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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30.

공개와 연대


서평
 
푸코, 역(逆)패놉티콘 사회, 민주주의
 
 
 
 
  
 
 
 
 
 
존 김 지음, <공개와 연대.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의 정치학>, 한석주ㆍ이단아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게이오대학교 디지털미디어콘텐츠 통합연구기구의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존 김이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산하의 저명한 인터넷 관련 연구소인 버크만센터에서 행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책의 논지는 ‘머리말’에 잘 드러나 있다.
 
 
  
“예전에 미국의 대학원에서 유학했을 때, ‘정보사회의 기원 The Origin of Information Society’이라는 수업에서 프랑스의 철학자인 미셸 푸코가 쓴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을 읽은 적이 있다. ‘처벌’과 ‘감옥’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쓰인 책이었는데, 그 책에서 푸코는 ‘패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번역하자면 ‘전망대 감시 시스템’ 정도가 될 것이다. [...]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 혁명에 따른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나는 패놉티콘을 떠올렸다. 단, 구도가 반대가 되어야 한다. 즉, 일반적으로 패놉티콘이라 하면 정부가 감시탑에 있고 독방에 들어있는 시민들이 감시당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위키리크스가 불쑥 등장하며 제시한 것은 우리들 시민이 감시탑에서 정부를 감시하는 구도인 것이다. 역패놉티콘이라고 불러야 할까. / 정부나 대기업을 비롯한 기존의 권위는 정보의 점유와 통제를 통해 그 권위를 구축하고 유지해왔다. 하지만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이 정보의 투명화를 극단까지 밀어붙여서, 기존의 권위는 붕괴되고 새로운 권위 체제가 구축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 이 책에서는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 혁명의 분석을 통해 ‘역패놉티콘 사회의 도래’에 대해 논해 보려고 한다.”(ix-xi)
 
 
  
이러한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어진다.
 
 
 
 
“위키리크스의 창시자인 어산지는 시대의 이단아로 정보의 완전 투명화를 실현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최첨단 기술 지식을 종횡으로 구사하고 국가 간 법제의 차이에서 오는 공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전제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까지도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한 실적을 불과 몇 년 만에 만들어냈다. / 정보를 독점하고 은폐하는 것으로 만들어진 권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정부이건 기업이건 종교 조직이건 간에 윤리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내부 고발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기밀을 폭로하여 권위를 붕괴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부정은 없어지고, 사회의 투명성과 정의가 담보된다. 그리고 디지털 혹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통신 기술이 뒤에서 이를 지원한다. / 위키리크스는 이런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이에 대한 정부의 선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기밀의 누설을 허락하지 않는 더욱 견고한 정보관리 체제를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기밀이 될 만한 정보 자체를 줄여 갈 것인가다. [...]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걱정한 것은 ‘빅 브라더’라는 정부가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미래 사회였다. 그러나 위키리크스나 페이스북의 등장으로 정부 활동의 어두운 이면을 포함한 모든 정보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용기 있는 시민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목숨을 건 정치 행동을 일으키기 위한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었다. 감시받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정부가 되는 ‘역패놉티콘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 위키리크스가 실현하는 ‘완전 투명화 사회’와 페이스북이 실현하는 ‘게릴라 시민운동’은 이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147-149)
 
 
 
 
존 김의 저작은 극히 최근의 현상인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 등의 현상을 통하여 중앙 행정기관의 감시자가 주위의 죄수 혹은 시민들을 감시하는 푸코의 ‘패놉티콘 사회’에 대하여, 불특정 다수의 깨어있는 시민들이 중앙 행정기관을 감시하는 ‘역패놉티콘’ 사회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하지만 우선 존 김의 문제의식과 결론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존 김이 이러한 측면을 모르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는 이 책의 기본적 지향점이 본질적으로 위키리크스로 대변되는 일련의 현상이 갖는 ‘긍정적인’ 정치적 측면 곧 민주주의의 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을 밝히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공적 정보 및 통신의 수단을 독점하고 이에 대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존 권력 체제는 인터넷, 위키리크스, 페이스북 등으로 대표되는 ‘전자 민주주의적’ 경향에 의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 서게 되었다. 존 김에 따르면, 정보의 독점 및 중앙 집중, 비밀주의로 대변되는 기존 행정ㆍ관리 체제는 특히 공적 이익을 위한 감시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어산지의 위키리크스에 의해 결정적인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이는 국가 기관 혹은 국가 간의 협약에 의한 공공기관 및 국제적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기업 모두에 해당되는 현상으로, 이들 새로운 정보수단은 유사 이래 고급 정보의 독점ㆍ비밀주의에 기초한 권력을 남용하여 부당 이득을 취한 이들에 항거하는 민초들의 저항에 무기를 쥐어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이와 유사한 관점으로는 전명산의 『국가에서 마을로』(갈무리, 2012)에 등장하는 ‘홀롭티시즘 사회’의 도래를 들 수 있다. “홀롭티시즘은 판옵티콘을 완전히 뒤집은 개념으로, 판옵티콘이 소수가 다수를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구조라면, 홀롭티시즘은 다수가 공동체 전체를 볼 수 있는 구조를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홀롭티시즘의 초입에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촛불집회, 지하철 게릴라 시위, 네티즌 수사대 등 최근 우리가 새롭게 경험한 일련의 사건들이 바로 그러한 사회적 경향의 초기 모습이다. /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빅브라더’의 사회가 될 가능성과 더불어 ‘위대한 개인들’이 이끌어가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가 될 가능성이 공존한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홀롭티시즘적인 관점에서 사람들이 공동체 전체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보도자료)
 
