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르트르가 1945년의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한 말은옳다. 이른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이 정말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책임으로부터 완벽히 면제받을 것이다. 그녀는 원래 위대하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고, 그는 원래 악인이고 나는 원래 용기가 없고, 하는 식으로. 운명이란 당신의 '알리바이'이다.
그러나 당신이 어제 들은 하느님의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느님인가, 당신인가? 우리들의 사랑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운명인가, 당신들인가? 한 노래 가사가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바람'이 아니었던가? 니체의 말대로, 나의 소망이 나의 인식이 된다.
2. 때로는 어떤 것이 내게 정말 옳은것으로, 가히 '운명'처럼 정말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그것은 운명인가? 물론 아니다. 이는 다만 당신이 사회문화적으로 그렇게 느끼도록 조건화된 경우에 불과하다. 나의 느낌과 생각이 내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져서 - 감히 그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믿기 어렵고 - 다만 내가 그렇게 진실로 '느낀다'고 믿도록 조건화된 경우.
더하여, 때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옳다는 혹은 당연하다는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여 도저히 스스로 자신의 느낌을 의심할 수 없는 경우마저 존재한다(물론 자기 기만이나 합리화의 경우는 제외해야 한다). 진심으로 그것이 옳다는 혹은 그것이 운명이라는 느낌이 너무도 강렬하여 나 스스로가 이러한 생각을 부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내게 이토록 '옳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생각, 이 느낌은 옳은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것이 옳다는 나의 강력한 감정은 그것이 실제로 옳은가와는 전혀 무관하며, 다만 내가 그것을 얼마나 옳다고 강력히 믿고 있는가만을 알려준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그것이 옳다고 혹은 그르다고 느끼는 감정의 강렬함, 혹은 그렇게 생각에 대한 믿음의 강렬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또 하나의 문제이다.
결국 문제는 '운명'의 정의(definition)이다. 사람들이 보통 '운명'이라 말하는 것들은 그들의 생각처럼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실상은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운명의 정의에 따라서는, 때로 정말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든 혹은 다른 무엇이라 부르든, 우리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계가 조건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3. 푸코에 따르면, 합리성(rationality)은 시공을 초월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특정 문제상황을 해결하려는 합리화(rationalization) 과정의 결과로서 얻어진 생산물(product)이다. 인간의 모든 사유가 합리화의 결과이다. 이것이 니체의, 사실은, 베버의 중요성이다.
4. 어떤 문제가 존재할 때, 유용한 해결책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와 세계를 냉정하게('냉혹하게'가 아니다), 곧 '정확하게' 본다. 인간은 자기 기만을 행하는 존재이니, 무엇보다 먼저 (남보다는) 자기 자신의 자동적 '자기 기만 메커니즘'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여기서 누군가가 '인식만 하면 뭐해요'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이는 그녀가 한 번도 냉정한 자기 인식을 스스로 수행해본 적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5. 이른바 프랑스현대철학자들은 '계몽'이 덜 된 존재들이다(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담론은 자신들만의 초엘리트 지식인 사회 안에서 생산, 유통, 폐기된다. 그들은 지식인과 인민의 관계, 학문과 일상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 관습을 그대로 답습한다. 그들에게는 계몽이, 성찰적 반성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다.
6. 악의(惡意)가 없는 자란 죽은 사람이며, 자신의 악의를 모르고 있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7. 사람들은 보통 내가 그녀에게 이런 인상을 받았으므로, 그녀의 의도가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만 확실히 구분할 수 있어도 인생의 불필요한 많은 분쟁을 피할 수 있다.
8. "철학은 전도를 하지 않는다" - 이는 설령 내 말이 옳다 해도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우선, 당신이 내 말을 듣기 싫어한다면, 혹은 듣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당신은 여하튼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당신이 내 말을 들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원래 없다. 더하여, 내 말이 '옳다'는 말은 보통 내가 설정한 전제의 한도 내에서 '옳은'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옳다'(진리)는 말의 의미는 천차만별, 무한대로 확장 가능하다. 옳다, 그르다는 '관점'의 문제일 수가 있다. 더구나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실제로는 전혀 옳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나의 말이 옳은 경우라 할지라도,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고통을 겪게 될 사람은 당신이다. 결국, 어떤 경우이든, 당신 자신의 인생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도 융도 늘 같은 말을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알아서 하세요!"
9. 아이러니 - 인간은 자신이 자기 합리화를 행하고 있지 않은지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부분, 곧 그녀가 스스로 의식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기 합리화를 거의 행하지 않는다. 그녀의 의식이 글자 그대로 깨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합리화를 행하는 부분은 그녀가 전혀 생각짇 못하는 부분, - 곧 의식적으로 늘 자기를 감시하고 처벌하느라 너무도 지친 나머지 -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다. 이 곳은 - 그녀의 의식적 고려와 검토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 무성의와 무신경, 자기 합리화로 점철되어 있는 영역이다.
