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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7.

le rideau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84137





"불행은 젊은이들의 실제 모습이다. 젊은이들은 편협한 교리를 주창하고 실행하며, 피와 비명과 소요와 잔인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전 유럽이 젊음을 믿었고 전 유럽이 젊음을 몰아붙여 정치와 국가적 사안에 관여하게 했다."(시오랑의 말, 203)


"내게 부족했던 것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지식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지식이 , 플로베르가 말했을 법한, 인류의 내용을 파악하는, 역사적 상황의 '혼'으로 파고드는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한 소설을 통해서, 위대한 한 소설을 통해서 그 당시 체코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결정을 감내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소설 한 권이 쓰인 적 없다. 바로 이것이, 그 어떤 것도 위대한 소설의 부재를 메워 줄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경우 중 하나이다."(226)


"온통 들썩이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젊은 [에메] 세제르의 한 편의 시 <귀향 수첩>(1939)이다. 검둥이들이 사는 서인도제도의 한 섬으로 검둥이 하나가 귀환한다.(세제르는 흑인이라고 하지 않고 일부러 검둥이라고 말한다.) 어떤 낭만도 없이, 어떤 이상도 없이, 이 시는 거칠게 '우리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한다. 아, 그렇다. 정말 서인도제도에 사는 흑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17세기에 아프리카에서 그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디에서 온 걸까? 그들은 어떤 부족에 속해 있었던 것일까?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는 잊혀 버리고 말았다. 처형되었다. 배의 화물칸에 몸을 싣고 떠난 긴긴 여정에 의해, 시체, 비명, 눈물, 피, 자살, 암살 사이에서 처형된 것이다. 지공을 통과한 이 여정 이후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망각만이, 본질적이고 토대가 되는 망각만이 남았을 뿐.

망각의 잊을 수 없는 충격은 노예의 섬을 꿈의 극장으로 변모시켰다. 실제로 마르티니크인들이 그들 고유 삶을 상상하고, 그들의 존재론적 기억을 창조할 수 있던 것은 전적으로 꿈에 의해서였으니까. 망각의 잊을 수 없는 충격은 민담 작가들을 정체성을 탐구하는 시인들의 반열로 끌어올렸으며, 나중에 그들의 환상과 광기와 더불어 숭고한 구전 유산을 소설가들에게 물려줬다. 이 소설가들을, 나는 좋아했다."(228-229)


 



 

2013. 3. 29.

알렉산드르 푸시킨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1799-1837
 
 
 
 
 
 
 
 
 
 
 
 
 
 
 
 
"일의 흐름을 거스르지 마라."(보리스 고두노프, 209)
 

***


 
"살리에리 - 사람들은 지상에 정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에도 정의는 없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225)
 
 
"살리에리 - 오, 하늘이시여!
정의란 대체 어디 있는가.
신성한 재능이, 불사의 천재가
불타는 사랑과 자기 희생과 노력과 열정과
간절한 기도의 보답으로 주어지는 대신
저 게으른 망나니, 미친 놈의 머리통을 비추고 있다...?
오, 모차르트, 모차르트!"(228)
 
 
"모차르트 - 우리는 소수자지요.
선택받은 인간으로
저열한 이익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빈둥거리는 행운아들로
아름다움 하나만을 섬기는 사제들이지요."(241)
 
 
 
***

 
 
"이항 대립은 구조주의 방법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그것은 문학의 복합성에 접근하는 보조수단이며 무기인 것이다. 이원항, 이분법, 병렬주의, 대립의 원리, 양극성 등의 개념들은 이항 대립의 다른 표현이다. 이항 대립은 의미 생성의 기초가 된다. 어떤 텍스트에서 이항 대립 쌍들이 발견되는 한 그 텍스트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33, 옮긴이글)
 
 
 
 
 
 
 

2013. 3. 16.

제인 에어 2





 
 
 
 
Charlotte Brontë (1816 –1855)
 









 




"그러나 젊은처럼 외고집을 부리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무경험처럼 맹목적인 게 또 어디 있을까?"(13)



"저를 좋은 부동산 투기나 물색하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로 아시나요?"(49)



"나는 이 조그마한 한 사람의 영국 아가씨를 영양(羚羊)처럼 부드러운 눈을 가지고 있고 극락의 천녀(天女)처럼 아름다운 터키 황제의 후궁들 전부하고도 바꾸지 않겠어.! / 터키 후궁의 비유가 또 내 비위를 건드렸다. 전 터키 후궁의 대역 같은 건 절대로 안 하겠어요. 그러니 결코 그런 것과 똑같이는 보지 마세요."(64)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일기 시작했어요. 어제는 오늘처럼 그렇게 사납고 거친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음울하고 신음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었어요. 저는 당신께서 집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이 방에 들어와서 비어 있는 의자와 불기 없는 난로를 보자 소름이 끼쳤어요. 그 뒤 얼마 있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오질 않았어요. 무언지 모르게 꺼림칙한 내심의 설렘이 저를 괴롭히는 거예요. 바람은 점차로 거세지고 제 귀에는 서글픈 낮은 목소리를 감싸고 있는 것같이 들렸어요. 그러나 그게 집 안에서인지 밖에서인지는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바람이 문득문득 숨을 죽일 적마다 그 소리는 분명하지 않게 구슬피 들려오는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전 그게 어디 먼 곳에서 개가 짖고 있는 소리라고 판단했어요. 그러니까 그 소리가 멎자 저는 마음이 한결 놓였어요. 잠이 들고서도 꿈속에서 바람 부는 캄캄한 밤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를 가르고 있는 어떤 장애물이 있다는 이상하고도 서운한 느낌을 경험했어요. 첫잠이 들면서 줄곧 저는 꿈속에서 꼬불꼬불한 낯선 길을 걷고 있었어요. 주위는 온통 깜깜하고 비가 저를 후려치고 있었어요. 저는 조그만 어린애를 하나 안고 있었는데,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약하디 약한 어린애였어요. 그 어린애는 싸늘한 제 팔에 안겨 떨면서 제 귀에다 대고 가련한 목소리로 울어대는 것이었어요. 저는 당신께서 저보다 훨씬 앞서서 가신 걸로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쫓아가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썼어요. 그리고 당신을 부르고 가디려달라고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온몸은 꼼짝도 할 수가 없고 목소리도 말이 되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러는 동안에 당신은 자꾸만 멀리멀리 가버리시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86-87)




