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4.

roland barthe

 
 
 
 
*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 1915-1980)
 
 

 
 
 
 
 
1953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 suivi de Nouveaux essais critiques
『글쓰기의 영도』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1957
Mythologies [2007]
『현대의 신화』
이화여대 기호학연구소 옮김, 동문선, 1997.
1963
Sur Racine
『라신에 관하여』
남수인 옮김, 동문선, 1998.
1967
Système de la mode
『모드의 체계』
이화여대 기호학연구소 옮김, 동문선, 1998.
1970
S/Z essai sur Sarrasine d'Honoré de Balzac
『S/Z』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1970
L'Empire des signes
『기호의 제국』
김주환ㆍ한은경 옮김, 정화열 해설, 산책자, 2008.
1973
Le Plaisir du texte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옮김, 동문선, 1997.
1975
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hes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이상빈 옮김, 동녘, 2013.
1976
Comment vivre ensemble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와 세미나, 1976-77』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1977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사랑의 단상』
김희영 옮김, 동문선, 2004.
1978
Le Neutre
『중립.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와 세미나, 1978』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1980
La Chambre claire : Note sur la photographie
『카메라 루시다』
조광희ㆍ한정식 옮김, 열화당, 1986/1998.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1981
Le Grain de la Voix : Entretiens, 1962-1980
『목소리의 결정』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5.
1987
Incidents
『작은 사건들』
김주경 옮김, 동문선, 2003.
2009
Journal de deuil
『애도일기』
김진영 옮김, 이순(웅진), 2012.


 
* 바르트 관련
 
 
- 그레이엄 앨런, 『문제적 텍스트 롤랑/바르트』, 송은영 옮김, 앨피, 2006.
- 신항식,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 기호의 윤리에 관하여』, 문경(문학과경계), 2003.
- 벵상 주브, 『롤랑 바르트』, 하태환 옮김, 민음사, 1994.






* 조너선 컬러, 『바르트』, 이종인 옮김, 시공사, 1999.



“그[베르테르]는 사랑에 빠졌다. 그는 도처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항상 의미를 만들어내며, 이 의미가 그를 전율케 한다. 그는 의미의 가혹한 시련 속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의 접촉은 이렇듯 모두 대답이라는 문제를 야기하며, 이때 대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살갗이다. / (손을 꽉 잡는다는 것 - 수많은 소설의 얘깃거리가 되어 온 - 손바닥 안에서의 그 미세한 움직임, 가만히 있는 무릎,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파의 등받이를 따라 늘어뜨려진 팔, 그 위로 차츰차츰 다가와 기대는 그의 머리. 그것은 미묘하고도 은밀한 기호들의 천국이다. 감각의 축제가 아닌, 의미의 축제와도 같은 그 어떤 것).”(『사랑의 단상』)(152-153)



연인은 기호의 천국에 산다. 사랑받는 사람과 관련 없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는 애인의 행동을 자세하게 분류하고 또 해석하면서 몇 시간을 보낸다. “그 일은 사소한 것이나(그것은 언제나 사소한 것이다) 내 모든 언어를 끌어당긴다.” / 바르트는 연인들의 기호학적 사색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며 설득력도 지니고 있다. 애인은 아주 빈번하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의도적인 몸짓’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 처신에 관한 고뇌는 사소한 것이다. 그것은 점덤 더 사소해져서 끝이 없다. 만약 그 사람이 무심코 이런저런 시간에 그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내게 주었다면,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전화를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그에게 전화할 수 있다고 - 이것이 그 메시지의 올바른 객관적 의미이다 - 말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은 바로 이 허락이니까.)” / “[...] 나에게는 새로운 것, 방해하는 것은 모두 어떤 사실의 부류가 아닌, 해석해야만 하는 기호로 받아들여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것들은 이내 기호로 변형되며 그리하여 하나의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이다(그 울림에 의해). 그 사람이 내게 새 전화번호를 주었다면 그건 어떤 기호일까? 시험 삼아 지금 곧 사용해보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필요에 의해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하라는 것이었을까? 내 응답 또한 그 사림이 필연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기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이미지의 소란스러운 교차가 폭발한다. 모든 것은 의미한다라는 명제가 나를 사로잡아, 계산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할 뿐 즐기지도 못하게 만든다.” [...]



이와 같은 소설적 단상들은 연인의 생각이 가지는 구체적인 몸짓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의미작용의 메커니즘과 그 물귀신 같은 공모성(共謀性)을 생생하게 드러내준다. 그렇다면 사랑에 빠진 연인, 강박증을 보이는 해설가, 곤경을 명쾌하게 분석하는 분석가와 기호학자/신화학자를 구분해주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연인의 담론이 갖고 있는 감상성(感傷性)이다. 연인은 평범한 기호를 의미 있는 기호로 착각하고, 그 주위의 사소한 대상에 본원적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153-155).
 
