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8.
노자의 윤리학
요즘 푸코와 노자 그리고 해월을 강의하고 있다. 이는 고백컨대, 나의 실존적인 구원의 여정이다. 나는 노자가 없었다면, 그러니까 노자를 읽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나는 기원전 5-2세기 경 어느 땐인가 남중국의 어느 곳에 살았던 '노자'(늙은 선생)라 불리는 한 사람 혹은 여러 명의 저자들이 없었다면, 오늘 미쳤거나 죽었을 것이다.
내가 노자로서 하려고 하는 일은 노자와 불교, 그리고 선불교와 수운 혹은 해월의 사상에 입각하여, 서양 철학사 전체를 다시 해석하는 것이다. 이 때 서양 철학 내의 지렛대는 니체와 푸코 혹은 들뢰즈가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선불교 혹은 노자 사상에 입각한 현대적인 반 파시스트 사회 혹은 정치 윤리학'을 설립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정리하건대, 일찍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땅의 생성론이자 과정 철학, 가히 참다운 페미니즘이자 휴머니즘이며, 모든 불교와 이른바 현금의 '포스트' 담론을 꿰뚫는 철학 혹은 사상으로서의 노자의 윤리학은 우선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의 그것이다. 이 때의 무위, 자연은 사람들이 고전 중국어는 문법적 기초의 기초도 모른 채 근대 일본어로 생각하는 그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자연(nature)으로 도피한다."는 그런 개소리가 아니다.
우선 무위는 노자 본문을 보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헛된 욕망에 사로 잡힌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위무위(爲無爲)이다. 또한 고대 중국어의 自然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어 번역어 '자연'(nature)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게' 혹은 '저절로'라는 부사이다! 문헌학 혹은 언어학이 없이는, 철학 혹은 학문이 없다(there's no philosophy without philology)!
우선, 그리하여, 오늘 한 마디만 부연해 본다면, 쉽게 말해, 내가 이해하는 노자 윤리학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일을 글친 것이 내가 해야할 어떤 일을 하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자는 달리 말한다. 내가 일을 그르친 것은 어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굳이 할 필요가 없었던 어떤 불필요한 일을 욕망 혹은 객기에 못 이겨 굳이 힘들게 몸 버리고 돈 들이며 힘들여 찾아서 해서 그런 것이라고.
이는 가령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일을 그르쳤을 때 나의 자아 혹은 자아 혹은 자존심은 그 일을 만회하기 위하여 어떤 방책을 도모하려 한다. 그 일을 우선 일어난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 일을 어떻게든 새로운 인위 혹은 작위(이는 중국 철학에서 반드시 나쁜 의미인 것은 아니다)로 무마해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생각해보자. 바로 노자에 나오는 그 비유 그대로, 진흙이 섞인 물이, 그러니까 진흙탕물이 흔들리고 휘저어져서 속이 보이지 않고 물과 진흙이 잔 속에서 뱅뱅 소용돌이를 치며 돈다. 그때 물을 가라 앉히려는 나의 모든 시도는, 가령 젓가락으로 물을 좀더 조용히 저어보거나 혹은 잔을 천천히 흔드는 식의 시도는, 오히려 가라앉으려는 물의 파동을 더욱 키우고 확대시키는 일일 뿐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어떤 행동 곧 인위로 물의 파동을 가라 앉히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곧 보다 정확히는 물을 흔들어 휘젓고 싶은 나의 마음을 달래며, 그 물이 스스로 가라앉아 자기 자신을 정화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병이 깊을 때 그 병을 고치려는 우리의 시도는 대개 그 병의 또 다른 증상이며, 결국 병을 더 악화시킨다.
그리하여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길은 넓고 편안하며 밝은데, 사람들은 좁고 어둡고 험난한 길을 더 좋아한다. 누가 자신의 기(氣) 곧 몸과 마음을 다스려 스스로를 쉬게 하고 안정케 하며, 누가 자신을 흐리게 만들어 자신과 다른 이들 그리고 세상 만물이 스스로 맑아지게 할 것이며, 누가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을 것인가, 라고. 그리하여 노자 윤리학의 핵심적 명제는 "세상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돕고, 감히 무엇을 행한다고 하지 않는다."는 말로 정리 가능하다.
2010.07.