 
 
 
 
 
 
그러나 이러한 정보ㆍ통신 테크놀로지 수단의 발달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전자민주주주의적’ 경향과 더불어 더욱 완벽한 ‘통제사회’를 가능케하는 ‘전자파시즘적’ 경향 역시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의 주체는 비단 이전과 같은 국가 기관 혹은 거대 기업만이 아니라, 웹 상에 존재하는 이른바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다. 이런 면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다수 무지와 편견에 의해 저질러지는 소수에 대한 폭력적 테러에 다름 아닌 유럽 중세 ‘마녀사냥’의 재판이 될 수도 있다(우리는 전세계에서 무차별적으로 벌어지는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마녀사냥’의 최근 사례를 무수히 목격하고 있다). 하버드의 신학자 하비 콕스가 자신의 역작 『세속도시』(1965)를 통하여, 현대 거대도시의 대중사회를 분석하면서 오직 하나의 전제적인 세계관을 강요하며 모든 이들의 내면에 대한 투명하고도 완벽한 통제를 강요했던 유럽 중세사회에 대하여 익명성과 개인의 사적 영역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신의 추복이라고 갈파한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이러한 측면에서 위키리크스의 위상은 조금 다른데, 이는 평등한 주권적 시민들의 결합ㆍ계약으로 간주되는 근대 국가 혹은 그러한 국가들 사이에서 위정자 혹은 거대 기업인이 자신의 특정한 지위를 이용하여 얻은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국가 혹은 인류 전체가 아닌 자신들이 속한 특수 집단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추구할 권리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사실상 가히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기도 한데, 이는 어산지이든 혹은 그 누구든 이러한 수준의 정보 취급 혹은 해킹 능력을 가진 인물들은 앞으로도 무수히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인물들이 이러한 사이트를 개설하고, 조직의 논리에 반하여 다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기밀’ 정보를 제공하는 개인들이 존재하며, 그에 대한 동조자들이 무수한 카피 사이트를 만들고, 이를 보도하는 매체들이 존재하는 한, 그러한 폭로는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부차적 문제라고 칭하여 질 수도 있지만, 다만 문제는 ‘국가 기밀해제 시효’의 경우처럼, 이른바 ‘통치권자’가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기밀을 설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리’, 곧 장기적 관점에서 본 국가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동시대의 대중들에게 모두 알릴 수는 없는’ 통치권자의 권리에 관련된 난점이 제기된다. 이는 말하자면 ‘네가 잘못한 일 혹은 오해받을 일이 없다면, 왜 내게 네 메일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못하느냐’는 애인의 잘못된 요구의 경우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 하나의 국가 혹은 조직도 일정한 ‘내적 생활’ 혹은 ‘국가 혹은 조직의 사적 영역’이 존재하는가 혹은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존재한다 해도 그러한 영역은 과연 어떤 조건하에서 어떻게 보호받아야 하는가라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결국 이러한 모든 논의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이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은 통치권 및 국가, 기업, 사생활, 권리, 공사 영역의 구분이라는 근대 정치학의 주요 개념들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만 한다는 요구와 당위성이다. 배아복제와 장기이식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정보 분야에서도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우리가 이전에는 기술적 이유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문제들이 기술의 발달로 가능하게 되었을 때 과연 우리는 이러한 기술을 활용해도 되는가, 활용한다면 어떤 조건 하에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위키리크스와 페이스북은 단순한 통신 기술 발달의 결과를 넘어, 지난 수세기 동안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고 지탱해왔던 정치와 사회 영역의 모든 개념들 곧 세계관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 및 재구성의 시기가 왔음을 알려주는 시금석이다. 
 
