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숭고의 분석학
본 장에서 칸트는 취미판단의 하부 영역으로서 '숭고의 분석학'을 다루고 있다. 미적 판단이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롭고 유동적인 합치에서 오는 조화의 느낌이라면, 숭고는 상상력과 이성의 관계가 부조화에서 조화로 이행하는 데서 오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적 판단이 단선적인 쾌감이라면 숭고는 복선적인 쾌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의 서술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칸트가 미적 판단을 다루는 앞장에서는 인식능력 안의 다른 영역들과 순수한 미적 판단을 명확히 구분하려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숭고를 다루는 이 장에서는 인식능력들 사이의 결합과 작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결론적으로 칸트에게 있어 숭고는 무엇보다 도덕성과 관련되며, 어찌보면 그것은 도덕적 에너지의 표현이다. 한편, 미가 대상의 형식과 관련됨으로써 여전히 감각 경험의 토개에 근거하는 반면, 숭고는 이성의 이념과 관련됨으로써 감각적인 것을 포기하고 이성으로 나아감을 목표한다. 그런 점에서 양자는 적대적이고 대립하는 측면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본 장의 서술순서는 다음과 같다. 우선 칸트는 '숭고판단'을 '미적판단'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어 그는 숭고판단의 하위 개념으로서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를 구분하고 있는데, 전자가 '절대적 크기'에 의해 성립되는 숭고판단이라면, 후자는 '강렬한 위력'에 의해 성립되는 숭고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감적 반성적 판단에 대한 주해를 달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숭고-도덕성의 관계에 대한 논의와 함께, 자신의 숭고에 대한 분석이 차지하는 이론적 위치가 조명되고 있다.
23~24절
칸트는 도입부에서 숭고의 분석학의 대상, 즉 '숭고판단'을 '미적판단'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양자 사이의 공통점으로는 그것들이 모두 그 자체로서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판단이라는 점, 감관적 판단이라는 점, 단칭판단이라는 점, 반성적 판단이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양자는 '쾌적'의 경우에서와 같이 전적으로 감관에 의존적이지는 않으며, 마찬가지로 도덕판단이나 인식판단과 같이 개념에 전적으로 규정되지도 않으나, 여전히 특수하게 "개념들과 관련"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다음으로 양자의 차이점으로는
첫째, 미(자연미)는 대상의 형식과 관련이 있는 반면에 숭고는 무정형적이고 무형식적인 대상과 관련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미적인 것이 무규정적인 지성개념의 현시라면, 숭고한 것은 무규정적인 이성개념의 현시라고 할 수 있는데, 따라서 전자가 질의 표상과 결합되어 있다면, 후자는 양의 표상과 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형식내지 형상이 질적인 특징과 관련이 있다면, 무규정성, 무제한성 그 자체는 양적인 특징으로 파악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칸트는 미적인 것이 "생명을 촉진하는 감정"을 지니지만, 숭고한 감정은 "생명력들이 일순간 저지되어 있다가 곧 장 뒤이어 한층 더 강화되어 범람하는 감정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따라서 전자를 적극적 쾌, 후자를 소극적이고 간접적인 쾌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숭고는 일반적으로 "경탄과 존경을 함유한다."
셋째, 자연미는 대상을 형식 합목적적인 면에 비추어보는 반면, 숭고한 것의 감정은 형식의 면에서 반목적적이고, 현시능력에 부적합하며, 상상력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차이점들에 입각해 칸트는 자연의 많은 대상들을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합하나, 어떤 대상을 숭고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숭고는 감성적 형식이 아닌 '이성의 이념'들과만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숭고에서 이 이성의 이념은 감성적으로 현시되는 일종의 부적합성을 통해서만 환기된다.
아울러 칸트는 자연미, 즉 미적으로 파악된 자연이 기계성이라는 자연의 개념을 기예로서의 개념으로 확장시킴으로써 "형식의 가능성에 대한 깊은 연구로 초대"하는 의의를 지니며, 그에 반해 숭고로 파악된 자연은 결코 자연 자신 안의 합목적적인 것을 지시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자연에서 전적으로 독립된 합목적성을 우리 안에서 느낄 수 있도록 하는"의의를 지님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전자에서는 여전히 우리 밖에서 하나의 근거가 찾아진다면, 후자에서는 전적으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자연의 표상에 숭고성을 집어넣는 사유방식 안에서 하나의 근거"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숭고한 것에 의해서는 자연 안의 어떠한 특수한 형식도 표상되지 않고, 단지 상상력의 자연의 표상에 대한 합목적적 사용만이 전개될 뿐"이다.
