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5.

잠언 07





Patterns in a Chromatic Field/Untitled Composition For Cello And Piano
for cello and piano (1981)






1. 당신은 무엇을 '모르기로' 결정했는가?



2. 주체화 - 우리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알렉산더의 물음에 '햇빛을 가리니 비켜달라'고 요구한 디오게네스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디오게네스는 우리가 아는 유일한 디오게네스이다. 디오게네스가 '가난한 이들의 세금을 면제해 달라거나, 학교를 세워달라'고 했다면 이 또한 커다란 칭송을 받았겠지만, 이 경우 우리는 오늘 우리가 아는 그 디오게네스를 모를 것이다. 이처럼 '나'란 바로 지금 내가 하는 행동과 말의 축적에 의해 이 자리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3.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 안셀무스와 홉스 데카르트의 이른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절대적 진리'는 우연히도 그들이 읽은 <성서>와 꼭 일치한다. 나의 생각은 우연히도 대한민국의 헌법, 상식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연일까? 이는 '내가 그 안에서 태어나 내가 그것을 '당연한 것', '진리'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게 나를 조건화시킨 것'과 나의 인식이 사실은 '쌍둥이'임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 인간이 말하는 '인간 본연의, 불변의 진리'란 바로 이렇게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와 동시적 상관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쌍둥이에 다름 아닌 이 인식은 그녀에게 '당연하고도 영원한 불변의 진리'로서 인식된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은 '이미 자신이 세계에 집어넣은 것'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4. 가장 강력한 컴플렉스 중의 하나는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면 혹은 그런 인간이 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에서 기인하는 컴플렉스, 곧 '폐인 컴플렉스'이다.



5. 망쳐버리면 더 이상 망쳐버릴까봐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6. 당신이 그렇게 불안해 하는 이유는 당신의 어머니(아버지)가 늘 그렇게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7. 패닉이 선생이다 - 패닉이 오는 것을 차라리 기뻐해야 한다. "기분이 더러워질 때" 학습된 감정의 자동적 메커니즘에 대책없이 빠지지 말고 내 마음과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도망가지 말고 - 가령 친구를 부르거나 하지 말고, 차라리 혼자 길을 하염없이 걸으며 - 냉정하고도 냉철한 눈으로 자기 마음 속에 몸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해 보아야 한다.



8.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 - 어떤 면에서는, 인생 자체가 이런 일의 연속이 아닐까? 바로 여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업보의 굴레를 끊고 해탈한다'는 말의 의미가 있다. 인생이란 내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의 죄과를 갚으며 사는 것이다. 내 성격의 결함은 내 부모 성격의 결함이 빚은 것이다, 내 부모 성격의 결함은 그 부모 성격의 결함이 ... 이런 식으로 무한 소급된다. 해탈이란, 내가 받은 업보와 악연을 나의 대(代)에서 끊겠다는 서원이자, 그러한 능력이다.



9. 가령 푸코의 철학을 공부하고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각자가 판단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요? 각자의 판단 밖에 없다면 상대주의에 빠지는 게 아닐까요?" 내게는 그들이 이렇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제가 지금 하는 것처럼, 각자 스스로 판단해서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요? 뭔가 누가 제 밖에서 타율적으로 정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이런 질문과도 같다. "시가 너무 많고 다양하면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시의 본질은 이런 건데, 이런 시의 정의와는 다른 저런 시를 쓰면  안 되는 게 아닐까요?"



궁극적으로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의 근본적 문제는 그녀가 '논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들이 '각자 스스로 판단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이 '그 각자'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그녀가 '스스로 철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철학하는 것을 그저 밖에서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는 철학함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 곧 이 경우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10. '고맙다'고 말해야 할 경우에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가가 상대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어 상대를 위해 유쾌한 작은 선행을 행한 경우가 있다. 그런데, 호의를 받은 사람이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사람들은 '상대'의 호의보다 '내'가 상대의 호의를 받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사람들, 상대의 선행보다 나의 미안함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달리 말해, 이들은 결국 '자기 생각'밖에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11. 인간에 대한 예의, 상대에 대한 존중, 인격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 중 하나는 그녀가 '함부로 묻는 인간'인가 아닌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12. 나라면 니체의 사유를 이렇게 정리해보겠다. "네가 스스로 생각해라! 그리하여, 천박함에서 벗어나라!"



13. 가령, 공부를 못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공부를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게을러서 혹은 결단력이 부족해서 공부를 못하는 줄 안다. 뚱뚱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뚱뚱한 모든 사람들이 게을러서 자기 관리를 못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인 줄 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한도의 바깥을 상상하기 어렵다.



