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7.

잠언 18



0.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못하면 자신의 인격적 성숙이 불가능하듯, 자신이 사람하는 사람에 대한 근본적 실망을 느끼지 못하면 자신의 삶이 시작되지 않는다.



1. 복음 1 - 내가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없듯이, 당신도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



2. 그렇게 적당히 타협적으로 징징대지 마라. 징징대려면 확실히 철저하고 전적으로 징징대거나, 아니면, 남탓 상황탓 하지 말고, 고개를 똑 바로 들고 네 인생을 살아라!



3. 기대에의 부응 - 자기 중심주의와 담론 효과가 만나면 모든 것을 관계망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관계망상은 자신과는 관계 없는 어떤 하나의 사실을 자신과의 관계 하에서만 해석하는 질병이다. 이건 분명히 나 들으라고 한 말이야, 이건 나 보라고 쓴 거야 운운 ... 이는 인식론적 자기 중심주의의 극단적 버전이다. 하지만 이는 실상 정도의 차이일 뿐 망상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일반적인 인간의 일반적 경향인데, 가령 내가 이곳에 올리는 글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 느끼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들에게는 내가 어떤 경우에도 특정 개인을 겨냥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나와 가까운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내게 '버림 받으려면' 남의 뒷얘기를 내 앞에서 하면 된다는 사실을 얘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여하튼 이 글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쓰는 글이다. 이 글이 '나'를 겨냥하여 쓴 것이라 생각되는가? 그렇다, 이 글은 바로 당신을 겨냥하여, 그리고 오직 당신만을 겨냥하여 쓴 글, 당신에게만 해당되는 글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관계망상이 실로 얼마나 황당한 자기 중심주의의 병적 형식인가를 알 수 있다.


4.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분석이 다만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인식은 실로 타자에 대한 모든 대상화, 주체화 과정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다. 청년 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권고와 질타는 실로 '청년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독백'이다.


그리고 이는 이후의 푸코가 깨달은 바로 그대로 기성세대의 담론 권력, 곧 자기 정당화 장치의 핵심적 일부를 이룬다.


나는 청년 세대가 아니며, 학벌부터 계급적 기반까지 그들과 모든 것이 다르고, 실상 그들을 잘 알지도 못한다. 기성세대의 급선무는 그들을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들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것, 자기 생각으로, 제멋대로 청년들의 삶을 규정짓지 않는 것이다.


나이와도 상관없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로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상상과 실천은 상대에 대한 경청과 정직한 내 생각의 토로, 그리고 서로의 생각에 대한 토론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실천 방안의 하나로 나는 모든 정치적 제도적 개혁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기 정직의 실천을 들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래, 어차피 남들은 속여도 된다, 그러나 나를 속이지는 말자! 우리나라에는 실로 데카르트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없다는 것, 이것이 근본문제이다. 자생적 데카르트의 탄생이 개인주의와 정당정치와 민주주의의 선결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묻자. 과연 우리에게는 내가 없는가? 과연 그런가? 이 부족한 나, 못난 나, 지지고 볶는 내가 이미 완전한 충만한 나의 또 다른 형식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더 나아가 관념적으로 완전한 이상보다 현실 안에서 불완전한 오늘의 내가 이미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서구가 17세기에 도달한 데카르트적 근대성이 한반도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어떤 모델도 비교대상도 없으며, 따라서 나 자신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의 삶은 내가 만들어나갈 바로 그 삶이라고, 서구적 근대성은 서구의 근대성일 뿐이고, 근본적으로는 근대성 자체가 서구의 지배를 위해 작동하는 완벽한 지배의 장치-기계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데카르트에게서 나는 좋은 부분을 배울 것이되, 나는 데카르트가 아니고 따라서, 그의 삶을 존경하고 존경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으로 나의 삶을 살 뿐, 데카르트는 내가 따르고 모방해야 할 내 삶의 모델이 아니라는 이 생각이야말로 참으로 데카르트적인 생각이 아니겠는가? 나는 데카르트가 나의 이런 생각을 지지하고 응원해주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설령 데카르트가 나의 이런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데카르트를 존중하고 배우되 동시에 무시하고 경멸하며 데카르트를 가르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믿는 바대로, 그리고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배우고 타인을 경청하며, 어떤 경우에도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대상화/주체화의 동시적, 상관적 과정'이라 일컫는 것이다.