'숭고판단'의 성격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에 이어 칸트는 양(보편타당성), 질(무관심성), 관계(주관적 합목적성), 양상(필연성)의 관점에서 미에 대한 분석과 숭고에 대한 분석이 겹쳐짐을 지적하며, 따라서 숭고에 대한 분석이 미에 대한 분석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질 수 있음을 언급한다. 이어 숭고의 하위 개념으로서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를 구분하는데, 그에 따르면 양자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상상력이 관계 맺는 요소에 있다. 수학적 숭고에서 상상력이 인식능력과 관계한다면 역학적 숭고에서 상상력은 욕구능력과 관계 맺는다.
A. 수학적-숭고에 대하여 25~ 27절
칸트는 "단적으로 큰 것을 우리는 숭고하다고 부른다."라고 말하며, 따라서 '수학적 숭고'를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 큰 것으로 정의한다. 본래 '크기'는 상대적인 개념일 수 밖에 없다. 즉 "현상들의 크기 규정이 어떤 크기에 대한 절대적인 개념을 결코 제공할 수 없고, 언제나 단지 하나의 비교개념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 크기 개념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는데, 이는 결코 직관에 의한 대상의 속성이 아닌 순전히 반성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것을 단적으로 혹은 절대적으로 크다. 즉 숭고하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에 알맞은 자(척도)를 그것의 밖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것의 안에서 찾을 것을 승낙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해 숭고한 것이란 "자연의 사물들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이념들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숭고한 것이란 그것을 단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관의 모든 자를 뛰어넘는 마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이어 그는 수 개념들에 의한 크기의 평가인 '수학적 크기의 평가'와 순전한 직관에서의 크기의 평가인 '미감적 크기의 평가'를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전자에서는 결코 '최대의 것'이 존재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론적으로 주어진 숫자에는 언제나 더 큰 숫자가 붙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후자에서는 최대의 것이 존재할 수 있는데, 이는 "숭고한 것의 이념을 수반하고, 수들에 의한 어떤 수학적인 크기 평가도 일으킬 수 없는 감동"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 수학적 크기의 평가가 상대적 크기의 현시라면 미감적 크기의 평가는 절대적 크기의 현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크기에 대한 미적 이해를 설명하기 위해 칸트는 상상력의 두 가지 작용, 즉 '포착'과 '총괄'을 언급하는데, 상상력은 "포착의 면에서는 무한히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총괄은 포착이 밀고 나가면 나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고, 이내 최대한도에, 곧 크기의 평가의 미감적으로 가장 큰 기본척도에 이른다." 이와 같은 상황의 실례로서 칸트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방문한 방문객의 당혹스러움을 들고 있다. 여기서 그 건축물의 자태는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내부의 전경을 한꺼번에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이다. 방문객은 곧 자신의 "상상력이 전체의 이념들을 현시하기에는 그 이념들에 대해 부적합하다는 감정이 드는바" 이로 말미암아 상상력은 자신의 최대한도에 이르게 되고, 이윽고 그것은 하나의 감동적 만족으로 옮겨진다.
