'의 멜포메네에게는 비극을 맡겨두었고, '춤과 노래의 즐거움' 테릅시코레에게 뤼라와 그 반주에 노래되는 서정 합창시를, '사랑'의 에라토에게는 서정시의 일부를, 입에 손가락 하나를 대고 명상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수많은 찬양의 노래' 폴리휨니아에게는 신의 찬가를, 나팔과 물시계를 들고 있는 모습의 '하늘의 여신' 우라니에에게는 음악적인 질서로 운동하는 하늘을 탐구하는 천문학을 부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목소리' 칼리오페에게는 장대한 서사시와 달콤한 연설의 기교를 맡긴다. 헤시오도스는 아홉 뮤즈들 가운데 나중에 최고의 전설적 가인(歌人) 오르페우스를 낳게 되는 칼리오페를 가장 뛰어난 뮤즈로 지목한다. 서사시는 물론, 음악과 시가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 문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연설의 기술, 설득의 기교로서의 수사학이 뮤즈 칼리오페의 선물로 소개되기 때문이다.
- 34~37


여기서는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한다

 







<여기서는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한다>
- 제리 홉킨스 외 / 조형준
       



"우리를 에로스 신 수하의 일종의 정치인들로 생각해 주세요."(163)


"나는 반항, 무질서, 혼란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 흥미를 느낍니다."(174)



http://www.nabeeya.net/nabee/view.html?type=serial&cat1=53&cat2=63&cat3=&sidx=&cidx=2743&set_field=&search=&page=









2012. 7. 27.

송상현의 시






* 임진왜란 발발 직후 동래성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 숙종 연간에 그린 것을 1760년(영조 36) 변박이 다시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육군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선발대는 거의 2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반면 부산진의 조선군 병력은, 기록에 따라 600명에서 10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어느 쪽이든 중과부적의 상황이었다. 정발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맹하게 분전했지만 성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월14일 부산진을 돌파한 일본군은 이튿날 동래로 밀려들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산진 함락 소식을 듣고 성 안팎의 방어 태세를 정비하고, 인근의 양산·울산 지역의 병력까지 불러들여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동래성으로 들어왔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성 바깥에서 협공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북쪽으로 달아나버렸다.
이윽고 일본군은 성을 포위한 뒤, 남문 밖에 목패를 세웠다. 목패에는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不戰則假我道)”는 글귀를 써 놓았다. 송상현은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死易假道難)”고 응수했다고 한다.
싸움이 시작된 지 반나절 만에 성은 함락되었다. 적군이 성안으로 밀려오는 와중에도 송상현이 조복(朝服·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에 입던 예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자, 일찍이 동래에 드나들며 송상현에게 후대를 받았던 일본군 부장 평성관(平成寬)은 그를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송상현은 그의 피신 권유를 거부하고 순절했다. 죽기 직전 그가 부친에게 보내려고 남겼다는 시를 보면 마음이 아리다.
“달무리처럼 포위당한 외로운 성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역비 한국학 연구총서 14)>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2012. 7. 8.

susana baca

페루의 아프로-페루 싱어 송라이터 수사나 바카,







최근 2011년 7월에는 페루의 문화부 장관직을 잠시 수행하기도 했고, 2012년 현재에도 라틴 아메리카 국제 기구의 장을 맡고 있다.


유튜브에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 노래를 붙인 <las muchachas>가 없는 게 무척 아쉽다 ...


Señor de los Milagros (Ya no lloraré ) 같은 곡을 들으면, 페루 가톨릭의 포스를 느낄 수 있다...


* 수사나 바카 -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Susana_Baca


* 네이버 블로그

http://cafe.naver.com/macrocosm/5244


* 전주세계소리축제 - 수사나 바카


http://eo.wikipedia.org/wiki/Pablo_Neruda





아프로 페루비안 음악의 완벽 결정체 ‘Maria lando'





먼저, 흑인 뒷골목에서 세계에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린 <Maria lando>입니다.
수자나 바카가 본격적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시작은 페루의 여성 작곡가 Chabuca Granda(페루 현대 작곡가)를 만나면서부터입니다. 수자나를 눈여겨 본 그란다는 그녀의 음악적 동료이자 스승으로 흑인 여성의 사회적 활동 자체가 금기시되던 상황에서 수자나에게 많은 용기와 조언을 주었는데요. 그란다는 죽기 전에 수자나를 위해 ‘Maria lando'란 곡을 남깁니다. 이 노래는 아프로 페루비안 음악의 완벽한 결정체라고 할 만큼 비평가들에게 찬사를 받습니다.
<Maria lando>는 1986년도에 발표된 곡으로 타악의 그루브한 느낌을 전하는 퍼커션이 도입부를 장식하며 시작됩니다. 퍼커션의 리듬을 따라 곧 이어 따라 붙는 기타와 피아노의 선율이 노래에 서정적인 분위기를 장식합니다. 한국적 감성의 한 맺힌 목소리와 닮은 수자나의 노래는 후반부에 들어가면서 퍼커션의 손장단과 절정을 이루며 감성을 깊게 자극합니다.


