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30.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 더하여 - 아래 나의 글은 한겨레 신문사에서 발간하는 <나.들> 2013년 10월호(vol. 12) 80-85쪽에 실렸다. 그런데 두 가지 비상식적인 일이 있다.

우선, 책을 받고 보니 제목을 아래 나의 원래 제목에서 '메이지에 물든 한국 학문의 담론', '한국 학문 오염시킨 메이지 유산'이라고 바꿔놓았다. 물론 내게는 상의도 하지 않은 채! 나는 책을 받고 알았다. 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메이지 학문이 오염시킨 게 아니다. 글에도 나타나 있듯이, 메이지학문은 한국 학문을 오염시킨 게 아니라, 대한민국 학문 담론의 인식 가능조건이다. '오염시켰다'고? 그럼 '오염'되기 전의 혹은 우리가 앞으로 찾아나가야 할, 어떤 '순수한' '한국'의 학문 담론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웃기는 일이다.

두번째 비상식적인 일은 열심히 써보내니 분량이 초과한다고 줄여달라고 해서 억지로 줄이고 줄였는데 책을 받아보니 마지막 장의 반이 백지 공란이다 ... 그럼 그렇게 말을 해주었으면 그렇게 불필요하게 줄일 필요는 없었을텐데, 여하튼 좀 기분이 심히 즐겁지는 못하다.

2013년 10월 8일 적다.


http://na-dle.hani.co.kr/arti/culture/4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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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1. ‘타자’ - 번역의 문제


19세기 중후반의 프랑스 시인 랭보는 ‘나는 타자(他者)이다’라고 말했다.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역시 20세기 중후반의 프랑스철학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타자’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문장들을 대한 적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아마도 거의 누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을 것이다. 이 세 가지 ‘타자’는 모두 같은 타자인 것일까? 언어와 사상이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듯이, 어학 곧 해당 언어에 대한 문법적 지식 없는 해당 사유의 정확한 이해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이상의 용례에 대한 정확한 문법적 해석, 그리고 그러한 개념과 문장이 말해진 정확한 사상적 맥락에 대한 이해이다.
 
2. 랭보 - ‘나는 타자이다’


우선 프랑스의 시인 랭보가 말한 ‘나는 타자이다’의 원어 문장은 1871년 랭보가 보낸 한 편지 속에서 발견되는데, 그 정확한 원문은 Je est un autre이다. Je는 1인칭 단수를 의미하는 대명사 ‘나’로서 영어의 I에 해당된다. est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되는 프랑스어 être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으로 영어의 is에 해당된다. est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1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곧 영어의 am이 아닌 is이다. 1인칭이 되려면 이 문장의 동사는 suis가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un은 영어의 a에 해당되는 것으로 프랑스어의 남성형 단수 부정관사이다. 마지막 단어는 문제의 autre인데, 이 단어는 여러가지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 문장의 경우에는 단수형 부정관사와 함께 사용되어 의심의 여지없이 타인(他人) 혹은 타자(他者)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랭보의 문장은 영어로 글자 그대로 직역되어 I is another로 번역된다. 이는 프랑스어 autre가 다른 ‘사람’ 곧 타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일반’ 곧 타자 일반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어의 another가 반드시 다른 사람 곧 타인이 아니라, 다른 것을 가리킬 수 있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경우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그래서 프랑스어에는 광의의 다른 것 일반이 아닌 오직 다른 사람들 곧 타인만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가 따로 있는데, autre와 같은 어원을 갖는 autrui가 그것이다. 자, 그렇다면 ‘나는 타자이다’라는 번역은 ‘옳은’ 혹은, 이 용어가 너무 과하다면, ‘충분히 섬세한’ 것이었을까? 우선 이 문장의 동사가 3인칭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 때의 주어 ‘나’는 (1인칭 주어 ‘나’가 아닌) 3인칭 주어 곧 ‘나 일반’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의 기존 번역 ‘나는 타자이다’는 잘못된 번역은 아니지만, 그리 섬세한 번역은 아니다. 잘못된 번역이 아닌 까닭은 이를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해도 나의 3인칭적 성격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섬세한 번역은 못되는 까닭은 이보다 더 좋은 번역의 가능성이 현대 한국어에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곧 그 주어가 갖는 3인칭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이 문장은 차라리 ‘나란 타자이다’라고 번역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문장의 un autre를 ‘나는 타자이다’처럼 타자로 번역해야 하는 것일까? 이 단어는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 것일까? 타인, 타자, 다른 사람? 우선 한국어 네이버 검색에 올라온 관련 학술논문을 보면 현대 대한민국의 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 문장을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하고 있으며, 종종 ‘나는 (또 하나의) 다른 존재이다’와 같은 다른 번역도 눈에 띈다. 일본어 위키피디어의 랭보 편에도 이 문장은 ‘私は他者である’ 곧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번역이 un autre를 (한 명의) 타인 같은 식으로 한정하여 특칭하지 않고, 타자와 같은 일반적 번역어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프랑스어 autre가 갖는 두 가지 의미, 곧 다른 것, 타자 일반과 다른 사람, 타인이라는 두 의미를 모두 담고자 하는 의도로 보이며, 이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3. 사르트르 -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