5. 내가 어떤 누구에게도 조종당하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어떤 누구도 조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6. 즐거운 자기 긍정 -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7. 복음 2 - 네가 나의 구원을 위해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도 너의 구원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8. "모든 사람들이 고대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 또는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특히 자기 자신을." -  프리드리히 슐레겔



9. 한국사회의 인식가능조건 곧 에피스테메는 겉다르고 속다른 이중성이다. 다만 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이 이중적이라면 그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아가 이중성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본다. 다 이중적일만 하니까 이중적이 된 것이 아닐까? 실로 생각과 말과 삶의 분리라는 이 이중성의 태도는 우리시대  인식과 실천, 생각과 삶의 가능 조건이다.


10. 내적 현실의 외적 대상을 향한 투사










11. "현상이 실체를 가리듯, 실체가 현상을 가린다." - 선림고경총서



12. 도덕주의적 인격주의는 지적 현학주의를 훨씬 능가하는 악을 생산한다.



13. 대화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일이지만, 버림 받는다.



14. 현실이라는 이미지 - 어떤 인간도 현실 자체, 현실 전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실이란 내가 보는 현실, 내가 느끼는 현실, 내게 당연하게 보이는 현실이다. 따라서 모든 '현실'은 현실에 대한 누군가의 표상, 파편적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관념이 현실을 가리듯이, 이 '현실'이 현실을 가린다.



15. '질서'란 늘 이미 그 뒤에 존재론적 위계를 전제하는 사물의 배치행위, 곧 권력 정당화의 장치이다.



16. "토마소 캄파넬라에 의하면 세상은 사악하거나, 죄악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것도 적재적소에 위치하지 않고, 모든 게 비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에는 개인적 자유, 우연 그리고 개별 사항들이 너무 많은 반면 질서가 너무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관리되어야 하고, 모든 사항들은 제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캄파넬라의 사고 속에는 스페인의 복고주의 외에도 분명히 중세의 특징이 엿보입니다. 가령 여러분, 조토의 벽화에 묘사된 위대한 질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대상들은 각자의 처지에 상응하는 대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등급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질서를 생각해 보세요. 고립된 모든 존재들은 단테의 작품에서는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이라는 정해진 공간에 소속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스콜라 철학의 질서 체계를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제반 사고는 마치 건축물의 부속품처럼 본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역시 상기한 내용과 유사합니다. 작품 내에서 모든 것을 질서 잡고 연결시켜 주는 것은 지상에 머물고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질서는 개별적으로 파고 들어 가서, 모든 개개인들의 삶을 규정합니다."(326쪽)

- 에른스트 블로흐, <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1950-1956, 1962-1963)>(1977), 열린 책들, 2008.



17.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인식의 내용은 인식대상보다는 차라리 인식주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내가 보는 세계는 실상 세계보다는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세계에 대한 연구는 나라는 인식주체에 대한 연구가 된다. 신학과 형이상학은 물론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이 인간학이고, 인간의 인식이며, 인간과학이라는 칸트, 포이에르바흐, 니체, 푸코의 말은 이런 뜻이다.



18. 사람들이 너의 열등함이라 부르는 것을 열등함이 아닌 너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건, 나아가 자긍심으로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19. 들뢰즈는 '오리엔탈리스트'가 아닐까?



20. 한문과 일본어를 모르면 21세기 대한민국의 '국학'은 태어나지 않는다.



21. 효도와 마마보이는 실로 차이가 미묘하여 거의 대부분의 경우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22.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와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북한의 구호는 주체사상이 성리학의 마르크스주의적 변용, 곧 '충효 마르크스주의'임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들이다.



23.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은 한 마디로 전망의 부재, 곧 철학의 부재이다!



24. 산티아고 순례길은 아랍과 유대인과 스페인인이 공존하던 70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을 쥐기 위한 왕권과 가톨릭의 배제 기능, 곧 이른바 가톨릭 '스페인'의 정체성 형성을 위한 주체화, 자기의 테크놀로지 장치이다.



25. 철학은 볼성상 불온한 것이다. 혹은 불온하지 않은 철학은 체제순응을 위한 자기 정당화의 논리이다.


26. "말은 거짓말을 해도, 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2015.11.4.-2015.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