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5.

나를 사랑한다는 것

어제 스승의 날이라 선생님들과의 모임에 잠시 참석하고 저녁엔 고맙게도 학생들이 마련해준 모임에 갔다왔다. 이런 다이어리에나 고백하는 것이지만, 부족하기만 한 날 믿고 따라주는 학생들에게 때론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울 때가 있다. 학생들과 차를 마시고, 포켓볼을 치러 갔는데, 중간에 학생 하나에게 문자가 와서 잠시 보러 다녀왔다. 학생은 요즘 자기 혐오와 죄책감에 빠져 요즘 몹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돌아와 당구를 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다른 학생에게 또 문자가 왔다. 그 학생은 내가 아끼는 학생들 중 하나인데 몹시 힘든 일이 있는 듯했다. 어렸을 적부터 지병이 있어 아파서, 그리고 역시 어린 시절 힘든 일을 겪어서, 그 삶이 아직 다 낫지 못한 그런 학생이다. 학생은 내게 스승의 날인데 선물은 못 드릴 망정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하다고 말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다 듣고나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많이 힘들었지? 네가 지금 후회하고 힘든 일을 했던 건 네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야, 그걸 꼭 기억해라. 그리고 나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을 내가 나 자신의 자기 혐오와 자존심과 싸운 끝에 얻어낸 건, 결국 나를 좀 더 이해하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깨달음, 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나처럼 그리고 아마도 지금의 내가 여전히 그러한 것처럼, 너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면, 너는 그런 바보같은 선택을 하지도, 그런 후회할 일을 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마치 내가 그때 그토록 힘들지 않았다면, 그런 바보 같은 일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처럼. 그리고 또 나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다 괜찮아, 괜찮아, 이젠 다 지나갔어, 이젠 나아질 거야, 지금 네가 힘든 건 지금 네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넌 네가 한 그 바보같은 일을 일부러 했던 게, 누구가에게 고통을 주려고 했던 게 아니었잖아? 악의가 있어서 했던 게 아니었잖아? 넌 일부러 아픈 게 아니었잖아? 네가 그런 힘든 일을 겪은 건 네 책임이 아니었잖아? 넌 다만 그때 너무 어렸고 그 일은 네가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일이었잖아? 너도 이젠 알고 있잖아. 하지만, 넌 아직 그때의, 무의식의 현실에서, 무의식이라는 감옥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거잖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렴. 저 푸르른 하늘을, 너를 보고 웃어주고 있는 저 사람들을,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사랑하는 저 사람들을, 나를, 말이야. 그래, 그때 아무도 너에게, 네가 얼마나 힘든지, 네 기분은 어떤지, 네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고, 네가 정말 힘들 때 아무도 널 안아주지 않았잖아? 아무도 네 어깨에 손을 얹고, 다 괜찮다고, 그것도 다 과정이라고, 네가 한 일이 잘 한 건 아니지만, 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잖아,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아무도 네가 힘들 때, '네'가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널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위로와 위안의 말과 보살핌을 보여준 사람이 없었잖아. 나도 너와 꼭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때의 너, 그리고 지금의 나와 똑 같이 했을 거고, 똑 같이 되어 있을 거야. 널 잘 이해하고, 널 더 사랑하고, 널 더 잘 이해하고, 널 좀 더 배려해줘. 이 모든 건 이기주의도, 자기 합리화도 아닌, 그저 너를 사랑하는 행위, 남들을 사랑하기 위해 네가 꼭 겪어야만 하는 자기를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그런 일일 뿐이야. 넌 네가 행복한 만큼만 너를 그리고 남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어. 이제 그만 너를 용서해주렴."

이 모든 말은 물론 그와 나와 이 세상의 모든 '그녀'들과 이 세상의 모든 '그'들에게 하는 말이다.


마치 젊은 시절의 나처럼 지독한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그 학생에게 나는 말해주었다.

"그건 병이야, 넌 환자라고. 넌 너 자신을 환자로 잘 대해주어야 해, 잘 대접해주어야 해. 아픈 사람에게 남들과 똑 같이 일어나 100미터를 뛰라고 할 수는 없는 거야. 사람들은 우울증이 그저 우울한 건 줄 알아. 그래서 의지로 극복하거나, 병원이 아니라, 그저 사랑으로 치유하려해. 근데 그건 말도 안되는 의학적 무지야."