이는 현대철학에 관련된 사르트르의 독창적 공헌이라 할 시선론(視線論)의 중심을 이루는 문장이다. 이는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서 가르생이 외치는 대사인데, 원어는 L'enfer, c'est les Autres이다. 이는 영어판 위키피디어를 보면, Hell is other people로으로, 일본어판 위키피디어에는 ‘지옥이라는 것은 타인에게 있다’(地獄とは他人である)로 번역되어 있다. 위 영어 번역을 현대 한국어로 직역하면 아마도 ‘지옥은 다른 사람들(타인들)이다’가 될 것이다. 같은 용어가 우리말에서는 타자로, 일어와 영어에서는 타인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르트르의 문장은 앞서 다룬 랭보 문장의 경우와 달리 다양한 우리말 번역을 갖는다. 이번에도 네이버를 검색해보면, 이 문장은 ‘지옥은 나의 타인이다’, ‘지옥은 타자이다’ 등으로 나온다. 그런데 사르트르의 원문을 살펴보면, 이 경우에는, 앞서 랭보의 경우와는 달리, 다른 것(들) 일반 곧 타자(성)이라는 의미보다는 일단 복수로 표현되어 ‘다른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단연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보다는 (일어와 영어의 경우처럼)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라는 구체적 지칭으로 옮긴 경우가 더 좋은 번역이라 할 수 있으며, 혹은 적어도 ‘지옥 그것은 타자들이다’로 옮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위 문장의 타인들을 지칭하는 단어 les Autres는 물론 단수 l'Autre의 복수로서 사르트르 초중기 사유의 대표작인 1943년의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 등장하는 중심개념들 중 하나이다. 사르트르는 이 책에서 헤겔의 영향을 받아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즉자존재(卽自, l'être-en-soi), 대자존재(對自, l'être-pour-soi)로 나누는데, 즉자존재는 가위나 지우개 같은 의식이 없는 존재 곧 사물이고, 대자존재는 의식을 가진 존재 곧 인간을 지칭한다(여기서 대자(對自)와 타자(他者)에 나타난 자(自)와 자(者) 사이의 구분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대자존재는 나(나인 주체)와 타자(내가 아닌 주체)로 구분되는데, 이 때 타자는 나의 ‘대타존재’(對他存在, l'être-pour-autrui)로서 정의된다. 그런데 대타존재의 원어를 보면 타자 일반이 아닌 타인들만을 배타적으로 지칭하는 l'autrui가 사용되어 있다. 곧 이 ‘대타존재’의 ‘타’(他)는 타자 일반이 아니라 타인들만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대타존재’로 정의되는 존재는 ‘타자’가 아니라 ‘타인들’로 번역되었어야 했다.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사르트르의 사유에 등장하여 현대 한국어에서 일반적으로 ‘타자’로 번역되는 용어는 타자와 타인(들)이라는 두 경우로 구분되어 번역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타 혹은 대타존재의 경우처럼, 즉자(卽自)가 아닌 대자(對自)라는 식으로 그 존재의 ‘의식성’이 강조된 경우, 이 용어는 지금처럼 타자로 번역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의식을 가진 내가 아닌 주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타자(他者)라는 용어는 타인(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4. 현대프랑스철학 - 동일자와 타자