2012. 5. 3.
아줌마를 위한 철학책 한 권
아줌마를 위한 철학 책 한 권
내 평생의 소원 중 하나는 ‘아줌마를 위한 철학 책 한 권’을 써보는 것이다. 이런 나의 소망은 너무 어렵지 않고 쉽게 쓰여 있어서 (우리 어머니와 같은) ‘아줌마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책, 또한 그 결과로 그것을 읽는 분들의 일상생활에 정말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책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나의 소망은 아마도 내가 철학을 전공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철학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몇몇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철학 개론’ 같은 과목을 가르쳐 보면서, 나는 나의 고등학생 시절이나 지금이나 철학에 대한 일반인들 혹은 학생들의 일반적 인식은 그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우리가 가진 철학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철학은 심오한 학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위대한 명저라는 철학 책을 읽어도 일단 이해가 되지 않는다(워낙 심오하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열심히 읽어 이해가 됐다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 그러니 철학은 나의 일상생활이나 고민과는 상관없는 위대한 철인들의 엄숙한 학문, 한편 반대로 (혹은 동시에) 먹고 살 걱정 없는 배부른 사람들의 말장난이 아닐까?
어느새 벌써 10년 훨씬 이상을 ‘철학’을 공부해온 나로서는 이 이야기들이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타당해 보이는 점은 현재 우리나라에는 오늘 우리의 고민을 우리의 언어로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오늘 우리의 철학이 부재해 있다는 측면이고, 그렇지 않아 보이는 측면은 ‘오늘 우리가 그런 철학을 못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모든 철학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의 의무를 - 일단 자신의 내적 필연성을 성실히 따른다는 전제 아래에서 - 두 가지로 생각하는데, 그 한 가지는 자기가 속한 학파 (혹은 종파) 이외의 책들을 성실히 읽는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자기 전공 분야의 전문 지식을 비전공인들(즉 마음이 열리고 성실히 배워보고자 하는 동시대의 일반인들 혹은 동료들)이 읽어서 이해가 될 수 있는 용어로 풀어보고자 최대한 노력하는 자세가 그것이다. 내가 언젠가 쓰려는 ‘아줌마를 위한 철학 책 한 권’은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정향된 책이다. 이러한 의도에는 철학이 단순히 일상과 무관한 지식인들의 엄숙한 학문 혹은 말장난만은 아니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철학이란 무엇일까? 우선 내가 수많은 이른바 [철학개론]들을 읽으며 발견한 사실 중 하나는 모든 [철학개론]은 실상 항상 [(어떤 입장에서 바라본) 철학개론]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보통 제목에는 그렇게 써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마치 [철학에세이], [철학의 기초이론]이나 [철학에 이르는 길]에서처럼, 그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만이 유일한 철학에 대한 올바른 정의로 생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왜냐하면 철학이란 바로 그 학문에 대한 정의 자체의 새로운 규정에서 시작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유물론 철학의 기초이론]이란 제목처럼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밝혀주는 것이 책을 사보는 초심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낫다고 본다).
철학은 한자어 哲學의 우리말 독음이다. 그러나 이 哲學이란 한자어는 중국어가 아니라, 19세기 일본의 철학자 니시 아마네(西周) 씨가 자신의 책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쓴 말이다. 따라서 철학은 우선 일본어 ‘테츠가쿠’(哲學)이다 - 1910년 이전 조선에 서구적 의미의 철학이란 개념은 없다. 哲學은 眞理, 理性, 科學, 信仰, 宗敎와 같은 20세기 이후 중국, 한국의 대부분의 개념어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어이다. 이것이 바로 식민(植民)이요, 학문의 이식(移植)이다.
물론 테츠가쿠는 그리스어 philosophia의 번역이다. 이는 ‘지식 혹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이 때의 소피아는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한 것,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 즉 이른바 ‘진리’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결코 영속적이지 않은 우리 일상의 고민의 해결에 유용한 실천적 지식은 학문 혹은 철학으로부터 원칙적으로 제거된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보편명사는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갖는 고유명사다.