10. 대한민국의 학생들, 아니 모든 배우는 이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너무 예의바르고 너무 얌전하며 너무 순하고 너무 (수동적으로만) 길이 잘 들어 있다. 이는 물론 구조적 문제인데, 궁극적으로 전통적 지배 이데올로기인 불교와 유교에 더하여, 근래에 수입된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적 감시와 처벌 메커니즘의 거의 완벽한 내면화가 가져온 결과이다. 이러한 태도는 한 마디로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식의 눈치보기, 분위기 파악, (자기) 기만, 비겁, 자기 처벌의 메커니즘이 완벽한 자동화의 수준으로까지 내재화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케이팝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품행담론은 아직 '자기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이다.
11. 대한민국 대학의 학문적 풍토를 비판하는 태도는 거의 대부분 (일제 시대 이래 더욱 강화된) 한(韓)민족의 자기 비하, 자기 멸시의 일종, 곧 사회적 버전이다. 한국에서 누군가가 우리나라 대학을 비판하면 이를 듣는 사람(물론 한국인)은 즐거운 웃음, 냉소를 터뜨린다. 사회학적, 문화인류학적으로 연구해볼 만한 현상.
12. 보편성 관념의 부재 - 오늘날 보편성은 비판받아야 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하지만, 때로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절감하기도 한다. 가령,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우선, 여러 사람이 있는데 자신과 친근한 관계에 있는 어떤 사람과만 (즐거운) 대화를 지속하는 경우. 이는 때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실상은 이러한 행위가 - 본의건 아니건 - 그 이외의 주변 사람을 소외시키는 행위가 된다(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당사자가 알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아예 의식을 못하건 모르는 경우는 보편성의 '전적인' 부재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공적인 자리나 상항에서도 자신과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농담(이야기)을 하는 경우. 실제로 주의 깊게 이런 경우를 심사숙고해 보면, 이를 정작 당사자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편성의 개념이 필요한 시간!
13. 자기 비하, 자기 경멸은 또 다른 자기중심주의이다. 문제가 여전히 그리고 늘 '자기'이다.
14.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것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성숙한 자가 된다.
15. 철학이란 방법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야 한다", ""~되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이나 바람, 당위 자체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도덕주의적 함정에 빠진다.
도덕주의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현실적 구체적 방법론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타인혐오, 자기혐오, 인간혐오에 빠진다. 어리석은 선택.
잘 되어야 한다고?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해야만 한다고? 안 돼서 못하는데, 노력하라고? 웃기는 이야기들이다! 가령 자신감이 부족한 인간에게 자신을 가지라고, 너 자신을 믿으라고 하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무의미한 말, 더 나아가 해로운 말이다(물론 때로는 이런 말이 좋은 효과를 낳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가져라'라는 말은 잘못된 대전제, 곧 그저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로 보라는 무식한 대전제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인간이 자신감이 없다면, 그것은 그가 의지가 약하고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합리적인 존재이며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감을 가질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것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아 실제로 자신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억지로 믿는다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자신감이 없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합리적이 존재이며 자신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현실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강함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적'이다. 인간은 스스로 설득이 되지 않으면 결코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16. '좋은' 방법론을 고르는 여러 기준들 중 하나는 그런 말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 곧 그런 담론이 어떤 인간을 낳는가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다. 가령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혹은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잘 살고 있나라는 담론은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낳는가, 어떤 인간을 결과적으로 탄생시키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담론은 성실한 인간을 낳는가? 효도해야지라는 담론은 효도하는 인간을 낳는가? 학생은 공부해야 한다는 담론은 공부하는 학생을 만드는가?
17.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잡는다" - 가령 어머니에게 고통받은 인간(어머니의 의도가 선한 것이었는가 아니었는가의 문제는 이 경우 중요하지 않다)은 때로 상당한 세월이 흘러 현실의 어머니가 이러저런 이유로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한 경우에도 여전히 어머니로부터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그녀는 가령 어머니가 죽어도 여전히 어머니로부터 고통받을 것이다. 이 경우 어머니는 머릿속 외부의 현실저 존재가 아니라, 머릿속의 현실적인 존재, 오늘 그녀의 정신적 구조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는 존재로서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녀는 그렇게 구조화, 조건화되어 있다.
관건은 이러한 지옥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실제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어떻게'의 문제, 방법론의 문제다.
18. 모든 인간관계는 적당한 거리, 적당한 불편함, 적당한 두려움이 존재해야 썩지 않는다, 오래 간다.