칸트는 다시 한번 숭고에서는 "대상의 형식의 합목적성이 그 판정의 기초에 놓이지 않음"을 강조하며, 그러한 주관적-합목적성이 어떠한 성격을 갖는지를 질문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그는 '이성의 목소리'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성의 목소리는 주어지는 크기에 대해서, 결코 전체로 포착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감성적 표상에서 전체로 주어지는 것으로 판정되는 크기들에 대해서조차 전체성을 요구"한다. 물론 이성의 목소리는 무한한 것 까지도 그러한 요구에서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무한한 것을 전체로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게끔 한다. 결국 칸트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성의 목소리란 일종의 '전체성 이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더 이상 어떤 개별적인 직관에는 적합하지 않은 이성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런 전체성 이념을 가리켜 그는 "무한한 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생각만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감관의 모든 자(척도)를 뛰어넘는 마음의 능력이 있음"울 알려준다고 말하며, 그로부터 "주어진 무한한 것을 전체로서 모순 없이 생각만이라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자신 초감성적인 능력이 인간의 마음에 있을 것이 요구된다."는 주장을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응당 칸트에게 "진정한 숭고함은 오직 판단하는 자의 마음에서 찾아야지, 그것에 대한 판정이 마음의 그러한 정조를 야기하는 자연객관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칸트는 숭고판단에 있어서의 만족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데, 그에 앞서 우선 숭고가 수반하는 감정에 대해 언급한다. "숭고한 것의 감정은 미감적인 크기 평가에서 상상력이 이성에 의한 평가에 부적합함에서 오는 불쾌의 감정이며, 또한 그때 동시에, 이성이념들을 향한 노력이 우리에 대해서 법칙인 한에서, 최대의 감성적 능력이 부적합하다는 바로 이 판단이 이성이념들과 합치하는데 서 일깨워지는 쾌감이다." 한편, 그러한 감정이 쾌감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직관과 지성에 치우쳐 있는 우리를 다시금 이성 이념으로 환기시켜 방향을 잡아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숭고의 불쾌의 감정이 쾌로 전환되는 과정을 그렇게 밝히며, 다시금 숭고에서의 만족의 의미를 정의한다. 그는 그에 대해 "미적인 것의 판정에 있어서 상상력과 지성이 그들의 일치에 의해 그렇게 하듯이, 이 경우에는 상상력과 이성이 그들의 상충에 의해 마음의 능력들의 주관적 합목적성을 만들어낸다. 곧 우리는 순수한 자립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감정, 바꿔 말해 우리는 그 탁월성이 다름 아니라 크기를 현시함에 있어서 그 자신 무한정한 것인 이 능력의 불충분성으로 인해 직관화 될 수 있는 그런 크기 평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아울러 이와 같이 숭고의 불쾌가 동시에 합목적적인 것으로 표상되기 위해서는 무능력이 주관의 무제한적 능력의 의식을 드러내고, 마음은 그 무제한적 능력을 무능력에 의해서만 미감적으로 판정할 수 있을 때 임을 재차 강조한다.
B. 자연의 역학적-숭고에 대하여 28~29절
칸트는 숭고판단의 두 번째 유형인 '역학적 숭고'를 논의하기 위해, 우선 '위력'과 '강제력'을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위력이란 커단란 장애들을 압도하는 능력"이며 강제력은 "그 자신 위력을 소유한 어떤 것의 저항 또한 압도"하는 힘이다. 다시 말해 위력의 고양된 형식이 강제력이라는 것이다. 이어 그는 역학적 숭고를 "미감적 판단에서 우리에 대해서 아무런 강제력도 가지지 않은 위력으로 고찰되는 자연"으로 정의한다. 역학적 숭고에 대한 분석에서는 관찰자의 감정적 반응이 더욱 깊이 다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나타나는 정서는 무엇보다 일종의 두려움 혹은 특별한 형식의 공포이다. 이 공포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그 대상을 두려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곧 우리가 순전히, 가령 어떤 대상에 저항을 해보려는 경우를 생각하고, 그 경우에 모든 저항이 어림없는 허사가 될 것으로 어떤 대상을 판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 상황으로서가 아닌 오직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자연력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공포가 역학적 숭고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가령 칸트가 예로 들고 있는 "번개와 천둥소리와 함께 몰려오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 먹구름, 온통 파괴력을 보이는 화산, 폐허를 남기고 가는 태풍, 파도가 치솟은 끝없는 대양, 힘차게 흘러내리는 높은 폭포와 같은 것들"은 그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우리의 저항하는 능력을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물론 그 속에서는 숭고판단의 여지 같은 것은 전혀없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다고 하면, 그러한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더 우리의 마음을 끌 뿐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칸트가 언급하는 역학적 숭고는 우리 자신의 안전에 대한 쾌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개인 자신의 안전에 기반을 둔 단순한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칸트의 생각에 따르면 역학적 숭고는 우리가 스스로를 단순한 물리적 생명체만이 아님을 의식한다는 의미이다. 