나는 철학에 대한 정의 혹은 조건 지움의 문제에 대해 김용옥 씨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의 입장은 [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통나무, 1986)에 나타나 있다. 나는 그가 철학을 (그 탐구의 대상 혹은 내용이 아닌) 탐구의 방법 그 자체로 규정하고 있어서, 기존의 정의들이 갖던 편협성을 감소시킨다고 본다. 그는 이 책에서 칸트 씨의 말을 인용한다. 칸트 씨는 자신의 수업 시간 맨 처음을 항상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결코 저에게 철학(die Philosophie)을 배울 수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은 여러분과 똑 같은 어떤 한 사람이 철학하는 것(philosophieren)만을 보실 수 있을 뿐입니다.”
위의 두 독일어 중 앞의 것은 명사이고, 뒤의 것은 동사이다. 이 말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해 본다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 타인의 사고 행위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산물(철학, 혹은 소니 워크맨)보다는 - 그들이 그것을 만든 사고방식(철학함, 혹은 과학/기술) 그 자체라는 말이다. 철학은 철학함이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놀랐던 것은 내가 배워본 서구 철학의 ‘이성’이 명사적 측면보다는 동사적 측면이 더 중시된다는 점이었다. 즉 그것은 명사 the Reason(이성)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동사 to reason(이성적으로 추리/추론하다)였다는 말이다. 철학함이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에 대한 무비판적 암기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철학함을 이렇게 규정한다.
철학함이란 내가 주어진 전제의 안팎에서 그 전제의 근거를 짚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다.
‘근거를 짚어가며’란 곧 왜를 묻는 작업이다. 모든 언명에는 드러난 혹은 암묵적으로 가정된 전제가 있다. 그 전제가 주어진 주장의 타당성을 보증한다. 그것은 그 언명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항상 가정된다. 그러나 철학의 존재 근거는 바로 이러한 자연과 당연에 대한 느낌과 이해가 개인과 사회에 따라 언제나 항상 다르다, 즉 너의 자연/당연과 나의 자연/당연이 항상 현실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에 기반해 있다.
결국 철학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영원한 질문들이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당연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이란 무엇인가? ...
보통 철학에서는 진리를 ‘참인 것으로 증명된 믿음’(Truth is true justified belief)으로 본다. 문제는 오직 어떠한 방식으로 그것이 증명되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위의 진리 규정을 따른다면, 진리 또한 하나의 믿음 혹은 신념이다. 따라서 넓게 말해 개개의 철학들 역시 하나의 신념 혹은 믿음, 즉 하나의 신앙 행위라 볼 수 있다. 물론 철학은 하나의 열린 신앙, 비판적 신앙을 지향한다.
왜냐하면 철학함이란 무엇보다도 자기비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물론 ‘과연 네 생각대로 그럴까?’를 묻지만, 그보다는 더욱 더 ‘과연 내 생각대로 그럴까?’를 물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이 철학함이라는 점에서, 나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전문적 철학 탐구 사이에는 본질적인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다만 정도의 차이, 체계성의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에 대한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나와 내 친구가 카페에 갔다. 나는 친구에게 음료수를 사주기로 마음먹고 이렇게 물어 본다: “야, 내가 사줄게 ... 난 커피, 넌? 너, 홍차 좋아하지? 커피? 홍차?” 당신 같으면 이 경우에 커피와 홍차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나는 커피, 너는 홍차 ... 그러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듯이 인간은 이 질문의 (드러난) 전제에서 벗어나는 것, 즉 콜라를 선택할 수도 있다 - 더구나 우리는 안 먹기를 선택하거나, ‘이 녀석이 평소에 날 안 좋아하더니, 오늘 또 왜 이래? 짜식, 더 싫다’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사주면 먹지, 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철학(함)은 이렇게 주어진 전제의 안팎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박탈 불가능한, 고유한 능력에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물음의 주체는 항상 나다. 이는 내가 생각할 때 칸트의 문제로 나의 문제를사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나의 문제의식으로 나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문제가 아주 시시해 보이지만 그 본질적 구조는 다음과 같은 보다 심오한(?) 질문들과 똑 같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몇 살에 결혼해야 하는가? 동성애는 정상인가? 효도와 자아실현이 상충될 때 나는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가?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신은 있는가? 없는가? 철학은 영원불변하는 것에 대한 지식만을 추구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대답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제시하게 될 모든 대답에는 일정한 나름의 근거와 이유가 있다. 그 주어진 이유들(the Reason)에 대해 왜(why)를 따져가며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철학함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당신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미 언제나 철학적 사고 행위를 항상 해왔다.