 
 
2012.10.30. 
 
 
 
 
 

2012. 9. 30.

부채인간 - 옮긴이 서문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부채인간>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 미디어, 2012



알라딘:
로쟈 서평, 주간경향
 
 
 
 
 
 
 
 

한국어판 서문
해제
옮긴이 서문


머리말

I. 부채를 사회의 기반으로 파악하다

왜 금융 경제가 아닌 부채 경제에 대해 말하는가
부채의 생산
특수 권력관계로서의 부채

II. 부채와 채무자의 계보학

1. 부채와 주체성 : 니체의 공헌
1) 사회적 관계의 기초로서 채권자-채무자 관계
2) 가능성ㆍ선택ㆍ결정으로서의 부채 시간
3)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경제

2. 두 명의 마르크스
1) 매우 니체적인 마르크스
2) 《자본》에 등장하는 객관적 부채

3. 부채 논리에 있어서의 행동 및 신용

4. 들뢰즈와 가타리: 부채의 짧은 역사
1) 무한 부채
2) 야만적 흐름
3) 자본주의적 흐름

III. 신자유주의에서 부채의 영향력

1. 푸코와 신자유주의의 탄생

2. 부채에 의한 주권ㆍ규율ㆍ생명관리 권력의 재배치
1) 주권권력
2) 규율권력
3) 생명관리권력

3. 부채의 시험에 직면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헤게모니인가, 통치성인가
1)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2) 서브프라임 위기
3) 국가 부채의 위기

4. 부채와 사회적 세계
1) 세 가지 부채: 사적 부채, 국가 부채, 사회 부채
2) 부채 주체성의 테크닉 안에 존재하는 위선, 냉소주의 및 불신
3) 가치평가와 부채
4) 사회적 예속화 및 기계적 노예화로서의 부채
5. 반생산과 반민주주의

결론

주석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52838.html



경향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212019305&code=900308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2851



시사IN - [특집/'부채 인간'의 탄생] 악마의 속삭임 '부자 되세요'

빚이 삶의 중심이 된 우리는 '부채 인간' 이다. 세계적인 금융자본주의의 바람을 타고 금융기관들은 미친 듯이 서민에게 대출을 해주며 부동산·주식 열풍을 일으켰다. 이제는 빚 때문에 힘들지만 빚이 없으면 살 수 없는 현실이다.

'금융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철학자 라차라토 인터뷰

http://www.sisainlive.com/cover2/viewContent.php?idxno=255



서울신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922018001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830679



문화일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92801032530159002






* 옮긴이 서문 [원본]




옮긴이 서문

부채인간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당신의 삶을 통제하는가?

1. 부채인간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은 당신과 우리의 오늘에 대한 책이다. 라짜라또는 청년 마르크스의 신용과 통화에 관한 소논문 「대출과 은행」 및 완숙기의 『자본』, 니체의 『도덕의 계보』, 그리고 이에 영향 받은 들뢰즈ㆍ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등을 원용하여 현대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지, 그리고 신용과 부채의 문제가 어떻게 ‘당신이 열심히 일을 할수록, 더 많은 빚은 지게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의 과정에서 라짜라또가 핵심으로 삼는 개념은 물론 특히 니체적 의미로 해석된 부채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이 책은 상기 사상가들의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저자 자신의 독창적 사유를 펼친 독자적인 저술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공정한 평가라 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의 핵심적 메커니즘을 드러내주는 키워드이다. 왜 기존 경제학의 개념이 아닌, 부채인간이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이 현대 신자유주의의 분석에 요청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저자 인터뷰 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 즉 사실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통화를 중립적인 것, 교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서만 간주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본주의 경제는 통화 경제이고, 신용 통화란 경제적 순환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통화의 창조는 부채를 통해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신용/부채에 대해 말하지 않고 시장 경제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금융화(그리고 오늘날 지상권을 갖고 있는 부채)는 사회적 생산성 및 부의 포획(capture)을 위해 작동하는 놀라운 기계입니다. 오늘날 부채 상환은 이윤을 대체해 버렸는데, 이는 기업의 이윤조차도 필연적으로 금융을 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채와 신용은 경제의 부정이 아니라, 경제의 진실입니다. 통화/부채의 발행을 통제한다는 것은 경제 금융을 통제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 발전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부채 인간은 부채 경제의 주체적 형상입니다. 나는 이 책에서 니체의 입장을 재구성하려 했는데, 그 주장의 기원은 오늘날에서야 겨우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사회적 관계의 기초가 경제적 교환 혹은 상징 교환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며, 대출자-채무자라는 권력 관계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권력 관계는 경제적인 동시에 주체적인 것입니다.”