내 병을 고치려고 젊은 시절 이래 정신의학, 심리학, 정신분석 개론서, 원전들을 무수히 읽은 나는 그것이 그저 단순한 의학적 무지 혹은 두려움의 산물임을 안다. 간염이나 폐렴을 의지나 사랑으로 고칠 수 없다면, 우울증과 불안강박증, 그리고 정신분열증을 의지와 사랑으로 고칠 수 없다는 것은 명약간화하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의 생각이라고 믿고 있는 '망상'들은 그저 그 병의 증세이다. 이는 단순히 정신의학 개론서 몇 권만 들춰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기 혐오, 불안, 질투,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 피해망상, 자포자기, 자기 파괴 혹은 자살충동이 우리 자신의 사고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수많은 임상실험 그리고 실제의 치료들이 증명하듯이, 우리가 일정한 항우울제 혹은 적절한 치료제를 투여받게 되면 그러한 사고는 사라진다. 이는 그것이 우리가 믿듯 우리 사고의 작용이 아니라, 단순한 하나의 의학적 증상, 즉 뇌하수체 호르몬 분비 상의 이상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나 자신 정신분석 치료를 통해 그러한 사고가 일정한 기간 동안의 상담 이후 사라지는 것을 직접 수 차례나 체험하였기에 나는 이러한 의학적 지식을 몸으로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물론 나도 처음엔 의사의 이런 설명을 믿지 않았다. 그저 환자인 내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혹은 내게는 위험한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이것이 이른바 정신에 관련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고통받는 점이다. 그것은 육체의 가시적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은 물론 그 스스로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사고인 줄로만 안다. 그리하여 증상은 더욱 더 악화된다. 타인들은 그것이 꾀병 혹은 그의 자발적 사유라고 생각하고, 당사자들 역시 이를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여 결국 그의 죄책감과 고통만 더 하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에 관련된 질병들이 갖는 일반적인 악순환의 전형이다.

나는 내 병을 고치려고 프로이트와 그와 관련된 정신의학, 심리학의 거의 모든 책들을 다 읽었다. 내가 아픈 것은 1984년 겨울부터인데, 그후에도 열심히 챙겨 읽었지만, 적어도 1990년 정도까지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와있는 거의 모든 관련서들을 사서 혹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노트를 만들어가며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놈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독일 출신의 미국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을 읽다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당시의 나로서는 가히 '황당한' 개념을 알게 되었다. 자기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자기를,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심지어 사랑한다 ... 자기를 '사랑'하다니 ... 후에 내가 알게 되고 전공까지 하게 된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의 말을 따르자면, 자기를 '배려'하다니 ... 나는 그말이 마음에 들어, 최근까지도 수업 시간에, 예전의 나와 같이 혹은 아마도 지금의 내가 여전히 아직 조금은 그러하듯이, 자기를 혐오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그 말을 해주곤 했다.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라."

물론 이때의 이해란 이해의 일반적인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사용된 말이다. 수학공식을 이해해듯이 나의 생각을 정확히 알고 이해해라. 그리고 네가 너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감하고 그를 이해하듯이 너 자신을 이해해라.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self-love)은 프롬에 따르면 이기주의(selfishness)가 아니다.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이기주의자들이 자신만을 사랑하며, 남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물론 그들이 남들을 사랑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자들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자기를 찾는 인간>>, 종로서적). 사랑은 능력이다, 사랑은 그러한 능력을 배우고 갈고 닦고 연습하고 실패를 통하여 배우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하나의 능력이다(<<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이는 원제 <the art of loving>에서 잘 드러나듯이, 수동적인 <사랑받기의 기술 the art of being loved> 아니라, 적극적 행동으로서의 <사랑하기라는 기술>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이때의 기술은 모든 것의 제작, 만듦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테크네 techne>에서 온 것이다. 테크네가 이후 라틴어 <아르스 ars>가 되고 이것이 다시 영어 <아트 art>가 된다. 그리하여 19세기의 일본인들이 이를 예술과 기술이라는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로, 때에 따라, 적절히 번역했다).

프롬에 따르면,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we don't fall in love)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함께 크는 것,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we grow up in love). 다시 말하면, 보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아직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주는' '적절한' 상대를 만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자신과 타인을 '사랑할 줄을 모르기 때문', 우리가 '아직 사랑하기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는 사랑의 크가와 깊이는 당신이 삶에 대하여 보고 느끼고 있는 인식의 크기와 깊이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능력이다. 나의 말로 하자면, 이는 마치 이해가 하나의 능력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남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이 들려주는 이야기, 자신의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물론 이는 철학적으로 불가능한, '순진한' 표현이나 여기서는 편의를 위하여 그냥 사용하자)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해석한다. 자신의 말, 남의 말, 자신과 남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 들을 줄 아는 능력은 말하자면 말되어진, 혹은 말로 된 것 이상의 것, 즉 그 말하고 있는 사람이 그 말을 통하여 원래 말하고자 했던 것까지 헤아려 들을 줄 아는 능력, 그의 드러난 말과 행동에 사로잡히지 않는 능력,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볼 줄 아는 능력이다.