물론 이 말은 당신이 직업적 철학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인간이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항상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으려는 경제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면에서, 혹은 최소한 그러한 사고를 지향한다는 면에서, 경제학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숭례문에서 광화문으로 가려면 직진해서 가지, 특별한 다른 볼 일이 없는 한, 동대문이나 서대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와 경제학자의 차이처럼, 당신과 철학자의 차이도 다만 정도상의 차이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철학자이다. 당신의 삶과 고민이 철학의 대상이다.
1996.
윤리 혹은 종교의 문제 -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는가?
* 아래는 1999년이던가 유학중이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한 한인교회에서 발표한 글이다.
나는 물론 종교가 없으나, 그 교회에 학술부장으로 있던, 역시 철학과 박사과정에 있던, 친구의 제안으로 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이다. 나의 생각과 그리스도 교 사이의 공통점, 친연성을 발견해 보려 한 글이다. 언젠가 불교에 대해서도 이런 글을 쓸 날이 오면 좋겠다. 지금 이 글을 적으며 정확한 날짜를 보니 1999년 4월 4일에 발표한 글인데, 꼭 9년 전의 글이다.
뱀발. 그리고 이 글은 원래 저장 파일을 잃어버려 복사본을 보고 나의 제자 이성현군이 새로이 워드로 쳐준 글이다.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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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 혹은 신앙의 문제 -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는가?
M. 하이데거 씨는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참다운 실존으로서의 ‘나’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익명적 군중으로서의 ‘사람들’로서 말하고 행동한다고 썼다. 이때 사유와 행동의 주체는 ‘나’가 아니라 ‘군중’이며 ‘대중’이다(이를 하이데거 씨는 “사람들은 지껄인다.”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떼 ‘사람들’ 스스로는 자신이 ‘나’로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는 참으로 피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그것을 진지하게 믿는 그 만큼 오히려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말하려는 바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며, 심지어는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라는 평범한 주장이다. 내가 다루려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올바로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이해란 무엇인가’ 즉 이해의 정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해란 우리말은 영어의Understanding 혹은 독어의 das Verständnis, 불어 Compréhension의 일본어 역(理解, りかい)의 우리말 음독이다. 모든 보편명사는 고유명사다. 그러나 ‘이해’란 용어 자체의 분석은 이 자리에서 수행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 글에서 ‘이해’란 용어를 우리가 “난 걔 이해해”라고 말할 때와 같은 이른바 ‘심정적(心情的) 이해’에 관련된 평범한 일상적 용법으로 사용했음을 밝혀둔다).
우리는 먼저 윗 문장에 나타난 ‘~할 수’라는 말을 통해 이해의 문제가 능력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다루려는 문제는 바로 이해에 관한 인간의 수행 능력 여부에 관련된 것이다. 이제 이러한 논지의 전개를 위해 이와 유사한 몇 가지 입장들을 살펴보자.
1) 인간은 다른 사람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가? - 물론 이것은 예외가 가능한 특칭 명제(some)가 아니라 예외가 전혀 없는 완벽한 전칭 명제(all)로서 제시된 것이다. ‘완전히’라는 단어를 일반적 의미로, 즉 “내가 너의 모든 생각, 느낌, 감정, 동기 등등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모조리 다 이해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때, 이 명제는 쉽게 거부되어질 수 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Nobody knows 혹은 God knows). 따라서 인간은 타인 혹은 타인의 행위에 대한 법리(法理)적 가부를 따질 수는 있을지언정, 그녀의 진실을 심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이해와 심판의 구조에는 항상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본질적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타인의 생각과 심정을 다 이해하고 파악한다면, 그녀는 신이지 인간이 아니다. 더욱이 누군가가 하느님의 의도와 생각을 다 정확히 이해하고 파악한다면, 그녀는 이미 신이거나 혹은 신 이상의 어떤 존재이다 - 마찬가지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기독교) 『성서』 해석에 궁극적 권위를 부여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 기독교가 인류에게 제시하는 하나의 위대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인간 능력의 본질적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는 세상에 대한 겸손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용이다. 왜냐하면 비단 나뿐만 아니라 - 설령 어느 누군가가 『성서』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 우리 모두가 똑 같은 하느님의 자식, 즉 인간이기 때문이다(신앙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은 그것이 일단 전제된 하나의 체계 안에서는 일정한 ‘사실의 영역’을 낳는다. 따라서 신앙의 사실은 말 그대로 ‘믿음이 전제된 사실’이다).