"나는 하느님이 내려주시고 인간에 의해 인정된 법을 지키리라. 지금과 같이 미치지 않고 바른 정신일 때 내가 받아들이는 원칙대로 살아나가리라. 법이나 원칙은 유혹이 없을 때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지금과 같이 육체와 정신이 그 준엄성에 반기를 들었을 때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법과 원칙은 엄정한 것이며 침범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개인의 편의를 위해 침범되어도 좋은 것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것들은 가치 있는 것이다. 나는 항상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내가 이제 그것을 믿을 수 없다면, 그건 내 정신이 이상해진 탓이다. 아주 미쳐서, 혈관은 불 같이 달아오르고 심장은 박동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빨리 뛰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전부터 품어온 의견,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결심뿐이다. 나는 거기에 꿋꿋이 발을 디뎌야 하는 것이다."(160)





"이렇게 말하면 좀 지나칠지 모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영국의 농민은 유럽의 어떤 나라의 농민보다도 가장 교육을 많이 받고 가장 예의 바르고 가장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프랑스나 독일의 농촌 부녀자들을 보아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도 내가 가르친 모턴의 소녀들과 비교하면 무지하고 조야하고 어리석어 보였다."(301)




"그녀가 자라남에 따라, 건전한 영국 교육은 그녀의 프랑스적 결점을 많이 교정해 주었다."(423)




***





1권을 읽고 거의 1년이 다 되어 2권을 읽었다. 다시 읽으니, 그녀와 이 소설의 무수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반유대주의자에, 대영 제국주의자, 오리엔탈리스트인 것이 보인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처럼, 카뮈의 모든 소설처럼.


그리고 제인 에어(사실은 샤를로트 브론테) 성격의 결점이 보인다. 물론 치명적인 결점은 그녀가 아직도 자신의 전통 도덕, 영국 성공회 목사의 딸인 그녀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을 진심으로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영국 최초의 낭만주의 연애소설'을 쓴 사람이지만, 사실은 최후의 중세인이다. 그녀는, 니체의 말대로, '낙타'인 것이다. 나는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조금도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소설적으로는 독자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특히 그녀의 - 아마도 여성만이 쓸 수 있을(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상하게 여성 화자(話者)가 사랑을 말하는 것이 좋았다) -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슬픔에 대한 간절한 묘사'는 너무도 섬세하다. 아름답다. 그녀가 서른 아홉에 결혼하여 다음 해에 임신한 상태에서 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슬픈 느낌으로 남는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1846년에 쓰여 1847년에 발표된 이 소설의 국역본에 근대 혹은 현대라는 번역어가 대략 4-5회(1권 175, 2권 45, 229, 264) 나오는데, 원래 용어가 무엇이었는지 원문을 대조해 확인해 보아야 겠다.













2013. 2. 28.

시인이 뽑은 좋은 시집들




* 아래는 제가 좋아하는 문학평론가 김익균 선생님께 부탁드려 받은
우리나라 좋은 시인, 시집 목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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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결과는 그때그때 다르니까 대략 경향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열 명 정도는 전집을 읽는 게 좋겠죠.



* 문학사 최고의 시집 설문조사(1위 10위) (2012년 『시인세계』)
1위 김소월 『진달래꽃』(1925년)
2위 서정주 『화사집』(1941년)
3위 백석 『사슴』(1936년)
4위 한용운 『님의 침묵』(1926년)
5위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년)
6위 정지용, 『정지용시집』(1935년)
7위 이상, 『이상선집』(1956년)
8위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1959년)
9위 임화, 『현해탄』(1938년)
10위 이육사, 『육사시집』(1946년)

전집을 읽어 주면 좋은 시집으로
임화, 김영랑, 이용악, 오장환, 김춘수, 김종삼, 신동엽 등

* 그 외의 추천 시집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년)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년)
 
 
신경림 『농무』(1973년)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1989년)
박노해, 『노동의 새벽』(1984년)
백무산 『만국의 노동자여』(1988년)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1981년)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1988년)
고은 『만인보』(1986~2010년)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1982년)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1978년)
정호승 『서울의 예수』(1982년)
황동규 『삼남에 내리는 눈』(1975년)
고정희 『초혼제』(1983년)『지리산의 봄』
오규원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년)『두두』(2009년)
최승호 『세속도시의 즐거움』(1990년) 『대설주의보』
허수경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년) 『혼자 가는 먼 집』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2005년)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년)
신용목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2007년)『아무 날의 도시』(2012년)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2012년)
* 그외

나희덕, 장석남, 문태준, 김선우, 진은영, 서효인, 유승도, 김진완

 
 
 
 

2012. 11. 11.

