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21.

19. 니체유고

프리드리히 니체, <<유고(1885년 가을~1887년 가을): 원래 나는 나를 어느 정도 나 자신에게서 보호해주고>>, 이진우 옮김, 니체전집 19, 책세상, 2005.

 
1[115] 모든 것의 해석적 성격. / 사건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난 것은 해석하는 존재에 의해 한 무리의 현상들이 해석되고 종합된 것이다.
  
1[120] 동일한 텍스트가 무한히 많은 해석들을 허용한다. 하나의 ‘올바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1[125] - “그것은 이러저러하다”를 “그것은 이러저러하게 되어야만 한다”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1[191] 주의. 결국 그리스 도시 전체가 개인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1[240] 반성은 여전히 순진의 표시일 수 있다.
 

1[247] 어찌하여 인간은 이처럼 신(神)으로 쇠약해져서 인간에게 소외되었는가.
 

2[77] 우리의 가치들이 사물 안으로 투입되어 해석되었다. / ‘그 자체’에는 도대체 의미가 있는 것인가?? / 의미란 필연적으로 관계-의미와 관점이 아닌가? / 모든 의미는 힘에의 의지다(모든 관계-의미들은 힘에의 의지로 해체된다).
 

2[85] 어떤 사물의 속성들은 다른 ‘사물들’에 대한 효과들이다 : 다른 ‘사물들’을 빼고 생각하면, 사물은 아무런 속도 갖지 않는다. 즉, 다른 사물들이 없으면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물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2[108] 세계는 “흐르는 강 속에” 있다. 무엇인가 형성되는 것으로서, 거듭해서 새롭게 연기되는 거짓으로서. 이 거짓은 결코 진리에 다가가지 못한다 : - 왜냐하면 ‘진리’는 없기 때문이다.
 

2[116] 저 자기 인식은 겸손이다-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감사다-왜냐하면 우리는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117] 도덕적 자기 해석은 세계부정으로 끝난다(그리스도교 비판). / 세계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 : 모든 해석은 성장 또는 몰락의 징후다.
 

2[148] 힘에의 의지는 해석한다 [...] 실제로 해석은 그 무엇인가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 자체다. (유기체적 과정은 해석을 전제한다.)
 

2[149] ‘물 자체’는 ‘의미 자체’, ‘뜻 자체’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사실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실이 있기 위해서는 항상 의미가 먼저 투입되어야 한다. / “그것은 무엇인가?”는 다른 무엇에 의해 파악된 의미-정립이다. ‘본질’, ‘실재’는 관점주의적인 것이며, 이미 다수를 전제한다. 그 밑바탕에는 항상 “그것은 나에게 (우리에게, 살아있는 만물 등에게) 무엇인가?”가 놓여 있다.
 

2[161] 나는 도덕적 가치 감정 비판을 감행한 사람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2[165] 근본문제 : 이러한 믿음의 전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도덕에 대한 믿음의 전능은? / (-그것은 삶의 근본 조건들 자체가 도덕을 위해 잘못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폭로된다 : 동물 세계와 식물 세계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 ‘자기 보존’ : 이타주의적 원칙과 이기주의적 원칙의 화해에 대한 다윈의 관점. / (이기주의 비판, 예를 들면 라 로슈푸코) / 생리적 번영이나 잘못됨, 또한 보존 및 성장 조건들에 관한 의식을 드러내주는 것인 징후와 기호 언어로서 도덕적 판단들을 이해하려는 나의 시도 : 점성술의 가치들에 관한 해석 방식. 편견들. 본능들은 이 편견들에게 넌지시 가르쳐준다(인종, 공동체, 청년기 또는 쇠퇴와 같은 다양한 단계 등등에 관해.) /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유럽적 도덕에 적용하면 : 우리의 도덕적 판단들은 쇠퇴, 에 대한 불신의 징후들이며, 염세주의의 준비다. / 우리가 모순을 실존 속에 투입해 해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결정적 중요성 : 모든 다른 가치들의 배후에는 저 도덕적 평가들이 명령하면서 서있다. 그것들이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무엇에 따라 측정하는가? 그리고 인식은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 나의 주요 명제 : 도덕적 현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 현상들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 있을 뿐이다. 이 해석조차 도덕 바깥에 근원을 갖고 있다.
 

2[167] 인과성의 부정. 모든 것에 각각 책임을 지우지 않고 또 그 어떤 것의 운명을 지탱하는 실을 너무 짧게 잡지 않기 위하여. ‘우연’은 실제로 존재한다.
 