핵심은 마지막 구절이다. 사회적 관계의 기초는 더 이상 경제적 혹은 상징적 교환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며, 대출자-채무자라는 권력 관계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라짜라또는 니체의 강력한 영향을 받아 부채인간의 개념을 구성한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자신의 주요 저작, 특히 『도덕의 계보』(1887)를 통하여 근대 영혼 및 신체의 통제 메커니즘을 분석한 바 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논의의 핵심은 죄책감, 혹은 부채의 관념이 근대 사회의 인간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핵심적 메커니즘을 구성한다는 주장이다. 아래에서는 라짜라토의 책을 이해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죄책감 혹은 부채에 관한 니체의 논의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2. 니체의 죄책감, 빚

니체는 우선 죄책감, 곧 양심의 가책 기원에 대한 자신의 ‘가설’을 제안한다.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 모든 본능은 안으로 향하게 된다. - 이것이 내가 인간의 내면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후에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이 인간에게서 자라난다. [...]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해 국가 조직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저 무서운 방어벽은-특히 형벌도 이러한 방어벽에 속한다-거칠고 자유롭게 방황하는 인간의 저 본능을 모두 거꾸로 돌려 인간 자신을 향하게 하는 일을 해냈다. 적의, 잔인함과 박해, 습격이나 변혁이나 파괴에 대한 쾌감-그러한 본능을 소유한 자에게서 이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의 근본적 개념 중 하나인(Schuld)는 , 곧 부채(Schulden)라는 매우 물질적인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간다(이 두 독일어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갖는 용어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곧, 손해와 고통 사이의 균형이라는 관념은 근본적으로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계약적 관계, 사법적 개인의 존재만큼이나 오래 되었으며 그 자신 교통ㆍ교환, 가치의 구입이라는 근본적 형식에로 또 다시 돌아가는 하나의 관계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이러한 관계의 원칙은 다음과 같은 고대인의 일반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어느 사물이나 그 가격을 지닌다. 모든 것은 대가로 지불될 수 있다.” 따라서, 정의 자체가 - 그 기원에 있어 - 주어진 어떤 순간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보아 “거의 대등한 힘의 상태를 전제한 보상이며 교환이다.” “‘죄’, ‘양심’,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의 발생지는 바로 이 영역, 즉 채무법이다.” 이로부터 형을 치르는 것에 대한 하나의 은유, “빚을 갚는다.”라는 일상적 표현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모든 내적ㆍ외적 처벌의 기초로서의 양심의 가책은 하나의 ‘질병’이다.

