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4.

칼 마르크스, 「라인 지구 민주주의자 위원회에 대한 재판(변론)」, 1849

 
 
칼 마르크스, 라인 지구 민주주의자 위원회에 대한 재판(변론), 1849225, 27일 자 -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박종철출판사, 1991.
    
 
여러분, 이 기회에 이른바 법적 지반을 정면으로 마주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정당하게도 법적 지반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는 만큼, 그리고 46일자 및 8일자 법률들은 자신의 현존재를 법적 지반의 형식적 승인에만 의존하고 있는 만큼 더욱더 저는 이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방 의회는 무엇보다도 대토지 소유를 대표하였습니다. 대토지 소유는 현실적으로 중세 봉건 사회의 기초였습니다. 이에 반해 현대 부르주아 사회, 우리의 사회는 공업 및 상업에 입각해 있습니다. 토지 소유 자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전의 모든 존재 조건들을 잃어버렸으며 상업 및 공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농업은 공업적으로 경영되고 있으며 과거의 봉건 영주들은 가축, 양모, 곡물, 사탕무, 화주 등등의 공장주들로, 다른 모든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공업 생산물 거래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영락하였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낡은 편견을 고집하려 해도 실제 생활에서 그들은 가능한 한 적은 비용을 들여 가능한 한 많이 생산하는,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곳에서 사서 가장 비싸게 팔 수 있는 곳에서 파는 부르주아로 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신사분들의 생활 양식, 생산 양식, 영리 양식이 이미, 그들이 물려받은 교만한 거짓 상상을 꾸짖고 있습니다. 지배적인 사회적 요소로서의 토지 소유는 중세적 생산 양식 및 교류 양식을 전제로 합니다. 연합 지방 의회는 오래 전에 존재하지 않게 된 이러한 중세의 생산 양식 및 교류 양식을 대표하였으며, 이 중세의 생산 양식 및 교류 양식의 대표자들은 그들이 아무리 낡은 특권을 고집한다 해도 바로 그만큼 새로운 사회의 이점을 함께 향유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다른 기초와 달라진 생산 양식에 입각해 있는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는 정치권력도 탈취해야만 했습니다. 그 정치권력을 이 새로운 사회는 몰락하는 사회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탈취해야만 했는바, 이 정치권력의 조직 전체는 완전히 상이한 물질적 사회관계들에서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혁명은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혁명은 낡은 사회의 최고의 정치적 표현인 절대 왕정, 그리고 신분 대표제를 겨냥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신분대표제는 오래 전에 현대 공업에 의해 파괴된 사회질서 혹은 기껏해야 부르주아 사회에 의해 나날이 포위되고 있고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해체된 신분들의 오만한 잔해를 대표하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낡은 사회의 대표자인 연합 지방 의회가, 혁명에 의해 권리를 획득해 가고 있는 새로운 사회에 대해 법률을 명할 수 있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법적 지반을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은 법적 지반의 수호라는 말에서 무엇을 이해하십니까? [법적 지반의 수호란] 과거의 사회적 시대에 속하는 법률들, 몰락한 혹은 몰락해가는 사회적 이해들의 대표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률들, 따라서 또한 보편적 욕구와 모순되게 존재하는 이러한 이해들을 법률로 고양시킨 법률들의 수호[를 뜻합니다]. 그러나 사회는 법률에 입각해 있지 않습니다. 그것[사회가 법률에 입각해 있다는 것]은 하나의 법률가적 망상입니다. 오히려 법률이 사회에 입각해야 하며, 법률은 각 개인의 자의에 반하여 그때그때의 물질적 생산양식에서 생겨난, 사회의 공통의 이해와 욕구의 표현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 저의 손에 들려 있는 나뽈레옹 법전 Code Napoléon, 이것이 현대 부르주아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18세기에 생겨났고 19세기에 계속 발전해 온 부르주아 사회가 형법전에서 법률적 표현을 발견한 것일 뿐입니다. 이 법전이 더 이상 사회관계들에 조응하지 않게 되자마자 그것은 한낱 종이 뭉치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 낡은 법률들이 낡은 사회 상태를 만들지 않았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낡은 법률을 새로운 사회적 발전의 기초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이 낡은 상태로부터 이 낡은 법률이 생겨났으므로 그 상태와 함께 그 법률들도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하는 생활 상태에 따라 이 법률들은 필연적으로 변화합니다. 사회발전의 새로운 욕구와 요구에 반하는 낡은 법률의 수호는 기본적으로, 시대에 맞는 공동 이익에 반하는 시대착오적인 특수 이익의 위선적 유지에 다름없습니다. 법적 지반의 이러한 유지는 그러한 특수 이익을, 그것이 더 이상 지배적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지배적인 것으로서 통용시키려 합니다. 그것은 이 사회의 생활 상태에 의해, 그 영리 양식, 그 교류, 그 물질적 생산 자체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은 법을 사회에 강요하려고 하며, 특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입법자들을 그 직무에 머물게 하려고 하며, 폭력적으로 소수의 이익을 다수의 이익에 놓기 위해 국가 권력을 남용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현존의 욕구와 매번 모순을 일으키며 교류, 공업을 방해하고, 정치 혁명으로 폭발할 사회적 위기를 준비합니다.
 
