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강원대 불문과 정승옥 선생님께서 매주 자신의 글(시를 제외한 아래의 글은 모두 정승옥 선생님의 것)과 함께 보내주시는 시, 이번 주는 내가 좋아하는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 오랫만에 다시 읽으니, 가슴과 머리로 함께 읽게 된다. 아름답다.




 
***




 
 
 
이성복, 1990
 
 
 
 
    
 
 
편지 1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2면)
  
“사랑도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성숙한 사람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아낌없이 주었고 아직도 줄 것이 남아있는데 사랑은 달아나고 있습니다. 시인은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1980년대 후반, 사람이 죽어나가는 세월도 사랑을 놓친 시인을 그곳에서 끌어 내리지 못합니다.
  
헤어진 이제 알게 된 것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만날 수 없는 지금 알게 된 것은 나는 당신을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넋 속에, 살 속에 박힌 사랑의 기억을 어떻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20대 중반인 1975년 초여름 밤, 나도 남해 금산 정상에 앉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 해 4월 어느 새벽, 졸지에 유명을 달리 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절절한 사랑을 해보지 못한 때였던가요.”

 
 
 
 
 
〈편지〉1, 2, 3, 4, 5와 〈그 여름의 끝〉이 실려 있는 이성복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그 여름의 끝》은 “일관되고 절절한 목소리로 사랑과 타는 듯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집입니다(오생근). 그리고 여기에 소개하는 여섯 편의 시는 이 시집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시들입니다. 다섯 편의 〈편지〉는 사랑의 변천과정 마디마디를 담은 편지들이 아니라 사랑이 지나간 뒤, 몸과 마음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주된 情調는 〈쓸쓸함〉입니다. 다섯 편이 같은 맥락의 시이지만 한 편 한 편이 주목할 만한 대목을 갖고 있습니다.
 
 
편지 2
 
 
그렇게 쉽게 떠날 줄 알았지요
그렇게 떠나기 어려울 줄 몰랐습니다
 
 
꽃핀 나무들만 괴로운 줄 알았지요
꽃 안 핀 나무들은 섧어하더이다
 
 
오늘 아침 버스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무슨 삼줄 훑어 놓은 것 같아서
 
 
오랜 후 당신의 숱 많은 고수머리가
눈에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하마 멀리 가지 마셔요
바람 부는 낯선 거리에서 짧은 편지를 씁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3면)
 
 
이뤄진 사랑(“꽃핀 나무들”)은 괴롭고 짝사랑(“꽃 안 핀 나무들”)은 서럽다는 시인의 가름 솜씨가 여간 아닙니다.
 
 
 
 
편지 3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다고 나는 말했지요
전설 속에서처럼 꽃이 피고 바람 불고
십리 안팎에서 바다는 늘 투정을 하고
우리는 오래 떠돌아 다녔지요 우리를 닮은
것들이 싫어서……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가까워졌지요 영락없이 우리에게 버려진 것들은
우리가 몹시 허할 때 찾아와 몸을 풀었지요
그곳에 다들 잘 있느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염려 마세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4면)
 
 
“어쩔 수 없이”란 말이 이렇게 시리게, 이렇게 쓸쓸하게 읽힌 적이 있을까 싶습니다. 떠나간 사랑이 안부를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당신 생각에 잠 못 이룬다고 유행가 가사를 읊을까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잘 있답니다”라고 답할밖에.
 
 
 
편지 4
 
 
당신을 맞거나 보내거나 저렇게 무한정 잎을 피워올린 과일나무 둥치*처럼 저희는 쓸쓸합니다 당신이 저희 곁에 오시거든 무성한 저희 잎새를 바라보시기를
 
 
저희 사랑이 꽃필 때 저희 목숨은 시들고 수없이 열매들을 따낸 과일나무처럼 저희 삶은 누추합니다 당신이 저희 곁을 떠나시거든 저희를 닮은 비틀린 나무들을 지켜보시기를
 
 
어두운 곳에서 옷을 벗다 들킨 여인처럼 저희 꿈은 자주 놀란답니다 갑자기 끊긴 아이의 울음처럼 캄캄히 멎은 저희 기도를 기억하시기를, 당신의 먼 길을 저희가 기억하듯이
 
 
*둥치 : 큰 나무의 밑동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5면)
 
 
 
다른 〈편지〉시편들에 비해 〈편지 4〉는 감정이 흐느적거리는 감이 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망가진 모습이 아니라 체면치레하는 멀쩡한 모습을 바라보라고, 딴 곳을 떠돌다가도 비틀린 모습을 만나면 당신 때문에 지쳐버린 나려니 하고 지켜보라고, 예기치 못하게 나를 떠난 당신을 내가 잊지 못하듯이 당신도 “캄캄히 멎은” 우리 기도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멀쩡한 모습 - 지쳐버린 나 - 캄캄히 멎은 우리 기도〉, 〈바라보시기를 - 지켜보시기를 - 기억하시기를〉식의 시의 흐름이 구차하고 거북하게 느껴집니다.
 