 
* 저자의 죽음(1968년) - “우리는 이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텍스트는 단 하나의 ‘신학적’[=절대적] 의미가 내세우는 단어의 조합(신이나 다름없는 저자의 ‘메시지’)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비(非)독창적 글쓰기가 뒤엉키고 충돌하는 다차원의 공간이 되어야 마땅하다.”(13-14) 저자가 아니라, 텍스트를 연구해야 한다.



* “엄마, 나 자전거 두 손 놓고도 잘 타요!”, “엄마, 나 개념 없이도 잘 해요!”(20)



* 「비평[비판]이란 무엇인가?」 - “비평가[비판가]의 책무는 작품의 숨겨진 의미-과거의 진실[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é)을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이해 가능한 것’을 구성하는 일은 과거와 현재의 현상들을 다루는 개념의 틀을 다시 짜는 일이다. / “평생 동안 나를 매혹시켜 온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방식이었다.” / 바르트의 글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또 실제 그렇게 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에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의미들은 실은 문화의 산물이며, 너무 친숙하여 오히려 우리가 간과하고 마는 개념적 틀의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 바르트는 기존 견해에 도전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세계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습관적 방식을 폭로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한다(21-22).



* “모든 자서전은 그 이름을 밝히지 않은 소설이다.”(23)
 
 
* 바르트는 사르트르의 시인과 산문작가의 구분을 écrivainécrivant 사이의 구분으로 대치한다. écrivain 또는 ‘작가’는 언어의 탐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고, écrivant은 언어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바르트가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물론 écrivain이다(172).
 
 
* 1954-1956년 동안 바르트는 <레 레트르 누벨>이라는 잡지에 매달 ‘이 달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짤막한 특별 기사를 썼다. “나는 현대 생활을 하면서 자연과 역사가 혼동되는 것을 목격하고 분노를 느낀다.” 바르트는 대중문화의 여러 측면들을 토론하면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으로 호도된 사회적 고정관념들을 분석해 나갔다(42).
 
 
* 신화(神話, mythologies). 대부분의 경우 바르트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위장된 이데올로기의 함축을 폭로하면서 ‘신화’를 폭로해야 할 환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급진적 사상은 이런 오래된 관습(시공을 초월한 불변의 공통분모로서의 ‘인간성’ 혹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의 조건을 역전시켜야 하며 늘 자연, 그 ‘법칙’, 그 ‘한계’를 지속적으로 벗겨내어 거기서 역사를 발견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자연을 하나의 역사적인 것으로 확립해야 한다.”(42-43) 프랑스인에게 “포도주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의 강요된 집단행동이며,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사회통합의 의식이다.” 신화적 의미를 생성시키면서 문화는 그 자체의 규범을 이른바 ‘자연스러운 사실’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인간과 세계의 관계이다 ... 부르주아 규범은 이제 자연계의 자명한 법칙으로 경험되고 있다.”(44) 가령 포도주는 2차적(신화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데, 바르트는 그것을 폭로하려 한다. 포도주와 한 장의 사진 같은 아주 실용적인 물건이나 관습도 사회적 용례에 의해 2차적 의미를 획득하여 하나의 신화로 기능하게 된다(43-44). 레슬링과 권투의 차이(47-49).



* 바르트는 나중에 동양의 신화학이라 할 일본 기행문 『기호의 제국』을 펴냈는데, 여기서 그는 일본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보여주는 인공성(人工性)을 높이 칭찬하고 있다. 일본의 정교한 예절 체계, 깊이보다 외양을 중시하는 태도, 서구인의 눈으로 볼 때 사회적 관습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노력 등이 모두 신기했다는 것이다. “언어의 ‘건강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언어의 바탕이 되는 기호의 자의성이다. 신화가 역겨운 것은 가짜 자연에 의존하려는 바로 그 태도 때문이다.”(49)
 
 
* 그는 대중지 <파리 마치>의 표지로 실린 프랑스 군복 차림의 흑인이 프랑스 국기에 거수경례를 하는 사진을 예로 든다. “겉으로 자연스럽게 보인다 하더라도 나는 이 표지의 의미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대충 이렇다.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다. 제국의 아들들은 인종이나 피부색의 구별 없이 프랑스 국기 아래 뭉쳐야 한다. 식민주의가 틀려먹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여, 이 젊은 흑인 병사를 보라. 이 젊은이가 소위 압제자라고 하는 제국에 이토록 충성하고 있는데, 도대체 식민주의가 왜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이 표지의 신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건 단지 흑인 병사의 사진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들이 단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그 옷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와 같이 얼토당토 않은 알리바이를 자꾸 꾸며내는 것을 바르트는 신화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으로 바라보았다(50-51). “신화를 분석하는 것은 지식인이 정치적 행위를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53) 빵집 점원 여성에게 건네는 한 마디, “오늘 햇빛이 참 좋네요.”(53-54) 아름다움의 인식, 향유는 계급에 의해 규정된다.