이것이 법적 지반을 고집한다는 것, 법적 지반을 수호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의식적인 기만 혹은 무의식적인 자기기만에 입각하고 있는 이 법적 지반이라는 공문구에 근거하여 연합 지방 의회의 소집을 지지하였으며, 혁명에 의해 필요하게 되었고 혁명에 의해 생겨난 국민의회 대신에 이 지방 의회로 하여금 기본법들을 만들어 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법률들에 따라 국민의회를 재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회는 연방 지방의회로 대표되었던 봉건 사회에 대립하여 현대 부르주아 사회를 대표하였습니다. 이 의회는 지금까지의 정치 조직 및 지금까지의 법률들과 충돌하는 생활 상태에 조응하는 헌법을 독자적으로 정하기 위해 인민에 의해 선출된 것입니다. 따라서 국민의회는 처음부터 주권을 가진 헌법 제정 의회였습니다.”(516~518)
 
 
협정 위원들의 의견이 아니라, 유럽혁명 및 이 유럽혁명에 의해 조건 지어진 3얼 혁명으로부터 출현한 국민의회의 현실적 역사적 지위, 그것만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여기에 문제로서 놓여 있었던 것은 하나의 사회를 지반으로 하는 두 개의 분파들의 정치적 충돌이 아니라, 두 사회 자체의 충돌, 정치적 형태를 띤 사회적 충돌이었습니다. 그것은 낡은 봉건관료 사회와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투쟁, 자유 경쟁 사회와 쭌프트[길드]제 사회의 투쟁, 토지 소유 사회와 공업 사회의 투쟁, 신앙의 사회와 지식의 사회의 투쟁이었습니다. 낡은 사회에 조응하는 정치적 표현, 그것은 신의 은총을 받은 왕권, 후견인 짓을 하는 관료, 독자적인 군대였습니다. 이 낡은 정치권력에 조응하는 사회적 기초, 그것은 농노적 혹은 반()농노적 농민들을 가진 특권적 귀족적 토지 소유, 가부장제적 또는 쭌프트적 소공업, 상호 폐쇄적인 신분들, 도시와 농촌의 험악한 대립,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에 대한 농촌의 지배였습니다. [...] 국민의회가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대표자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왕권은 봉권귀족 사회의 대표자였습니다. 관료와 군대가 상업 및 공업의 지배자에서 그것들의 도구로 전락하여 한낱 부르주아적 교류의 기관들로 되어버린 것은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생활조건들에 기인합니다. 이 사회는 농업이 봉건적 특권들에 의해 제한되고 공업이 관료적 감독에 의해 제한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유경쟁이라는 이 사회의 생활 원리에 반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는 대외교역 관계들이 국민생산의 이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국제적 궁정정치의 고려에 의해 규제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낡은 국가가 신의 은총을 받은 왕권의 욕구와 이 왕권의 사회적 지주인 왕궁의 성벽 수선에 생산을 종속시켜야만 하는 반면,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재무 행정을 생산의 욕구에 종속시켜야만 합니다. 현대 공업이 사실상 평균화 작용을 하듯, 현대 사회는 도시와 농촌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법률적 정치적 장벽들을 무너뜨려야만 합니다. 이 사회에는 여전히 계급들이 존재하지만, 신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회의 발전은 이 계급들의 투쟁 속에 그 본질이 있지만, 이 계급들은 신분들 및 신의 은총을 받은, 이 신분들의 왕정에 대항할 때는 단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낡은 봉건 관료 사회의 최고의 정치적 표현이자 최고의 정치적 대표자인 신의 은총을 받은 왕정은 현대 부르주아 사회에 본심으로 우러나오는 어떤 양보도 할 수 없습니다. 왕권의 자기 보존 본능, 그리고 왕권의 배후에 서 있으며 왕권이 지주로 삼고 있는 사회는 항상 또 다시 왕권으로 하여금 이미 한 양보를 철회하게 하고 봉건적 성격을 고수하게 하며 반혁명을 감행하게 합니다! 혁명이 일어난 후에 반혁명은, 왕권의 항상 새로이 생기는 생존 조건입니다.
 