소설가는 너그러운 인종인가 - 무라카미 하루키 강연

소설가는 너그러운 인종인가
- 무라카미 하루키 강연
 
MONKEY BUSINESS 2013/14 가을겨울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제1회 [소설가는 너그러운 인종인가]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라고 말하면 처음부터 이야기의 입구가 너무 넓어짐으로, 일단 소설가라고 하는 것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그 편이 더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고 –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도 실제로 한 사람 있긴 한 거지만 – 비교적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보는 대로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소설가의 대다수는 –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 원만한 인격과 공정한 시야를 갖고 있다고 보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또한 보고 있자면, 그다지 큰 목소리로 말하긴 뭣합니다만, 칭찬의 대상이 되기 힘든 특수한 성향이나, 기묘한 생활습관이나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는 (아마도 92퍼센트 정도가 아닐가라고 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실제로 입으로 말하냐 안 말하냐는 별개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것, 쓰고 있는 것이 가장 옳다. 특별한 예외는 있지만, 다른 작가는 적든 많든 모두 틀려먹었다’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에 따라 하루하루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 인종을 친구나 이웃으로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주 겸손하게 표현하더라도, 그다지 많을 것 같진 않습니다.
작가들끼리 두터운 우정을 맺고 있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만,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 눈썹에 침을 바릅니다. 그런 일도 있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친밀한 관계는 그다지 오래 가지 않을 거라고. 작가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종이고, 역시 자존심이나 라이벌의식이 강한 사람이 많고, 작가끼리 묶어놓으면 잘 되기 보다는, 잘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저도 몇 번이고 그런 경험을 해봤습니다.
유명한 예로는, 1922년 파리에 있는 한 디너 파티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가 동석한 일이 있었지요. 하지만 두 사람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거의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대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할까, 침을 넘기며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서로 자존심같은 것이 강했던 거지요. 흔히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영역에 있어서 ‘배타성’이라는 것을 거론한다면 – 간단히 말하면 ‘텃새’의식에 대해서 – 소설가만큼 넓은 마음을 가지고 너그러움을 발휘하는 인종은 아마 달리 없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가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굳이 말한다면 몇 개 안 되는 아름다운 속성 중 하나가 아닐까, 저는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설명해봅시다.
 
