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cage, in a landscape, 1948.
0. 당신은 누구를 왜 경멸하는가?
1. 권력의 최대 형식은 자연에 대한 해석이다. 이는 자신의 관점이 관점이나 해석이 아닌, 있는 그대로, 곧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나의 자연이 자연 자체"라고 선언하는것이다. 이때 '나의 자연과 다른 모든 자연'은 자연적이지 않은 것, 이상한 것,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계몽과 교정의 대상으로 치부된다.
2. 마르크스의 <독일이데올로기>에 등장하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집단에 대해서는 불변의 진리이다. 때로 개인은 자신의 존재 조건을 넘어 의식, 곧 도덕적인 이유로 어떤 일을 행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수십,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하나의 집단에 대하여 이러한 도덕성을 바란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따라서 도덕적 개선을 넘어선 제도의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3. 고진을 읽으니 내 안의 고진이 드러난다.
4. 글이란, 사유란 모름지기 내가 세상의 유일한 주인인 것처럼 쓰는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5. 무겁지 않은 글쓰기란 무겁지 않으니 가벼운 글을 쓴다는 식의 이분법이 아니라 기존에 자신이 생각하던 가벼움과 무거움 모두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벼움, 새로운 무거움의 글쓰기이다. 이처럼, 글쓰기란 - 마치 삶과 사랑과 마찬가지로 - 이미 존재하는 어떤 모델을 따르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글쓰기의 새로운 모습을 오늘 내가 여기서 발명해내는 일이다.
6. 신중히 생각하고 가벼이, 그러나 경박하지 않게.
7. 모든 현실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첫걸음 - 나의 마음과 외적 상황 모두를 어떤 조작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8. 내가 오늘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하다면, 네가 오늘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도 중요하지 않을까?
9. 폭력이 보여주는 최악의 형태는 실상 자기 '스타일'의 강요이다. 더구나 그것이 강요하는 자가 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합리성'의 형식을 갖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10. 자기 비하의 핵심이 이기적인 자기 중심주의인 것처럼, 지속되는 죄책감이야말로 자기 합리화의 궁극 형식이다.
11. 위안과 위로, 가능성과 희망이 남아있는 한 새로운 길은 열리지 않는다. 새로운 길은 완벽한 절망, 희망의 완전한 결여, 비유가 아닌 실제로 몸이 덜덜 떨리는 육체적 두려움, 겁이나 숨도 못쉬는 심리적 지옥의 상태를 어떤 조작도 도피도 위안도 없이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수하겠다고 마음 먹은 자, 곧 내 몸을 던지겠다고 마음 먹은 용기있는 자에게만 열린다.
지금 이 삶이 살만 하고 견딜만한 것인 한, 위로와 위안이 있는 한, 희망과 가능성이 있는 한,
새로운 삶은 네게 자신의 문을 열어보여주지 않는다. 죽어야만할 때 죽을 용기가 없는 자는 제대로 살 수조차 없다. 모든 길이 끊어지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내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지 않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그리하여 두려움과 공포를 어떤 조작도 없이 온전히 다 받아들일 때에만, 이해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실로 신비스러운 일이지만, 내 몸 안에서 내가 모르던 힘이 저절로 솟아나온다.
이 말을 믿지 못하는 이는 이러한 경험이 없는 이인데, 이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몸을 던져 이를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다.
12. 설득권력으로서의 철학 - 내가 생각하는 철학에 따르면, 설득력이 없는, 자신과 타인을 설득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담론은 철학이 아니다. 설득력이 없는 담론이란 타인들로부터의 공감도 지지도 얻어내지 못하는 담론이다. 그런데 철학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오직 합리적 논증에 기대어 자신의 권위와 힘 곧 설득력을 얻으려한다. 이 설득력이야말로 설득하고 설득시키는 힘, 곧 철학의 현실적 권력이다. 당신의 말이 타인들의 공감과 지지, 적어도 찬성 혹은 반대에 관한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바로 그만큼 당신의 담론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것이며 바로 그만큼 무력하다.
이제 당신은 물을 것이다. 설득력이란 무엇이며, 설득력은 꼭 얻어야 하는 것인가를(혹은 때로는 이 글이 자신을 겨냥해 쓰인것이 아닌가라고 자문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데 나는 - 무라카미 하루키와 마찬가지로 -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당신의 모든 질문은 타당하며 유의미하다.
