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24.

잠언 05


 
Satyricon, 1998
 




0. 가장 비극적인 삶이란 '나만의 질문'을 아직 발명하지 못한 자의 삶이다.


1. 철학이란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게 당연하게 인식되는) '틀'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적 검토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며,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 학문이란, 공부란 내가 배우는 이 공부와 나의 일상 생활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다. 달리 말해, 공부란 '내가 배우는 공부의 내용, 공부를 하며 내게 드는 생각, 그리고 지금 내 상황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 사이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이란 교육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다.


3.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철학에 있어 유일한 타당한 시제는 오직 '현재'이며, 그 주어가 어떤 경우에도 '나'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4. 학문이란, 가령 칸트의 책이란, 설령 독일인이 독일어로 그 책을 읽는 경우에조차, 하나의 외국어이다. 학문이란 하나의 엄밀한 약속 체계, 규칙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문을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외국어 학습과 똑같이, 적어도 그 최초의 단계에 있어서는 상당한 양의 학습과 암기가 요구된다. 오랜 시간 그 언어의 단어, 문법, 용례를 지루하지만 꾸준히 외우고 습득한 후에야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고,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바와 달리, 적어도 그 최초의 시기에는 꾸준한 암기와 이해, 습득이 요구될 뿐,  토론할 바가 전혀 없다.


교육은 기계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가령 내가 라틴어를, 물리학을 배우고자 한다면, 상당한 시간을 성실히 라틴어와 물리학의 단어와 개념, 문법과 규칙, 용례와 공리 들을 외우고 습득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두 공부는 공히 토론할 일이 전혀 없다. 다만 라틴어와 물리학의 학습은 그 단계가 깊어지면서 점차로 그 성격이 달라갈라지는데, 전자는 여전히 이해할 일이 거의 없고 다만 그 용례들을 찬찬히 매 경우마다 살펴야 하는 반면, 후자는 자신이 습득한 개념들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된다. 철학은 물론 후자에 더 가깝지만, 비트겐슈타인이 잘 보여준 것처럼, 전자의 특성도 가지고 있다.


물론 이상의 대비는 방편적인 것일 뿐 실제로 두 가지는 겹친다(물론 교육의 지향점은 민주주의적 인간의 확보이다). 이상의 요지를 종합하면 교육이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작동되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일이다.


5. 푸코의 최종적 관심 중 하나는 '아예 처음부터 자격이 박탈된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에 자격을 부여하는 '정당화legitimation'의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삶의 혹은 논의의 어느 과정, 어떤 시점으로부터 자격을 박탈당한 존재가 아니라, 아예 게임의 시작, 논의의 맨처음부터 자격 자체가 없는 존재로 가정되어 있다는 점이다(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다).


푸코가 찾아낸 해결책은 자격의 부여와 박탈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규칙들의 집합으로서의 인식론적 조건, 곧 장 자체가 힘 관계의 놀이에 의해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그 절대성, 보편성, 필연성, 곧 변경불가능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여 게임의 규칙 자체를 변형시키는 것, 곧 다른 게임을 하는 것이다.


정치적이든 심리적이든, 자격(과 그 박탈), 자격 있음과 없음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기준의 문제, 곧 정당성의 근거라는 문제를 낳게 되고, 이는 곧 정당화 논리의 문제가 된다. 정당화가 정당성을 생산하는 하나의 장치, 메커니즘인 것과 똑 같이, 합리화는 합리성을 생산하는 하나의 장치, 메커니즘이며, 통치화는 통치성을 생산하는 하나의 장치, 메커니즘이다. 이렇게 생산된 정당성, 합리성, 통치성이 곧 (이른바 주어진 시점의 한 사회에 의해 보편적 정상적 도덕적인 것으로 가정되는) 품행good conduct이다. 이 이른바 '품행'은 자신이 규정하는 '올바른' 품행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통제하는 기준, 곧 박탈-기계이다. 따라서 이른바 품행은 개인의 내외면 모두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전면적으로 정당화하고, 이는 개인에게 죄책감, 열등감, 양심의 가책 등의 양상 아래 내면화된다. 따라서 푸코의 통치성 논의가 목표로 하는 타겟은 이러한 기존의 정당화, 합리화, 통치화의 품행에 대적하는 새로운 대항품행(counter-conduct)의 제공이다.


6. 마르크스에게는 헤겔적 합리성 이외의 합리성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탈신화화화 곧 합리화 과정을 설정한 베버는 이러한 합리화 과정의 방식이 시대와 지역, 상황에 따라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합리화의 결과로 탄생하는 합리성의 개수도 복수(復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베버는 이러한 통찰을 서구의 특수성을 해명하는 문제(왜 다른 문명들도 분명히 서구가 오늘날 발전시킨 여러가지 근대적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초기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오직 서구만이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었는가?)로 전화시킴으로써 자신의 탁월한 통찰을 서구 내로 한정시키면서, 서구적 보편주의의 폭력을 용인, 심지어 조장하는 이론의 탄생에 기여하고 말았다(오늘날 헌팅턴도 거의 완벽히 동일한 길을 걷고 있으나, 차이점은 베버가 이를 아마도 반쯤은 무의식적 상태에서 행한 반면, 헌팅턴은 이를 완벽히 의식적인 상태에서 선택했다는 점이다).


7. (사랑의) 나눔에 인색한 사람은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8. 많은 경우 사람들은 스타일, 취향, 관점의 차이를 '도덕성'의 차이로 보곤 한다.


