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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

michel foucault - l'usage de la parole - 1963/1974



 
 Le discours de la folie 3
- La persécution (1963)  
 
 
 
 
 
Le discours de la folie 4
- Le corps et ses doubles (1963)  
 
 
 
 
 
 
interview 1974
radioscopie
 
 
 

2013. 9. 20.

[대담] 철학과 인문학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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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한 대학 철학과 학술지에 싣기 위해 한 두 달(?) 전에 행한 인터뷰다.
사실 인터뷰 전체는 현재의 2-3배 분량인데, 녹취록 정리가 어려워
일단 이번에는 앞부분만 학회지에 싣기로 했다. 
 
 
 
 




 
















 

 
 

2012. 12. 2.

인문학 공동체 - 인터뷰



- 우선, 인문학 공동체의 가치와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 선생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가치
 
인문학공동체의 인문학이란 인간에 대한 연구를 의미하는 라틴어 studia humanitas에 대한 일본어 번역이다. 인문학이란 오직 인간에 대한 연구, 인간학일 뿐이다. 인간학 공동체에 대한 가치와 지속 가능성이란 이러한 인식 안에 다 들어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인간 곧 나와 우리에 관한 연구 안 해도 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도 없고 따라서 고민도 공부도 없는 이와 그러한 인식 아래 배우고 고민하는 이의 평생은 어떤 의미로든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정말 무엇이 실용적인가를 생각해보라. 인문학이야말로 실용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문학공동체에 대한 독자들의 진지한 관심을 촉구한다.
 
지속가능성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부재로 인해 현실적으로 인문학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은 그리 밝지 못하다. 이는 물론 주체인 공동체 운영진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가령 우리나라에서 오직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인문학 공동체를 운영하는 바보는 없다. 실제로 여러 인문학 커미니티에 가서 강의를 해보면 모두 일정한 사명감을 가지고 스스로 즐거운 일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박봉 혹은 무급에도 불구하고 참여하는 모습을 본다.
 
문제는 인간학 혹은 인문학에 대한 우리나라의 가히 무지와 편견, 천박함이 어우러진 일반 대중의 인식이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인간학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티비와 주변에서 주워들은 인문학에 대한 황당무계한 소문(가령, 철학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혹은 반대로 인문학에 대한 터무니없는 어리석은 환상만을 품은 채 인문학을 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둘이다.
 
하나. 우선 당신이 인문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알고자 굳이 찾아다니며 배워야 한다. 안 알아보고 안 배워도 좋다. 다 당신 인생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관심할 권리와 자신을 파괴할 권리 모두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먹고 살기도 힘든 당신에게 인간학만이 유일한 실용적인 길이라 주장하는 멍청한 주장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인문학이 도대체 무엇이며, 뭘 하는 학문인지 당신이 굳이 시간들여 배우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이 지금 인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평생 가지고 살 것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둘. 인문학 공동체들은 대한민국 국민들 중 이러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돕는 커리큘럼을 개발해야 한다(인문학에 대한 인식도 관심도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해주자!). 가령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 대한 강의가 있다고 하자. 보통 음 심오한 니체의 철학이니 어렵겟구나, 하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이 책이 기존 도덕이란 것 자체가 나약한 인간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이른바 양심의 가책 혹은 죄책감이란 하나의 그냥 질병 혹은 그 증상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책임을 안다면 이 강의에 대해 조금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가령 니체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제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건 무슨 말인가? 잘못하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말라는 말인가? 죄책감이 잘못된 행동의 개선에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인가? 음, 씨바 쫄지마 ... 보다 이건 한 수 더 나간 것 같다 ... 그렇다면 ... 나꼼수가 니체적이었단 말인가?

- 다음으로는, 제도권 교육과 대안 공간에서의 교육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치셨던 선생님의 경험을 살려주실 수 있는, 구체적인 예시가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차이점에 대해 말하자면, 물론 일장일단이 있다. 그러나 설문이 대학교육의 문제점보다는 오히려 대안교육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달라는 것으로 생각되니 일단 이렇게 적어보자.
 
첫째. 자신들이 굳이 강의를 알아보아, 굳이 돈 내고, 굳이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 특히 강일 당일날 다른 곳에 갈 수도 있는데 굳이 그 모든 현실적 압박과 유혹을 이기고 참여한 사람들이라 강의 분위기나 태도부터가 질적으로 다르다. 대학 강의처럼 학점을 위해 그냥 앉아 자기 인생을 허비하는 한심한 작태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진다.
 
둘째. 대학과 달리 선생님과 수강생, 호은 수강생들 사이에 지나친 위계질서가 없으니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편안한 인간관계가 맺어진다. 한 마디로 교수와 학생이 아니니, 내가 쫄 이유도 없고, 미래의 어떤 혜택 혹은 자리 등과 같이 뭘 상대에게 바라거나 하지 않으니 자유롭다. 물론 이런 말이 합리적 권위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내가 핵물리학을 배우고 싶으면 오늘부터 조용히 적어도 15년 정도는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말없이 기존 시스템을 습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의 습득과는 달리, 인문학의 장점(?)은 이런 학습의 과정에서조차 질문하고 토론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내 대학 수업에서 나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들이 인문학 연구 공동체에 찾아오는 일이 종종 있다. 그때 나는 대학에서는 제도적 제한, 가령 숫자의 제한으로 알 수 없었던 그 학생의 삶에 대해 듣고 말하고 서로 더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와 앎 그리고 배움을 통해 나와 학생의 사이는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앎이자 배움, 스투디아 후마니타스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인문학 공부의 약점은 없는가? 없다. 물론 스스로 알아보아, 스스로 돈 내고,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일들이 모인 공동체에도 그것이 인간이 하는 일인만큼 왜 문제가 없겠는가? 그러나 그 문제의 크기는 내가 아는 어떤 다른 공동체보다도 작다. 나는 오늘도 인문학을 배우러 버스를 타고 공동체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먼훗날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