다른 한편 현대 사회 또한 낡은 사회가 자신을 여전히 폭력적으로 유지하는 데 쓰이는 전래의 공적 권력, 즉 낡은 사회의 국가 권력을 파괴하고 제거하기 전까지는 휴식을 취할 수 없습니다. 신의 은총은 받은 왕권의 지배는 바로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적 요소들의 지배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회들 사이에는 어떠한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사회들의 물질적 이해와 욕구가 생사가 걸린 투쟁을 조건 지으며, [이 투쟁에서] 한쪽은 승리해야 하며 다른 한쪽은 패배해야 합니다. 이것이 양자 사이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화해입니다. 따라서 이 두 회들의 최고의 정치적 대표자들, 즉 왕권과 인민 대의 기관 사이에는 어떠한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국민의회에게는 낡은 사회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인 권력으로서 왕권에 대립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만이 남아 있습니다.“(526~528)
 
 
여러분! 검찰은 조세거부를 사회의 기초를 뒤흔드는방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세 거부는 사회의 기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이번 경우에 조세 거부는 바로, 자신의 기초를 위협하는 정부에 대항한 사회의 정당 방위였습니다.”(528~529)
    
 
“[검찰은] 그 다음으로, 국민의회는 우리처럼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우리처럼 혁명적 지반 위에 서 있지 않았으며, 합법적 지반을 지키려 했다[고 하면서 우리를 비난합니다]. / 검찰은 우리를 범죄자로 묘사하기 위해, 앞에서는 국민의회를 위법적이라고 말하고 지금은 합법적이라고 말하는 짓을 걸핏하면 하고 있습니다. 조세의 징수가 일단 위법이라고 선언되면, 저는 이러한 위법의 폭력적 실행을 폭력적으로 거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러한 관점으로 보아도 우리는 폭력을 폭력에 의해서 몰아낼 권리를 부여받은 것입니다.”(530)
    
 
결론적으로 반복해서 말씀 드리면, 이제 드라마의 1막이 끝났습니다. 두 사회들, 즉 중세사회와 부르주아 사회의 투쟁은 새롭게 정치적 형식으로 수행될 것입니다. 이후 의회가 소집되자마자, 바로 그 충돌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이미 내각의 기관지 ()프로이센 신문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사람들이 선출되었다. 의회는 한 번 더 해산될 필요가 있다. / 그러나 새로운 국민의회가 어떤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필연적인 결과는 다음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혁명의 완전한 승리, 아니면 새롭게 승리하는 혁명. 아마도 혁명의 승리는 반혁명의 완결 이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531)
    
 
독일의 역사 - 위키
 
게르만족 민족 대이동(4세기 ~ 6세기)
프랑크 왕국(5세기 ~ 843)
동프랑크 왕국(843~ 918)
독일 왕국(918~ 962)
신성로마제국(962~ 1806)
영방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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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국(1701~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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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관세동맹(1843~ 1866)
독일혁명(1848)
보오전쟁(1866)
북독일 연방(1866~ 1871)
보불전쟁(1870~ 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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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 대전(1914~ 1918)
11월 혁명(1918)
바이마르 공화국(1918~ 1933)
알자스-로렌(1871~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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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군정기(1945~ 1949)
자르 보호령(1947~ 1956)
독일 민주 공화국(1949~ 1990)
독일 연방 공화국(1949~ )
독일의 재통일(1990)
    