2) 이제 이어서, 문제를 ‘이해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이해 받는 사람’(보다 정확히는 ‘이해 받는다고 주장되어지고 있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내’가 (너로부터) 이해 받고 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 대답은 아마도 ‘너’라기보다는 ‘나’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해’라는 바로 그 말의 의미와는 모순(?)되게도 ‘내가 이해하는 대로의 네가 너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한 입장은 ‘나’에게 편(리)하다 - 그러나 이해 받는(혹은, 이해 당하는?) ‘너’에게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남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경우, 항상 (그 이해하려는 행위의 수행자인 나의 의지나 동기, 느낌보다는) 그 행위의 수혜자가 받는 느낌이 더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하나의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른바 ‘이해 받는’ 이의 의견이 경청되지 않으며, 그의 느낌과 생각이 존중되지 않는 이해와 사랑이란 단순한 무지이며, 실상 자기 편의에 입각한 일종의 타인에 대한 폭력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역시 대부분의 폭력은 사랑과 이해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다(‘너를 위해서!’).
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제로서 현대의 인권 개념을 확장해 보고자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진실을 왜곡 당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 나는 기독교의 ‘영혼의 복지’라는 표현에서 이러한 생각과의 친연성을 발견한다.
3) 그렇다면, 인간은 타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이 때 '충분히'란 말은 먼저 ‘~을 위해서, 혹은 ~하기에 충분히’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이는 이해의 본질과 관련된다. 이해란 우선적으로 언제나 보다 약한 자, 보다 억울한 자를 위한 단어이다. 물론 강자와 가해자도 이해 받을 수 있고, 또 이해 받아야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그것은 보통 그녀의 이해 받지 못하는 측면, 즉 약점과 상처에 대해서이다(물론 그녀의 긍지와 기쁨 또한 이해 받아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 혹은 기득권자란 누구인가? 그것은 ‘피해자 혹은 없는 자의 고통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자’, 즉 인식론적으로 말하면 ‘들을 귀 없는 자’, 바로 우리 모두가 때로 가해자이다(갑골문에 따르면, 성인(聖人)이란 한자의 聖자에 귀 耳변이 들어 있는 것은 그가 바로 “하늘의 말, 남들의 말을 잘 듣는다.”는 뜻이다(壬자는 제사상(祭祀床), 口자는 제기(祭器)이다). 성인이란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며,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 말을 넘어) 원래 그들이 가슴 속으로부터 말하고자 했던 바까지 듣는 사람이다 - 그래서 동양에서는 ‘성인은 속일 수 없다’고 한다).
때로 피해자이며 종종 가해자인 우리 모두가 남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 때의 ‘충분히’란 결국 ‘아픈 이의 곤혹, 괴로움, 상처가 좀 덜 아플 수 있을 만큼 충분히’일 것이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완전히’는 바라지도 않지만, ‘충분히’조차도 정말 어렵다. 아니 나는 그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정말 어려운 일일뿐더러, 심지어 그러한 사고방식 안에 하나의 중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인간은 ‘그녀가 타인에 대해 “내가 너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더 이상 그 타인의 말을 잘 듣지 않게 되는 경향’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참으로 이해하고 껴안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을 참으로 이해하고 용서하기조차도 참으로 힘겹다. 하물며 그것이 너임에야, 그녀임에야. 나는 너의 심정을, 너의 영혼의 깊은 소리를, 너의 진실을 모른다. 인간의 말이란 종종 참으로 잔인한 것이다. 그러한 때에 나의 선택은 ‘사람들’의 눈초리 안에서 재단되고, 나의 진실은 ‘그들’의 웃음꺼리가 된다. 실상 우리가 현실적으로 타인에게 바랄 수 있는 최대치는 마음 속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부드러운 이해가 아니라, 나에게 더 작은 상처만을 입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가? 아니, 나는 내 영혼의 목소리, 그 부름을 듣는가? 아마도 나는 그녀의 진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든, 인간의 ‘진실’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아마도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에 등장하는 ‘알고 있으면서도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행동의 규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I. 칸트 씨의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은 알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진실을 알 능력이 어차피 없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차라리 나의 주장은 차라리 도올 김용옥 씨의 말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에 더 가깝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 마치 칸트 씨의 그것처럼 - 다만 인간의 인식과 이해의 능력에 일정한 한계선을 그으려는 것뿐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윤리란 듣는 것이다(L'éthique aujourd'hui, c'est écouter). 그것은 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며, 너의,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듣기’가 ‘말하기’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강조점은 ‘듣는 것’에 있다. 실상 ‘잘 듣는 자’만이 적절한 때에 ‘잘’ 말할 수 있다.