한편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레비나스 등 현대프랑스 사상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타자(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타자(他者, l'Autre, the Other)란 ‘동일자(同一者, le Même, the Same)가 아닌 것’이다. 동일자란 다시 말해 자기와의 동일성(同一性, Identité, Identity)을 유지하는 것, 곧 전통철학의 자기 원인적(causa sui) 실체(實體, Substance)를 의미하고, 인간의 경우, 이는 의식 주체(主體, Sujet, Subject)와 일치한다. 그리고 타자란 바로 동일자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보면, 타자를 마치 사르트르에 있어서의 타인처럼 ‘내가 아닌 주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의 타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을 갖는 존재(동일자)가 아닌 것’이다. 곧 타자는 (자기) 동일성을 갖는 무엇이 아니라, 차이를 갖는 어떤 것이다. 이렇게 동일자가 아닌 성질을 일컬어 프랑스철학에서는 타자성(他者性)이라고 부르는데, 타자성이란 한 마디로 ‘동일성에 기반한 자기 원인적 실체들’ 곧 의식을 가진 주체, 그의 대상이 되는 객체(대상) 및 양자 사이의 ‘올바른’ 관계로서의 인식 모두를 부정하는 그 무엇이다. 이 경우의 타자는 의식적 주체 관념 일반의 부정에 기반하여 서있으므로 나는 물론 타인들도 타자가 아니다. 타자는 의식 혹은 주체에 의하여 인식 불가능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같음(동일성)이 아니라 다름(차이, différence)과 달라짐(차이화, différenc/tiation)에 기반한 무엇이다.


결국 라캉, 푸코, 들뢰즈, 데라다, 레비나스 등이 사용하는 타자 개념은 우선 사르트르의 타자 개념과는 전혀 무관한, 사실상은 정면으로 대립되는 개념이며, 다음으로 랭보의 ‘나는 타자이다’에 등장하는 타자를 (다른 사물 혹은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이질적인 것, 곧 ‘의식적 주체에 의해 인식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의 타자성(他者性)으로 새길 때의 그 타자와 같은 개념이다.


5. 번역의 층위 - 지식 고고학적 지층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펴본 현대 한국어 ‘타자’의 경우처럼, 원어인 프랑스어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용어들이 왜 우리말에서는 같은 하나의 용어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불필요한 혼동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역자의 실력부족 혹은 부주의를 훨씬 뛰어넘는 근본적인 인식 층위의 수정을 요구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오늘날 대한민국 학문을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하나의 인식론적 효과, 곧 내가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라 명명한 바 있는 지식 고고학적 지층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무수한 사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프랑스어 autre와 관련된 철학 용어의 번역은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의 인식과 정확히 어떤 관련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오늘날 우리의 인식, 철학적 이해와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단적으로 말해, autre는 당시 선진 유럽 문명을 먼저 접한 일본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들에 의해 번역된 용어이다. 당시 메이지 지식인들은 이 용어를 위에서 언급된 철학적 의미에서 크게 다른 것 곧 타자(他者)와 다른 사람 곧 타인(他人)의 두 의미로 번역했는데, 그 이유는 물론 프랑스어의 autre가 이 두 가지 뜻을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프랑스어 autrui는 물론 ‘타인들’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autre라는 용어를 이른바 오늘날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이라 불리는 이들, 곧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레비나스 등이 뜻하는 그러한 의미의 타자(他者) 혹은 타자성(他者性)이라는 의미로는 번역할 수가 없었는데, 이는 물론 메이지 지식인들이 이 용어를 번역했던 19세기 중후반에는 이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이 태어나기도 이전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autre라는 용어의 현대 한국어 번역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의미의 혼탁에 대한 근본 원인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상의 혼탁을 랭보, 사르트르,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이라는 세 경우에 맞추어 하나씩 검토해보자.