즉 "자연의 위력의 불가저항성도 자연존재자로 볼 때의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체적 무력함을 인식시켜 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그 위력에서 독립적인 것으로 판정하는 하나의 능력과 자연에 대해 압도적임을 들춰내준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숭고판단의 성립은 자연이 두려움을 일으키는 한에서가 아니라, 자연이 우리 안에 우리의 힘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원리가 한편으로는 억지스러워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장 평범한 판정들의 기초에도 놓여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개명된 사회 속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전사에 대한 각별한 존경의 감정을 그 실례로서 제시하는데, 그 존경의 감정은 "위험을 뚫고 나가는 그의 마음의 불요불굴성이 인식되기 때문"에 활성화된다. 아울러 그는 "전쟁조차도 만약 그 전쟁이 질서 있게 그리고 시민의 권리들을 신성시하면서 수행된다면, 그 자체로 어떤 숭고한 것을 가지는 것이며, 전쟁을 이런 식으로 수행한 국민이 더 많은 위험에 처했고 그 위험 아래서 용기 있게 견뎌낼 수 있었다면, 그 전쟁은 그 국민의 사유방식을 그만큼 더 숭고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랜 평화는 한낱 상인정신을 그리고 그와 함께 천박한 이기심과 비겁함과 유약함을 만연시키고 국민의 사유방식을 저열하게 만들고는 한다."는 언급을 하기도 한다. 또 칸트는 자신이 제시하는 '숭고에 수반되는 존경'의 감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종교와 미신을 구분하고 있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미신이 "마음에 세우는 것은 숭고한 것에 대한 외경이 아니라, 겁먹은 인간이 그를 존경하지 않으면서도 그 의지에 굴복할 것을 아는 초강력한 존재자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이로부터는 선한 품행의 종교 대신에, 도대체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은총의 갈구와 아첨만이 생겨날 따름이다." 결국 칸트가 역학적 숭고의 작용으로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우월성은 자연의 조건과 제약을 감수하면서도 이를 상대화할 줄 아는 인간의 정신적 강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자연에서의 숭고한 것에 대한 판단의 경우에는 쉽게 다른 사람들의 동참을 예상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그 이유가 자연대상들의 이러한 탁월성에 대한 판단은 "한낱 미감적 판단력뿐만 아니라, 미감적 판단력의 기초에 놓여 있는 인식능력들의 개발도 훨씬 더 많이 요구"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가령, 우리가 삶의 조건에서 오로지 자연 존재로서 생존하고 기본적인 욕구들만을 채울 수 있는 상황이라면 숭고판단과 같은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자연스레 "그렇다면 숭고판단이란 몇몇의 탁월한 삶의 형식에만 적합한가?"라는 질문을 수반하게 된다.
물론 이에 대해 칸트는 부정적인 답을 내놓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의 숭고한 것에 관한 판단이 문화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이 판단이 바로 문화로부터 처음으로 산출되거나 가령 한낱 인습적으로 사회에 도입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판단은 인간의 자연본성에 그 토대를 두며, 그것도 사람들이 건전한 지성을 가지고서 동시에 누구에게나 강요할 수 있고 요구할 수 있는 것에서, 곧 실천적 이념들에 대한 감정의 소질에서, 다시 말해 도덕적 감정의 소질"에서 비롯한다.
칸트가 미의 분석에서 순수한 미적 판단을 다른 것과 명확히 구분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면, 숭고의 분석에서 그는 이와 같이 인식능력들 사이의 결합과 작용에 중점을 둔다고 말 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의 문장에서 알 수 있듯 미적 경험(숭고판단)과 도덕적 태도(도덕성)사이의 관계이다.
* 미감적 반성적 판단들의 해설에 대한 일반적 주해
이 주해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요한 첫 번째 내용은 앞서 언급한 숭고-도덕성의 관계이다. 우선 칸트는 이에 대해 "자연의 숭고한 것에 대한 감정은 도덕적인 것에 대한 감정의 정조와 비슷한 마음의 정조가 그 감정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능히 생각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며, 이는 무엇보다 사유방식의 모종의 자유라는 점에서 그러함을 지적한다. 물론 '윤리성'과 '숭고한 것의 미감적 판단'의 작용은 상이하다. 전자에서 이성이 감성에 대해 강제력을 가함으로서 이루어진다면, 후자에서 이 강제력은 이성의 도구로서의 상상력 자신에 의해 행사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므로 "자연의 숭고한 것에서의 흡족은 또한 단지 소극적이다." 한편, 숭고판단이 이루어지는 경우란 예컨대 "경악에 가까운 감탄, 전율, 그리고 하늘 높이 솟구쳐 있는 산악들, 깊은 협곡과 콸콸 흐르는 격류, 우울한 명상에 잠기게 하는 깊이 그늘진 황야 등을 바라볼 때 보는 이를 엄습하는 심한 경외감은 그가 안전한 곳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 경우에는 현실적인 공포가 아니라, 단지 상상력을 가지고 그에 참여하려는 하나의 시도일 따름이며", 그러한 마음의 동요를 마음의 평정상태와 결합시키고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자연보다도, 그러니까 또한 우리가 안녕하다는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에서의 우리 밖의 자연보다도 우월한, 바로 그 상상하는 능력의 위력을 느끼기 위함이다."