아마도 한 인간이 ‘내가 너를 조금은 이해했나보다’하고 겸손히 생각해도 좋을 유일한 경우는 이해하는(?) 내가 ‘나를 너를 이해한다고 - 하이데거 씨의 표현대로 - 너에게 ‘지껄이는’ 순간이 아니라, 이해 받는 그녀가 나에게 진심으로 ‘그 때 이해 받았다는 느낌을 받아서 너에게 참 고마웠다’고 언제가 후에 나직이 말하는 그 순간뿐일 것이다 - 나는, 현실적으로, 이러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도와 행위가 윤리의 ‘최소치’라기보다는 ‘최대치’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서』에 쓰인 “네가 네 몸을 사랑하듯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명령 앞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의 본질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곤 한다. 그러나 나는 왜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해야 하며, 더욱이 나의 이웃들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약]의 기자들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세속에 있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자신과 똑 같은 하느님의 자녀인 그의 이웃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게 『성서』의 메시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러한 두 가지 ‘사랑’이 그리스도인에게 - 조건부의 선택적 사항이 아니라 -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형태로 주어지는 이유는, 내게는 ‘하느님’과 함께 ‘나의 이웃’이 나를 ‘나’로서 만드는 본질적 조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기를 선택하고, 또 그러한 말씀을 복음으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긍정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랑’ 없이 그녀는 살아 갈 수도,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를 행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자기 사랑’ 혹은 ‘자기이해’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참다운 자기 사랑과 이기주의를 혼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 프롬 씨의 말처럼, 이기주의자가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되, 실상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이기주의와 참다운 자기 사랑은 다른 것이다. 이기주의란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하고 동시에 바로 그러한 나의 행위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해 것이다. 내가 나의 건강과 내 가족의 미래를 위해 금연을 행하는 것은 이기주의와는 무관한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참다운 이해 혹은 사랑이란 자만심과도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참다운 본질이란 바로 그녀에게 나누어져 있는 하느님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역시 사랑할 수 없다.
나는 M. 푸코 씨의 다음과 같은 명제를 지지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가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윤리적으로 우선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타인과의 관계보다 언제나 존재론적으로(=본질적으로) 우선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고독한 대면, 친교의 시간이 풍부하고 깊어지는 만큼, 자신과 세상을 잘 이해하는 만큼, 바로 그 만큼만 타인을 잘 배려할 수 있다.
*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평화와 축복이 이 세상에 가득하길 빌어봅니다.
Thank you for your kind attention.
1999년 4월 4일, 스트라스부르 한인교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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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말하자면, 이 세상에 모든 고통 받는 사람들, 이해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즉 나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이다.
나는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이 자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모든 고통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 중 오늘보다 내일이 더 고통스러우리라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자신의 느낌을 믿고 이야기할 그 누군가가 없는 사람들만이 자살한다.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그 누군가를 가진 어떤 사람도 자살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것은 커뮤니케이션, 소통의 문제이다.
윤리에 대한 24개의 노트
윤리에 대한 24개의 노트
1. 이 글의 ‘나’는 물론, ‘너’이다. 아래의 글들은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좋아했다는 라틴 속담 “인간의 것 중에 나와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Nihil humanum a mihi alienum puto)라는 말에 대한 적극적인 동의에서 나온 것이다.
2. 함석헌은 “윤리는 삼각형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로써 윤리가 어떤 단순한 계약 혹은 거래 이상의 것임을 말하고 했을 것이다. 물론 윤리에서 이기(利己)의 측면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나는 윤리가 그 이상의 어떤 것임을 믿는다.
