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6.
칸트, 판단력 비판 - 제1편 제2절 [380-442]
미감적 판단력의 변증학
취미에 관계할 수 있는 변증학의 개념으로는 취미 자신이 아니라 취미 비판의 변증학의 개념만이 남는다. (381쪽)
취미에 대한 상투어로서 명제1. ‘누구나 자기 자신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 명제2. ‘취미판단에
관해서는 논의할 수 없다' 사이에는 ‘취미에 관해서는 논쟁할 수 있다'가 빠져 있다. 그러므로 취미의 원리의 관해서 다음의 이율배반이 나타난다.
1) 정립: 취미판단은 개념들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반정립: 취미판단은 개념들에 기초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결코 논쟁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82쪽)
여기서 제시된 이율배반의 기초에는 취미의 올바른 개념, 곧 반성적인 미감적 판단력의 취미개념이 놓여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원칙들이 합일되었는데, 그것은 양자가 참일 수 있기 때문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386쪽)
자연의 미감적 합목적성의 실재론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기초에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원인 안에 그것의 이념, 곧 우리의 상상력을 위한 하나의 목적이 놓여 있었다고 상정하고 싶어한다. (394쪽)
그런데 우리는 미 일반을 판정함에 있어 판정의 선험적 표준을 우리 자신 안에서 찾으며, 미감적 판단력은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판단에 관해서 그 자신 법칙수립적이다. (397쪽)
그러나 미감적 이념들에 의한 흡족은 특정한 목적들의 달성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원리의 이성론에서조차 목적들의 실재성이 아니라 관념성이 그 기초에 놓여 있다. 예술 자체는 지성과 학문의 산물이 아니라, 천재의 산물로 보아야만 한다. 자연과 예술의 미적인 것을 판정함에 있어서, 합목적성의 관념론은 취미판단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전제이다. (398쪽)
감성화로서의 모든 현출은 도식적이거나 상징적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지성이 파악하는 개념에 대응하는 직관이 선험적으로 주어지고, 후자의 경우에는 오직 이성만이 사고할 수 개념의 근저에 판단력이 도식화에서 준수하는 방식에 유비적으로 수행하는 직관이 놓이다. 상징적 표상방식은 단지 직관적 표상방식의 한 종류이다. (399쪽)
미적인 것은 윤리적으로좋은[선한] 것의 상징이며,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만 미적인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요구함과 함께 정의한 것이다. (401쪽)
판단력은 주관 자신 안에 그리고 주관 밖에 있는 어떤 것에 자신이 관계 맺어져 있음을 본다. 이 초감성적인 것에서 이론적인 능력은 실천적인 능력과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어떤 공통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 통일된다. (402쪽)
1. 미적인 것은 직접적으로 적의하다. 2. 미적인 것은 일체의 이해관심 없이 적의하다. 3. 상상력의 자유는 미적인 것의 판정에서 지성의 합법칙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표상된다. 4. 미적인 것의 판정의 주관적 원리는 보편적인 것으로 표상되지만 어떠한 보편적 개념에 의해서도 인지되지 않는 것으로 표상된다.
이상의 유비에 대한 고려는 통상적인 일이다. 우리는 자주 자연이나 예술의 아름다운 대상들을 윤리적 판정을 기초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본다. (403쪽)
목적론적 판단력의 분석학
합목적적이며 마치 우리의 사용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마련되어 있는 것 같은 성질을 가진, 그러면서도 우리의 사용을 고려함 없이도 사물들의 본질에 근원적으로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의 필연성 속에, 우리 밖에 있다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이성 안에 있는, 자연에 대한 커다란 경탄의 근거가 놓여 있다. (414쪽)
그러나 이 지성적 합목적성은 비록 그것이 객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능성의 면에서 (질료적인 합목적성이 아니라) 형식적인 합목적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나 밖의 사물들의 총체는 나의 임의의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공간 한정으로부터 선험적으로 이끌어 낼 것을 바랄 수는 없다. 이러한 것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실존하는 사물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경험적인 합목적성은 실재적인 것으로서 한 목적 개념에 의존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다양한 규칙들은 모두 종합적이며, 객관이 직관에 주어지는 것을 필요로 한다. (415쪽)
이로써 우리는, 공간은 내 밖에 있는 사물들의 성질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순전한 표상방식이고, 그러므로 나에게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에 대한 나 자신의 표상방식 속에다가 합목적성을 집어넣는 것인데 이 합목적성을 경험적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밖의 객관에 있는 어떠한 목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때 그 원리는 나의 개념 밖에 그리고 나의 표상 밖에 선험적으로 놓여 있는 특수한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에 의해 선험적으로 진실한 것으로 인식된다. 무릇 감탄이란 한 표상 및 그 표상에 의해 주어진 규칙이 이미 마음 안에 기초로 놓여 있는 원리들과 합일하지 않는 데서 마음이 받는 충격이다. 이 충격은 과연 우리가 옳게 보았는가 또는 옳게 판단했는가 하는 의심을 낳는다. (416쪽)
그러나 경탄은 이러한 의심이 사라졌음에도 언제나 다시 나타나는 감탄이기에, 현상들로서의 사물들의 본질에서 관찰된 합목적성의 전적으로 자연적인 작용결과로서, 비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공간이라고 일컬어지는 감성적 직관의 형식이 개념들의 능력, 즉 지성과 합일함은, 그 위에 마음을 확장시켜 저 감성적 표상들 너머에 놓여 있는 무언가를 예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하학적 형태들이나 수들의 속성들이 가진 모종의 선험적 합목적성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그것들을 미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 의해 우리가 그 속성을 합목적적이라고 발견하는 미감적/감성적 판정이 아니라 객관적 합목적성을 인식시켜주는 개념들에 의한 지성적 합목적성이다. 우리는 그러한 속성을 수학적 도형의 미라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적 완전성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이다. (417쪽)
경험이 우리의 판단력을 이끌어 객관적 질료적 합목적성의 개념, 즉 자연의 목적의 개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오로지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판정될 수 있을 때뿐이다. (418쪽) 외적 합목적성, 즉 한 사물의 다른 사물들에 대한 유익성은, 그 한 사물로부터 유익함을 얻은 것의 실존이 그 자신 자체로 자연의 목적이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하나의 외적 자연목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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