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9.

플라톤, <국가/정체> -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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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 『국가ㆍ政體』(개정증보판), 박종현 역주, 서광사, 2005.



 
 
- 소크라테스: “됐소, 트라시마코스 선생! 그런데 선생은 어떤 이는 시가(詩歌, 음악, mousikē)에 능하다(교양이 있다: mousikos)고 하되, 또 어떤 이는 시가(음악)를 모른다(교양이 없다: amousos)고 말하겠구려?”
 
- 트라시마코스: “저는 그럽니다.”(107, 1권 349d-e)


 
  
* 역주 66) 본격적인 지혜에 대한 사랑의 활동인 철학(philosophia)이 있기 이전의 헬라스인들에게 있어서는 시가(mousikē)가 그들의 교육 또는 교양의 전부인 셈이었다. 따라서 시가에 능하거나 밝은(mousikos) 사람이 곧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있어 호메로스의 『일리랑스』나 『오디세이아』는 가히 경전적(經典的)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의 등장은 이런 지위를 누려온 시가에 대한 도전처럼 시인에게 느껴졌을 것이다. 헬라스에 있어서 철학과 시(詩) 사이의 불화가 여기서 발단한다(107).

 
  
- 소크라테스: “그러니, 글라우콘! 시가를 통한 교육[양육: trophē]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겠지? 즉, 리듬과 선법(線法, 和音, harmonia)은 혼의 내면으로 가장 깊숙이 젖어 들며, 우아함을 대동함으로써 혼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고, 또한 어떤 사람이 옳게 교육을 받는다면, 우아한(고상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 반대로 만들 것이기 때문에 말일세. 그리고 또 시가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교육을 받은 이는 빠져서 없는 것들과 훌륭하게 만들어지지 못한 것들 또는 훌륭하게 자라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가장 민감하게 알아볼 것이며, 그야말로 옳게 싫어할 줄을 알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칭찬하고 기뻐하여 혼 속에 받아들임으로써, 이것들에서 교육을 받아, 스스로 훌륭하디 훌륭한 사람으로 되는데, 일찍이 어려서부터, 그 논거(이론: logos)도 알 수 있기 전에, 추한 것들은 비난하고 미워하기를 옳게 하다가, 이렇게 교육받은 사람인지라, 그 논거를 접하게 되면, 그 친근성 덕에 그걸 알아보고서는 제일 반길 것이기 때문에 말일세.”
 
- 글라우콘: “제게는 어쨌든 그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시가 교육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220-221, 402d-402a)
 

 
 
* 역주 59) 여기에서 시가를 통한 교육의 원어는 en mousikēi trophē이다. 헬라스인들은 성격 또는 인격(ēthos) 형성과 관련해서 아주 체계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들의 용어 사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ēthos는 ethos(습관, 버릇)에서 형성되고, ‘습관’은 반복되는 몸가짐이나 마음가짐으로 굳어진 습성(굳어진 상태, hexis)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게 그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플라톤의 교육관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德論)도 이에 기본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시가 교육과 관련해서 하고 있는 언급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400c-e에서 보자. to eurhythmon(eurhythmia: 좋은 리듬), eulogia(좋음 말씨), euarmostia(조화로움), euschēmosynē(좋은 모양, 우아함), euētheia(좋은 성격, 좋은 성품) 등은 모두 eu(잘, 훌륭하게: well)라는 말과 결합된 복합어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반복성’이나 굳어진 상태(hexis)를 전제로 한 말이다. 그런 성격 또는 인격을 다듬어 가고서야 훌륭한 사고(dianoia)의 틀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220).
 

 
* 역주 60) ‘시가 교육’은 곧 ‘시민 교육’이다. 이는 시가 교육을 통해서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ēthos) 형성과 함께 건전한 생각, 즉 그런 ‘의견’이나 ‘판단’ 또는 ‘소신’(doxa)을 갖도록 하고, 이를 지키며 실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교육이다. 이는 어찌 보면, 단련과 주입의 과정이다(221).
 

 
- 소크라테스: “내가 생각하기에는 ‘움직이는 운동’(phora: 장소적 이동의 운동, 운동 일반은 kinēsis)에는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 많은 종류가 있는 게 틀림없으이. 누구든 현자라면야 아마도 그 모두를 말할 수 있을 걸세. 우리에게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두 가지일세.”
 