2[168] 도덕-발전의 경향. 모든 사람은 다른 어떤 교의와 사물의 평가보다 그 자신이 잘 극복할 수 있는 교의와 사물의 평가가 유효하기를 바란다. 따라서 모든 시대의 약자와 평범한 자의 근본 경향은 좀더 강한 자를 약하게 만들고 끌어내리는 것이다 : 도덕적 판단의 주요 수단. 약자에 대한 강자의 태도는 낙인찍혀 있다. 좀더 강한 자의 좀더 고귀한 상태는 나쁜 별명을 얻는다. / 소수에 대한 다수의 투쟁, 희귀한 자에 대한 통상적인 자의 투쟁, 강자에 대한 약자의 투쟁.
 

2[170] 도덕적 판단이 이미 얼마나 많은 선회를 해왔으며, 또 얼마나 여러 번에 걸쳐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악’이 ‘선’으로 개명되었는지에 관한 지식과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이동들 중의 하나에 대해 나는 ‘도덕의 도덕성’이라는 대립을 가지고 --- / 또한 양심도 자신의 영역을 뒤바꾸었다 : 무리(群衆)의 양심 가책이 있었다 // 언뜻 개인적 책임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양심도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여전히 무리-양심인가.
 

2[172] ‘존재’ - 우리는 이에 관해 ‘산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표상도 갖고 있지 않다. - 다시 말해 죽은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2[174] 사람들은 사물들 속에서 자신이 집어넣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다시 발견하지 못한다.
 

2[182] 도덕은 본질적으로 개인을 넘어서 또는 개인의 노예화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지속시키는 수단이다.
 

2[184] 나의 문제 : 인류는 이제까지 도덕뿐만 아니라 자신의 도덕성에서 어떤 해를 입었는가? 정신 등등에서의 훼손
 

2[185] “우리 비도덕주의자들”
 

2[190] 도덕적 가치 평가는 해석이며, 일종의 해석하는 방식이다. 해석 자체는 특정한 생리적 상태들과 또한 지배적 판단들에 관한 특정한 정신적 수준의 징후다. 누가 해석하는가? - 우리의 정념들이.
 

* 2[191] 나의 주장 : 도덕적 가치 평가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 도덕적 감정-충동을 “왜?”라고 물음으로써 저지해야 한다는 것. “왜?”와 도덕 비판에 대한 이 열망은 바로 정직의 고상한 감각으로서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는 것. 우리의 정직, 즉 우리를 기만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 : “왜 안 되지?” -어떤 법정 앞에서?- 기만당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정복과 착취에 대한 주의, 삶의 정당 방어 본능. // 이것이 너희에 대한 나의 요구다 - 그 요구들은 너희 귀에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 : 너희가 도덕적 평가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 너희가 여기서 비판이 아닌 예속을 요구하는 도덕적 감정-충동을 “왜 예속을?”이라는 질문으로 저지해야 한다는 것. 너희가 “왜?”와 도덕 비판에 대한 이러한 열망을 지금 너희가 갖고 있는 도덕성의 형식 자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너희가 너희 시대를 명예롭게 만드는 가장 고상한 정직의 형식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2[192] 감정: 너희는 해야만 한다! 위반함에 있어서의 불안 - 질문: “누가 거기서 명령하는가? 우리는 거기서 누구의 분노를 두려워하는가?”
 

2[197] 신앙이 없는 사람과 무신론자, 그렇다! - 불신으로부터 신앙과 목적을, 그리고 종종 순교를 준비하는 뿌리 뽑힌 자의 괴로움과 열정 없이 : 세상은 대체로 신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상적이고 자애롭고 인간적인 척도에 따라 진행되지도 않는다는 통찰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푹 삶아졌고 냉담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부도덕하고 신적이지 않으며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우리는 세계를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숭배의 의미에서 해석했다. 세계는 우리가 믿었던 바의 가치가 없다 :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만들었던 위로의 마지막 거미줄은 우리에 의해 찢어졌다. 역사가 자신의 무의미성을 알게 되고 그 자체에 싫증나게 된다는 점이 바로 전체 역사의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실존에 피곤해짐, 더 이상 원치 않음에 대한 이러한 의지, (이러한 반대 의지의 표현으로서의) 자의(恣意), 자기 안녕, 주체의 붕괴. - 쇼펜하우어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이것이 최고의 경의로써 존중되기를 바랐다. 그는 그것을 도덕이라 명명했고, 모든 자기희생적 행위가 --임을 포고했다. 그는 예술이 만들어내는 무관심한 상태에서 혐오의 완전한 해방과 만족을 위한 준비를 인식하기를 바람으로써 예술의 가치를 보장한다고 믿었다.
 

2[200] 마찬가지로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다 :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교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교와 너무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과 너무 가까이 살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그리스도교로부터 성장했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기를 금지하는 것은 우리의 엄격하고 사치스러운 경건함 자체다.
 