가령 어떤 소설가가 노래를 잘하고 가수로서 데뷔한다고 합시다. 혹은 그림에 관심이 있어 화가로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고 칩시다. 그 작가는 일단 틀림없이, 적지 않은 저항을 받고, 야유와 조소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뭐 잘 났다고 돼도 않는 짓을 하고’ 라던가 ‘초자인 주제에 그만큼의 기술도 재능도 없으면서’ 같은 말을 들을 것이고, 전문적인 가수나 화가로부터는 냉대받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래그래, 잘 왔어요’같은 따뜻한 환영을 받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극히 한정된 장소에서 극히 한정된 형식의 것일 뿐입니다.
저는 저의 소설을 쓰면서, 여태까지 삼십 년 남짓 적극적으로 영미문학의 번역을 해왔습니다만, 처음에는(혹은 지금도 여전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꽤 반발을 샀습니다. ‘번역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인이 함부로 발을 들이밀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라던가 ‘작가의 번역이라니, 민폐스러운 취미생활이다’같은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습니다. 또한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을 썼을 때는, 논픽션 전문 작가들로부터 꽤 심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논픽션의 법칙을 모른다’라던가 ‘싸구려 최루성글이다’라던가 ‘경박한 장난짓’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른바 장르적 ‘논픽션’이 아니라 제 나름대로 생각한 말 그대로 ‘비 픽션’이랄까, 즉 ‘픽션이 아닌 작품’을 쓴 것일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논픽션’이라는 성역의 문지기를 하던 호랑이의 꼬리를 밟아버린 셈입니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고, 논픽션글에 ‘고유의 룰’이 있다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처음 그 일을 겪고는 상당히 황당했었습니다.
어쨌든 뭐라도, 자기 전문 외의 것에 발을 들이밀면, 그 분야의 전문가는 일단 좋은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백혈구가 체내의 이물질을 없애려고 하는 것처럼, 그 접근을 쫓아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질기게 하고 있으면 그 사이 점점 ‘그래, 뭐 하는 수 없지’같은 느낌으로 묵인되어, 동석이 허락되는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초기엔 정말 반발이 심합니다. ‘그 분야’가 좁으면 좁을 수록, 전문적이면 전문적일 수록, 또한 권위적일 수록, 사람들의 자존심이나 배타성도 강하고, 거기서 받는 저항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가령 가수나 화가가 소설을 쓴다고 해서, 혹은 번역가나 논픽션작가가 소설을 쓴다고 해서, 소설가는 그걸로 싫은 표정을 지을까요? 아마도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가수나 화가가 소설을 쓰고, 번역자나 논픽션작가가 소설을 쓰고, 그 작품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소설가가 ‘외부인이 제멋대로 굴고 말야’처럼 화를 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욕을 하거나, 야유하거나 발을 걸어 넘어트리거나 같은 일도 최소한 제가 들은 바로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소설이 전문이 아닌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기회가 생기면 얼굴을 맞대고 소설이야기를 하거나, 때로는 격려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물론 뒤에선 작품의 뒷담화를 까거나하는 정도의 일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소설가끼리도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고, 말하자면 일상적 영업행위입니다. 외부업종자의 소설진입은 특별히 다를 게 없습니다. 소설가라고 하는 인종은 많은 결핍을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나와바리’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워 보입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답은 꽤 확실합니다. 소설 따위 – ‘소설따위’라는 말이 꽤 난폭하지만 말입니다 – 쓰려고 생각하면 거의 누구라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피아니스트나 발레리나로서 데뷔할 때는, 작은 어린이시절부터 길고 고통스러운 훈련이 필요합니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전문지식과 기초적인 기술이 필요합니다. 일단 화구도 사놓을 필요가 있지요. 등산가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체력이나 테크닉이나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소설이라면, 문장을 쓸 수 있고 (문장은 일단 누구라도 쓸 수 있습니다), 볼펜과 노트가 곁에 있다면, 그리고 나름의 작화능력이 있다면, 전문적 훈련따위 없어도, 일단은 쓸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일단 소설이라는 형태로는 됩니다. 대학 문창과에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소설을 쓰기 위한 전문지식이라는 것은, 있는 듯 없는 것이니까요.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우수한 작품을 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저 개인의 경우를 예로 들긴 뭣합니다만, 저만해도 소설을 쓰기 위한 훈련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대학의 연극학과라는 곳에 가긴 했습니다만, 시대상황이라는 것도 있어, 사실상 무엇하나 공부도 안 하고, 머리도 기르고, 수엽도 기르고, 더러운 옷차림으로 언저리를 빈둥빈둥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작가가 되려는 의도도 없었고 습작을 한 것도 아니고, 어느 날 불현듯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첫 소설(같은 것)을 써서 그걸로 문예지의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잘 모른 체로 직업적 작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것일까?’라고 스스로도 갸우뚱했을 정도입니다. 암만 해도 너무 간단했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문학을 장난으로 보냐’며 불쾌하게 생각하는 분이 있겠지만, 저는 그저 그 사안의 기본적인 실존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입구가 넓은 표현형태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입구의 넓이야말로,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는 소박하고 위대한 에너지원의 중요한 일부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누구라도 쓸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제 해석에 의하면, 소설에 대한 비방이 아니라, 도리어 칭찬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는 누구라도 내키면 간단히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링같은 것입니다. 줄의 틈도 넓고 편리한 디딤대도 준비되어 있지요. 링도 꽤 넓습니다. 잠입을 저지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관도 그다지 시끄럽지 않아요. 현역레슬러들도 – 즉 이 경우엔 소설가에 해당하지만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어서 ‘그래, 자 누구라도 다 올라와 보슈’같은 분위기입니다. 싹싹하달까, 쉽다고나 할까, 융통성이 있다거나 할까, 말하자면 꽤 대충 에라이 같은 분위기라는 겁니다.
하지만 링에 올라가는 것은 간단이라도 거기에 오래 머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소설가들은 물론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을 한 두개 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설을 오래 써나가는 것, 소설을 써서 생활을 지탱시킨다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것, 이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에겐 일단 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단언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재능은 물론 필요하고, 거기에 얼마간의 기개도 필요합니다. 또한 인생의 다른 여러가지 일과 마찬가지로 운과 만남 같은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떤 종류의 ‘자격’같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지고 있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원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후천적으로 고생해서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자격’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것은 알려지지 않고 정면으로 이야기되는 일도 드뭅니다. 아마도 그것이 시각화도 언어화도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소설가로서 계속 살아나가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일인지, 소설가들은 몸으로 체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다른 전문직종의 사람이 다가와서, 줄 사이로 들어와, 소설가로서 데뷔하는 것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너그러운 것일 테지요. ‘자, 올 테면 와보세요’같은 태도를 많은 작가들이 보입니다. 혹은 누가 새롭게 왔다고 해도 그다지 신경을 안 씁니다. 그 신참이 그 사이 링에서 떨어져나갔다고 해도, 혹은 내가 스스로 내려간다고 해도 (아마 대부분 다 그런 경우이지만), ‘저런저런’ 이라던가 ‘건강하세요’같은 것이 되고, 만약 그나 그녀가 나름대로 노력해서 링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에 대해선 경의를 품습니다. 그리고 경의는 –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 공정하고 정당하게 댓가를 받아야할 것입니다(랄까, 받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소설가가 너그러운 것은, 문학업계가 제로섬사회가 아닌 것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즉 신인작가가 한 명 등장했다고 해서, 그 대신 전부터 있던 작가가 한 명 직장을 잃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노골적으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프로 스포츠의 세계와는 그런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지요. 신인선수가 한 명, 팀에 새로 들어가서 기존의 선수가 한 명 빠지게 된다,같은 것은 문학의 세계에선 일단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소설이 10만부 팔렸다고 해서, 다른 소설이 10만부 덜 팔리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새 작가의 책이 팔리는 것으로 인해 소설전체가 활기를 띄고, 업계전체에 윤기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긴 시간을 두고 보면, 어떤 종류의 자연도태는 적절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넓다고 해도, 그 링에는 적정인원이라는 게 있으니깐요.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감개를 느낍니다.
저는 이래저래 삼십 년에 걸쳐 소설을 써왔고 전문작가로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대로 한다면 ‘문예세계’라고 하는 링 위에서 어떻게든 삼십 년 머물고 있고 예전 표현으로 한다면 ‘붓 하나로 먹고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좁게 보면 나름의 성취라고 해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 삼십 년사이, 꽤 많은 사람들이 신인작가로서 데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적지 않은 숫자의 작품들이 그 시점에서는 꽤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평론가의 칭찬을 받고 여러가지 문학상을 받고 세간의 화제도 되고 책도 어느 정도 팔렸습니다. 장래가 촉망되었습니다. 즉 각광을 받고 장대한 테마송을 달고 링에 올라온것이지요. 하지만 이십 년 전, 삼십 년 전, 데뷔한 사람들 중 어느 정도가 현재도 실질적으로 현역소설가로서 활동하냐를 물어보면, 그 숫자는 솔직히 말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라고 할까, 실제로는 극소수입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많은 ‘신진작가’들이 모르는 사이 조용히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습니다. 혹은 – 어쩌면 이 케이스가 더 많을지 모르지만 – 소설을 쓰는 것에 질리거나 소설을 계속 쓰는 것이 피곤해져서, 다른 분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쓴 작품의 대부분은 – 당시엔 그걸로 화제도 되고 각광도 받았습니다만 – 지금은 일반사회로부터 잊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 작품들은 지금 일반서점에서 찾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소설가의 정원수에는 제한이 없지만, 서점의 공간은 제한되어 있으니깐요.