 
1848년 독일 혁명(Deutsche Revolution 1848/49) - 위키
1848년 혁명의 일부로 1848년부터 1849년에 걸쳐 독일 전 지역에서 벌어진 혁명적 움직임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혁명 이전은 독일 3월 혁명에 앞서, 1815년 독일연방 성립부터 1848년의 혁명 발발까지를 가리킨다. 빈 회의의 결과,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반동정책에 의해 독일은 38개의 주로 분할되고, 각 주에서는 절대주의적 지배 체제를 강화했으며, 또한 이를 반대하여 통일과 자유를 표방하던 부르셴샤프트 등의 운동에 대해서는 1819년 카를스바트 결의처럼 심한 탄압이 가해졌다. 그러나 농민해방과 관세 동맹 성립을 계기로 농·공업의 자본주의화는 진전되고 그 결과 1840년대에는 라인 주를 중심으로 하는 산업 부르주아지와 정권을 독점하는 동부 융커 귀족층, 초기 자본주의가 취한 가혹한 노동제도하에서 고생하던 노동자 및 영락 수공업자와 부르주아지 간에 각각 대립이 생겼다. 이에 따라 1848년의 혁명전야에는 민주적 대의제도·헌법 제정·독일 통일을 요구하는 부르주아지의 청원운동과 슐레지엔 직조공 폭동 등과 같은 기아폭동이 격심해져 혁명의 토양이 마련되었다.
    
 
3월 혁명. 1848년부터 1849년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 파리의 2월혁명은 독일에 중대한 영향을 불러일으켜 184835일에는 남부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이 하이델베르크에 모여 전독일 통일회의 준비를 결정했다. 18일에 일어난 베를린 시가전으로 국왕이 양보함으로써 자유주의적인 캄프하우젠 내각이 성립되었다. 내각은 제헌의회의 준비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했다.
 
 
빈 혁명. 1848313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급진파 자유주의자 로베르트 블룸이 주도하여 혁명이 발생, 군중은 란트하우스의 의회로 쇄도하여 궁전까지도 포위했다. 황제는 시민 요구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테르니히는 궁정 반대파의 사직 요구에 굴복, 런던으로 망명했다. 시민의 무력 봉기에 직면하여 시민적 자유의 원칙이 승인되었다. 또한 헝가리와 뵈멘에서도 마자르인이나 슬라브인의 자치정부가 결성되었다.
 
 
베를린 혁명. 베를린에서는 184835일 시민의 폭동이 발생했고, 7일에는 국회 소집, 헌법 발포의 청원이 결의되었다. 14, 시내에는 바리케이드가 구축되어 긴장이 극도에 달했고, 18일에는 검열 폐지, 통일헌법에 관한 칙령이 나왔다. 그러나 왕궁 앞으로 모인 군중에 대한 군대의 발포는 전시가에 걸친 시가전을 유발, 왕은 군대를 철퇴시키고 왕 자신이 통일의 선두에 설 것을 약속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1848518일부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의 성 바울 교회당에서 열린 최초의 국민의회이다. 의원은 약 600명으로 자유주의자가 다수를 점했다. 국민의회에는 독일 국민의 기본권을 근간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 헌법 초안을 제정, 전독일인에게 자유·평등한 시민권과 민주주의적 제반 권리를 승인했다. 국가 형태는 세습 황제제에 바탕을 둔 독일제국으로 하고 의회는 2원제를 규정했다. 오랜 의론이 거듭된 결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독일주의에 의한 독일 통일의 방향이 제시되었으며, 18493월 국민의회는 프로이센 왕 빌헬름 4세를 독일 황제로 선출했으나 그에게 거부당하였다. 빌헬름 4세의 거부 이후 국민회의는 목표를 잃고 점차적으로 기능을 상실해 가다가 결국 해체되었다.
 
 
 
* 맑스사전, 도서출판 b, 2011.
    