This is the first song from the compilation "The Soul of Black Perú" that gathers an amazing group of afro-peruvian music artists compiled by David Byrne (the ex-lead singer of the well known rock band Talking Heads). In a way the compilation works for an introduction to black/creole music that emerged during the Colonial Period wich combines basically African, Spanish and Andean influences. This is the song that led to Bacas international fame, the song begins with a description of the early morning hours in a small town of Perú:

"The dawn breaks like a statue
Like a winged statue spreading across the city
And the noon rings, a bell made of water
A golden singing bell that keeps us from feeling alone"


"조상(彫像)처럼, 도시를 가로질러 날개를 펼친 조상처럼 깨쳐오는 새벽
그리고 한낮은 물론 만든 종을 울린다
우리로부터 외로움을 떨쳐주는 황금으로 된 노래하는 종 하나."


The rest of the song talks about a servant girl named María Landó, for whom "there is no dawn", "there is no noon", "there is only lack of sleep", "suffering", "and work for others". In general describes the way slaves lived and worked on the sugar fields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 song was composed by Chabuca Granda, a noted Peruvian composer who Baca often mentions as one of her heroes and mentors.

This is the first of a couple of videos i intend to brought up for all of you lovers of traditional music, better known as world music. Enjoy!

from: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여인의 노래, ‘La Guillermina’
두 번째 노래는 페루 민중의 정서를 그녀만의 색깔로 완성시킨 <La Guillermina>입니다.
<La Guillermina>는 칠레의 시인 빠블로 네루다의 시를 그녀가 재해석해 만든 노래입니다. 빠블로 네루다의 시는 많은 음악인들이 소재로 삼았는데요. 사랑과 절망을 주로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칠레의 반체제 저항 시인으로 수자나 바카에게는 페루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노래로 승화시키는데 큰 영감을 전해주었습니다.







일 포스티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La Guillermina>는 주인공이 꿈을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태양과 별, 구름과 육지 등의 메타포를 사용해 화자의 심리 상태와 목표를 향한 갈망을 표현합니다. 도입부에 나오는 스페니시적인 기타 리듬이 수자나의 보컬과 어울리며 점점 열정적인 노래가 되어갑니다. <La Guillermina>는 페루의 우울한 뒷골목 어딘가를 걷고 있는 듯 한 느낌으로 페루 국민들의 마음과 깊은 공감대를 이루며 아프로 페루비안 음악 열풍에 한 몫을 담당했습니다.





고려바위
네루다 - 수사나 바카


http://koreanrock.com/kr.pl?SusanaBaca






lamento negro, 2001



 
Susana Baca - Poema



 





Susana Baca - Señor de los Milagros (Ya no lloraré)








Toro mata (Susana baca)





live




Susana Baca : Horas de Amor






SUSANA BACA - LA UNIDAD - ALEJANDRO ROMUALDO





* 전주소리축제


http://blog.sorifestival.com/


* 네루다 위키


http://en.wikipedia.org/wiki/Pablo_Neruda



* 네루다 집 투어 여행기!


http://ystoro.blog.me/60057274488



*

詩 poema

파블로 네루다


그래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흩어지고
열리는 것을
행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들쑤셔진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 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 풀려났다.















2012. 7. 6.

『무미예찬』

프랑수아 줄리앙, 『무미예찬』, 산책자, 2010.





 
“고대 중국 사상이 현실에 접근하는 관점은 진실로 '존재'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것(물자체, 이데아)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내재하며 생성에 그 변전의 논리를 부여하는 일관성을 묻는 것이다.”(038)
 
프랑수아 줄리앙(올바른 우리말 표기법은 쥘리앙이나, 일단 인용서 표기를 존중) 책을 유학시절에도 읽었지만 제대로 차분히 전권을 다 읽기는 처음이다. 잘 썼다. 아주 특급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일단 동양의 사유에 대해 헛소리는 거의 전혀 없는 수준이다. 사실은 탁월하다.
 
일본식 서구화가 완료되고도 50년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역설적으로 이른바 동양사상은 이른바 동양인들에게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오묘하다거나, 신비하다거나, 과학적이지 못하다거나, 서양과학을 넘어선다든가 하는, 여하튼 요점은 '한문을 모르거나, 한문만 아는' 괴상한 사람들의 괴상한 이해만이 난무한다(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전을 우리 할아버지들의 용어와 관점이 아니라 서양의 관점과 개념을 통해 해설하고 설명할 때 더 이해가 잘되는 수준에 도달할 정도의 서양화/근대화를 이루었다.
 
'性卽理'를 '性이 곧 理요', 라고 번역(?)하는 것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무의미한 동어반복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이를 "Nature is principle."이라고 옮긴 애매한 영어가 오히려 앞의 번역보다 더 많은 것이 이해하게 해주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각설하여, 줄리앙은 둘 다를 안다. 일단 줄리앙은 불어, 영어, 독어를 하고, 그리스어, 라틴어를 하고, 더하여 중국어와 한문, 일어를 한다(아마 몇 가지 언어를 더 할 줄 알 것이다).
 