2[203] 그러나 모든 사람은 “도덕이 여기 있다. 도덕은 주어져 있다!”라는 주요 사안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모두 정직하게, 무의식적으로, 부단히 자신들이 도덕이라 부르는 것의 가치를 믿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도덕의 권위 하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 도덕의 가치! 바로 이 가치를 의심하는 어떤 사람이 발언권을 갖는 것을 그들은 허용할 것인가? 그는 단지 이런 측면에서만 도덕의 추론, 추론 가능성, 심리적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마음을 쓰는가?
 

2[205] 자기 자신에 머물러 있어서 다른 것을 침범하지 않는 이기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 따라서 너희가 말하는 ‘허용된’ ‘도덕적으로 무관심한’ 이기주의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나를 장려한다”, “생명은 항상 다른 생명의 비용으로 살아간다”. -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직 자신의 정직에 이르는 첫걸음을 떼지 않은 것이다.
 

4[7] - “질병은 사람을 개선한다” : 모든 세기에 걸쳐 만나게 되는, 그것도 현자의 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민중의 입을 통해서도 만나게 되는 이 유명한 주장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그 타당성과 관련해 한번쯤 이렇게 질문해도 될 것이다 : 도덕과 질병 사이에는 혹 인과적 결속이 있는 것인가? ‘인간의 개선’, 크게 보면, 예컨대 지난 세기에 이루어진 유럽인의 부인할 수 없는 온화함, 인간화, 순화 - 그것은 혹 오랫동안의 은밀하고 무시무시한 고통, 잘못됨, 궁핍, 쇠약의 결과인가? ‘질병’이 유럽인들을 ‘개선’했는가? 또는 달리 물으면 : 우리의 도덕성은-중국인들의 도덕성과 비교될 수 있는 유럽에서의 우리의 민감한 현대적 도덕성-생리적 퇴보의 표현인가? ...... ‘인간’이 화려하고 강렬한 유형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역사의 모든 부분은 금방 갑작스럽고, 위험하고, 폭발적인 성격을 취한가는 점을 쉽게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인간성이 나빠진다. 어쩌면 다르게 나타나고자 하는 그런 경우에는, 심리학을 심층에 이르도록 추진하고 또 거기서 일반적인 명제를 발견하고자 하는 용기나 섬세함이 결여돼 있을 것이다. ‘어떤 인간’이 더욱더 건강하고, 더욱더 강하고, 더욱더 부유하고, 더욱더 생산적이고, 더욱더 모험적일수록 그는 ‘더욱더 부도덕’해진다. 대체로 그것에 몰두해서는 안 되는! 곤혹스러운 생각! 그렇지만 우리가 그 생각과 함께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얼마나 놀라워하며 미래를 바라보게 될 것인가!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요구하는 바로 그것보다-인간화, 인간의 ‘개선’과 증대하는 ‘문명화’보다- 우리로 하여금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덕성보다 값비싼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사람들은 덕성으로 인해 지구를 병원으로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의 간병인이다”라는 말은 마지막 결론의 지혜일 것이다. 물론 : 사람들은 무척 열망했던 ‘지상에서의 평화’를 가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또한 ‘서로에게 마음에 듦’은 적어질 것이다! 그만큼 적은 아름다움, 용기, 자만, 모험, 위험! 사람들에게 지상에서 살아가는 목적이 되어줄 만한 그런 ‘작품’들은 그만큼 적어질 것이다! 아! ‘행위들’은 이제 전혀 없다! 존립해 있고 시간의 파도에 씻겨 나가지 않은 모든 위대한 작품과 행위들 - 가장 심오한 이성으로 볼 때 그것들은 모두 위대한 부도덕성이지 않은가? ......
 

* 5[10]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뭔가 낯선 것을 알려진 것, 익숙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 첫 번째 기본 원칙 : 우리가 익숙해진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수수께끼,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 낯설게 만드는 것에 대한 감정의 둔화 :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의심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 탐색은 인식하는 사람의 제일 본능이다 : 물론 규칙의 확인으로써 ‘인식된’ 것은 전혀 없다! -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의 미신 : 그들이 고수할 수 있는 곳, 즉 현상들의 규칙성이 단축시키는 정식들의 적용을 허용하는 곳에서 그들은 무엇인가가 인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안정성’을 느낀다. 그러나 지적 안정성의 배후에는 두려움의 진정(鎭靜)이 있다 : 그들은 규칙을 원하는데, 그것은 규칙이 세계에서 두려움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학문의 배후 본능이다. / 규칙성은 묻는(즉, 두려워하는) 본능을 잠들게 한다. “설명한다”는 사건의 규칙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칙’에 대한 믿음은 자의적인 것의 위험성에 대한 믿음이다. 법칙을 믿으려는 선한 의지는 학문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특히 민주 시대에)
 

5[22] 근본 해법 : 우리는 이성을 믿는다. 그러나 이성은 잿빛 개념들의 철학이다. 언어는 온갖 천진난만한 편견들 위에 건립되었다. / 그런데 우리는 불화와 문제들을 사물 속에 집어넣고 읽어낸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언어적 형식으로만 사유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이성’의 ‘영원한 진리’를 믿는다(예컨대 주어, 술어 등등. / 만약 우리가 언어적 속박을 받지 않고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중단할 것이다, 우리는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하나의 한계를 한계로서 보게 된다. / 이성적 사유는 우리가 던져버릴 수 없는 도식에 따른 해석이다.
 