우선, 랭보의 ‘나는 타자이다’라는 언명은 ‘나는 다른 사람(타인)이다’라는 의미와 ‘이른바 나란 의식적 주체에 의해 온전히 포괄될 수 없는 어떤 타자성이다’라는 의미 양자를 모두 갖는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원래의 랭보 문장 자체가 이러한 양의적(兩義的) 효과를 내도록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현대 한국어에서 이러한 양의성은 ‘나란 타자이다’라고 번역되어야 할 문장이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됨으로써 전자의 의미에 의해 후자가 가려지는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타자이다’로 번역된 한국어 문장은 원문의 뉘앙스가 상당 부분 소거된 ‘나는 타인이다’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되고 말 소지가 다분하다. 혹은 랭보의 문장을 타자(성)에 대한 강조로 읽을 수도 있으나, 이는 오직 이러한 타자성의 담론이 철학적으로 부각된 이후, 곧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1950~1960년대 이후에만 가능한 사후적 해석이다. 랭보의 문장은 타자성이 부각되기 이전의 시기라면 ‘나는 다른 무엇, 다른 어떤 존재이다’라는 문학적 혹은 일반적 의미 안에 포괄적으로 뭉뚱그려져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러한 설명이 랭보가 이후 프랑스철학자들의 사유를 선취(先取)한 것이라는 관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사르트르의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라는 문장은 이제 쉽게 이해된다. 사르트르는 이른바 ‘사르트르 이후의’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이 말하는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르트르가 인정하는 것은 오직 의식적 주체가 아닌 다른 사물 혹은 존재로서의 대타적(對他的) 존재 곧 타자(他者)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적 세계에는 의식 없는 즉자 존재 곧 대상 사물, (나와 타인들로 구성되는) 의식적 주체들, 그리고 의식과 존재가 일치하는 완전한 존재로 설정되어 있지만 인간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즉대자적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는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번역을 주의해서 검토해보자. 왜 사르트르의 이 문장은 타인으로 번역되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타자로 번역된 것일까? 사르트르의 이 문장이 번역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이 문장이 들어있는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문>이 발표된 1944년 이후, 혹은 그러한 사유의 배경이 된의 『존재와 무』가 발간된 1943년 이후의 일일 수밖에 없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타자’는 물론 ‘존재와 무’라는 번역 자체가 당시의 한국인들에 의해서 번역된 용어들이기보다는 일본인들에 의해 이미 번역된 용어를 우리말 음가(音價)로 읽은 것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도 사르트르의 이 글들이 번역된 것은 아마도 2차 대전 종전 후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른바 ‘언어의 사회성’에 의해 일단 어떤 의미로 고정된 단어 혹은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거나 혹은 번역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었을 것이므로 당시의 일본인들 혹은 한국인들은 분명히 이미 존재하는 당시 철학계의 관용어들을 사용하여 이 용어들을 번역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어의 les autres에 해당되는 용어는 메이지 시대에 이미 확정된 하나의 의미, 곧 ‘타인들’(혹은 같은 의미를 갖는 ‘타자들’)밖에는 없었을 것이므로, 이 문장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히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로 번역되었다(한국어에서는 ‘분명히 단복수를 적시하지 않으면, 의미상의 혼동이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단복수의 구분 없이 단수로 적는다). 그리고 그 이후 1950~1960년대가 되자, 이른바 ‘프랑스현대철학자들’이 등장하여 프랑스어 autre에 그때까지 프랑스어에서조차 명백히 분절되어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의미, 곧 ‘타자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오늘 현대 한국어로 프랑스철학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차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1800년대 후반에 일본어로 번역된 프랑스어 autre에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난 일군의 새로운 프랑스철학자들이 이전의 프랑스어 혹은 철학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의미를 부가하였으므로, 여전히 1800년대 후반에 메이지 시대의 일본학자들이 만든 용어들로 번역한 오늘날 한국의 철학용어들이 그 새로운 의미를 반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의 ‘타자’ 개념 번역의 경우는 이전의 단순한 ‘다른 것’ 혹은 ‘다른 사람’이라는 주체 중심의 철학관을 넘어서는 곳에 그 근본 의미가 있으므로,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 앞에 놓여진 선택은 전혀 새로운 개념을 만들거나, 기존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하는 것 사이에 존재했다. 이들은 선택은 후자였는데, 아마도 이는 준거가 될 현대프랑스철학자들 자신이 어떤 새로운 용어를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용어 autre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했던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들 역시 기존 autre의 번역어인 ‘타자’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한 것으로 보인다.