제가 생각하기에,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다지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 적합한 작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지성이나 교양이나 지식은 소설을 쓰는 데에 필요합니다. 이런 저라도 최소한의 지성이나 지식이 겸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정말 그러냐’고 대놓고 물어보면 사실 그다지 자신은 없습니다만.
하지만 너무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은, 혹은 일반사람을 훌쩍 뛰어넘는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설을 쓰는 일엔 적합하지 않지 않을까 저는 늘 생각합니다. 소설을쓴다 – 혹은 이야기를 만든다 – 라는 행위는 꽤 저속 low gear로 행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체감으로 치자면, 걷기보다는 빠르지만 자전거로 가는 것보다는 늦는 정도의 속도입니다. 의식의 흐름이 그 속도에 적합한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소설가는 자기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바꿔 표현하려고 합니다. 원래 있던 형태와, 거기에서 우러나온 새로운 형태 사이의 ‘격차’를 통해 그 격차의 다이내미즘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꽤 둘러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 것입니다.
자기 머리 속에 있는 어느 정도의 선명한 윤곽을 가진 메시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을 하나하나 이야기로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그 윤곽을 그대로 스트레이트하게 언어화한 편이 이야기는 빠르고, 보통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전환하려면 반년 정도 걸릴지 모르는 메시지나 개념을 그대로의 형태로 직접표현을 하면 단 삼 일로 언어화시킬 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마이크 앞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십 분이면 퉁 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은 물론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듣고 있는 사람도 ‘아 그런 뜻이구나’라며 무릎을 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것이 ‘머리가 좋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이야기라고 하는 fuzzy한, 혹은 실체를 알 수 없는 틀을 가지고 나오거나 혹은 제로부터 무언가를 새로 정립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지식을 유기적으로 논리적으로 조합해서 그대로 언어화하면 주변 사람들은 ‘흠흠’하며 납득하고 감탄해줄 것입니다.
적지 않은 수의 문학평론가가, 어떤 종류의 소설이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 혹은 이해한다고 해도 그 이해를 유용하게 언어화 이론화할 수 없다 – 고 하는 이유는 아마 그 언저리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말해, 소설가들에 비해 머리가 너무 좋고, 머리회전이 너무 빠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라고 하는 느린 vehicle에, 제대로 신체를 맞춰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이들, 텍스트의 이야기의 페이스를 일단 자기 페이스대로 번역해서, 그 번역된 텍스트에 따라 자신의 논지를 설파합니다. 그런 작업이 적절한 경우도 있지만 별로 적절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별로 잘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그 텍스트의 페이스가 단지 느린 것 뿐만 아니라 느려터진 것 위에 중의의, 복합적인 것을 품은 경우에는, 그 번역작업은 점점 더 곤란한 일이 되어갑니다. 평론가가 자체적으로 번역한 그 텍스트는 곡해된, 굴절된 것이 되어버립니다. 물론 진정 그릇이 큰 총명한 평론가가 있다면 그런 작업도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아쉽지만 여러분도 아시다피시, ‘진정 그릇이 큰 총명한’인간은 어떤 분야에서도 꽤 희박한 존재입니다.
그건 그렇고,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들, 총명한 사람들이 – 그 대부분은 다른 업종사람들이지만 – 소설을 한두개 쓴 후, 그대로 어디론가로 이동해간 모양새를 전 몇 번이고 이 눈으로 목격해왔습니다. 그들이 쓴 작품의 많은 경우는 ‘잘 쓴’ 소설이었습니다. 몇 개의 작품에는 신선한 쇼크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소설가로서 링에 오래 머무는 일은, 극히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조금 견학하고선 그대로 나가버렸다’라는 인상마저 받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 분들이 소설을 쓰는 일에, 생각했던 것 만큼의 이점(merit)을 발견못한 것 같습니다. 한두개 소설을 쓰고 ‘아, 알겠다 소설이란 이런 거였구나’라고 납득하고 그대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고 추측합니다. 이거라면 다른 걸 한 편이 효율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저도 그 기분을 잘 압니다. 소설을 쓴다고 하는 것은 어쨌든 효율이 나쁜 작업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을 반복하는 작업입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설은 그것을 별도의 문맥으로 바꿔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 바꿔 말하기 속에서 불명확한 점, fuzzy한 부분이 있다면, 또 그것에 대해서 ‘그것은말야, 말하자면 이런 거란다’라는 이야기가 다시 시작합니다. 그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거야’라고 하는 것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은 ‘바꿔 말하기’인 것이지요. 열어도 열어도 그 안에서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인형같은 것입니다. 이만큼 효율이 나쁜, 돌아가는 작업은 어딜 가도 없습니다. 처음의 테마가 그대로 명확하고 지적으로 언어화되면 ‘말하자면’이라는 바꿔말하기 작업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데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는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다,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설가의 입장에선 그러한 불필요한 곳, 돌아가는 곳에서 진실이나 진리가 제대로 잠복해있다고 합니다. 뭔가 합리화 같습니다만, 소설가는 대체적으로 그렇게 믿고 자기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소설같은 건 없어져도 상관없다’라는 의견이 있어도 당연하고 그와 동시에 ‘세상에는 아무래도 소설이 필요하다’라는 의견이 있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는 시간을 취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틀에 따라도 달라집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효율성이 안 좋은 돌아가는 것들과 효율성이 좋은 기민한 것들이 표리가 되어 우리들이 사는 세계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느 쪽이 결여되도(혹은 압도적 열세가 되도)이 세계는 아마도 뒤틀린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다지 머리가 나쁜 인간은 소설은 쓰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도 소설은 못 쓴다 – 적어도 장기에 걸쳐서 오래 써나가는 것은 어렵다 – 라는 것입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구린’작업입니다. 거기에는 ‘스마트’한 요소는 거의 보기 힘듭니다. 혼자 방에 쳐박혀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데’라며 문장을 매만집니다. 책상 앞에서 열심히 머리를 쓰고 하루종일 걸려 겨우 한 줄의 문장의 밀도를 아주 조금 높였다고 해서 누가 박수를 쳐주는 것도 아닙니다. ‘잘 했다’라고 누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혼자서 납득하고 혼자서 ‘그래그래’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입니다. 나중에 책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 한 줄의 문장의 밀도에 주목해주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작업인 것입니다. 손은 드럽게 많이 가고 참 테 안 나는 일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일년 정도 들여서 긴 핀셋을 써서 성냥같은 걸로 세밀하게 배 한 척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소설을 쓰는 것은 작업으로선 그것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본질적으로 공통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장편소설이라도 되면 그런 세심한 밀실작업을 매일매일 해나가야만 합니다. 끝도 한도 없이 해야만 합니다. 그런 작업이 원래 습성에 맞는 사람이 아니면, 혹은 그것을 괴로워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오래 해나갈 수 있는 성질의 일이 못됩니다.
어렸을 적, 어떤 책에서, 후지산에 구경간 두 사람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다 후지산을 처음 봅니다. 머리가 좋은 쪽의 남자는 후지산을 몇 개의 각도에서 본 것만으로 ‘아, 후지산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알겠어, 이런 부분을 멋지다고 하는구나’라고 납득하고 그대로 돌아옵니다. 무척 효율이 좋지요. 하지만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은 쪽의 남자는 그리 간단히 후지산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혼자 남아서 실제로 자기 다리로 후지산 정상까지 올라가봅니다. 그렇게 하면 시간도 걸리고 수고도 듭니다. 체력은 소모되고 지칩니다. 그리고 겨우 그 끝에서 ‘아, 이게 후지산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한다고나 할까, 일단 정리를 합니다.
소설가라고 하는 종족은(적어도 그 대부분은) 후자의, 즉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은 남자 쪽에 속하게 됩니다. 실제로 자기 다리를 써서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후지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못하는 타입입니다. 아니, 몇 번 올라가봐도 아직 잘 모르겠다, 혹은 오르면 오를 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진다,라는 것이 소설가들의 본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효율 이전’의 문제이지요. 이건 아무리 봐도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못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소설가는 다른 업종의 재능있는 사람들이 어는 날 불쑥 다가와서 소설을 쓰고, 그것이 평론가나 세간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해도 딱히 놀라지는 않습니다. 위협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소설을 장기간에 걸쳐 계속 써나간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임을, 소설가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능있는 사람들에게는 재능있는 사람들의 페이스가 있고, 지식인에게는 지식인들의 페이스가 있고, 학자에게는 학자의 페이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페이스는 댁의 경우, 길게 보자면, 소설의 집필에는 걸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직업적 소설가 속에서도 ‘재능있는 사람’은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세속적으로 머리가 좋은 것 뿐만이 아니라, ‘소설적’으로도 머리가 좋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본대로라면, 그렇게 머리가 좋은 것만으로 해나갈 수 있는 세월은 – 쉽게 말하면 ‘소설가로서의 유통기한’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 잘해봤자 10년 정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것을 넘기면 단순히 머리가 좋은 것을 뛰어넘는, 보다 영속적인 자질을 필요로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느 시점에서 칼날의 예리함은 다른 종류의 예리함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런 전환포인트를 제대로 옮겨간 사람은 작가로서 한층 더 커지고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습니다. 그것을 못 옮겨간 사람은 적든 많든 도중에 모습을 지우게 – 혹은 존재감이 옅어지게 – 되고 맙니다. 혹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에 적절히 안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설가에게 있어서 ‘정착해야만 하는 장소에 적절히 안착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창조력이 감퇴한다’라는 것과 거의 동의어라고 보여집니다. 소설가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늘 이동하고 있지 않으면, 죽어버립니다.