9. 사람들은 푸코를 - 그들이 마르크스를 이미 그렇게 보았듯이 - '도덕주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오류이자, 누군가가 푸코와 마르크스의 해석에서 범할 수 있는 최대의 오류이다.


10. 어떤 말이든 어떤 맥락, 어떤 상황에 대입시켜 설명하고자 시도해 보라.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적절한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이 합리성이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11.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알 수는 없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옳다. 더 작은 존재가 더 큰 존재를 이해할 수 없듯이.


12. 삶을 살고 철학을 하는데 그날 그날 몸과 마음의 컨디션 조절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마음이 피폐한 자, 자기 몸의 소리를 못 듣는 자는 아직 철학을 행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13. 지금 옳은가, 잘하고 있는가, 잘 살고 있는가가 관건이 아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그녀가 지금 올바른 방향을 향해가고 있는가, 올바른 길 위에 서있는가의 여부이다.


한 사람이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녀가 참으로 올바른 유일한 길, 곧 스스로에게 다가가는 길 위에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만이 중요할 뿐이라는 융의 말은 참으로 탁월한 통찰이다. 지금의 고통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 위에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이다.


14. 존 로크의 <관용에 관한 편지>(Epistola de Tolerantia, 1689)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게으름을 '스스로가 자신의 타락과 파멸을 재촉하는 것이지만 남에게 특별한 피해를 따로 끼치지는 않으므로' 관용의 대상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이전 전통적 그리스도교에서는 게으름을 7대 죄악 중 하나로 간주하여 놔두지 않았다. 이제 게으름이 관용의 대상, 무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15. 어떤 개인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그 개인일 수밖에 없다, 라는 로크의 생각은 밀에 도달하여 이른바 '자유주의'(liberalism)라는 형식으로 확고히 정착되는데, 그 핵심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정하겠다, 곧 남이 정하도록 놔두지 않겠다, 라는 '간섭 배제 원칙'으로 나아간다.


16. 오늘 푸코는 자유주의를 '내가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통치당하고 있지 않은가를 끊임없이 묻는 체제'로 정의한다. 푸코는 이로써 자유주의의 규칙, 나아가 정치학의 규칙을 완전히 바꾼 것인데, 물음을 묻는 주체가 더 이상 통치자도, 심지어는 보편적 인간도 아닌, 피통치자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푸코의 피통치자는 '네가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결단을 내린 주체이다.


나아가 푸코는, 이런 측면에서, 결정적 한 걸음을 더 내딛는데, 그것은 '인간이란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이른바 '보편적' 형식을 특정 시대, 특정 지역의, 특정인들이 특정 사건을 거쳐 구성해낸 역사적 산물임을 밝혀낸 일이다. 곧, 누구나 해야 하는 보편적 인간상, 곧 내가 따라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이란 없다,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란 없다. 인간 일반에게 무엇이 좋은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설령 누군가가 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해도 내가 그거을 따라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으며, 그가 나에게 그것의 실행을 강제할 수도 없다. 결국 이는 곧 '내가 무엇을 마땅히 해야 하는지 내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만약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일 수밖에 없다'는 원칙의 천명이다.


17. 에픽테토스가 이 세상에는 당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생각과 당신을 노예로 만드는 생각 둘두 가지밖에는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의미에서 보면 정확히 푸코가 말하는 '사유의 담론 효과'에 대한 언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부와 관련하여 이렇게도 말해 볼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당신을 공부하게 만드는 생각과 당신이 공부하지 않게 만드는 생각 두 가지밖에는 없다.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전자의 생각을 하는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실하고 차분하게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고, 특히나 후자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진지하고 성실한 공부로부터 멀어진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당신을 공부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달리 말하면, 당신이 공부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드는, 혹은 공부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들인가?


18. 니체는 역사적 감각의 결여가 이류 학자들의 공통적 특징이라고 말했다(이들은 자신이 배우고 알게 된 특정시대, 특정 학파의 최종 버전 혹은 가장 최근 버전이 그것의 영구불변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 자체'의 본질적 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 지리적 감각의 결여가 이류학자들의 공통적 특징이다.


19. 인간은 대개의 경우 자신이 파괴하고 싶어하는 사고방식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사고한다.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동일한 사고의 구조를 유지한 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치를 바꾸는 것, 곧 같은 구조 내에서 자신이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만큼 자신의 적으로부터 영향받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나와 나의 적은 같은 구조가 낳은 두 명의 쌍둥이 자매들이다. 누가 나의 적이 되는가? 나와 같은 생각의 '틀'을 공유한 자들만이. 따라서 차라리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 보아야만 할 것이다. 왜 저 사람은 나의 적이 되었을까? 나의 적은 나의 분신이다. 나의 적이, 나다.


20. 당신 삶을 두 개로 가를 결정적 질문 하나(경솔하게 대답하지 말고, 차분하게 잘 생각해보라) - 당신은 혼자 있을 때, 혼자 있는가?


21. '현실'과 '진실'을 기준으로 사는 삶이란, 자신에게 어리석은 것인 만큼, 타인들에게는 끔찍한 것이다. 그녀는 현실과 진실을 - 이른바 현실과 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해석이 아닌 - 현실 자체, 진실 자체, 곧 사실 자체로 생각한다. 그녀는 '해석권력'(power of interpretation)이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2. 니체의 매우 흥미로운 생각 - "무지하고 비겁한 다수로부터 지혜롭고 용기 있는 소수를 보호해야 한다."


23. 함부로 말을 내뱉으며, 그것이 재치있고 소신있는 행동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24. 철학을 비판한다 - 자신이 철학을 비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철학을 자신의 '외부'에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2013.04.-20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