 
신라인 신문Die Neue Rheinische Zeitung [간행기간 1848~ 1849]
    
 
맑스의 편집으로 1848년 혁명 후 쾰른에서 발행된 일간 신문. 1848411일 맑스는 쾰른으로 옮겨가 헤스, 안네케, 고트샬크가 계획하고 있던 민주파 신문에 참가한다. 얼마 안 있어 헤스, 안네케, 고트샬크는 맑스파가 진출하는 가운데 물러난다. 고트샬크가 노동자협회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그의 체포 후 맑스가 노동자협회의 회장이 된다) 맑스파는 민주협회를 신문의 모태로 삼는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 속에서 주주 대부분이 신문에서 발을 빼고 있었다. 엥겔스는 훗날 "1호가 나오자 곧바로 주주의 절반이 우리를 버렸고 월말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맑스와 신라인 신문』」, 21:19]고 말하고 있다. 맑스는 부친의 유산 대부분을 신문에 쏟아 부어 결국 큰 손실을 보게 된다. 184861일에 신라인 신문이 발간되었다. 편집장은 맑스, 편집위원은 뷔르거스, 드롱케, 엥겔스, 베르트, 페르디난트 볼프, 빌헬름 볼프, 인쇄는 디츠, 발행인은 코르프였다. 라인 신문이상으로 6,000부까지 발행부수를 늘렸지만, 48926일 쾰른의 민주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위해 계엄령이 발포되었을 때 928일부터 휴간 당했다(이 때 호외가 배포되었다). 이 계엄령은 913, 신문이 민주협회와 노동자협회에 호소한 6,000명의 집회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집회는 더 나아가 17일에 만 명이 넘는 규모에 달했기 때문에 당국은 계엄령을 발포했다. 1011일에 복간했으나 이미 925일 당국은 인민집회에 참가한 편집자 빌헬름 볼프, 뷔르거스, 엥겔스, 드롱케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엥겔스와 드롱케가 벨기에로 망명함으로써 이듬해인 49518일 신문은 발행을 정지하게 된다. 다음 날인 519일호는 붉은색으로 인쇄되었다. 맑스는 이미 1845년에 [프로이센] 국적을 상실했고 프로이센 정부에 대한 국적 재획득의 시도(1848822)도 실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편집원과는 달리 체포영장은 발부되지 않았다. 최초로 신문 기사에 대해 판사의 호출을 받은 것은 4874, 5일의 그의 기사 체포건이었다. 이는 안네케와 고트샬크의 체포에 관한 비판 기사였다. 나아가 1114일에 맑스는 예심법원 검사 헤커[5:438-443]의 기사 건으로 다시 소환을 받는다. 이 직후 맑스는 신문에 세금을 더 이상 한푼도 내지 말라(1117)[6:29]를 쓰고 프로이센 국가에 대한 납세거부를 호소하게 되지만, 당연히 소환을 받게 된다. 맑스는 프로이센 당국과의 교섭을 몇 차례 거듭하며, 결국 49518일 외국인으로서 추방령을 받고 신라인 신문은 불과 1년 만에 발행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다. - 마토바 아키히로(的場昭弘)
 
 
참고문헌 Reprint. Glashütten im Taunus, 1973.
G. Becker, Karl Marx und Friedrich Engels in Köln 1848-49, Berlin, 1963.
 
신라인 신문 · 정치경제 평론
Neue Rheinische Zeitung. Politisch­Ökonomische Revue
  
  
간행기간 1850. 1850년에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런던에서 기획된 월간 잡지. 발행금지 처분을 받은 신라인 신문의 속간지라는 성격이 처음부터 의도되어 있었다. 월간 잡지라는 것을 활용해 기사 대상으로 경제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었다. 1호당 5보겐(80페이지)으로 인쇄되었다. 인쇄는 함부르크의 슈베르트가 떠맡았지만, 발행지는 런던, 함부르크, 뉴욕이었다. 1848년 혁명 이후 많은 독일인 혁명가들이 영국이나 미국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자금이 넉넉해지면 주간지, 그리고 귀국하게 될 날이 오면 일간지로 발전시킬 작정이었다. 그러나 18501월에 제1호가 발행된 이후 결국 마지막 호가 된 5, 6호 합병호가 11월에 나온 것으로 이 계획은 붕괴한다. 이 잡지에 발표된 논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850)과 엥겔스의 독일 헌법전쟁(1850), 독일 농민전쟁(1850)이다. 맑스의 논문은 1호부터 6호까지 매호에 게재되며, 엥겔스의 논문 중 전자는 1호부터 3호까지, 후자는 마지막 호에 게재되었다. 프랑스에서의 혁명의 실패를 다룬 맑스의 저작이나 바덴봉기를 다룬 엥겔스의 독일 헌법전쟁18496월 이래의 혁명의 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맑스와 엥겔스에 의한 독자적인 신문이나 잡지 구상은 이로써 영원히 종언을 고한다. 이후 그들의 신문, 잡지와의 관계는 기사 집필에 한정된다. 예외적으로 폴크(1858-59)에 관해서는 집필뿐만 아니라 편집과 재정을 지원하게 되지만 역시 이 신문도 단명으로 끝났다. - 마토바 아키히로(的場昭弘)
 