자, 이래서 저는, 긴 세월 질리지도 않고 소설을 써나가는 작가들에 대해 – 즉 저의 동료들에 대해 – 경의를 품고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그들의 작품 하나하넹 대해서는 개인적인 호불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이십년, 삼십 년에 걸쳐 직업적 소설가로서 활약하고, 혹은 살아남고, 각자 나름의 고정독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소설가로서 무엇인가 근사하고 강한 핵(core)과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내적인 동기부여(drive). 그것이 소설가라고 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질, 자격,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소설을 하나 써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우수한 소설을 하나 쓰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쉽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계속 써나가는 것은 정말 꽤 어렵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무언가 특별한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재능’과는 조금 별개의 곳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단 하나입니다. 실제로 물 속으로 들어가서 뜨는지 안 뜨는지 알아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가혹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소설같은 것은 안 써도(도리어 안 쓰는 편이) 인생은 총명하고 유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을 수 밖에는 없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나갑니다. 그러한 분들은 물론 우리들은 마음을 열고 환영합니다. 링으로 올라온 것을 환영합니다.
글/무라카미 하루키
번역/임경선
 
 
 

2012. 7. 27.

무라카미 류




<라인> - 무라카미 류 / 양억관


"그가 보고 들은 한, 이 세상에도 자기 자신에게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73)



넌,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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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수프> - 무라카미 류 / 정태원

<스트레인지 데이스> - 무라카미 류 / 양억관

<반도에서 나가라 (전2권 세트)> - 무라카미 류 / 윤덕주

<교코> - 무라카미 류 / 양억��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개정판)> - 무라카미 류 / 한성례

<악마의 패스> - 무라카미 류 / 이윤정

<코인로커 베이비스 1> - 무라카미 류 / 양억관


구원, 그리스의 빛






<영혼의 자서전. 1> - 니코스 카잔차키스 / 안정효

       
"내가 벅찬 재앙이 닥치자마자 형언하기 힘든 비인간적 기쁨에 사로잡힌다는 사실을 나는 이때 처음 깨달았다. 숙모 칼리오페의 집이 홀랑 타버렸을 때 처음으로 불을 구경하던 나는 누가 목덜미를 잡아 집어던질 때까지 불 길 앞에서 깡충깡충 뛰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우리 선생이던 크라사키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웃지 않기 위해 애를 먹었다."(107)


"나는 언제가 나이 많은 이슬람 교도의 입을 통해 들었던 근엄한 격언이 머리에 떠올랐다. <만일 여자가 같이 자자고 부르는데 가지 않으면 너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신은 이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너는 지옥의 밑바닥에 유다와 자리를 같이 하리라.> 나는 이 말에 겁이 났다. 식은 땀을 흘리면서 나는 다친 짐승처럼 비틀거리며 집으로 걸음을 서둘렀다."(190)



"동양의 불안정하고 혼란한 함성은 그리스의 빛을 거치는 동안 점점 투명해지며 인간화하면서 로고스로, 이성으로 변형된다. 동양의 노예 근성을 자유로, 야만적 도취를 명석한 합리성으로 바꿔 놓는 여과기이다. 무형의 형태를, 측정이 불가능한 사물에 척도를 부여하며, 맹복적으로 맞서 싸우는 힘들에 균형을 잡아주는 사명은 세파에 시달린 그리스라는 바다와 땅의 힘에서 나온다.