6.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
 
이제까지의 논의를 간략히 정리해보자. 랭보와 사르트르와 현대프랑스철학자들의 세 경우 모두, 현대 한국어에서 나타나는 의미 해독상의 혼동은 타자(他者)라는 용어가 ‘다른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을 지칭할 때도 ‘타자’라는 용어를 무리없이 사용할 수 있던 메이지 시대의 번역 관행을 원어인 프랑스어에서 해당 용어에 상당한 의미변화가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무반성적으로 따름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적절한 주의와 변용을 거쳤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 부주의한 사례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는 실로 대한민국 학문의 인식가능 조건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지층, 곧 지식고고학적 지층의 차원에서 면밀히 검토해야 할 보다 깊은 문제의 표면적 드러남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학문의 메이지 효과’란 ‘대한민국의 학문 담론에서 일본 메이지 시대 번역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인식론적 효과’를 말하는 것으로, 단적으로 메이지 시대 일본 번역어가 없었다면, 혹은 이러한 번역어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거쳤다면, 생겨나지 않거나 혹은 적어도 다른 방식의 담론 효과를 불러일으겼을 담론 현상을 지칭한다.
 
 
몇 가지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동일한 영어 truth가 일본어에서 학문과 사상의 영역에서는 진리(眞理)로, 일상 및 예술의 경우에는 진실(眞實)로 번역됨으로써(동일한 구분을 따라 번역된 다른 예로는 비판(批判)/비평(批評) 및 근대(近代)/모더니즘 등을 들 수 있다) 원어에는 없었던 특이한 효과를 현대 일본어 및 한국어에서 발생시키게 된다. 이 글에서는 단지 타인과 타자라는 두 용어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이상의 검토 작업은 주체(主體), 객체(客體), 주관(主觀), 객관(客觀), 절대(絶對), 상대(相對), 철학(哲學), 이성(理性), 사회(社會), 민족(民族), 과학(科學), 예술(藝術), 진선미(眞善美), 자유(自由), 보편성(普遍性), 합리성(合理性), 근대성(近代性) 등 우리의 일상과 학문을 지배하는 글자 그대로 ‘무수한’ 메이지 개념들에 대한 개념사적이고 계보학적인 분석의 한 사례에 불과할 뿐이다.
 
7. 신한어(新漢語) - 근대 일본식 한자어


대략 19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하여 오늘날의 이른바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중심은 중국으로부터 서구 열강으로 과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 중국중심의 질서에는 존재하지 않던 다양한 서구의 개념들이 동아시아로 유입되게 되는데, 이러한 유입 곧 번역의 과정은 대부분 중국 및 일본의 학자들에 의해 수행된다. 가령 현대 한국어의 경우, 오늘날 사용되는 서구어 번역 한자어는 대략 중국ㆍ일본ㆍ조선에서 번역된 한자어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특히 이 중에서 근대 일본계 한자어의 영향력은 막강한 위치를 차지한다. 가령 박영섭의 연구에 따르면 1987년 당시 한국어에서 사용되는 한자어 중 90% 이상이 중국 고전에서 수용된 근대 이전의 것들이나, 학술어 등 전문어의 경우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일본계 근대 한자어가 무려 82%에 달한다. 일본이 개발한 이 근대 한자어를 일본에서는 새로운 한자어 곧 신한어(新漢語) 혹은 신문명어(新文明語), 화제한어(和製漢語)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신사(新詞)라고 부르는데, 이 글에서는 ‘신한어’로 통칭하고자 한다.
 
