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17.

잠언 09

 



0.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자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누군가가 '민주주의자'인가 아닌가를 알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녀가 타인의 말을 들을 능력이 있는가, 보다 정확히는 그녀가 남의 말을 듣고자 하는 의지와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민주주의자'란 차라리 하나의 무서운 농담이다.



1.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의 인식 버전을 앎의 의지(will to know)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앎의 의지의 철학 버전은 보편에의 의지(will to the universal)이다.



2. 철학자의 참다운 윤리는 자신의 이론을 자신의 '이론'에도 적용시키는가의 여부에 놓여 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중요시하는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가의 여부는 이에 비하면 차라리 부차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3. 야구와 바둑이 '있는 줄' 알다 - 흔히 가령 야구 혹은 바둑이 인생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말은 맞을 수밖에 없다. 야구나 바둑을 삶으로부터 실체적으로 분리하여 바깥에 두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야구와 바둑은 삶의 내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야구와 바둑은 삶의 일부이고, 따라서 삶의 모든 속성이 야구와 바둑에서도 발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 "한 학문의 청년기는 그것의 성숙기이다. 이 시기 이전에, 학문은 - 어린아이가 편견으로 살아가듯 - 편견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며, 결국 부모들의 세대를 살아가는 것이므로 낡은 것이다." -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와 라캉>, <<아미엥에서의 주장>>(솔, 1991, 25쪽).



5.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은 정치였다. 정치 일반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정치였다. [...] 일단 마르크스-레닌 주의 정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자, 나는 또한 철학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마침내 마르크스와 레닌, 그람시의 위대한 테제, 즉 철학이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는 테제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같은 책, 45쪽)



6.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마땅히 그래야 되므로'라는 식으로 도덕화하는 경우가 있다.



7. 내가 아는 것과 내 몸이 느끼는 것은 다르다. 가령, 당신이  - 그것이 심지어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 당신이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다고 '믿는다면' 당신의 이러한 믿음에 따라 반응한다. 따라서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 무엇이 사실인가임과 동시에 - 어떤 면에서는 더욱 더 내가, 나의 몸이 무엇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가이다.



8. 친구, 애인, 부모, 직장을 막론하고, 인간관계를 '우격다짐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그녀가 실패해도 문제이지만, 기실 더 큰 문제는 그녀가 - 적어도 외견상 - '성공'했을 경우이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이룬 반면, '사람'을 영원히 잃는다. 결국, 부작용이 성과를 능가하는 것이다.



9. 라캉의 manque(lack)는 결핍이 아니라 결여이다. 결핍은 무엇인가 '채워넣어야' 할 부정적인 것이고, 결여는 '존재의 본질적 양태', 곧 존재의 존재 조건이다.



10.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는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 이호영, <<여자의 속사정, 남자의 겉치레>>(23쪽)



11. "<대학 大學>이라는 책은 남자에게 '나라를 다스리고 治國',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라 平天下'고 주문한다. 그런데 <대학>에서 주문하는 정치를 하려면 먼저 왕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평천하'를 직접 실현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모두가 왕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대학>이라는 남자의 규격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태도 '왕 노릇 연기'이다. 한 마디로 <대학>은 왕만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 남자를 왕으로 느끼게끔 해주는 가상적인 '남자 판타지'라는 얘기다. 남자는 근본적으로 판타지에 목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같은 책, 22-23쪽.



12. 존경과 사랑을 동시에 얻기는 참으로 힘들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상극이다. 그러나 지금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진심의 존경을 받고 있다면, 이는 그 인격의 탁월함을 증거하는 것이다.




13. 가령 철학선생님에게 배워야 할 것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철학하는 것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철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철학함이란 하나의 능력이며, 가령 누군가가 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철학을 배우는 이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 적어도 처음에는 선생님이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철학하는 행위를 직접 보고 이를 모델로 삼아 따라해 봄으로써 - 어떻게 스스로 철학하는가를 배우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칸트가 자신의 수업 시간에 자주 반복했다는 '여러분은 내게 철학을 배울 수 없고 오직 철학하는 방법만을 배울 수 있을 뿐이다'라는 말은 천하의 명언이다).




14. 당신이 가장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15.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몹시 괴롭힌다. 이런 면에서, 내 삶의 목표는 '자기를 괴롭히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16. 시칠리아의 암소, 혹은 키요틴 - 평생 '단장취의'와 '거두절미'로 타인을 심판하던 자가 이번에는 스스로 그러한 심판의 대상이 되다.




17. 하나의 관점 - 철학자를 '섹시한' 철학자와 '그렇지 않은' 철학자로 나누어 본다.




18. '초심자의 마음이 부처이다'라는 말은 때로 참으로 옳다. 아무 것도 모르나,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며, 나아가 참으로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초심자들은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던지는 대부분의 질문은 가히 근본적인, 곧 철학적인 질문들이다.




19. 프랑스철학의 두드러지는 두 가지 특징은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과학철학적 전통, 그리고 소쉬르 이래의 구조주의적 사유이다.




20. "종교란 죽음의 해결을 위해 발명된 것이다." - 김용옥




21. 현상학이 말하는 이른바 '본질직관'이란 '서양본질직관'이다.




22. 철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종종 어떤 철학자 개인에 대한 호감을 철학 행위 자체의 탁월함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철학은 개인에 대한 호감 혹은 악감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철학자가 '유명'해진다면, 이는 곧 그 철학자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따르는 일군의 사람들, 팬들(?)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철학자가 참된 철학자라면,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 자기 자신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호감이 아닌 - 참다운 사유 행위 자체, 철학 행위 자체를 향하도록 이끌고 격려할 것이다.




23.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가령 엄마에 대한 자식의 묘사는 대개의 경우 '엄마'보다는 오히려 그 말을 한 '자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24. 푸코 효과 -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할까?'로부터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로.




25. 올바른 교육의 유일한 형태는 학생들의 말을 경청하고,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교육이다(학생들의 의견이 잘 경청되었고 잘 반영되었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학생들 자신이어야만 하며, 이에는 어떤 예외, 혹은 어떤 형식의 대표자(대리인)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이외의 모든 '교육' 형태란 기득권자의 가치관을 피교육자들에게 주입시키는 폭력 혹은 세뇌에 다름 아니다.








 
 
Danzonete Hebreo




2014.05.-2014.06.





 
 

댓글 1개:

  1. 24. 푸코 효과 -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할까?'로부터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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