* 『비평과 진실[비판과 진리]』(Critique et Vérité). 바르트는 한 국가의 비평은 과거의 대상을 시기별로 채택하여 그것을 새롭게 기술함으로써, 오늘의 시대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문학연구를 작품을 어떤 상황 속에 놓고 그 의미를 캐내는 비평과, 작품을 텅 빈 공간으로 보는 문화과학(혹은 시학)으로 구분했다. 문화과학은 의미가 발생되는 조건을 분석하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비평가는 자신의 언어로 작품을 뒤덮으며 작품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어 의미를 발생시키는 작가이다. 반면 시학은 작품을 해석하지 않고 작품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읽기의 구조규약[=코드, code]를 기술하는 것이다. 시학은 다양한 시대의 독자와 다른 성향의 독자에게 다양한 의미를 전달해주는 읽기의 구조와 규약에 집중한다(93-94).
 
 
* 소쉬르의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개념 쌍. 랑그는 사람들이 특정 언어를 배울 때 익히는 언어의 체계[文法]이며, 파롤은 말, 즉 언어로 실제로 말해지거나 쓰인 무한한 발화(發話)들이다. 언어학과 기호학은 의미작용을 가능케 하는 규칙과 변별의 내재적 체계를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기호학은 하나의 전제, 곧 인간의 행동이나 인간이 만든 물건에 의미가 있다면 거기에는 그 의미를 생성시키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변별 및 규약의 체계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가령 음식문화[및 ‘식사예절’]를 연구하는 기호학자가 있다고 하자. 이 때 파롤은 식사 행위라는 개별적 구체적 사건이 되고, 랑그는 이런 식사를 지배하는 규칙의 체계가 된다. 가령, 랑그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어떤 요리가 어떤 요리와 함께 나와서는 안 되며, 또 몇 가지 코스로 식사를 구성하는가와 같은, 하나의 식사 행위가 문화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려주는 규칙[기준]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양식을 수프-전채-주요리-후식-음료의 순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은 랑그이고, 야채수프-아스파라거스-로스트비프-애플파이-커피 등 구체적인 음식을 먹는 것은 파롤이다. 영어의 2형식은 주어, 동사, 보어(S-V-C)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랑그이고, 구체적인 발화들, 곧 I am a boy, You are a girl, He is a pupil 등은 파롤이 된다.]
 
 
레스토랑의 메뉴는 사회의 ‘음식문법’의 가장 좋은 사례이다. 연사적(連辭的, syntagmatique) 위치가 있고(수프, 전채, 주요리, 샐러드, 후식 등), 각 위치를 메워줄 수 있는 서로 대조되는 항목들의 계사적(繫辭的, paradigmatique) 부류(수프는 야채크림수프, 크림수프, 샥스핀 수프 등이 부류가 된다)가 있다. 또 이들 음식을 먹는연사적 순서를 지배하는 규칙이 있다(가령 수프, 주요리, 후식은 정통적인 순서이지만, 후식, 주요리, 수프는 비문법적이다). 또 같은 부류 안에서 서로 다른 음식을 고르는 것은 의미를 갖게 된다. 가령 주요리로 햄버거를 먹는 것과 구운 꿩고기를 먹는 것은 서로 변별됨으로써 2차적 의미(이 경우, 빈부의 차이)를 구성하게 된다. [연사적 관계는 “저 사과는 붉다.”라는 말에서 ‘저/사과는/붉다’ 사이의 관계를 말하며, 계사적 관계는 ‘저/이/그’, ‘사과/배/감’, ‘붉다/푸르다/노랗다’ 사이의 관계이다.](97-99)
 
 
* 분절(分節, articulation). 언어의 중요한 특징이다. 가령 “머리가 아프다.”라는 문장은 일정한 음성의 연쇄체에 일정한 의미가 결합한 단위이다. 이 문장은 ‘머리/가/아프다’의 세 단위로 분절되는데, 이를 1차 분절이라 하고, 다시 ‘머리’가 ‘ㅁ/ㅓ/ㄹ/ㅣ’의 네 단음으로 분절되는 것을 2차 분절이라 한다. 인간의 언어가 지닌 이중 분절이라는 것은 겨우 수십 개의 음운이나 일정한 수의 기호소로 무한한 말을 할 수 있는 놀라운 메커니즘이다. 유한수의 단위를 유한수의 연결규칙으로 결합시켜 무한한 수의 문장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능력을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이중 분절이다(99-100).