8. 메이지 지식인들의 조어(造語) 방식
 
메이지 시기의 일본 학자들은 유학을 가거나 서양학문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사서삼경에 정통한 유교적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다양한 경로로 서양학문을 접한 후, 서양의 용어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명사, 특히 관념적 곧 대부분의 학문적 개념을 한자로 적는 일본어의 특성상 서양의 제반 개념을 자신들의 새로운 조어(造語) 방식을 통해 새롭게 한자어로 번역하게 된다. 심재기에 따르면, 일본인들의 신한어 조어 방식은 대략 자주(自主), 수학(數學), 전기(電氣)처럼 근대 중국에서 만든 것을 일본이 습용한 한자어, 자유(自由), 철학(哲學), 기차(汽車)처럼 일본이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만든 한자로 양분하는데, 현대 한국어의 경우에는 이 외에도 시장(市場, いちば), 역할(役割, やくわり), 호명(呼名, よびな)처럼 일본에서는 훈독(訓讀)하여 한자어가 아니나 한국에서는 음독(音讀)하여 한자어가 된 것을 추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관념적 개념어의 대부분을 한자로 표기하는 일본어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대부분이 속하는 경우이지만, 기존 중국의 어휘를 일본인들이 습용하여 서구어의 번역에 사용한 경우는 다음처럼 구분 가능하다. 우선 대학(大學)의 경우처럼 이미 존재하고 있던 중국어에 변경을 가하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university의 번역어로 사용하는 방식, 법칙(法則)처럼 기존하는 법(法)과 칙(則)을 조합하여 rule의 번역어로 사용하는 방식, 문학(文學)의 경우처럼 전혀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 literature의 번역어로 사용하는 방식. 이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방식은 물론 두번째와 세번째 방식이다.
 
9. ‘동아시아’ 사유의 근본조건 - 메이지 신한어
 
한편 이러한 일본계 신한어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면서 중국의 신지식인들에 의해, 당시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특히 학문적 영역에서, 현대 중국어에까지 대량으로 유입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 이래 다양한 침탈 과정을 통해 이러한 신한어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동아시아 전반(어떤 면에서는 ‘동아시아’ 발명의 주체가 바로 이러한 담론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이러는 사실상 글자 그대로 ‘노가다’ 판에서 ‘야구’를 거쳐 특히 ‘학문’에 이르는 전면적 수용 현상을 가져왔다. 이는 사실상 일제 및 이어지는 이후의 미국중심의 학문 담론과 함께, 생활세계의 ‘식민화’는 물론, 대한민국 학문 담론의 근본적인 인식가능 조건을 구성하는 결정적 사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0. 새로운 ‘보편학’을 위한 전제조건


오늘 우리가 우리의 참다운 보편학을 구성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우리 학문의 인식가능 조건, 토대에 대한 면밀하고도 세심한 분석은 참으로 그것을 위한 선결과제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과거 우리의 (일본을 통한) 서양 사상 유입의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에 대한 오늘의 주체적 수용 및 미래의 자생적인 우리 학문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 작업은 오늘 우리의 인식을 -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메이지 시대 번역어에 대한 개념사적ㆍ계보학적 검토 작업이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현대 학문의 인식론적 근본 조건을 규정하고 있는 일본 메이지 시기의 신한어들을 우리로부터 타자화내지는 외화시킴으로써 이들 용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을 가능케하는 동시에, 이러한 용어가 우리나라에 수입되면서 어떻게 오늘 우리의 인식을 규정하였는가를 이해하게 함으로써,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용어들을 새롭게 전유, 해석하여 우리의 고유한 학문적, 일상적 용어를 창출하고 궁극적으로는 오늘 우리의 새로운 ‘보편학’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