19. "일은 일" - 함께 일을 할 때, '상대가 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은 일이므로, 담백하고 간명하게 예의를 갖추어 본심을 정확히 전달하면 된다.
20.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 사정이 있다. 따라서 자기 사정이 없는 사람은 없으므로, 자기 사정만을 특별히 양해해 달라고 말하는 자는 사회에서 아웃된다. 그는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이다
21. 냉정한 인식과 냉혹한 인간성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22. "너도 물론 위에서 시켜서 한 거라는 거 다 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쓰레기 같은 인간 말종이 될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 월터 미티
23. 한 분야(보통은 자기 분야)에서의 무능력을 그 인간 자체에 대한 경멸의 이유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24. '초심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은, 그 이 말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와 달리, 이러한 말을 생각하는 경우 그렇지 않았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효과가 발생되는 하나의 유용한 조작 개념(operational notion)이다.
25. "신이란 그것에 따라 우리가 자신의 고통을 측정하는 개념이다." - 존 레논, <신>(god)
26. 해석권력(power on interpretation) - 실상은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 가능한 어떤 현상에 대해 자신의 해석이 사실 혹은 현실 자체라고 말하고 그것을 관철, 강요하는 능력.이는 당사자가 자신이 현상에 대한 해석 권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경우와 모르고 있는 경우로 크게 대별된다. 전자와는 궁극적으로 대화와 투쟁이, 후자와는 교육과 설명이 가능할 따름이다.
27. "언어가 살해한다." - 헤겔
28.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이 실상은 정말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존재하는 바깥'이라는 점, 그리하여 이른바 '바깥'이 실상은 안쪽을 유지하는 하나의 장치임을 깨달은 푸코는 구조주의적 중립성의 개념 전체를 포기하고 니체주의적 힘 관계의 논리를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리하여, "권력에는 바깥이 존재하지 않는다."
29. 블랑쇼의 '익명의 그녀'(une anonyme)가 바타유의 '공공의 여성' 곧 '창녀'(la femme publique)이다.
30. '저주의 몫'(la part mudite) - 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그중에서도 자기 삶, 생존 자체의 정당성을 빼앗긴 자들, 박탈당한 자들, '파렴치한 자들'(les infameux)이, 그들에 대해, 그들을 위해 쓰는 것이야말로 '문학'이다(푸코의 문학관).
31. 논증의 '필연성' - 모든 '고전적'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갖는 '필연성'을 논증하고자 한다. 그러나 가령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아니라 아리우스파가 승리했다면,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정되고 따라서 삼위일체론이 부정되었다면, 보다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에 의해 그리스도교 <성경>의 정경과 외경이 지금과 달라졌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물론 그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그 '필연성'을 논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도 - 바로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 하나님이 역사(役事)하신 결과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 믿지 않는 자들에겐 반증불가능한 맹목적 믿음으로 보이는 영역이다. 그들 논증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는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필연적임에 틀림없기 때문에.
32.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라는 니체의 말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니체의 말은 사람을 죽여놓고서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사실은 없고 어차피 해석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살인자의 말을 편들어주지 않는다.
니체의 사실이 없다는 말은 이른바 사람들이 말하는 사실이 무수히 선택 가능한 사실들 중에 관심을 받아 선택된 사실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이 아니라 보는 자의 관심에 의해 조명된 사실, 또 그렇게 선택된 사실이다.
정말 객관적 사실이란 것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관심과 무관하게 중립적으로 드러난다면, 세상에 신문은 단 하나만 존재하거나 혹은 모든 신문이 다 완벽히 똑 같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앉아 있는 방 혹은 버스의 크기나 평수, 당신의 나이는 다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엄밀한 '중립적 사실보도'를 해야 할 언론은 내일 아침 신문에 그러한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다.
사실이란 특정한 관심에 따라 선택된 사실이며, 이는 사실상 무한 개수의 사실에서 유한한 개수의 사실을, 그것도 지극히 협소한 유한 개수의 사실만을 추출해낸 것이다. 그러니 사실이란 늘 선택된 사실이며, 인간은 이러한 선택의 기준 곧 '관심'(interest) 혹은 '관점'(perspective) 없이 사실을 볼 능력이 없다. 바로 이런 면에서 관심과 관점이란 한계가 아니라 인간 인식의 '조건'(condition)이며, 모든 인간은 자신의 관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사실이 없다라는 말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사실이란 없으므로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라는 말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무수한 사실들 중에 당신이 왜 다른 모든 사실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하필이면 이 사실을 인식했고 또 말하는가에 관련된 언명이다. 한 마디로, 사실과 관점의 문제는 주어진 관점 내에서의 사실 여부보다는, 무수한 사실들 중 이런 혹은 저런 사실에 대해 말하는 당신의 선택과 관점의 층위에 속하는 말이다.