한문 문법을 모르고, 동양 고전에 토를 다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는 그저 자기 무지의 고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이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직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진중권은 분명 나름 의미도 있었고, 여전히 일정한 의미를 갖는 유능한 학자임에 틀림없지만, 진중권의 책에서 서양 이외의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얻어듣기란, 홍세화의 책에서 프랑스 비판을 찾아내기와 같이 지난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여하튼 이런 점에서 줄리앙은 - 아직까지는 동양이나 서양에서 - 서양과 동양을 둘 다 아는 희귀한 서양 지식인이다(그의 인격에 대해 말이 많은데, 그 부분은 관심 없다).
 
줄리앙은 이 책에서 위에 적은 이 한 마디를 쓰고 있다. 이 말은 이른바 서양의 지식인은 물론, 한국의 지식인에게서도 거의 들어본 바가 없는 적확한 통찰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줄리앙이 하수가 아님을 기꺼이 인정했다.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의 독자들이 얻어 배울 바가 있다. 이런 면에서 쥘리앙은 이미 프랑스인 학자 혹은 유럽인 학자, 서양인 학자가 아니라, 그냥 '학자'이다.
 
줄리앙은 '인식론적 오리엔탈리즘'을 거의 완전히 벗어던진 최초의 주요한 서양 사상가인지도 모른다(그렇다고 줄리앙이 라캉이나,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급이라는 말은 전혀 아니고, 일정한 지적 영향력을 갖는 서양 학자들 중 여하튼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초라는 의미에서).
 
다음 학기부터 '줄리앙과 함께 읽는 동양 고전' 같은 시리즈 강의를 한번 해볼까 한다.
 
“참된 군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으니, 옛 병서에서 이르듯이 훌륭한 전술가에 대해 칭찬할 것이 없는 것과도 같다. 훌륭한 전술가는 자신의 덕을 가까이 자신의 가족 가운데 베풀며 극히 일상적인 방식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의 행동의 유익은 결코 이목을 끌지 않으며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는다. 그는 적대적인 상황을 거의 눈치 채지 못하게끔 조금씩 변화시킴으로써, 점차 얻어진 승리가 결코 찬미의 대상이 되거나 공적으로 일컬어지지 못하게 한다. 참된 효능은 항상 은미隱微한 반면, 이목을 끄는 것은 미혹케 한다. 군자와 전술가는 눈에 띄고 피상적인 행동을 거부하고, 오랜 시간 동안 깊은 곳에서 퍼져나가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맛'은 일시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맛없음 淡'은 깊고 널리 퍼져서 그만큼 더 강력히 작용하는 성질이다.”(042)


2012. 7. 1.

파블로 네루다, 숲





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 <<추억 memorias>>, 다 읽다.  그중에 내가 수업시간에도 읽었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묘사가 몇 있어 옮겨본다.

*

우선 다섯 살 정도 때의 이야기.


"언젠가 테무코에 있는 우리 집 뒤뜰에서 내 세계의 작은 물건들과 작은 존재들을 살펴보다가 나는 담장 판자에 뚫린 구멍을 보게 되었다.그 구멍으로 내다보니 거기 우리 집 뒤에 있는 풍경과 같은 것, 방치되고 황량한 풍경이 있었다.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는데, 왜냐하면 막연하게나마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홀연히 어떤 손이 나타났다 - 내 나이 또래쯤 돼보이는 작은 손이. 내가 다시 가까이 갔을 때, 그 손은 사라지고, 그 대신 거기엔 아주 근사한 흰 양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양의 털은 바래서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바퀴들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러한 사정이 그걸 더욱 진정한 것이게 했다. 나는 그렇게 근사한 양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 구멍으로 다시 내다 봤으나 그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서 내 보물을 가지고 나왔다. 솔 냄새와 송진으로 가득 찬 벌어진 솔방울인데, 내가 무척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걸 아까 그 자리에 갖다 놓고 나서 양을 가지고 왔다.

나는 그 손도 그 아이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양도 다시는 보지 못했다. 불이 나는 바람에 나는 그 장난감을 결국 잃어버리고 말았다. 거의 쉰살이 다 된 1945년 지금까지도, 완구점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남몰래 진열장을 들여다보지만, 소용 없는 노릇이다. 이제 그와 같은 양은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것이다.

나는 운 좋은 사람이었다. 형제들 사이에서 느끼는 친밀감은 인생에서 아주 근사한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우리 삶을 기르는 불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의 사랑을 느끼는 것,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우리의 잠과 고독을 지켜보고, 우리의 위험과 약함을 돌보는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사랑을 느끼는 건 한결 더 대단하고 더욱더 아름다운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존재의 범위를 넓히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묶기 때문이다.