칸트는 자연 뿐만이 아닌 심성의 숭고함을 검토하기도 하는데, 그 한 예로 '용감한 방식의 격정'을 들고 있다. 이것은 "곧 어떠한 저항이라도 이겨내려는 우리의 힘에 대한 의식을 환기시키는" 것이며 이는 미감적으로 숭고하다. 예컨대 분노가 그러하고, 심지어는 절망(그러나 격분하거나 낙담한 절망이 아닌)이 그러하다. 한편 그는 "비굴하고도 저열한 은총의 갈구와 아첨을 권장하는 종교적 설교"나 "자기 멸시와 흐느껴 우는 가장된 회개와 한낱 수동적인 마음자세만이 최고 존재자에게 적의한 것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보는 그릇된 겸손" 등은 심성의 숭고함은 커녕 아름다움과도 거리가 먼 것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주해에서 다루어지는 두 번째 주요한 내용은 숭고를 다루는 동시대의 다른 학자들의 논의와의 비교 하에 칸트 자신의 논의가 갖는 위치를 조명하는 것이다. 칸트의 숭고 분석이 그 이전의 논의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가 숭고에 선험적인 분석을 도입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즉 경험적으로 주어진 개별 대상으로서 숭고 체험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가능성의 조건 그 자체에 대해 심층적인 질문을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는 숭고분석이 어떤 대상이 숭고한 것으로 체험되거나, 거기에서 개인이 숭고의 감정을 느낀다는 식의 개별사례를 기술하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이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논자는 버크(Edmund Burke)이다. 그는 숭고체험을 일종의 생리학(심리학)적 언설로 풀어내고 있는데, "숭고한 것의 감정은 자기보존의 추동과 공포, 다시 말해 일종의 고통에 기초하며, 이 고통은 신체의 부분들을 실제로 파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기 때문에, 이 고통이 만들어내는 운동들은 가늘거나 굵은 맥관들을 위험하거나 괴로운 폐쇄들로부터 정화하여 쾌적한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감각은 쾌감은 아니기는 하지만, 일종의 흡족한 경외감으로서, 경악이 섞여있는 모종의 평정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즉 버크는 개별 관찰자가 숭고한 대상을 볼 때 가지는 생리학적(심리학적)반응들을 자세히 기술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렇게 모든 사람이 특정한 조건에서 숭고의 감정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는 식의 설명은 부족함을 지적하며, "사람들이 취미판단(숭고판단)을 모든 사람이 마땅히 그에 동의해야 할 것을 동시에 요구할 수 있는 그러한 판단으로 인정할 만하다면 그러한 판단의 기초에는 사람들이 마음의 변화의 경험적 법칙들에 대한 탐지를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선험적인 원리가 놓여 있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미감적 판단들에 대한 경험적 해설이 "보다 고차적인 연구를 위한 재료를 수집하기 위한 시작"이 될 수 는 있으나 이러한 능력에 대한 하나의 초월적 해설이 가능해야 하며, 이것이야 말로 본질적인 취미판단에 속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순수 미감적 판단들의 연역 30절
이 절부터 칸트는 미감적 판단들에 있어서의 연역의 문제, 즉 타당성 요구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 연역과 같은 논리적 접근을 통해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데, 간략히 숭고를 배제하고 미에 대한 판단만을 포함시키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미감적 판단의 모든 주관에 대한 보편타당성의 요구는 어떤 선험적 원리에 기반해야만 하는 판단으로서, 하나의 연역을 필요로 한다. 이 연역은 미감적 판단이 곧 객관의 형식에서의 흡족 또는 부적의함에 관련할 때에는 그 판단의 해설 위에 덧붙여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연의 미적인 것에 관한 취미판단들은 그와 같은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합목적성은 어디까지나 객관과 객관의 형태 안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여기에서 연역은 가능하며 필연적이다. 그러나 반면 숭고에 있어서는 "자연의 숭고한 것은 단지 비본래적으로만 그렇게 불리는 것이며, 숭고한 것이란 본래적으로 한갓 인간의 자연본성에서의 사유방식에만 또는 차라리 이 사유방식의 토대에만 부여되는 것"이므로 판단자가 숭고와 관련해서 자신의 이성 능력을 의식한다는 사실의 지적 자체가 타당성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는 자연사물들의 '미에 관한 판단'들의 연역만을 찾으면 전체 미감적 판단력을 위한 관제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