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13.

길들, 길들임 - 사물의 질서








“클라라의 집은 놀랄 만한 이야기들과 차분한 침묵의 세계였다. 그곳에서 시간은 시계나 달력으로 표시되지 않았고, 물체들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갖고 있었으며, 혼령들은 식탁에 앉아 인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과거와 미래는 서로 다를 것 없는 단일체를 이루었으며, 현재라는 현실은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뒤죽박죽된 갖가지 거울들의 만화경이었다.” 이자벨 아옌데, 『영혼의 집(La Casa de los Espiritus, 1982)』 1권, 권미선 옮김, 민음사, 2003, 149쪽.



사물이란 무엇일까?
 
사물이란 무엇일까? 당신에게 사물은 무엇인가? 아니, 당신에게 이 사물, 저 사물은 무엇인가? 가령 당신이 들고 있는 이 책, 당신이 쓰고 있는 이 안경, 당신 곁에 놓여 있는 이 펜은 어떻게 해서 오늘 당신에게 바로 그런 의미를 갖는 그런 사물이 되었을까? 그래, 이 펜, 이 바늘, 이 시계는 그저 거기에 말없이 놓여 있는 사물일 뿐, 사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내 주변에 있는 것들, 내가 쓰는 것들, 도구, 한 마디로 그저 사물이 아닐까?
 
느낌(感)과 정(情)
 


사물을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요 뜻풀이가 나온다.



사물事物
 
명사
1. 일과 물건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
 
1번은 사(事)와 물(物)을 병렬된 두 개의 낱말로 각기 따로 새긴 것이고, 2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용법은 2번에 더 가깝다. 정확한 어원을 알 수는 없지만, 현재 한국어에서 사용되는 한자어의 80% 이상이 19세기 중후반 메이지(明治) 시대에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번역어임을 생각해볼 때, 사물이란 용어도 그럴 확률이 상당히 높다. 물론 일본어에서 우리말의 사물에 해당하는 용어는 모노(物) 혹은 모노고토(物事)가 일반적이고 사물은 한문투의 고답적인 문어체의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사물(事物)이라는 용어가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의 번역이라면 이는 다음과 같은 계열을 따라 번역되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한자 문명권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物)로 지칭되었다. ‘물’이라는 일반적 범주 아래 다양한 종류의 ‘것(物)들’이 있게 되는데, 우선 살아있는 것은 생물(生物),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무생물(無生物), 움직이는 것은 동물(動物), 심어져 있는 것은 식물(植物),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인물(人物), (실제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쇠로 된 것은 광물(鑛物), 조용히 놓여 있는 것은 정물(靜物), 실어 날라야 할 재화는 화물(貨物), 괴이한 것은 괴물(怪物) 등이 그것이다. 물론 사물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이상의 모든 ‘것들’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이지만, 앞에 놓이는 사(事)를 이런 식으로 뒤에 오는 물(物)을 꾸미는 것으로 보면 사물의 또 다른 가능한 뜻은 ‘일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오늘날 되돌아보면 지나치게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이지만, 하이데거의 ‘손-안에-있는 것’(Zuhanddenheit)이란 바로 이런 현상을 지칭하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한편,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 곧 사물이므로, 넓은 뜻의 사물에는 단지 내가 보는 이 ‘책’만이 아니라 이 책을 보는 ‘나’도 또한 포함된다. 그리고 한자 문명권의 사람들은 물과 물이 만나면 느낌 곧 감(感), 나아가 정(情)이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나와 네가 오래 만나면 우리 사이에는 느낌, 감정(感情) 혹은 미운 정, 고운 정과 같은 정감(情感)이 생긴다. 그리고 물과 물 사이의 정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작년부터 내가 사용하는, 내가 아끼는 이 펜에 정이 들었다.
 
사물의 대체 불가능성
 
어떤 특정한 사물 혹은 물건에 ‘정이 든다’라는 말은 달리 말하자면 그것이 ‘대체 불가능한 것’이 되어 간다는 말이다. 이 펜은 내가 다 쓰면 혹은 질리면, 버리고 똑같은 혹은 비슷한 종류의 ‘새것’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애정하는 곧 ‘아끼는 정’(愛情)을 품고 써오던 이 펜을 누가 빌려 갔다가 잃어버리고 내게 똑같은 것을 사준다고 해도 이 새 펜에 대한 나의 마음은 예전의 그 펜에 대한 그 마음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만약 그 펜이 돌아가신 어머님이 내 졸업 선물로 사주신 펜이라면 그 펜은 이 세상의 어떤 다른 펜과도 바꿀 수 없는 펜, 어떤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것,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물건이 된다. 그 펜은 내게 문구점에 진열되어 있는 어떤 값비싼 펜도 갖지 못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서로를 길들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새침한 장미에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우리의 주인공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묻는다. “이 세상에 장미들이 많은데 내가 왜 다른 장미 말고 이 장미만을 사랑해야 하는 거야?” 작품속의 현자, 간달프, 요다인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너와 장미가 서로를 길들였기 때문이야.” 불어 원문에서 사용된 ‘서로를 길들이다’는 s'apprivoiser 동사이다. 상호성을 의미하는 앞부분의 s'(se)를 제외하면 불어 apprivoiser는 13세기부터 사용된 용어로서 원래 ‘동물을 순하게 만들다’, ‘길들이다’, 곧 ‘나의 것으로 사유화하여(priver) 소유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집’을 의미하는 domus에서 파생되어 ‘가축(家畜)’ㆍ‘식솔(食率)’을 의미하는 라틴어 domesticus가 불어의 domestique가 되는 것과 동일한 과정). priver는 ‘고유한, 개별적인, 개인적인, 사적인’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privatus에서 나온 말로, 다시 이로부터 ‘분리되다, 떨어져나가다’라는 뜻이 파생된다. 결국 이 용어는 너무도 평범하여 굳이 의식도 되지 않던 무엇인가가 일정한 과정을 거쳐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나만의 것이 된다’, 곧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걸음 더 나아가 ‘친해진다’(privauté), ‘길들여진다’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익숙해지고 친해지고 길들여지는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일방적일 수 없으며, 늘 상호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길들여짐의 과정은 인간들 혹은 생명체들 사이에 한정되지 않고 더 멀리 뻗어나간다. 우리집 강아지 쿠키와 나는 서로를 길들인다. 당신집 고양이 에로스와 당신은 서로 길들인다. 새로 이사 온 이 집에 나는 이제 길들여졌다.
 