그렇다. 이해했는가? 바로 당신이 정당하게 묻고 질문한대로, 설득력이 권력이며, 설득력이 힘의 논리이다. 설득권력!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철학이, 생각이, 공부가, 글이란 이미 권력추구 행위이다. 물론 이때의 권력은 필히 니체적 힘에의 의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따라서 철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쓴다면서도 타인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으려는 생각도 의지도 능력도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헤겔의 말대로 인간 의식의 모든 행위 곧 노동이 나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면, 나의 노동은 설득력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다면 설득력은 어떻게 얻을수 있는가? 당신의 삶, 가치관, 진심, 한마디로 당신의 인생 전체가 당신의 동시대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것이 될 때이다. 당신은 당신의 진심 일상생활은 변화하지 않은 채로 당신이 보여주는 당신의 논리가 사람들에게 공감과 설득력을 얻기를 바라는가? 좋다. 그러나 당신이 바라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의식과 외적 언어와 행동는 당신의 진심 평상시 태도의 필연적 반영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당신의 말과 행동이 사랑이 오늘 당신이 사랑하는 자의 되돌아오는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로 비극이다. 이는 당신의 생각과 사랑이 당신의 머릿속에 갇혀있을 뿐 상대의 공감과 되돌아오는 사랑과 존중을 불러일으킬 현실적 힘과 능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용>의 말대로, 공감과 설득력의 획득은 평생을 두고 오늘 담담히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나만의 나인 동시에 우리인 나를 위해 스스로 행하는 작은 실천, 특별한 것 하나 없는 평범함, 곧 중용의 실천에서만 조금씩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없이 힘과 억지로 자신의 사정을 타인들에게 강요하는 자, 스스로를 설득하고 스스로가 설득되는 기나긴 지난하고도 지루한 자기성찰의 과정을 걷지 못하여 어떤 합리적 논리도 없이
궤변과 교언과 폭력과 심정적 호소로만 타인의 마음을 얻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자에게
세상은 비극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사소한 이 작은 일에 있어서의 타인에 대한 경청, 이 시시한 이 비소한 일에 있어서의 자기 배려만이 공감과 설득력을 낳고, 그리하여 천하를 바꿀 힘을 만든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자는 많아도 이에 성공하는 이는 드물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세상을 실제로 바꾸는 힘은 오직 자신의 진심과 세상의 이치를 맞닿게 하는데 성공한 자에게서만 나온다.
13.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그리고 그 실천)은 어떤 사람을 만들까?
14. 이른바 '고집'을 너무 부리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러나 이른바 사람들이 고집이라 부르는 것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옳다고 느껴지는 그의 가치관, 인식의 근본구조, 쉽게 말해 '진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해주어야 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가치관, 진심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집과 진심의 문제는 가치관들 사이의 수적 충돌, 곧 인정투쟁, 권력투쟁으로도 기술될 수 있다. 사람들과 교섭하지 않고 혼자 살거나(혹은 혼자 죽거나) 혹은 현실의 이러한 속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에 반응하며 같이 살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고집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멋대로 재단되고 유린되는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교섭이라는 사회적 속성을 갖는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파기해야만 할 장애물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어떤 부분이 존중받아야 할 인권이며, 어떤 부분이 당신의 성숙을 위해 버려야 할 장애물인지를 누가 알고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철학이 내 머리속, 몸 속 생각, 느낌과 나 바깥의 현실과의 무한한 대화라고 할 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란 영원히 지금-여기-나의 삶이다.
15. 요령이 아니라 실력, 요행이 아니라 정도
16. 공과 사를 불문하고 자신이 듣고 보는 모든 일을 개인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상에 입각해서 모든 일을 지각하고 판단하며 모든 일을 자신과의 관계에 입각해서만 바라본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모든 것을 자신과의 관계에 의해(어떤 행동이나 말이 자신에게 행해진 것이라고, 자신에게 이렇게 들린다고) 판단한다. 이들은 결국 하나의 사태를 오직 자신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해석하면서 그것이 해석이 아닌사실 자체라고 믿는다. 그 결과가 앞서 말한 개인화, 사적 사건화, 심리학화. 나아가 도덕화이며, 이들은 자신이 말이나 행위의 당사자보다 그들의 의도와 본의를 더 정확히 잘 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니체와푸코가 정확히 지직한대로 이러한 인간의 속성은 너무나 보편적으로 퍼져 있어서, 가령 현재의이 글을 개인화, 심리학화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즉이 글을 읽으며 이 글이 자신이 보라고 쓴 것은 아닌가라는 자신만의 생각에 함몰되지 않을 능력을 갖춘 건강한 사람은 오히려 소수이다. 이처럼 내가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나의 문제는 실상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이며, 이런 부정적인 자기중심주의적 자동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만이 아니라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역능을 니체적인 긍정의 의지로 끝까지 밀어부치는 들뢰즈의 작업이다.
17. 철학이란 무엇인가? 논점의 이해이다. 논점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로 어떤 논지를 찬성하고 찬양한다는 것은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떤 논지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다. 철학이란 이런 면에서 논점의 분명한 이해를 통한 합리적 논의라 할 수 있다.
18. 어느 날의 편지 - "심지어 저로서는 이것이 인생이 숨겨놓은 비밀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드러내야 할 때 무엇인가를 용기있게 드러내면 나와 세계가 변화하고 무엇인가를 얻지만(가장 좋지 않은 경우에조차 나는 '나의' 실패를 얻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있으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현재의 상태가 유지된다는 것 말입니다."
19. 민주주의 정치윤리의 간략한 규준 - "나의 일은 내가, 너의 일은 네가, 너와 나의 일은 너와 네가 같이 판단하도록 한다."
20. 공부란 섬세한 차이를 읽어내고 존중하는 것이다. 디테일이 학문의 최소요건이다.
2014.11.-20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