그리스를 여행하면 참된 기쁨을, 위대한 풍요함을 얻는다. 그리스의 흙은 피와, 땀과, 눈물로 너무나 속속들이 젖었고, 그리스의 산들은 너무나 많은 인간의 투쟁을 보았기에, 여기 이 산과 해안에서 백인종의 그리고 모든 인류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음을 생각해보면 나는 전율한다. 짐승에서 인간으로의 기적적인 변신이 이루어진 곳은 틀림없이 우아함과 흥겨움이 넘치는 이런 바닷가에서였으리라. 톱처럼 수많은 젖이 달린 아스타르테가 소아시아에서 닻을 내렸거, 야만적이고 조잡한 목상(木像)을 받은 그리스인들이 거기서 야수성을 씻어 내고 인간의 젖가슴만 남기고는 존귀한 인간의 육체를 부여한 곳은 그리스의 바닷가였으리라.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인들은 원시적인 본능과, 난장판을 즐겼으리라. 야수 같은 고함을, 아르타르테는 받았다. 그들은 본능을 사랑으로, 물어뜯는 입을 키스로, 술잔치를 종교적인 예식으로, 고함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변모시켰다. 아스타르테를 그들은 아프로디테로 변형시켰다.


영적인, 그리고 또한 지리적인 그리스의 위치는 신비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지닌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두 격류가 땅과 바다에서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리스는 항상 지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끊임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곳이다. 이러한 숙명적인 위치는 그리스의 운명과 전 세계의 운명에 기초적인 영향력을 미쳤다."(221~222)


"광기로 삶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재난을 맞으리라."(280)



구원, 깨달음




<영혼의 자서전. 2> - 니코스 카잔차키스 / 안정효



       
"니체가 나에게 준 상처들은 깊고 신성해서, 베르그송의 신비주의적 위안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았다. 잠깐 아물기는 했지만 상처는 곧 다시 터져 피가 났으니, 젊었을 적에 내가 바라던 바는 치료가 아니라 상처였기 때문이다."(458)


"나중에, 훨씬 뒤에, 나는 절벽의 언저리에서 꿋꿋하게 서서 교만람의 기미도 없고 두려움도 없이 심연을 내려다보았다."(459)


"그들은 꽃 피는 나무 밑에서 얼마 동안 가만히 앉아 침묵을 지켰고, 붓다는 천천히 자비롭게 사랑하는 제자의 머를 쓰다듬었다. <구원이란 모든 구세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 그는 잠깐 잠잠했지만, 나무에서 떨어진 꽃송이를 손가락에 끼고 비틀며 말했다. <인류를 구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자가 구세주이니라.>"(484)


"엣날에 40년 동안이나 고행의 수도를 하고도 아직 신에 다다르지 못했던 위대한 성자가 살았다. 무엇인가 도중에서 그를 가로막았다. 40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는 깨달았다. 그것은 마실 물을 담으면 식혀 주기 때문에 그가 굉장히 좋아하던 작은 항아리였다. 그는 항아리를 깨뜨리고 당장 신과 하나가 되었다. / 내 경우 작은 항아리란 자그마하고 뿌리치기 어려운 젊은 여자의 육체임을 알았다."(499~500)


"<구원을 받게 되는>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낡은 설명은 힘이 빠져서 인간의 지적 체계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을 위한 새로운 정당성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시대마다 나름대로의 <외침>이 따로 마련되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외침을 듣고 그것에 따라 노력하는 인간은 행복하다. 오직 그만이 구원을 받는다."(577~578)



"언젠가 러시아의 경종학자(耕種學者)가 이스트라티와 나를 아스트라한 부근의 사막으로 안내했다. 그는 팔을 벌리고 가없는 모래밭을 의기양양하게 포옹했다. <나에게는 일꾼이 수천 명이나 됩니다.> 그가 말했다. <그들은 뿌리가 길어서 빗물과 흙을 놓아주지 않는 그런 종류의 풀을 심어요. 몇 년만 지나면 사막을 몽땅 과수원이 될 것입니다.> 그의 눈이 빛났다. <봐요! 마을과, 과수원과, 물이 어디에서나 다 보이지 않아요?> <어디 말이에요?> 이스트라가 놀라서 물었다. <어디 말이에요? 난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요.> 경종학자는 미소를 지었다. <몇 년 지나면 보일 겁니다.> 선서를 하듯 지팡이를 모래밭에 박으며 그가 말했다.


이제 나는 그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같이 항해한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갖게 될 황폐한 땅을 둘러보니 내 눈에는 사람과, 과수원과, 물이 풍족한 광경이 선하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미래의 성당에서 울리는 종과, 운동장에서 뛰놀며 웃는 아이들의 소리를 들었고 ... 내 앞에는 아몬드나무 꽃이 피었으니, 손을 뻗으면 만발한 가지를 하나 꺽을 수도 있으리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믿음으로써 우리들은 그것을 창조하게 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란 우리들이 충분히 갈구하지 않았으며, 비존재의 음산한 문턱을 지나 전진하기에 충분할 만큼 우리들의 피를 쏟아 붓지 못한 무엇이다."(603~604)



***




그런데, 이 모든 깨달음들은 다 '남의' 깨달음들이다.