길들이다
 


당신과 나도 이제 서로를 길들이게 될 것이다. 길들인다. 우리말,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내버리거나 내놓는 것이 아니라, 들여놓는다, 들인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길을. (마음에 든다, 곧 마음에 들이듯이) 길을 (내 마음에, 내 몸에) 들인다. 당신의 발과 새로 산 신발이 서로를 길들인다. 당신과 내가 서로를 길들인다. ‘길들인다’의 ‘길’은 길(道)일까? 도, 곧 길이란 이 세상이 움직이는 바 그대로의 길(the way things are)이다. 이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디케(dikē)라는 신으로 불렀고, 이는 라틴어 justitia를 거쳐 현대 유럽어 justice가 되고, 이를 일본인들이 정의(正義)라고 번역했다(내가 말하는 ‘동아시아 학문의 메이지 효과’). 이 세상의 모든 산길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산과 동물 혹은 때로는 인간이 만나서 다니면서 생겨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와 당신의 만남 곧 길들여짐은 미리 정해진 다른 어떤 방식이 아니라, 우리 둘이 만들어가는 대로, 우리 둘 ‘사이’에서, 나중에, 생겨날 것이다. 길은 우리 앞에 미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산이, 나와 당신이 만났을 때, 나와 산, 그리고 나와 당신 ‘사이’에서 나중에 생겨날 것이다. 나와 당신이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의 이상적인 모델과 모범을 따라 우리의 사랑을 거기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 세상에는 아직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랑의 방식을 우리들 ‘사이’에서 발명해내는 일이다. 내가 나의 삶을 산다는 것은 (앞서 걸은 다른 사람들의 길들을 잘 살펴보고 참조하되) 결국 내가 존재하고 살아가고 죽어가는 나만의 방식을 발명해내는 일이다.
 
 
이름, 말과 사물
 
‘길들이다’라는 말은 결국 하나의 사물인 ‘나’와 나 아닌 다른 ‘사물들’ 사이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길은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개의 길들이다. 길들이는 일은 길들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길들이는 일, 길들을 만들어내는 일은 사물들 사이에 길을 내는 일,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일, 곧 사물들 사이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이름이 없으면 그 사물은 인식될 수 없다(無名無物). 이름은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자 그것을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인식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름은 ‘의미’를 주는 것이자, 그 의미를 가능케 하는 ‘인식론적 장’이다. 인간은 의미론적 동물, 기호를 사용하는 동물이다(Homo Semioticus). 산골소녀 미자가 자신의 친구인 옥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거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길들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자에게 옥자는 미란도 코퍼레이션이라는 거대기업이 부여한 숫자, 일련번호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존재, 나의 세계에 들어온 존재, 나와 서로를 길들인 존재, 곧 옥자이기 때문이다. 거대 기업이 부여한 익명의 번호는 ‘호칭’일지언정 서로를 길들이고 서로를 만들어가는 ‘이름’일 수 없다. 당신이 들고 있는 이 책, 당신이 쓰고 있는 이 안경, 당신 곁에 말없이 놓여 있는 이 펜에 이름을 붙여주어라. 내가 들고 있는 이 펜, 내 서랍에 들어있는 이 바늘, 내가 쳐다보는 이 시계는, 마치 내 왼손 새끼손가락의 지문처럼, 오직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의 펜, 나의 바늘, 나의 시계이다. 내가 이름을 가지듯, 내 강아지가 이름을 가지듯, 나의 펜도 이름을 가질 권리가 있다.
 
길들, 길들임
 
그리고 이 사물들의 세계가 나의 세계를 만든다, 나의 세계이다. 나라는 사물과 이 사물들은 서로를 길들인다. 그리고 나는,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이라는 사물과, 서로를 길들인다. ‘나’란 내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서로를 길들인 결과물(효과, effect)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를 길들이는 방식에는 하나의 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길들이 있다. 이제 나는 이제까지의 내 길과는 달리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곧 나를, 당신을, 세계를 길들일 수 있다. 나의 세계는 내가 길든 세계, 내가 길들인 세계, 내가 길들이는 세계이다. 나의 오늘을 낳은 것이 내가 길든 이 세계라면, 나의 내일을 낳는 것은 내가 지금 길들이는 이 세계이다. 나는 내가 길들이는 길들이다.

 
 
2017. 8. 9.



* 잡지 <핑거프린트> 창간호 2017년 9월호(격월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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