한편, 어떤 범죄자가 스스로를 사회의 ‘적’ 혹은 ‘비행인’(?)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양심의 가책 혹은 죄책감의 내면화를 통해서이다. 그는 사회에 의해 정복 혹은 ‘포괄ㆍ이해’(conquis et "compris")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치 및 도덕의 기준은 언제나 사회적이다. 사회는 자신의 보존ㆍ보호ㆍ번영이라는 자신의 명확한 이해(利害) 기준에 따라 가치들 및 도덕들을 판단한다. 달리 말해, 모든 가치와 도덕은 오직 주어진 사회 내에서만 타당하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사회의 관심은, 결코 자신의 ‘참다운 진보’가 아닌, 오직 자신의 단순한 보존, 현상 유지(statu quo)에 있다. 사회적 가치는 근본적으로 사회의 이기주의에 의해 탄생한다. 사회적 가치는 사회적 기능에 관련된 효용성에 준하여 판단된다. 더구나 이러한 사회의 이익을 위한 덕들은 그 기원이 망각됨으로써 오늘날 이익이 아닌 어떤 순수한 동기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행해지고 있다.
“근본 동기, 즉 유용성이라는 동기가 망각된 그러한 행위들이 도덕적 행위라고 불린다. [...] 모든 도덕의 근원이며 도덕적 행위에 대한 모든 찬사의 근원인 사회는 분명 이익 이외의 다른 모든 동기가 도덕적으로 훨씬 높게 평가되도록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나 격렬하게 개인의 사리사욕과 싸워야만 했다. 그리하여 도덕은 마치 이익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은 근원적으로는 사회의 이익이며, 모든 개인적인 이익에 맞서 자신을 관철시켜나가고 더 높은 품위를 얻기 위해 애써왔다.”
하나의 사회는 자신에게 ‘부적합한’ 모든 것들을 억압하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예외들’을 자신에 대한 위험 요소로서 배제한다. “예외자를 범죄자로 다루고 억압하기 위한 심문, 불신, 관대하지 않음의 정도-자신들의 예외성으로 인해 내적으로 병들 정도로 그들 자신에게 양심의 가책을 갖게 하기 위해서.”따라서, 한편으로는 “살해하고, 고문하고, 자유아 재산을 빼앗”으며, “교육을 제한함으로써, 학교를 통해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로서)” “속이고, 기만하고 쫓아” 다니는 사회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내면화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최면에 걸리고”, “뭉그러진”, “실패한”, “길들여진” 범죄자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영혼과 신체에 있어 ‘근대인’으로 ‘형성’되고 ‘개선’되었으며 ‘변형’된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이다.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육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의무와 마찬가지로 죄,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 역시 이제는 그 기원이 잊혀진 과정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의 발명품이다. 우리는 결코 양심의 가책의 존재 이유,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 내력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 도덕을 포함한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 발명된 것이며, 그 자신이 구성된 계기들, 곧 역사를 갖는다. 우리는 도덕의 계보학을 수행해야 한다.

3. 부채의 인간학 - 경제 인간, 부채 인간

결국 라짜라또의 부채인간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메커니즘이 전통적인 기존 경제학적 관념만으로는 분석 불가능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개념적 도구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개인적인 것, 도덕적인 것, 한 마디로 ‘경제적이지 않은 모든 가치’를 경제적 효용가치로 환원한다. 오늘날의 이른바 ‘스펙’이란 용어가 학생들에게 미치는 권력 효과에서 잘 드러나듯이, 당신이 좋은 학교를 가지 못하고, 좋은 영어 성적을 받지 못하며, 좋은 직장을 가지 못했고, 혹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더구나 많은 부채를 지고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 개인의 책임이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닌 품행을 통제하는 도덕적 가치를 구성한다.
“현실을 봐라, 너 언제까지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살래? 네가 지금 그럴 때니?”
그리고 이는 바로 니체의 단언처럼 스스로에 대하여 내면화 된다.
“아, 난 왜 이러지? 난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지, 난 왜 이렇게 끈기가 없지, 그래 모든 건 다, 내 잘못이야.”
라짜라또의 부채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구조적 문제이다. 현대 세계를 살면서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도덕주의적 담론에서 근본적으로 탈피할 수 있는 개인은 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경제적 교환 혹은 상징 교환에만 의존하는 기존의 경제학적 분석은 부채인간이라는 더 큰 개념 아래 새롭게 포괄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경제적 인간의 생산과 실존적 인간의 생산은 분리불가능한 동전의 양면이다. 따라서,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가 그에 적합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의 분석을 위한 도구이다. 달리 말해, 부채인간의 개념은 현대 신자유주의의 비판을 위해 고안된 비판적 인간학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사회보장 연금 신청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회복지 기관의 ‘상담’을 받고 나온 신청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가 내게 주요 관심사나 일생에 하고 싶은 일 혹은 예전에 하던 일을 왜 선택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질문으로 답했죠. “그럼, 당신은 왜 이 복지 기관에서 일을 하기로 선택했나요?” 나는 그녀의 질문이 너무 지나친 질문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내 삶에 대해 그녀에게 이야기해야만 할 의무는 전혀 없는 거죠. […] 그녀가 계속 그런 질문을 고집하는 건, 나에 대해 그녀가 갖는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로부터 그녀가 나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그녀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녀가 보기에 나는 아직 나의 직업, 내 길을 찾지 못한 사람이고, 그저 내가 상황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도록 그녀가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이었던 겁니다. 나는 내가 내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고, 나 자신을 정당화해야 하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혀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지요. 그녀는 나를 좀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모든 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제시하는 능력 평가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이에 더하여, 내밀함에 관련된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나는 심도 있는 능력 평가를 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이는 고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정해진 관습대로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삶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역겨운 용어들을 쏟아 내면서 당신에게 당신의 삶에 대한 심사숙고를 강요한다.”