33.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 - 토머스 홉스, <시민론>(1642년, '디본셔 백작에게 드리는 헌사')
34. 자신의 몸이 싫어하는 걸 싫어하지 않으려고, 심지어 좋아하려고 하는 사람들, 더하여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35. 강박관념의 특징은 그것이 매우 논리적인 관념의 질서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러 면에서, 강박관념의 해결은 비논리적인 방식으로는 어렵고, 오히려 더 논리적인 방식으로 그 논리를 밀고 나아가 그 논리의 '부분적' 특성, 비현실성, 비논리성을 밝히는 방식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도 역시 모든 인간은 '합리적'이다. 이 말을 듣고 어떻게 강박증환자의 논리와 '우리'의 논리가 같은 합리성일 수 있는가를 묻는 사람은 적어도 다음의세 가지 사항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첫째, 합리성에 대한 나의 정의와 타인(이 경우 위의 정의)의 정의가 다를 때, 누구의 정의를 정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둘째, 강박증 환자와 나는 다만 정도의 차이에서만 다른 두 사람인가, 아니면 질적으로 다른 실체적으로 구분되는 두 사람인가? 셋째, 합리성의 정의는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36. 모든 인간은 자기 기만을 한다. 자기 기만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 조건이다. 다만 자신의 자기 기만을 명확히 인식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있을 뿐이다. 전자는 앞으로 나아가겠지만, 후자는, 그가 여전히 그러한 상태에 머무르는 한, 당연히,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다.
37. 성격이 나쁜 인간이란 - 원래 그녀가 선천적으로 악(惡)해서라기보다는 - 어린 시절의 고통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성격의 인간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격 안 좋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해서 '같이 지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38. 도덕과 무관한 이유로도, 그리고 때로는 비도덕적인 이유로도, 얼마든지 '도덕적' 행동, 보다 정확히는 '도덕적으로 보이는' 행동, 혹은 때로는 '도덕적 결과를 낳는' 행동을 할 수 있다.
39. 논리적 오류 - 보통 우리는 '모든 인간은 외롭다'라는 말을 들으면, 모든 인간이 외로움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로부터 치유되고 싶어하고 따라서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들 생각한다.
40. 오르한 파묵은 좋은 소설가이다. 그러나 파묵의 가장 큰 장점은 소설가로서의 그가 가진 재능, 곧 '놀라운 입담'이 아니라, 그가 '오늘을 사는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 곧 '서양과 비서양의 대면'이라는 고통스러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사실 안에 놓여 있다.
41. 당신이 사랑하는 죽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 사람은 죽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다.
42. "존 레논은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생각'이란 것을 하게 만들어준 사람들 중 하나이다" - 다니엘 클로드
43. 리트머스 시험지 - "이 세상의 모든 사상가, 소설가, 시인들은 자신들의 책이 아니라면 정신병자들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이 말이 당신에게 '안심'을 주었는가?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44. 데카르트와 니체 - 이른바 한 사회의 '상식'이란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는 관습의 집합이다. 참으로 스스로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은 데카르트를 따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다시 스스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의 재검토 과정에서 데카르트가 검토한 것은 인식의 측면만이었다. 그의 '방법적 회의'는 관습적 삶의 도덕적 기초를 인정하고, 또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시작된다. 이러한 관습적 도덕 자체에 대한 재검토는 니체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45. 법과 주먹, 혹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 "사회는 멀고, 가정은 가깝다."
46. 철학의 유일한 문제는 '자연'과 '당연'의 문제, 곧 기준의 문제이다.
47. 인정 투쟁은 '정의(defintion) 투쟁'이다. 기존의 '진리'와 '정의' 자체가 타도의 대상이다. 다시금 세워져야 하는 것은 진리와 정의의 새로운 정의에 다름 아니다.
48. "요컨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자연법 그 자체는 어떤 힘에 대한 공포 없이는 지켜지지 않는다." -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1>(227쪽)
49. 11세기 안셀무스의 이른바 '존재론적 증명'을 밀고 나가면, 17세기의 이신론자들(deists), 그리고 이후의 과학자들(scientists), 그리하여 무신론자들(atheists)이 나온다. 이는 정의상 '신앙의 내부에만 설정된 이성'으로부터 '신앙 바깥에 존재하는 이성'으로의 이행이다. 이성과 자연, 신과 인간의 정의가 모두 바뀐다.
50. 이른바 '무신론자들'은 여전히 유신론자들이다. 그리스도교를 '저주하는' 이들이 여전히 또 다른, 뒤집힌, 그리스도교도들인 것처럼. 그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 한다.
1984.12.-201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