그 교환은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인류는 하나'라는 귀중한 생각에 눈뜨게 했다. 한참 뒤에 나는 다시 그런 체험을 했는데, 이번에는 걱정과 박해를 배경으로 해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인간의 형제애를 나누려고 무슨 수지질(樹脂質)의 지구 비슷한, 그리고 향내 나는 걸 주려고 했다는 데 대해 당신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담장 옆에 솔방울을 남겨 놓았듯이, 나는 나의 말, 언어를 내가 잘 알지 못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문 앞에, 김옥에 있는 사람들, 쫓기는 사람들 혹은 외로운 사람들의 문 앞에 놓아왔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나의 어린 시절에서, 외딴 집의 뒤뜰에서 배운 커다란 교훈이다. 그것은 서로 모르고, 삶의 어떤 좋은 걸 상대방에게 건네주고 싶어 했던 두 아이의 놀이에 지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작고 신비한 선물 교환은 내 속 깊이, 불멸의 것으로 남아, 내 시에 빛을 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고 여린 싹. 자기와 다른 사람을 가만히, 조용히 위하려는 두 어린아이의 마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사실 이런 경험은 나를 포함하여 누구에게나 있었던 아마도 '아무 것도 아닌, 별 것 아닌 경험들'일테지만, 시인은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이후 지배하게 된 원리, 사랑과 나눔의 원리, 연대와 행복의 원리를 뽑아올려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우리 곁에 있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 시인 el poeta


전에 나는 고통스러운 사랑에 붙잡혀
인생을 살았고, 어린 잎 모양의 석영(石映) 조각을
소중히 보살폈으며
눈을 삶에 고정시켰다.
너그러움을 사러 나갔고, 탐욕의 시장을
걸어 다녔다, 아주 은밀한 시샘의 냄새를
맡으며, 가면들과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적대감을 들이마시며.
나는 저습지들의 세계를 살았다 -
그 돌연한 꽃, 흰 나리가
그 떨리는 거품 속에 나를 삼키고
발을 옮길 때마다 내 영혼이
나락의 이빨 속으로 빠져드는 곳.
내 시는 이렇게 태어났다 - 어려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형벌처럼
고독에서 벗어나면서,
또는 뻔뻔스러운 정원에서
그 가장 신비한 꽃을 숨겼다, 마치 그걸 묻듯이.
이렇게 깊은 수로에 사는
검은 물처럼 격리되어
나는 손에서 손으로 도망쳤다, 각 존재의
소외에로, 나날의 증오에로.
그들이 그렇게 살았음을 나는 알았다, 낯선
바다에서 온 물고기처럼, 그들
존재의 반을 숨기고, 그리고 어둑한
광막함 속에서 나는 죽음을 만났다.
문들과 길들을 여는 죽음.
벽 위로 미끄러지는 죽음.


- 파블로 네루다, <<모두의 노래 canto general>>, 1950.


1950년. 음 ... 잠깐만 옆길로 새면 ... 우리나라가 6.25 전쟁일 때, 지구의 반대편에서 칠레의 공산주의자 네루다는 이런 시를 썼다. 그리고 이 시집은 바로 또 다른 공산주의자 체 게바라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즐겨 읽곤 했다고 말하고 있는 바로 네루다의 그 시집이다.



*


새삼 체 게바라 <<자서전>>의 젊은 시절을 다룬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가 생각나 같이 올린다. 원작도 영화도 주연배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도 다 좋았던 영화이다. 아직 못 본 사람은 꼭 찾아보길. 너무 아름답고 즐거운 행복한 영화다!





아래는 영화 예고편!




자, 다시 <<자서전>>으로 돌아가서 ... 이번 이야기는 시간이 좀더 흘러 십대 중반 혹은 후반 정도의 나이였을 때의 일인듯 싶은데, 네루다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 칠레의 어느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우연히 만나게 된 프랑스 여인들의 식탁에 함께 앉아 벽 위에 울렁거리는 촛불 그림자를 바라보다 보면, 거의 몽환적인 혹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그런 에피소드이다 ...

그런데 누구나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나는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해주엇던 밤과 산림이 이제 험악해져 버렸다.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때 갑지가ㅣ 어두음이 내리는 외로운 길을 홀로 지나가던 여행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를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걸음을 멈춘 나는 그가 간혹 이런 고요한 곳에 불쑥 나타나는 싸구려 판초를 두르고 야윈 말을 탄 농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사정을 그에게 말했다.

그는 내가 오늘밤 안에 나의 목적지인 타작하는 곳까지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 지역을 구석구석 잘 알고 있엇다. 어디서 타작을 하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산 속에서 밤을 지새고 싶지는 않다고, 날이 샐 때까지 묵어갈 곳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로 그 길에서 뻗어나가는 좁은 길을 따라 10 킬로미터 정도 가면 될 거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면 멀리 이층집에서 불빛이 보일 거요."

"호텔인가요?"

"호텔은 아닐세, 젊은이. 그렇지만 그집 사람들은 자네를 반길 걸세. 그들은 프랑스 여자들인데, 임업을 한다던가? 여기서 산 지 벌써 30년이 넘은 사람들일세.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그 사람들이 재워 줄 걸세."