“수당 수령자는 ‘개별 조사’에서 자신을 설명해야만 하고, 또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주기적으로 자신의 삶과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혹은 지어내고), 그들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해야만 한다. 수당 수령자가 사생활 침해와 개인과 주체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려고 해도, 기관이 강요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에 의해 그는 이 폭력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는 당신의 생각과 삶을 그들의 기준에 맞추어 도덕화하고, 당신은 이에 대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여, 복지기관과 국가는 당신의 공적 생활은 물론 사생활을 통제하며, 이러한 통제는 당신의 가장 내밀한 곳, 곧 당신의 마음속에까지 이른다.

“더 나아가, ‘신청자의 사생활 염탐’은 복지 기관의 종사자들에 의해 점점 더 빈번히 행해지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내심으로는 가난한 자, 실업자, 임시직 종사자들을 ‘불신’하고, 그들을 ‘사기꾼’ 혹은 ‘모리배’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 기관은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수당 수령자들의 품행을 감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개인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간다. 복지 기관은 수령자의 집에 들어가 생활 방식을 조사하고 질문할 권리를 갖는다. 수당 수령자의 방을 살펴보고 화장실을 들여다보며 칫솔이 몇 개나 있는지 확인한다. 또 전기세와 전화세, 집세 영수증을 요구하고, 그의 생활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특히 그가 혼자 살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만약, 그가 어떤 배우자와 함께 살고 있다면, 이 배우자는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가야만 하는 존재로 가정되기 때문에, 복지 수당은 중단될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 학습의 과정을 거쳐, 당신은 이제 ‘스스로 알아서 하는’ 존재가 된다. 신자유주의는 다름 아닌 당신의 마음, 품행, 일상을 통제한다. 신자유주의는 당신의 사생활, 취미, 습관, 생각, 품행, 태도, 자세, 가치관, 세계관을 새롭게 빚어낸다. 당신은 그들이 제시하는 기준에 맞추어 스스로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일은 당신은 그러한 당신의 삶이 당신 자신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진짜 자기’인 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주체로서 조립ㆍ제조ㆍ생산된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잃고 그저 신자유주의적 가치에 의해 조건화 된 채로 느끼고 생각하는 자동인형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라짜라또는 이렇게 말한다.

“부채의 활동 범위는 단순히 금융과 화폐 정책을 세심히 조작하고 막대한 양의 돈을 굴리는 일에 국한되지 않으며, 사용자의 실존을 생산ㆍ통제하는 기술을 형성ㆍ배치하는 것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경제는 결코 주체를 장악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신자유주의가 당신 앞에 제시하는 삶의 양식을 거부하고 그와는 다른 게임, 다른 삶을 살 수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라짜라또에 의하면 계급투쟁이다. 더하여, 이는 또한 당신의 주체성, 정체성을 위한 투쟁이다.

가장 효과적인 지점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려면 부채에 대한 이 죄책감을 극복해야만 한다.

“이 죄책감은 신에 대한 부채가 아닌, 지상의 부채, 우리의 지갑을 짓누르고, 우리의 주체성을 조정하며 포맷하는 부채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부채를 탕감하거나 파산 신청을 내는 것이 아니라, - 이런 일들이 매우 유용할 때조차도 - 우리를 가두고 있는 담론 및 부채의 도덕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일이다. 우리는 부채에 대해 우리를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우리를 잃었다. 모든 정당화는 이미 당신을 죄인으로 만든다! 이 2차적 순수를 정복하고, 모든 죄책감과 의무,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단 한 푼도 상환해서는 안 된다. 부채를 없애기 위해 투쟁해야만 한다. 돈을 상환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재앙으로 몰아넣는 권력장치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과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와 권력의 문제이다. 이것은 시혜와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과 투쟁의 문제이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가타리의 말을 인용하여, 당신이고 나인, 그리하여 우리 모두인, 대한민국의 모든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 곧 그들의 단어로는 ‘열등생들’에게 건네는 이런 한 마디 말을 상상해본다.

“당신은 대한민국의 열등생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장점이다. 다행히도,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당신과 같은 열등생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 열등생들은, 때로는 명시적으로 또 때로는 암묵적으로, 자신에게 강요되는 이른바 ‘정상화’ 계획을 거부한다. 당신이 계속해서 불량 학생으로 남아 있기를, 그리고 우리가 좋은 친구들로 남아 있기를!”

2012년 9월 13일,

옮긴이들을 대표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