14. 서양의 책을 읽다가 그리스도교에 입각한 이야기가 나오면 '짜증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타자화해서 내 바깥에 놓고 '어리석은 이들'이라는 식으로 치부하는 자세로는 배우지 못한다(물론 사람은 배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며, 바로 그런 한도 내에서 안 배워도 된다). 나는 공부와 독서의 그리고 경청의 전략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바로 내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리스도교는 당시의 그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동시대의 당연을 구성하는 틀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보편을 사유하는 당대의 틀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라는 틀을 통해 자신들의 보편, 당연, 자연을 사유했던 것이다. 나 역시 인간인 한 그러한 틀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한에 있어, 내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이다.



15. 바울에 반대하여 - 유럽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데 1500년이 걸렸다. 적어도 데카르트부터 세어봐도, 유럽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나는데 거의 400년이 걸렸다. 예수와 그의 사망이 아무리 위대하고 중요하고 큰 일이라 해도 그것으로 인간 삶의 '모든 것'을 뒤덮으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죽은 자들, 특히 억울하게 젊어서 죄없이 죽은 자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예수가 된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화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예수의 죽음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죽음이 그렇듯 그저 하나의 죽음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삶을 그리스도라는 이름 아래 절대화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인간의 삶을, 보다 정확히는 삶에 대한 다른 모든 방식의 해석을 '그른 것', '어리석은 것', '헛된 것', 더 나아가 '악한 것'으로 설정하는  일에 대름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간에 대한 이해의 유일한 지평으로 설정하는 권력과 지배의 보편화 양상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한계가 없는 보편, 자신의 바깥을 인정하지 않는 인식이란, 그대로 폭력이다.



16. '센스가 없다'는 것은 죄가 아니나, 때로는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고통을 준다.



17. 자기 인식의 바깥, 한도, 제한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은 - 자신의 의도와도 무관하게 - 무서운 인간, 함부로 말하는 자, 천박하고도 끔찍한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이 된다. 이처럼 도덕적으로 악한 인간이란 실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능력이 없는 자, 곧 인식하지 못하는 자이다.



18. 권력이란 무엇인가? - 하나의 상황 혹은 사태에 대하여 두 가지 이상의 해석과 해결방안이 존재할 때, 여하한 정당화의 논리를 동원하여 자신의 관점, 가치관에 입각한 가치 판단과 결정, 선택의 옳음을 강변하고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현실적 (수행) 능력.



19. 모든 (자기) 검열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일 수는 없다. 모든 (자기) 검열이 아니라, 비합리적 (자기) 검열을 제거해야 한다.



20. 부르디외의 말대로,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본질주의자들이다. 독일인은, 한국인은, 일본인은, 중국인은, 미국인은, 혹은, 너는, 나는, 당신은, 그는, 그녀는 ... 그들은 늘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본질주의자들은 이른바 한 '개인' 혹은 '집단'이 - 원래부터, 그냥 그렇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내외부적 상황이 낳은 복합적 구성물(social construct)임을 알지 못한다.



21. 최근 몇 권의 책을 읽으며 - 2014년 대한민국의 문학비평이 아직 이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내가 김현의 문학비평을 읽던 1980년대 후반에 비해 전반적으로 오히려 퇴보했다는 것은, 사실, 충격적인 일이다.



22. "우리는 성장해서도 항상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른 부모를 만나더라면 충분히 칭찬받고도 남을 일을 했는데도 자신의 부모는 매정하게 그것을 폄하하곤 했다면 말이다." - 강신주, <감정수업>(36쪽)



23. 데리다의 두 가지 근본적 문제 - 오늘 마르크스주의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는 사유(<마르크스의 유령들>), 결국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유(<다른 곶>).



24. 막스 베버가 말하는 중립적 혹은 긍적적 측면의 합리화 과정와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정적 의미로서의 합리화 과정은 니체에 의해 이미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이해되어 있다. 단, 이때 우리는 층위(논리계형)를 구분해볼 수 있다. 정리하면, 주어진 보편성 곧 합리성(게임)의 한도 내에서는, 옳고 그름이 분명히 구분된다. 그러나 이 합리성(보편성)과 저 합리성(보편성)이 충돌하는 경우 이를 해결해줄 보다 상위의 보편적 합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합리성이 합리성 자체이며, 자신의 보편성이 보편성 자체라고 진심으로 믿고 또 그렇게 말하는 이의 경우, 이는 무지의 양상을 띠는(반드시 권력욕 혹은 악의 때문에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으므로) 권력 행위가 된다.



25. 21세기 문화의 영웅, 존 존(john zorn)과 그의 의로운 사람들(義人, tzadik)








 
 
 



2014.02.-201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