나는 그 말을 탄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는 늙은 말을 타고 자기 길을 갔다. 나는 길 잃은 나그네처럼 좁은 길을 따라 계속 갔다. 금방 깎은 듯이 하얗고 둥근 손톱 같은 초생달이 계단을 타고 하늘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날 밤 9시쯤 나는 멀리 집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불빛을 보았다. 나는 번개와 장애물이 하느님이 보내주신 안식처를 향하는 나의 길을 막을까 두려워 말을 재촉해 몰았다. 집터 입구의 대문을 지나 나무토막과 톱밥더미를 피해 황야 깊숙이 자리잡은 그 집의 현관에 도달했다. 몇 분이 지나고, 이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 후, 검은 드레스를 입은 , 갸날픈 몸매에 머리가 하얀 여자가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문을 조금 열고 밤 늦게 나타난 여행자를 엄격한 눈으로 훑어보며 물었다.

"누구세요? 여긴 어떻게 왔죠?"

조용한, 마치 귀신 같은 목소리가 다가왔다.

"숲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전 학생입니다. 에르나데스 댁의 타작 잔치에 초대받아 가는 길이었습니다. 전 지금 몹시 지쳤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네 자매분들이 매우 친절하다고 가르쳐 주더군요. 어디 한 구석에서라도 재워주신다면 아침 일찍 해가 뜨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들어와요." 그녀가 말했다.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녀는 나를 어두운 거실로 인도하고 두세 개의 파라핀 등불을 켰다. 등불은 단백석 유리에 금박과 동 무늬가 가미된 아름다운 아르 누보 양식이었다. 방에서는 습한 냄새가 났다. 길다란 붉은 색 천이 높은 창을 가리고 있었다. 안락의자들은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무엇 때문에 덮어 놓았을까?

그 방은 이전 19세기 풍으로 정확히 어떤 양식인지 잘 알 수 없었고 마치 꿈처럼 음침했다. 검은 옷을 입은 하얀 머리의 여인은 생각에 잠긴 듯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의 발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처음에는 이것, 다음에는 저것 또 사진첩과 부채를 소리없이 여기저기 만졌다.

나는 마치 호수에 빠져 그 밑바닥에서 계속 살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 몸이 지쳐 꿈 속에서 헤매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나를 반겼던 여자와 비슷한 여자 두 명이 나타났다. 늦은 밤이었고 매우 추웠다. 그들은 내 곁에 가까이 앉았다. 그 중 한 명은 새롱거리듯이 엷은 웃음을 띄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문을 열어 주었던 그 여자처럼 우울한 빛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대화는 모든 곳으로부터 동떨어진 시골 구석에서, 수천 마리의 벌레 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 그리고 새 소리로 가득 찬 밤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해서 알고 싶어했다. 나는 보들레를 언급하며 그의 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보들레르!"

그들이 외쳤다. "어쩌면 세상이 생긴 후 외딴 이 곳에서 누군가가 그 이름을 발음한 건 처음일 거야. 우리 집에 그의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이 있지.


*

이 근처 500킬로미터 근방에 보들레르의 훌륭한 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야. 이 산 속에는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이 없거든."

세 자매 중 두 사람은 아비뇽에서 태어났다. 셋 중 가장 나이가 적은 여자도 프랑스인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칠레에서 태어났다. 그들의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친척들은 모두 오래 전에 죽었다. 그 세 여자는 비, 바람, 제재소의 먼지에 익숙해졌고, 또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곤 몇몇의 시골 농부와 시골 하인들 밖에 없다는 것에 적응했다. 그들은 이 깊은 산 속의 유일한 집인 이 집에서 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인디오 하녀가 방으로 들어와서 제일 나이 많은 여자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복도를 지나 식당으로 갔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식당 한 가운데에는 수많은 초가 빛나고 있는 두 개의 은 촛대가 하얀 식탁보에 덮인 원형 식탁을 밝히고 있었다. 은과 크리스탈이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마치 빅토리아 여왕이 저녁 식사를 위해 나를 성으로 초대한 것처럼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헝클어진 복장에 지친 몸은 먼지로 범벅이 되어 왔는데 식탁은 왕자에게나 걸맞을 듯 했다. 나는 전혀 왕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 눈에 나는 땀에 범벅이 된, 짐을 현관앞에 부려놓은 마부같이 보였을 것이다.

나는 평생 그날처럼 그렇게 잘 먹어본 적이 없다. 집주인들은 요리 예술의 장인들이었고, 사랑하는 조국 프랑스의 요리법을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나는 요리 하나하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느 것이나 맛있고 향기가 좋았다. 지하실에서 프랑스 식의 특별한 방법으로 숙성시킨 값진 포도주를 꺼내왔다.