 
차티스트 운동 Chartist Movement
1830년대 후반부터 1850년대 전반기에 걸쳐 영국에서 이루어진 의회개혁 운동. 보통선거를 비롯한 6개 항목의 요구로 이루어진 인민헌장을 내건 데서 이 이름이 붙었다. 1832년의 제1차 선거법 개정이 불충분한 것에 그치고, 이와 동시에 선거법이 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구빈법(1834)을 비롯한 노동자에게 불리한 개혁이 진행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8385월의 인민헌장의 간행에 이어서 이루어진 1839년 제1차 청원이 최대의 고양기였지만, 1842년의 제2차 청원과 유럽 전체의 혁명운동의 고양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1848년의 제3차 청원 역시 제1차 청원 이상의 서명인들을 모아 410일의 케닝턴 커먼(Kennington Common)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 등의 정치적 위기를 만들어냈다. 1848년 이후 대륙의 혁명운동이 후퇴함에 따라 이 운동 역시 크게 후퇴하여 중산계급과 협조하는 흐름이 강화되었지만 일부 지도자들은 대륙의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적인 노선을 취하며, 또한 그 후에도 일부는 제1인터내셔널에 가담했다. 운동의 중심적인 지도자는 아일랜드의 지주 출신으로 전 하원의원이었던 퍼거스 오코너(Feargus O'Conner)였다. 그는 1847년에 차티스트 후보자로서 노팅엄에서 하원의원에 선출되며, 기관지 역할을 수행한 노던 스타나 유세 활동을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 런던 노동자협회의 지도자로서 초기에 활약한 W. 러벳, 이론적 지도자였던 오브라이언, 후기의 사회주의적인 방향을 향한 전환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하니, 어니스트 존스가 잘 알려져 있고, 또한 제1인터내셔널에 가담한 인물로서는 B. 루크래프트 등을 들 수 있다. 구체적인 운동의 형태는 다양한데, 청원에 대한 서명을 비롯하여 집회, 시위행진, 선거에 대한 참여, '토지계획'이라고 불린 입식지 운동, 더 나아가서는 무력의 보유 혹은 행사를 포함하는 실력 행동이 취해지며, 그 중에서도 1839년 말부터 40년 초에 걸쳐서는 웨일즈 남부에서 일어난 뉴포트 봉기를 비롯한 실력투쟁이 이루어졌다. 또한 비록 자연발생적인 것이긴 했지만 18428월에는 인민헌장을 요구의 하나로서 내세워 랭카셔로부터 스태포드셔, 웨일즈의 일부에 이르는 대규모의 플러그 플롯이라 불린 총파업이 이루어졌다. 운동이 이와 같은 확산을 보인 이유는, 여성 참가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 공동체를 단위로 한 폭넓은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직적인 면에서 이 운동에서는 상시적인 지도조직, 직업적 지도자를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18407월에 조직된 전국헌장협회는 '노동자계급 최초의 당'이었다고 평가되는 경우도 있듯이 운동의 전국적 통합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 오카모토 미치히로(岡本充弘)
참고문헌. David Jones, Chartism and The Chartists, London 1975.
R. G. Gammage, The History of the Chartist Movement, London 1855.
    
 
[두산백과] 차티스트 운동.
 