5[50] 5) 소크라테스부터는 병의 징후로서,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준비로서의 그리스 철학.
 

5[70] 힘에의 의지와 그것의 변형들 (이제까지의 도덕에의 의지는 하나의 학파였다)
 

5[87] 인류의 위에 있는 어떤 인간으로 말하자면,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다. / 몽테스키외.
 

5[89] 우리 시대가 (유럽) 최고의 인간 유형이라는 커다란 오류에 대항하여. 오히려 : 르네상스-인간은 더 고귀했을 것이고,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다. 아마 우리는 상당히 아래쪽에 있을 것이다 : ‘이해’는 최고의 힘을 말해주는 기호가 아니라 쓸모 있는 피로의 표시일 것이다. 도덕화 자체는 ‘퇴폐’다.
 

6[15] 의미를 사물 속에서 구하지 말고 : 의미를 집어넣어라!
 

7[1] ‘본질’은 없다 : ‘변하는 것’ ‘현상적인 것’이 유일한 존재방식이다.
 

7[2] 진리와 오류의 가치 / 어떤 예술가는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거기서 시선을 돌려 뒤를 돌아보는데, 그의 진지한 견해는, 사물에서 가치 있는 것은 우리가 색체와 형태, 소리, 사상에서 얻는 그림자 같은 나머지라는 것이다. 그는 사물이나 인간이 더 섬세해지고 더 엷어지고 더 묽어지면, 그만큼 그들의 가치는 커진다고 믿는다 : 현실적일수록, 그들의 가치는 더 커진다. 이것이 플라톤주의다 : 그러나 플라톤주의는 방향을 돌리면 더욱 대담하다 : - 그것은 현실성의 정도를 가치 정도에 따라 쟀고 이렇게 말했다 : ‘이념’이 많을 수록 존재가 더 많아진다. 그는 ‘현실’ 개념을 돌려서 이렇게 말했다 : “너희가 현실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며, 우리가 ‘이념’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가까이> 진리에 접근한다”. -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은 최고의 개명(改名)이었다 : 그리고 이를 그리스도교가 수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놀라운 사실을 보지 못한다. 플라톤은 곡예사로서, 그는 곡예사였다, 실제로 존재보다 가상을 선호했다 : 다시 말해, 진리보다 거짓과 창작을, 실제로 있는 것보다 비현실적인 것을, - 그러나 그는 가상의 가치를 너무 확신했기 때문에 ‘존재’ ‘원인성’과 ‘선함’, 진리라는 속성들, 간단히 말해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나머지 모든 속성들을 그것에 부여했다. / 가치 개념 자체는 원인으로 생각되었다 : 첫 번째 통찰. / 이상(理想)에 속하는 모든 속성이 증여되고, 명예가 수여되다 : 두 번째 통찰
 

7[3] <제3장. 진리에의 의지> [...] C. 새로운 것공포를 일으킨다 : 다른 한편, 새로운 것을 새롭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포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 경악은 약화된 공포다. / 낯익은 것은 신뢰를 불러 일으킨다 / ‘진실한’ 것은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 관성은 외부의 어떤 인상에도 우선 동일화를 시도한다 : 다시 말해서 인상과 기억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반복을 원한다. / 공포구분, 비교를 가르친다. / 판단 속에는 의지(그것은 그러그러해야 한다)가 일부 남아 있고 쾌락의 감정이 일부 남아있다(긍정의 즐거움 :) / 주의. 비교원래 활동이 아니라 동일하게 취급하기다! 판단은 원래 어떤 것이 이러이러하다는 믿음이 아니라, 어떤 것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의지다. / 주의. 고통은 가장 거친 형태의 판단(부정하는). / 쾌락은 긍정 / ‘원인과 결과’의 심리학적 발생에 관하여
 

8[7] 거짓에 대한 즐거움은 예술의 어머니, 두려움과 감성은 종교의 어머니, 우리는 금지된 것
을 얻으려고 애쓴다Nitimur in vetitum와 호기심은 학문의 어머니, 잔인함은 비-이기주의적 도덕의 어머니, 후회는 사회적 평등 운동의 기원, 힘에의 의지는 정의의 기원, 전쟁은 (양심과 명랑함과) 정직성의 아버지, 주인의 권리 / 가족의 기원으로서. 불신은 정의와 관조의 뿌리
 



* 미셸 푸코 : <<비정상인들>>, 이 매력적인 텍스트!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