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물>, 3장 재현하기, 4절 이중화된 재현(109-115/77-81)
“그렇지만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와 관련하여 [...] 의미되는 것에 대한 의미하는 것의 관계가 놓이게 되는 공간에서는 이제 의미되는 것과 의미하는 것의 마주침이 어떤 매개 형상[닮음]에 의해서도 보장되지 않는다. 의미되는 것에 대한 의미하는 것의 관계는 인식의 내부에서 한 사물의 관념과 또 다른 사물의 관념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이다. <포르루아얄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호는 두 가지 관념, 재현하는 사물의 관념과 재현되는 사물의 관념을 내포한다. 기호의 본질은 후자에 의해 전자를 유발하는 데 있다." 기호에 관한 이원적인 이론.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더 복잡한 조직과 분명하게 대립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기호의 이론은 완전히 별개인 세 개의 요소, 즉 표시되는 것, 표시하는 것, 후자[표시하는 것]에서 전자[표시되는 것]의 표지(marque)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전제로 했다. 여기에서 이 마지막 요소는 닮음(ressemblance)이었다. 기호에 의해 지시되는 것과 기호가 ‘거의 동일한 사물’인 범위 내에서 기호는 어떤 것을 표시했다. 바로 이 삼중의 단일한 체계가 ‘닮음에 의한 사유’와 동시에 사라지고 엄밀한 이항 구조로 대체된다.
그러나 기호가 이와 같은 수수한 이원성이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한다. 의미하는 요소는 또 다른 관념이나 이미지 또는 지각과 결합하거나 이것을 대신하는 관념이나 이미지 또는 지각이라는 것만으로는 기호가 될 수 없다. 의미하는 요소(l'élément signifiant)는 자신이 의미하는 것에 자신을 연결하는 관계를 추가적으로 드러낸다는 조건에서만 기호가 된다. 의미하는 요소는 무언가를 재현해야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의미하는 요소 안에 이 재현이 들어 있어야 한다(Il faut qu'il représente, mais que cette représentation, à son tour, se trouve représentée en lui). 이것은 기호의 이항조직에 필수적이고, <포르루아얄의 논리>가 기호란 무엇인가를 말하기에 앞서 표명하는 조건이다. "어떤 하나의 대상이 또 다른 대상을 재현하는 것으로만 간주될 때, 이 하나의 대상에 대한 관념은 기호의 관념이고, 이 최초의 대상은 기호라 불린다[우리가 하나의 대상을 오직 그것이 다른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한에서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갖는 관념은 기호에 대한 관념이며, 이 첫 번째 대상은 기호라 불린다]."(Quand on ne regarde un certain objet que comme en représentant un autre, l'idée qu'on en a est une idée de signe, et ce premier objet s'appelle signe) 또 다른 관념을 대체하는 관념에 재현하는 힘의 관념이 겹치는 만큼, 의미하는 관념은 양분된다(l'idée signifiante se dédouble). 세 가지 항목, 즉 의미되는 관념과 의미하는 관념 그리고 후자에 내포된 재현하는 역할의 관념이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는 3항 체계로의 은밀한 회귀가 아니다. 오히려 2항 현상의 불가피한 괴리 현상인데, 이 형상은 스스로에 대해 뒤로 물러나, 의미하는 요소의 내부에 온전히 놓인다. 사실 의미하는 것의 모든 내용, 모든 기능, 모든 한정은 의미하는 것이 재현하는 것일 뿐이지만, 즉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 재현하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정연하고 투명하지만, 이 내용은 그 자체로 주어지는 재현[작용] 속에서만 지정되고, 의미되는 것은 기호에 의한 재현[작용]의 내부에 어떠한 나머지도 불투명성도 없이 자리 잡는다. <포르루아얄의 논리>가 제시하는 기호의 기본적인 표본이 말도 소리도 상징도 아니며, 선이나 도형으로 된 공간상의 재현, 곧 지도 혹은 도안(圖案, 表)와도 같은 그림(dessin)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는 사실 도표(tableau)가 스스로 재현하는 것만을 내용으로 하고, 또 이 내용은 재현 작용에 의해 재현된 것으로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17세기에 출현하는 바와 같은 기호의 이항배치는 스토아학파 이래, 심지어는 최초의 그리스 문법학자들 이래, 양태가 서로 다르긴 하지만 언제나 3원적[표시되는 것, 표시하는 것, 후자에서 전자를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닮음)]이었던 구조를 대신하는데, 이 배치는 기호가 그 자신에 대해 이분화되고 이중화된 하나의 재현이라는 것(le signe est une représentation dédoublée et redoublée sur elle-même))을 전제로 한다. 하나의 관념이 또 다른 관념의 기호일 수 있는 것은 두 관념 사이에 재현[작용]의 관계가 확립될 수 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재현의 관념 내부에서 이 재현이 언제나 표시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는 본질적으로 재현이 스스로에 대해 언제나 수직을 이루기 때문이다. 재현은 지시인 동시에 출현, 곧 하나의 대상에 대한 관계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발현이다(elle est à la fois indication et apparaître; rapport à un objet et manifestation de soi)이다. 고전주의 시대 이래, 기호는 재현이 재현 가능한 한도 내에서 재현작용이 갖는 재현성이다(le signe, c'est la représentativité de la représentation en tant qu'elle est représentable).”
Michel Foucault interviewé à propos de son livre
« Les Mots et les Choses. Une archéologie des sciences humaines » (1966)
par Pierre Dumay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