피곤을 내 눈을 감기게 만들었지만, 나는 이상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 자매의 가장 큰 자랑은 섬세한 요리솜씨였다. 그들에게 그 식탁은 성스러운 유산을, 긴 시간의 망망한 대양에 이해 멀어져버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의 문화를 보전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슬며시 웃다가 아주 이상한 카드뭉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우린 이상한 늙은이들이라네." 가장 나이 많은 여자가 말했다.

지난 30 여 년 동안 이 깊은 산 속까지 들어왔던 스물일곱 명이 이 집이 들러 갔다. 몇몇은 사업 때문에 왔고, 몇몇은 호기심으로, 그리고 그외는 나처럼 우연히 길을 잃고 들르게 되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이 세 사람은 이 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개인 신상기록을 간직하고 있었다. 신상 기록에는 방문한 날짜와 그 때 준비한 요리가 적혀있었다.

"우린 그 친구들이 다시 올 것에 대비해서 단 한 가지라도 같은 요리를 내놓지 않기 위해 우리가 차렸던 매번의 식단을 보관하고 있다네."

나는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파 봉지처럼 처진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새벽이 되자 나는 촛불을 켜고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마구간에서 일하는 소년이 내 말에 안장을 준비했을 때는 이미 날이 많이 밝아 있었다. 마음씨 좋은 여자분들께 컴컴한 새벽에 작별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선 이 모든 것이 너무 이상하지 않느냐고, 마술에 홀린 꿈 속 같다고 속삭였다. 그리고 이 마력을 깨지 않기 위해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갓 사춘기로 들어설 무렵인 45년 전의 일이다. <<악의 꽃>>을 품고 처녀림 깊은 곳에 유배되엇던 그 세 연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이 아껴 보관했던 옛 포도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숲 속의 잊혀져 버린 그 제재소와 하얀 집은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가장 단순한 운명은 죽음과 망각일 것이다. 어쩌면 숲이 그들과 잊을 수 없는 그날 저녁에 나를 반겨준 그 집을 삼켜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꿈 속의 호수 바닥처럼 내 기억에 선명하게 살아 있다. 나는 망망하고 거친 외로움 속에 아무런 실용적 목적도 없이 옛 세계의 우아함을 지켰던 그 세 우울한 여자들에게 찬미를 보낸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접근할 수 없는 외로운 산 속 깊은 곳에서 조상들이 손으로 직접 일군 우미한 문화의 마지막 흔적을 지켰다."


어떤가? 기이하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아닌가? 아마 누구나 기이할만큼 현실적이거나 혹은 드문 일이어서 그일이 벌어지고 있던 바로 그 순간조차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를 자문하게 되는 그러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그 이야기는 프랑스의 낭시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 일을 생각하면 그것을 생각하는 지금조차도 그것이 정말 있었던 일인가 싶을 정도로 신비로운 분위기에 휩싸여버린다. 너무도 편안하고 너무도 비현실적인 현실이었다. 다음에 언제 기회가 되면 적어보도록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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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 <<회상>>에서 내가 옮겨보려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바로 그 다음날 밤에 일어난 일이다 ...


"일찍 집을 나선 나는 채 12시가 되기도 전에 산뜻한 몸과 마음으로 에르난데스 가의 농장에 도착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외진 길을 따라온 여행과 기분좋은 잠으로 인해 나의 어린 얼굴에서는 밝은 빛이 나고 있었다.

에르난데스 가의 농장에서는 밀, 귀리, 보리 따위를 아직도 말을 이용해서 타작하고 있었다. 암말들이 기수들의 재촉하는 소리에 따라 원을 그리며 곡물더미를 밟는 것만큼 즐거운 풍경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태양은 밝고 천연의 다이아몬드 같은 공기는 온 산은 반짝이게 했다. 타작은 황금빛 축제다. 노란 짚이 황금빛 산을 이루고 여기저기에 즐거운 소리와 몸짓이 가득하다. 곡물을 담으려고 남자들이 바쁘게 가마를 들고 뛰고 여자들은 먹을 것을 준비하고, 말들은 고삐가 풀려 제멋대로 날뛰고 개들은 짖어 댄다. 어린아이들은 이삭에 달린 알곡을 뜯어내듯 말발굽에 밟히기 직전에 날쌔게 낚아채야 했다.

에르난데스 가는 아주 특이한 가족이었다. 남자들은 수염도 갂지 않고 제대로 입지도 않았다. 그들은 내의만 입은 채 허리띠에다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기름이나 곡물 먼저, 진흙 따위가 묻어 있었고 비 때문에 언제나 뼛속까지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들이나 아들들이나 조카들이나 사촌들이나 모두 똑 같았다. 그들은 몇 시간이고 기계 밑에 들어가 있거나 지붕 위 또는 타작 기계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들은 딴 이야기라고는 할 것이 없었다. 싸움을 벌일 때를 제외하면 모든 것에 대해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들이 싸움을 벌일 때는 회오리치는 태풍의 격노처럼 그들 앞에 놓인 모든 것을 뒤엎어 놓았다. 마당에 쇠고기 바베큐를 차리면 제일 먼저 손을 뻗는 것도 그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들, 개척지 사람들이었다. 혈기왕성한 그들 옆에서 나는 창백하고 왜소해 보였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나를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우리는 바베큐와 기타 연주를 끝내고 태양과 타작일이 가져다 준 곤한 몸을 간이 침대에 뉘여 밤을 보내야 했다. 결혼한 부부들과 짝이 있는 없는 여자들은 새로 자른 나무로 만든 간이 건물 안에서 잤다. 우리 남자들은 타작하는 마당에서 자야 했다. 타작하는 마당은 신선한 짚이 산을 이루었다. 마을 전체가 노란 보드라움 속에서 잠들 수 있었다.

