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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7.

우리는 서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






<노름꾼 외> - 도스토예프스키 / 심성보

       
"우리는 서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경우에, 즉 궁지에 몰리면 모두 그곳으로 간다."(124)



서유견문 - 유길준의 목소리





유길준, <서유견문(조선 지식인 유길준, 서양을 번역하다)
- (오래된 책방08)



       

"우리나라의 글자는 우리 선왕[세종]께서 창조하신 글자요, 한자는 중국과 함께 쓰는 글자이니, 나는 오히려 우리 글자만을 순수하게 쓰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 유길준, <서문>, 26쪽.



"유길준이 1895년에 간행한 '서유견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혼용체 저서이자 최초의 서양 문물 계몽서라고 예전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다. 그 뒤에도 책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기에, 책 이름만 보고는 세계 일주 기행문 정도로만 생각하였다. 1993년 보스턴에서 안식년을 지내는 동안 '서유견문' 출간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유길준이 머물렀던 집과 유학하였던 학교를 찾아다니다가, 국한문혼용 저술이니 한문으로 된 저술보다 쉬울 거라는 생각에서 이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한문으로 된 책보다 갑절은 더 힘들었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할 때 한문을 번역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이유는 문법이 다르다는 점에과 일본식 외래어가 많다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일본식 한자어 자체가 새롭고 낯설었겠지만, 일본식 한자어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우리 세대 독자들에겐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일본식 한자어가 어느새 우리말이 된 셈이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문체가 당대 지식인들에게서 부정적인 반응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측하고도 이 책을 국한문혼용체로 썼다. 한문을 모르는 국민들까지 읽게 하려면 국한문혼용체가 낫다고 여긴 것이다. '한글'을 '우리 글자'라고 한 것에서부터 사상의 전환을 엿볼 수 있다. 국한문혼용체는 에전에도 일부 시행되었지만, 그가 이 책을 국한문혼용체로 쓴 까닭은 나라마다 말과 글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문법 교재와 정치학 교재를 함께 썼던 학자는 우리 역사에서 유길준밖에 없다. 계몽기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유길준은 이 두 가지 교재를 자신이 함께 써야겠다고 생각했으며, 국한문혼용체라는 문체를 시도하여 그러한 생각을 실천하였다. 국한문혼용이라는 국어 의식과 '득중 得中'이라는 정치 노선은 그에게 하나였기에 그러한 인식에서 '서유견문'을 읽어야 하겠다."

- 허경진, <글을 시작하기 전에>, 5~6쪽.


"일본사람 가운데 견문이 많고 학식이 넓은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새로 나온 기이한 책들을 보며 거듭 생각하는 동안, 그 사정을 살펴보고 실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진상을 파헤쳐보니, 그들의 제도나 법규 가운데 서양[泰西]의 풍을 모방한 것이 십중팔구나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17)



*** 




서유견문은 내가 상상하던 바와 전혀 다른 책이었다.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서양문물을 접한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1882년 미국에 외교 사절로 가서 유학생으로 남아 서양문물을 공부한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다.

유길준은 1885년 유럽을 거쳐 귀국하면서 '서유견문'을 쓰기 시작하여 1890년 완성, 임오군란 등으로 출간하지 못하다가, 1884년 갑오경장을 거쳐 일본에 망명 그곳에서 다름 아닌 후쿠자와 유키치의 교순사에서 이 책을 간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본격적인 국한문 혼용체로 적어내려간 이 탁월한 책은 그후 대한제국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불행한 책이었다.

한글을 우리 글자(我文)라 칭하고, 진서를 한자(漢字)라 칭하는 이 민족주의의 선구적 저작은 당시인들에게는 오히려 읽기 어려웠을 일본식 조어인 신한어로 쓰여 있지만, 역설적으로 완벽히(자기가 그런 줄조차 모를만큼) '메이지화된' 오늘 우리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쉽게 읽힌다.

유길준의 글은 요즘에도 보기 드문 상식의 목소리, 건강한 시민의 양식을 가진 것이었다. 허경진의 번역 덕도 있겠지만, 원래 문체 자체가 좋았다.

일제병탄을 반대하고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한 양심적 지식인이었지만, 그렇다고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아닌, 이 '개화기'의 지식인에게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 것일까?




구원, 그리스의 빛






<영혼의 자서전. 1> - 니코스 카잔차키스 / 안정효

       
"내가 벅찬 재앙이 닥치자마자 형언하기 힘든 비인간적 기쁨에 사로잡힌다는 사실을 나는 이때 처음 깨달았다. 숙모 칼리오페의 집이 홀랑 타버렸을 때 처음으로 불을 구경하던 나는 누가 목덜미를 잡아 집어던질 때까지 불 길 앞에서 깡충깡충 뛰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우리 선생이던 크라사키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웃지 않기 위해 애를 먹었다."(107)


"나는 언제가 나이 많은 이슬람 교도의 입을 통해 들었던 근엄한 격언이 머리에 떠올랐다. <만일 여자가 같이 자자고 부르는데 가지 않으면 너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신은 이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너는 지옥의 밑바닥에 유다와 자리를 같이 하리라.> 나는 이 말에 겁이 났다. 식은 땀을 흘리면서 나는 다친 짐승처럼 비틀거리며 집으로 걸음을 서둘렀다."(190)



"동양의 불안정하고 혼란한 함성은 그리스의 빛을 거치는 동안 점점 투명해지며 인간화하면서 로고스로, 이성으로 변형된다. 동양의 노예 근성을 자유로, 야만적 도취를 명석한 합리성으로 바꿔 놓는 여과기이다. 무형의 형태를, 측정이 불가능한 사물에 척도를 부여하며, 맹복적으로 맞서 싸우는 힘들에 균형을 잡아주는 사명은 세파에 시달린 그리스라는 바다와 땅의 힘에서 나온다.

그리스를 여행하면 참된 기쁨을, 위대한 풍요함을 얻는다. 그리스의 흙은 피와, 땀과, 눈물로 너무나 속속들이 젖었고, 그리스의 산들은 너무나 많은 인간의 투쟁을 보았기에, 여기 이 산과 해안에서 백인종의 그리고 모든 인류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음을 생각해보면 나는 전율한다. 짐승에서 인간으로의 기적적인 변신이 이루어진 곳은 틀림없이 우아함과 흥겨움이 넘치는 이런 바닷가에서였으리라. 톱처럼 수많은 젖이 달린 아스타르테가 소아시아에서 닻을 내렸거, 야만적이고 조잡한 목상(木像)을 받은 그리스인들이 거기서 야수성을 씻어 내고 인간의 젖가슴만 남기고는 존귀한 인간의 육체를 부여한 곳은 그리스의 바닷가였으리라.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인들은 원시적인 본능과, 난장판을 즐겼으리라. 야수 같은 고함을, 아르타르테는 받았다. 그들은 본능을 사랑으로, 물어뜯는 입을 키스로, 술잔치를 종교적인 예식으로, 고함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변모시켰다. 아스타르테를 그들은 아프로디테로 변형시켰다.


영적인, 그리고 또한 지리적인 그리스의 위치는 신비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지닌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두 격류가 땅과 바다에서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리스는 항상 지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끊임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곳이다. 이러한 숙명적인 위치는 그리스의 운명과 전 세계의 운명에 기초적인 영향력을 미쳤다."(221~222)


"광기로 삶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재난을 맞으리라."(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