* 바르트는 패션이나 문학이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기표(signifiant) 우선주의를 지키고자 했다(106). 의미가 있는 곳에 체계가 있다. 바르트 탐구의 주된 관심은 기호와 그것이 발생시키는 의미에 대한 체계적 반성이다(108).
 
 
* 구조주의(structuralisme). 현상을 규칙과 변별의 내재된 체계의 산물로 보는 구조주의는 언어학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원칙을 차용해왔다. 1) 의미(sens)를 나타내는 실체는 본질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내적ㆍ외적 관계의 그물망에 의해 규정된다. 2) 따라서, 의미작용(signification)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러한 현상을 가능케 한 규범 체계를 서술하는 것이다. 이제 구조주의적 설명은 - 더 이상 역사적 전례나 인과관계를 추구하지 않으며 - 다만 특정 대상이나 행동을 그것들이 기능하는 체계 속에 연결시킴으로써, 그 구조와 의미작용만을 파악하고자 한다(110). “반성적이든 시적인 것이든, 모든 구조주의적 행동의 목표는 대상을 ‘재구성하여’ 그것이 기능하는 규칙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것은 생각의 방식(혹은 ‘시학’)이다. 따라서 소설시학은 그 대상에게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의미가 어떤 방식, 어떤 수단으로 생산되는지를 파악하는데 더욱 관심을 갖는다.” 바르트는 문학도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작품의 의미 해독을 도덕적 목표로 삼지 말고, 그 의미가 만들어진 과정의 규칙과 제약을 재구성하도록 해야 한다 ... 모름지기 문학비평가라면 작품의 주제를 재구성하는 것보다는 그 작품의 체계를 더 잘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이는 언어학자가 특정 문장의 의미보다는 그 문장의 의미가 전달되는 형식구조의 확립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도 같다.”
 
 
구조주의 문학연구 방법론의 네 가지 특징
 
 
1) 문학의 언어를 언어학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문학구조의 변별성을 파악하려 한다. 에밀 벵브니스트(Émile Benveniste [bɛ̃venist], 1902-1976)d의 담론(discours)과 이야기(histoire).
 
 
2) 서사(敍事, narration, narrative)의 구성요소를 밝혀내고 다른 서사 기술에서 그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재배열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서사학’(敍事學, narratologie)의 발달. 블라디미르 프로프(Vladimir Propp, 1895-1970), ‘민담(民譚)의 문법’. 민담의 기본 모티브와 그것이 어떻게 다르게 배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은 이에 힘입어 플롯(plot)의 기본 요소는 무엇이고, 어떻게 서로 결합되는지, 플롯의 기본구조는 무엇인지, 어떻게 완성/미완성의 효과가 생산되는지를 연구. “구성 단위들 및 규칙들에 내재된 체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서는 서사를 생산할 수 없다.”
 
 
3) 문학적 의미는 자품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문화 담론에 의해 생산되는 코드에 상당히 의존한다.
 
 
4) 읽기에 있어서의 독자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한다. 이때 독자는 - 어떤 사람 혹은 주체로서보다는 - 일정한 기능(機能, fonction[=函數]) 혹은 역할(役割, rôle)로서 이해된다. “텍스트에 접근하는 ‘나’는 그 자체로 이미 다른 텍스트의 집합이며, 무한한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잃어버린(기원이 상실된) 코드들의 집합체이다. [...] 주체성은 일반적으로 내가 그것 때문에 텍스트를 방해하는 하나의 충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에서 이 가짜 충만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코드들의 흔적에 불과하다. 결국 나의 주체성은 고정 관념의 총합이 되어 버리고 만다.” / “문학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들을 더 이상 텍스트의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 생산자로 만드는 것이다.” / “독자의 탄생은 곧 저자의 죽음을 의미한다.”
 
 
구조주의 이후, 사람들은 문학을 - 더 이상 의사전달 혹은 재현으로 바라보지 않고 - 문학제도에 의해 생산되는 몇 가지 형식 혹은 문화의 담론적 코드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구조분석은 작품 속에 숨겨진 비밀스런 의미를 찾지 않는다.
 