나로서는 이렇게 집의 안락을 박탈당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잠자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몰랐다. 구두를 벗어 조심스럽게 밀짚단 밑에 넣어 베개를 만들었다. 옷을 벗어 판초를 감고 짚더미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느라 나는 벌써 하나같이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눈을 뜨고 누워 있었다. 얼굴과 팔은 짚으로 덮여 있고 맑고 찬 밤공기는 살을 파고드는 듯했다. 달은 없었지만 별들은 금방 비로 씻어낸 것 같았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잠길로 들어선 모든 사람들 위 높은 하늘에서 나만을 위해 반짝였다. 그러다가 나는 잠들었다. 얼마후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낯선 사람의 몸이 짚 속에서 내 몸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몸체에 짚이 꺾이고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림 속에 온 몸이 굳어졌다. 일어서서 고함을 쳐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꼼짝도 않고 있었다. 내 머리 곁에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손이, 크고 거친 그러나 한 여성의 손이 내게 뻗쳐 왔다. 그 손은 내 눈썹을, 눈을,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게걸스러운 입이 내 입을 덮치고 여자의 몸이 내 발끝까지 내 몸을 눌러왔다.

조금씩 조금씩 나의 두려움은 강렬한 환희로 바뀌어 갔다. 내 손은 그녀의 땋은 머리를, 부드러운 눈썹을 그리고 양귀비처럼 보드라운 눈꺼풀과 두 눈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섰다. 나는 풍만하고 탄탄한 젖가슴을, 넓고 둥근 엉덩이를, 그리고 나를 휘함고 있는 다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산 이끼와 같은 촉촉한 음모에 손가락을 파묻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잠에서 깨게 해서는 안 될 일고여덟 명의 다른 남자들의 몸이 파묻혀 있는 짚더미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사랑을 나누는 일은 얼마나 어려웠던가.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다. 다만 끊임없는 조심성이 필요했다. 잠시 후 그 낯선 사람은 돌연 내 곁에서 잠들어 버렸다. 격렬한 상태로 치달았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모르고 겁을 먹었다. 나는 조금만 있으면 날이 밝아올 것이고 잠에서 깬 일꾼들은 발가벗은 여자가 타작마당에 내곁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그만 잠들어 버렸다. 나는 깨어나자마자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나 내가 찾은 것은 움푹 파인 따뜻한 빈 자리뿐이었다. 잠시 후 새 한 마리가 노래하기 시작하더니 온 숲이 새소리로 가득 찼다. 기계의 정적이 길게 울리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각자 맡은 일을 하며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또 하루의 타작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정오가 되자 우리는 모두 긴 나무로 만든 간이 식탁에 둘러 앉았다. 나는 음식을 먹으며 곁눈질로 지난 밤 나를 찾아온 여자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어떤 여자는 너무 늙었고 또 어떤 여자는 너무 야위었고 그리고 대부분의 여자는 정어리처럼 비쩍 마른 어린 소녀들이었다. 나는 충만한 젖가슴과 길게 땋아내린 머리채를 가진 풍만한 여자를 찾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줄 로스트를 들고 나타났다. 그 남자는 에르난데스 가 사람이었다. 그 여자일 수도 있었다. 나는 식탁의 끝에 앉아 그녀를 지켜 보았다. 나는 머리를 땋은 이 아름다운 여자가 내게 눈짓을 주고 살짝 웃는 것을 틀림없이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입가에 맺힌 웃음이 내 온 몸 속에서 넓고 깊어지며 활짝 열리는 것을 느꼈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그것도 모르는, 그것도 밤에,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깰 수도 있는, 그것도 어린 청년을 성숙한 부인이 남몰래 안는 이 이야기는 어쩌면 통속극의 한 장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진실된 장면은 모두 통속극이다. 마치 당신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모든 중요한 일들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당신이 들었던 모든 진실된 장면은 당신의 머리속에서 완성된다 ...


마지막으로 보들레르. <<악의 꽃>> 판본은 우리나라 번역도 많이 있으나 문학과지성사에서 최근 나온 다음 판본을 올려보도록 하자. 사진이 크지 않으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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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baudelaire, les fleurs du mal, 1857.