- 글라우콘: “어떤 것들인데요?”

- 소크라테스: “천문학에 더해 이것과 상관적인 것이 있네.”

- 글라우콘: “어떤 것인가요?”

- 소크라테스: “눈이 천문학에 맞추어져 있듯이 귀는 화성학적 운동(enarmonios phora)에 맞추어져 있으며, 이 학문들(epistēmai)은 서로 자매관계에 있는 것 같으니. 여보게 글라우콘! 피타고라스학파가 그렇게 주장하고 우리도 동의하듯이 말일세. 아니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 글라우콘: “동의합니다.”

- 소크라테스: “그러면 이는 큰 일거리이므로 그들이 이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그리고 이것들 이외에 다른 것이 있는지 그들한테서 들어볼 걸세.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맞서서 우리의 주장을 지킬 것이네.”

- 글라우콘: “그건 어떤 것들인가요?”

- 소크라테스: “우리가 양육하게 되는 사람들이 이것 가운데 어느 것이나 결코 불완전한 형태로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우리가 방금 천문학과 관련해서 언급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이르러야만 되는 거기에 언제나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로 배우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네. 혹시 화성(和聲, 線法, harmonia)과 관련해서도 사람들이 또 다른 유의 그런 짓을 한다는 사실을 자네는 모르고 있는가? 그들도 들리는 협화음(協和音, symphōnia)들과 소리들을 대비적으로 측정함으로써, 천문학자들처럼 헛수고를 하기에 말일세.”

- 글라우콘: “단연코 우스꽝스러운 일이기도 하죠. 그들은 어떤 것들을 조밀음정(稠密音程, pyknōmata)으로 부르며, 마치 이웃의 소리를 엿들으려는 사람들처럼 귀를 갖다 댑니다. 어떤 이들은 사이에 있는 음마저도 듣는다고 하면서, 이것을 가장 좁은 ‘음정’(diastēma: 음정의 폭이 가장 작은 것)이라 부르며 이것으로써 음들을 측정해야만 한다고 말하나, 다른 이들은 그걸 이미 내어본 소리와 같은 것이라 주장하는데, 이들은 양쪽 모두 지성(nous)보다도 귀를 앞세웁니다.”

- 소크라테스: “자네는 현(絃)들을 괴롭히며 줄감개에다 이것들을 조이면서 고문하는 그 훌륭한 양반들을 두고 말하는 게로구먼. 그러나 채로써 하는 현들에 때림이라든가 또는 비난에 대한 현들쪽의 거부나 엄살 등의 관련된 비유가 더 길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를 그만 두거니와, 내가 말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라 방금 우리가 화성과 관련해서 묻고자 한다고 했던 그 사람들일세. 그들은 천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똑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일세. 그들은 이들 들려오는 협화음들에 있는 수(數)들을 찾되, 문제들로 올라가지는 않는다네. 즉 어떤 수들이 협화음들이고 어떤 것들이 아닌지를, 그리고 무엇 때문에 각각의 경우악 그러한지를 고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네.”(482-484, 530c-531c)
 
 

* 역주 49) 피타고라스 학파는 실험에 의해 한 옥타브에 있어서 제일 낮은 음과 8도음, 5도음 및 4도음 간에는 현의 길이로 따져서 각각 2:1, 3:2, 4:3의 비례 관계가 성립함을 알게 되었다. 이 실험은 하나의 줄을 갖고서 기러기 발 같은 것으로 이동시키며 측정한 것이다(483).
 
 

* 역주 50) 조밀음정: pyknōmata (단수는 pyknōma)는 어원상으로 ‘조밀한’(pyknon) 음정(diastēma)의 뜻이다. 아리스토크세노스(Aristoxenos)는 그의 『화성학』 I. 24. 10-15d에서 이를 pyknon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내리고 있는 그것의 의미 규정에 따르면 ‘4음 음계의 음정에 있어서 결합된 두 음정이 나머지 음정보다도 더 작은 쪽’의 음정을 가리킨다. 이를 테면 두 4분음의 음정 또는 반음들의 음정이 그런 경우이다(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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