나의 절망과 고독과 일상과 시시함에서 우러나오는, 나의 깨달음을 찾아야 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그게 인간이야. 모든 인간에게 완벽한 미모를 준다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그때는 또 방바닥에 거울을 깔아놓고 내 항문의 주름은 왜 정확한 쌍방 대칭 데칼코마니가 아닐까, 머리를 쥐어뜯는게 인간이라구. 신이여, 당신은 왜 나에게 좌우비대칭 소음순을 주신건가요 ... 당신은 왜 나에게 짝부랄을 달아준건가요 따지고 드는게 인간이기 때문이지. 부끄러워하고, 부러워 하고 부끄러워 하고 부러워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생각 해 본적 없어?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174)
"뭐야 바보잖아 싶겠지만 그게 인간이야. 현실적으로 살고 있다 다들 생각하지만, 실은 관념 속에서 평생을 살 뿐이지. 현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 라는 말은 나는 그 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어- 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어.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 거품을 물던 인간도, 아내의 사타구니에 무쇠 팬티를 채우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인간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했다며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맨 인간도 ... 모두가 당대의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를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옛날 사람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다들 낄낄거리지만 그리고 돌아서서 대학을 못갈 바엔 죽는 게 나아! 다들 괴로워하는 거지. 돈이 최고야 무쇠 같은 신앙으로 무장하고, 예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뭐가 있어- 당대의 상상력에 매물되기 마련인 거야. 맞아.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 지금의 인간은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니까 ... 하지만 그 <현실>은 언젠가 결국 아무도 입지 않는 시시한 청바지와 같은 것으로 변하게 될 거야.

[...]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다니는 고린도 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나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226~228).


"와와 하지 마시고 예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곁에 있는 당신의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손길이 닿을 수 있고... 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빛을 밝혀가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세계는 당신과 나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의 상상에 따라 우리를 불편하게 해온 모든 진리는 언젠가 곧 시시한 것으로 전락할 거라 저는 믿습니다"(418).


2012. 7. 6.

『무미예찬』

프랑수아 줄리앙, 『무미예찬』, 산책자, 2010.





 
“고대 중국 사상이 현실에 접근하는 관점은 진실로 '존재'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것(물자체, 이데아)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내재하며 생성에 그 변전의 논리를 부여하는 일관성을 묻는 것이다.”(038)
 
프랑수아 줄리앙(올바른 우리말 표기법은 쥘리앙이나, 일단 인용서 표기를 존중) 책을 유학시절에도 읽었지만 제대로 차분히 전권을 다 읽기는 처음이다. 잘 썼다. 아주 특급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일단 동양의 사유에 대해 헛소리는 거의 전혀 없는 수준이다. 사실은 탁월하다.
 
일본식 서구화가 완료되고도 50년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역설적으로 이른바 동양사상은 이른바 동양인들에게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오묘하다거나, 신비하다거나, 과학적이지 못하다거나, 서양과학을 넘어선다든가 하는, 여하튼 요점은 '한문을 모르거나, 한문만 아는' 괴상한 사람들의 괴상한 이해만이 난무한다(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전을 우리 할아버지들의 용어와 관점이 아니라 서양의 관점과 개념을 통해 해설하고 설명할 때 더 이해가 잘되는 수준에 도달할 정도의 서양화/근대화를 이루었다.
 
'性卽理'를 '性이 곧 理요', 라고 번역(?)하는 것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무의미한 동어반복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이를 "Nature is principle."이라고 옮긴 애매한 영어가 오히려 앞의 번역보다 더 많은 것이 이해하게 해주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각설하여, 줄리앙은 둘 다를 안다. 일단 줄리앙은 불어, 영어, 독어를 하고, 그리스어, 라틴어를 하고, 더하여 중국어와 한문, 일어를 한다(아마 몇 가지 언어를 더 할 줄 알 것이다).
 
한문 문법을 모르고, 동양 고전에 토를 다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는 그저 자기 무지의 고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이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직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진중권은 분명 나름 의미도 있었고, 여전히 일정한 의미를 갖는 유능한 학자임에 틀림없지만, 진중권의 책에서 서양 이외의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얻어듣기란, 홍세화의 책에서 프랑스 비판을 찾아내기와 같이 지난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여하튼 이런 점에서 줄리앙은 - 아직까지는 동양이나 서양에서 - 서양과 동양을 둘 다 아는 희귀한 서양 지식인이다(그의 인격에 대해 말이 많은데, 그 부분은 관심 없다).
 
줄리앙은 이 책에서 위에 적은 이 한 마디를 쓰고 있다. 이 말은 이른바 서양의 지식인은 물론, 한국의 지식인에게서도 거의 들어본 바가 없는 적확한 통찰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줄리앙이 하수가 아님을 기꺼이 인정했다.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의 독자들이 얻어 배울 바가 있다. 이런 면에서 쥘리앙은 이미 프랑스인 학자 혹은 유럽인 학자, 서양인 학자가 아니라, 그냥 '학자'이다.
 
줄리앙은 '인식론적 오리엔탈리즘'을 거의 완전히 벗어던진 최초의 주요한 서양 사상가인지도 모른다(그렇다고 줄리앙이 라캉이나,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급이라는 말은 전혀 아니고, 일정한 지적 영향력을 갖는 서양 학자들 중 여하튼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초라는 의미에서).
 
다음 학기부터 '줄리앙과 함께 읽는 동양 고전' 같은 시리즈 강의를 한번 해볼까 한다.
 
“참된 군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으니, 옛 병서에서 이르듯이 훌륭한 전술가에 대해 칭찬할 것이 없는 것과도 같다. 훌륭한 전술가는 자신의 덕을 가까이 자신의 가족 가운데 베풀며 극히 일상적인 방식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의 행동의 유익은 결코 이목을 끌지 않으며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는다. 그는 적대적인 상황을 거의 눈치 채지 못하게끔 조금씩 변화시킴으로써, 점차 얻어진 승리가 결코 찬미의 대상이 되거나 공적으로 일컬어지지 못하게 한다. 참된 효능은 항상 은미隱微한 반면, 이목을 끄는 것은 미혹케 한다. 군자와 전술가는 눈에 띄고 피상적인 행동을 거부하고, 오랜 시간 동안 깊은 곳에서 퍼져나가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맛'은 일시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맛없음 淡'은 깊고 널리 퍼져서 그만큼 더 강력히 작용하는 성질이다.”(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