우선, 어제 만난 프랑스 여인들 마지막 부분에 다음날 일어난 그것만큼 신비롭고 더 숨막히는 다른 여성의 이야기를 덧붙였으니 다들 꼭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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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네루다 자서전에서 글쓰기, 시와 관련된 몇 개의 단상을 정리해본다. 이때는 이미 네루다가 상당히 유명한 시인이 되고 나이도 제법 들었던 때의 일인 듯 싶다. 우선 당신이 작가라면 그에 대한 부러움과 나의 지금 글이 아직 그러하지 못함에 대한 절망으로 고개를 떨구게 만들, 작은 에피소드 하나.





"하루는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나를 데리러 왔는데, 나는 어디로 가는 지 알지도 못한 채 그 차에 탔다. 나의 주머니에는 나의 시집 <<가슴 속의 스페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차 안에서 그들은 내가 베가 시장의 짐꾼 조합 강당에서 진행되는 강의에 초청되었다고 설명했다.



허름한 강당에 들어섰을 때 호세 아순시온 실바의 시 <밤>에 묘사되고 있는 한기가 내 몸을 전율케 했는데 그것은 겨울이 깊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의 분위기가 내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약 오십여 명의 남자들이 나무상자나 임시방편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허리에 자루를 앞치마처럼 두르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헤어진 런닝 셔츠로 몸을 가렸을 뿐이었고,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칠레의 그 추운 7월을 허리 위로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견디고 있었다.



나는 이 특별한 관중들 앞에 놓인 책상 뒤로 가서 앉았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가진 석탄같이 검은 자신들의 눈동자를 모두 나에게 꽂았다.



[...]



이런 관중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내가 그들에게 무엇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내 삶의 어떤 것에 이들은 관심을 가질까? 나는 도무지 생각을 가다듬을 수 없었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주머니에서 책을 꺼내 들고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얼마 전에 스페인에 있었습니다. 긴 전쟁이 끊기지 않고 총성이 멈출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스페인에 대해 쓴 것을 한번 들어보시죠."



내 시집 <<가슴 속의 스페인>>은 내가 보기에도 이해하기 쉬운 책이 아니라는 걸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책은 상황을 선명하게 묘사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결국 압도적이고 고통스러운 사건들의 급류에 휩쓸려 가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몇 편의 시를 읽고, 몇 마디 말을 덧붙여 설명을 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시를 한 편 한 편 읽어 나가며 침묵의 깊은 우물 속으로 내 목소리가 떨어지고 있는 것을 들었다. 시구 한 줄 한 줄을 넋을 잃은 듯이 따르는 그들의 눈동자와 검은 눈썹을 보며 나는 내 시가 표적을 제대로 맞추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 시의 소리에 그리고 내 시와 저 버림받은 영혼들을 잇는 자석 같은 힘에 사로잡힌 듯 계속 읽어나갔다.



시낭송은 한 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내가 강당을 떠나려 하자 한 사람이 일어섰다. 그는 허리에 자루를 두른 사람들 중 하나였다.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껏 우리를 이렇게 감동시킨 것은 이제껏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말을 맺으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젖은 눈동자들과 거친 박수 사이를 걸어 거리로 나왔다.



이러한 불과 얼음의 시련을 겪은 시인이 어떻게 그 뒤 이전과 같을 수 있겠는가?"





네루다, 그는 나와 꼭 같은 꿈을 품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 혹은 그 말이 지나치다면, 자신이 자신만큼이나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글을 썼던 이들로부터 돌려받았다.



누가 네루다가 행복한 시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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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자서전>> 곳곳에서 내가 이곳에 옮겨놓기 위해 표시해 놓았던 시, 문학, 글쓰기 혹은 이미지에 관련된 단상들 몇 개를 적어본다.





"그는 많은 것을 보고 산 사람으로, 여전히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 이미지의 잔영 속에 사는 사람이었다."



"젊은 작가는 외로움의 몸서리 없이는, 설령 그것이 단지 상상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글을 쓸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이나 사회의 맛이 깃들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가끔씩 폴 엘뤼아르와 시간을 허비하는 시적 환희를 즐기곤 했다. 만일 시인들이 여론조사에 진실하게 대답한다면,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그 비밀은 누설되고야 말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시간을 허비하는 방식을, 시간만큼이나 오래된 방식들을 갖고 있다. 폴과 함께 있으면 나는 낮밤이 바뀌는 것도 다 잊어 버렸고, 우리가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든 그렇지 않든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이론으로 자기 본성을 점점 죽여나간 코스모폴리탄이었다."



"내가 어떤 돌들을 작은 오리와 비교했다고 해서 한 우루과이의 비평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작은 오리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작은 동물들은 시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고 못박고 있었다. 문학적 교양은 이런 정도의 경박함에 이르렀다. 그들은 창의적인 예술가들에게 숭고한 주제들만을 다루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틀렸다. 우리는 교양의 심판자들이 가장 하찮게 보는 것으로 시를 만들 것이다."





그걸 이해했어? 이 마지막 말이 사소하고 반복되는 별 것 아닌 이야기처럼 보이는 만큼 이 이야기가 정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이야기라는 걸?






2008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