 
 
편지 5
 
 
늘 멀리 있어 자주 뵙지 못하는 아쉬움 남습니다 간혹 지금 헤매는 길이 잘못 든 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요 그러나 모든 것이 아득하게 있어 급한 마음엔 한 가닥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이젠 되도록 편지 안 드리겠습니다 눈 없는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가쁜 숨소리를 받으며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6면)
 
 
 
이젠 편지하지 않겠다는 다짐에는 포기의 빛이 스미는 듯하지만 이내 “눈 없는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가쁜 숨소리를 받”습니다. 그리움은 계속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괴로움은 많이 가시고 그리움의 괴로움은 쓸쓸함으로 변색합니다.
 
 
그리움의 쓸쓸함, 쓸쓸한 그리움, 그리움의 간절함, 간절한 그리움.
 
 
쓸쓸함도 그리움도 간절함도 이제 벗어나야 할 멍에가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삶의 조건일 뿐입니다. 이들 때문에 발버둥질칠 게 아니라 이들과 함께 놀 줄 아는 사람이 될 일입니다.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117면)
 
 
 
그 여름 폭풍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나무 백일홍” 뿐 아니라 “나의 절망”입니다. 그리고 둘 다 폭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앞에서 쓸쓸함, 그리움, 간절함과 함께 놀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이제 나의 절망도 장난처럼 끝납니다. 절망도 벗어나야 할 치욕이 아니라 함께 놀아야 할 인간들의 〈반려감정〉임을 이 시는 일깨웁니다.
 
 
시 〈섬〉에서 시인이 왜 “쓸쓸함의 정다움”( 《그 여름의 끝》, 55면)을 이야기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소개]
 
경북 상주 출생으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여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경기고교에 입학하여 당시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원호를 통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때 《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수영의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71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진형준 등과 친분을 쌓았고 1976년 복학하여 황지우 등과 교내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1977년 〈정든 유곽에서〉 등을 《문학과 지성》에 발표, 등단했다. 대구 계명대학 강의 조교로 있으면서 무크지 《우리세대의 문학1》에 동인으로 참가했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평가하는 말로 “철저히 카프카적이고 철저히 니체적이며 철저히 보들레르적”이었던 시인은 1984년 프랑스에 다녀온 후 사상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그리고 논어와 주역에 심취했다. 그리고 낸 시집이 동양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남해금산》이다. 이 시에는 개인적, 사회적 상처의 원인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정제된 언어로 표현되었다. 시인은 보다 깊고 따뜻하며, 더욱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뛰어난 시 세계를 새로이 보여준다. 서정적 시편들로써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그는 우리의 조각난 삶과 서러운 일상의 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바라보면서 비극적 서정을 결정적으로 고양시켜 드러낸다. 이 심오한 바라봄-드러냄의 변증은 80년대 우리 시단의 가장 탁월한 성취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환상소설의 한 장면처럼 납득하기 힘든 상황의 묘사, 이유가 선명하지 않은 절규 등을 담아냈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언어 파괴에 능란하다. 의식의 해체를 통해 역동적 상상력을 발휘, 영상 효과로 처리하는 데도 뛰어나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에 대해 냉소적이라거나 《그 여름의 끝》 이후의 관념성을 비판받기도 했다. 그는 초기 시의 모더니즘 경향에서 벗어나 동양의 형이상의 세계에 심취하였다.
 
 
1989년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1991년 프랑스 파리에 다시 갔다. 다른 삶의 방법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시인은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와 함께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테니스. 시인에게 마치 애인과도 같은 테니스는 그에게 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삶을 보다 즐겁게 만들었다. 2007년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나무인간 강판권〉등으로 제5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예스 24〉에서)
 
 
[참고문헌]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1994
,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1994
,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 〈정든 유곽에서〉, 문학과지성사, 1996(시선집)
,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2003
,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열림원, 2003(절판)
 
 
이성복,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산문집), 문학동네, 2001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아포리즘), 문학동네, 2001
 
이성복 외, 〈사랑으로 가는 먼 길〉(이성복 문학앨범), 웅진출판, 1994(절판)
《작가세계》(58), 〈이성복 특집〉, 세계사, 2003,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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