 
“작품이란 독사(doxa)다. 작품은 층위(수준, 제도)의 구성물이다. 그 안에는 심장, 핵심, 비밀, 가장 근본적인 원칙 따위는 없다. 단지 무한한 층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층위는 작품의 표면을 통합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115)
 
 
“작품의 표면 구조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다. 글쓰기의 공간은 그 표면을 탐구해야 하며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110-116)
 
“우리는 이제 텍스트가 단 하나의 신학적 의미(저자-신의 ‘메시지’)만을 전달하는 단어들의 집합이 아니라, 다차원의 공간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는 다양한 비(非)독창적인 글쓰기가 혼합되고 충돌한다. 왜냐하면 텍스트란 수도 없이 많은 문화의 중심부에서 가져온 인용의 그물망이기 때문이다.”(118)



* 바르트의 독해는 클리언스 브룩스, 크로 랜섬 등과 같은 영미권 신비평가들의 자세히 읽기와 다르다. 이들은 전체적 유기성이 갖는 미학의 파악을 자세히 읽기의 목적으로 삼은데 반해, 작품의 ‘다원적’ 성격의 파악에 관심을 갖는 바르트는 전체적 통일 구조의 추적을 거부하는 대신, 각 부분이 어떻게 작동하고, 그 부분에 어떤 코드가 관련되어 있고, 또 그 코드의 기능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집중했다(120). 마찬가지로, 바르트의 입장은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른바 ‘해체’(déconstructionisme)와도 다르지만, 그렇다고 그 차이가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 해체는 한 담론의 배경이 되는 철학적 전제조건을 담론 스스로가 파괴(해야)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구조주의는 물론 의미를 코드와 규약의 생산물로 바라보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규약의 파괴에서도 의미가 생산된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구조주의의 표어가 포괄적인 과학성의 개념이었다면, ‘해체’를 포함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표어는 포괄적인 문제제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22-123).



* 진정한 작가에게 글을 쓴다라는 동사는 - 목적어(‘무엇’)를 수반하는 타동사가 아니라 - ‘스스로 쓴다’라는 뜻의 자동사이다. “나는 나 자신의 오래된 단편들을 샅샅이 추구하는 것을 포기한다. 나는 나 자신을 복구하려(우리가 기념비에 대해 말할 때처럼) 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기술하지 않겠다. 아니, 나 자신에 대해서는 쓰지 않겠다. 오히려 텍스트를 쓰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R.B.라고 부르겠다.”(『바르트가 쓴 바르트』)(141).



* 『바르트가 쓴 바르트』 -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쓴 것은 결코 마지막 말이 될 수 없다. 내가 ‘진지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나 자신은 더욱 더 해석의 대상이 된다 ... 나의 텍스트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어느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보다 우세하다고 할 수 없다. 맨 나중의 텍스트는 한층 심화된 텍스트일 뿐, 결코 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텍스트 위에 텍스트가 놓여 있을 뿐, 서로 조응하지 않는다.”(147) “내가 개인적 삶을 드러낼 때 나 자신을 가장 많이 폭로하는 셈이 된다 [...] 개인적인 것은 사소한 것이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서, 주체에 의해 고백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흔적일 뿐이다.”(148)



* 주체의 부정 - “나라는 주제는 통합되어 있지 않다.” “주체는 단지 언어의 효과이고 문자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일 뿐이다.” “주체의 분야에서는 지시대상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지 않았던가?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이야기일 뿐이다.”(157-158) 바르트 자신이 볼 때나 또 우리들이 볼 때나, 바르트(이 자리에 누구의 이름을 넣어도 좋다, 가령 당신)는 글쓰기의 집합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진정한 ‘바르트’라고 못 박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대조와 모순의 덩어리인 글쓰기의 집합체, 바르트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바르트’라는 사람 자체가 이들 단상들을 정리하기 위해 형성된 구조물이기 때문이다(158).



* 위반에 대한 위반 - “반작용형성. 독사(대중적 의견)는 이미 정해져 있어서 참을 수가 없다. 나는 그런 독사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 하나의 역설을 제시한다. 그러면 이 역설이 변질하여 새로운 구체물이 되고, 그렇게 하여 이것 역시 독사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다른 새로운 역설을 찾아 떠나야 한다.”(160-161) “나는 나의 가면을 가리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Larvatus prodeo.”(161) “분명 그는 의미가 면제된(병역에서 면제되듯이) 세상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꿈은 ‘모든 기호의 부재’를 꿈꾼 『글쓰기의 0도』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꿈과 관련된 천 개의 확인 행위가 발생한 것이다.”(『바르트가 쓴 바르트』)(145)
 
 
“내가 가장 확실하게 느끼는 것은 내가 그 어떤 환원적 체계에도 반대한다는 것이다.”(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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