18381848년 노동자층을 주체로 하여 전개된 영국의 민중운동. 노동자들은 1832년의 선거법 개정에서도 선거권을 얻지 못하자, 1830년대 중반부터 경제적 ·사회적으로 쌓여온 불만과 함께 선거권 획득을 위한 요구의 목소리를 높여갔다. 우선 1836~1837년에 런던에서는 W.오언을 고문으로, W.러벗을 지도자로 내세워 런던 노동자협회를 결성하였고, 버밍엄에서는 은행가 T.애트우드의 노력으로 버밍엄 정치동맹을 이루었으며, 북부와 서부에서는 노동자들의 운동을 활발히 추진하면서 F.E.오코너가 노던 스타지를 발간하여 이를 지도하였다. 이와 같은 각지의 노동자 조직이나 운동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하여, 1837년 초에 러벗 등은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을 작성하여 다음해 5월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이 헌장이 실현되도록 국민청원 서명운동과 그를 위한 전국 조직 결성을 확대하여, 각지에서 집회를 갖고 행진을 했다. 그리하여 18392월에는 런던에서, 그리고 5월에는 버밍엄으로 옮겨 통일대회를 열었는데 오코너 등 급진파와 러벗 등 온건파가 대립하여 결말을 짓지 못한 채 6월에 120만 명의 서명 청원서를 하원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벗 등은 체포되고, 런던 대회의 파업 결의도 취소되는 등 관헌의 탄압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9월에는 해산하였다. 그 후 1840년 오코너는 맨체스터에서 전국헌장협회를 설립하고 1842년에 325만 명의 서명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같은 해 버밍엄에서도 정치동맹 대신에 완전선거권동맹을 조직하고 역시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다시 모두 거부되어 동맹은 깨지고 러벗도 물러났으며 차티스트 지도 아래 북부에 퍼졌던 파업운동도 무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오코너는 그래도 노던 스타및 전국헌장협회를 통해 운동을 계속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서 G.J.하니가 지도자가 되어 마르크스 ·엥겔스와 협력하여 1845년에 설립한 우애(友愛)민주주의협회를 기반으로 노동자 조직을 호소하였다. 1848년의 프랑스 2월혁명으로 전유럽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세 번에 걸친 570만 명의 청원 서명을 모아, 4월 런던에서 대청원 시위운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무력에 의해 억제되고, 청원은 하원에 전달되었으나 역시 부결되었다. 그 후 지도자들의 체포 ·투옥이 계속되고 전국헌장협회를 중심으로 한 재건의 노력도 헛수고로 돌아가 1858년의 대회 후 소멸되었다.
    
 
공산주의자 동맹(League of Communists, Bund der Kommunisten)
 
노동 계급의 최초의 국제적 정치조직으로, 18476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영국 런던에서 설립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의 전신은 1836년에 조직된 의인동맹(義人同盟, Bund der Gerechten) 또는 정의자동맹(正義者同盟))이었다(이 동맹의 시초는 1834년 파리에서 조직된 독일의 망명객들로 구성된 추방자동맹(追放者同盟)이었다. 추방자동맹의 급진적 좌익분자들과 직공(職工)들이 1836년 비밀결사 의인동맹을 결성했으며, 이 의인동맹이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 아래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재조직된 것이 공산주의자 동맹이다). "의인동맹"은 프랑스 혁명당시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된 공산주의자 그라쿠스 바브프의 사상을 따르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단체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나중에 가입하였다. "의인동맹"이 내건 구호는 모든 사람은 형제이다!였으며, "평등과 정의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상에 기초하여, 지상에 (복음서에 나오는)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 18476월 런던에서 있은 의인동맹 제1차대회에서 이 동맹은 공산주의자동맹으로 개편되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민주주의중앙집권제원칙에 따라 조직되었으며 부르주아지 타도, 프롤레타리아의 지배, 낡은 부르주아 사회 폐절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184711월 말12월 초에 소집된 공산주의자동맹 제2차대회에서는 카를 마르크스가 작성한 동맹의 규약을 채택하였으며 또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강령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노동계급 당의 첫 강령인 공산당 선언(1848)이다. / 공산주의자동맹은 모든 사람은 형제이다!라는 의인동맹의 구호 대신에 전 세계 노동자들은 단결하라!라는 새로운 구호를 만들었다. 또 기회주의자들을 반대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하며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각국에 지부를 두었으며 유럽에서 일어난 1848-1849년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851-1852년 프로이센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 많은 동맹원들을 체포하였다. 쾰른 재판을 전후로 하여 조직이 파괴되고 일시적으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사이의 연계도 끊어졌다. 이러한 정세에서 185211월 마르크스의 제의에 따라 동맹이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