그런데 최근에 한 학생의 블로그를 읽다가 이런 글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

나는 학생이 아마도 아무렇지도 않게 썼을 이 '평범한' 한 문장을 읽고 약간의 지적인 충격을 받았다. 이 학생은 글도 좋고 수업태도도 무척 좋은 여학생으로서, 아마도 - 이러한 말이 '성차별'이 아니라면 - 여학생들 특유의 자의식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고민으로, 즉 자신만의 문제의식으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그러한 학생이었는데, 이 짧은 글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을 터이다. 여하튼 나는 이 글을 읽고 작은 혹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철학적 전말은 이러하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우리의 사소하고도 시시한 일상에서 정확히 무엇을 어떤 행동을 하는 것, 어떤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런데 도대체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은 가능하기나 한 말인가?

그렇다. 한 마디로 나의 충격은 '분석철학적 충격'이었다. 즉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도대체 정확히 무슨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더욱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은 또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마치 '내가 나의 애인을 사랑하듯이' 사랑한다는 말인가? 내가 나를 보고 싶어하고, 나와 없으면 내가 못 견뎌하는가? 물론 그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말은 내가 나를 참으로 위해준다는 말인가? 그런데 '참으로'란 무엇인가? 쉽게 이런 비유를 해볼 수 있겠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을 일러 내가 그를 '참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확실히 그를 '망치는' 길에 오히려 가까울 것이다.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오늘과 그의 미래에 대하여 내가 생각키에 참으로 그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참으로'를 설명해야 하는 문장 안에 '참으로'가 다시 나온다. 그리하여 이 말은 순환논증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우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의 일정한 의미를 밝혀준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되, 그의 단기적 말초적 이익 이상의 어떤 것을 보고, 멀리 보고, 행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그의 의사를 존중하는 행위, 그의 말과 느낌, 생각과 기분을 존중해 주는 행위이다. 이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느낌과 의사와 기분과 생각을 들어주는 행위, 그것들을 정확히 아는 행위, 그리하여 그것을 존중하여 주는 행위이다.

나에 대한 사랑이란 이렇게 나에 대한 인식과 분리되어질 수 없다. 나에 대한 앎 없이 나에 대한 배려란 무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기란 때로 참으로 쉬운 일인 동시에 때로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남이 아니라 나에게 정직하기,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보인다는 것, 하이데거의 말대로 무책임한 군중으로서의 '사람들'(das Man)이 아니라, 진실된(authentic) 자기 자신을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실로, 때로 귀찮으며, 때로 두려운 일이 될 수도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의 느낌과 생각, 의지와 소망에 대한 정확한 앎 없이 나 자신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행하기란 불가능하다.

나의 또 다른 학생 하나는 나에게 남긴 방명록에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라고 적고는, 이렇게 스스로 답했다.

"나는 그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아마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에 대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한 행동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닐까."

맞다. 그리고 이때의 '자기에 대하여 책임지기'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정확히 알고 이해하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배려를 행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자신의 윤리학 저서인 <실천이성비판>>에서 실천이성의 준칙으로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항상 자신과 타인의 인격에 대하여 그것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

어린 시절 나는 이 문장이 <타인>에 대한 것이라고만 기억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공부를 하며 다시 책을 자세히 읽어보니 <자신과 그리고 타인들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었다. 그렇다. 내가 나에게 남이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도 우리는 '그것을 하는 나'와 '그것을 하는 나를 바라보는 나'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불교 혹은 후설의 현상학이 말하는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y)이다. 의식 자체란 없으며, 오직 무엇에 '대한' 의식만이 존재할 뿐이다. 대상이 없는 혹은 내용이 없는 의식, 즉 '의식 자체'란 없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남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남인 나'를 내가 정확히 알고, 그를 올바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이해하며, 그리하여 그를 배려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글을 마칠 시간이 되었다. 불현듯, 젊어 죽어 우리에게 '영원한 청년'으로서 기억되는 시인 윤동주의 <서시> 중 한 귀절이 떠오른다.
나도, 그를 따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009. 0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