3. 나는 윤리학의 제1원리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참다운 윤리는 무엇보다도 존재에 기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윤리가 그 자체의 본질에 있어서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존재에 대한 긍정임을 뜻한다.
4. 그러한 나의 윤리 사상이 갖는 윤리의 실천적 제1원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5. 이때의 ‘이해(理解)’라는 말은 물론 영어 understand 혹은 독어 verstehen, 불어 comprendre의 일역(日譯)이다. 이 understand, verstehen, comprendre 세 단어는 공히 그들 언어의 상식적 사용법 안에서 이해하는 주체와 이해되는 객체의 존재를 각기 하나의 실체들로서 전제한다. 따라서 이해란 바로 또 하나의 실체인 ‘(참다운) 인식’이다. 인식이란 그 그리스어의 어원 épistémè가 잘 보여주듯 바로 ‘진리’이다.
6. 내가 위에서 말한 명제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비관적 혹은 냉소적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또는 그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 혹은 제한의 의미에 더 가깝다. 그것은 차라리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에서 행했던 바와 같은, 인간의 감성 혹은 인식 능력의 한계에 대한 주장이다.
7.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에 가장 근접하는 이는 오직 나 자신일 것이다 - 이것이 J. S.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이 자유론(On Liberty, 1859)에서 “모두는 그 사람 자신, 즉 그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서 주권자이다”라고 말한 의미라고 본다.
8. 따라서 위에서 내가 제시했던 윤리학의 제1원리는 도올의 다음과 같은 언명에 의해 보충될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김용옥, 「求原諒」, 老子哲學 이것이다(上), 20쪽, 통나무, 1989)
9. 얼핏 보아 이렇게 전혀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위의 두 언명은 다음과 같은 전제들에 의해 서로를 보완하게 된다. 첫째, “만약 내가 너와 똑 같은 입장이었다면(if I were in your shoes ... ), 나도 너와 똑 같이 행동했으리라”는 가정(=대전제)에 대한 신뢰가 있다. 이것이 하나의 가정이며, 또한 대전제에 대한 신념인 이유는 ‘모든 것이 똑 같은 상황’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0. 결국 나는 모든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reason)가 있음을 믿는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 대해 합리적(rational)이다. 이는 그러한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정상, 사이코, 변태, 기형이란 오직 타인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11. 이러한 말이 윤리학의 영역에서 의미 있게 주장되어 질 수 있는 이유들 중 하나는 모든 시대의 폭력은 그것이 사랑과 이해와 이성의 이름 아래 저질러져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우리와 그들의 ‘현실’에 대한 약간의 냉정한 고찰만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사실이다.
12. 이제 나는 사랑의 최소 요건 혹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하나의 사랑에서 사랑받는 이의 의견과 느낌과 감정을 존중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집착이며 또한 이른바 사랑받고 있다고 말 되어지는 이에 대한 사실상의 인격 모독이며 궁극적으로 폭력이다. 사랑이란 그의 말,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love is listening to his words, his voice).
13. 따라서 ‘나는 너를 이해한다.’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면 하나의 폭력에 불과하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 말은 무지, 오해, 왜곡, 위증이다.
14. 이제 나의 진실은 ‘나를 이해하는 이들’에 의해 그들의 웃음꺼리가 된다. 나의 느낌은 왜곡 당한다. 가해자란 무엇보다도 피해자의 고통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자이다.
15.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느낌과 생각과 의견을 왜곡당하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 나는 이로써 현대적 인권(human rights)의 개념을 확장하고자 한다.
16. 이러한 전제에 입각해 보다 적극적인 결론으로 나아가 보자. 아무도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나 자신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 나 이외에 나의 욕구와 소망을 알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심지어 타인에 대한 배려를 향한 나 자신의 최소 요건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진심으로 기쁘지 않고는 너를 기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 자신에 대한 배려 이전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행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 대한 배려는 윤리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우선합니다. 그 근거는 나와 자신의 관계가 존재론적으로(=본질적으로) 나와 타인의 관계보다 우선하기 때문이죠.”(Il n'y a pas à faire passer le souci des autres avant le souci de soi; le souci de soi est éthiquement premier, dans la mesure où le rapport à soi est ontologiquement premier - 'L'ethique du souci de soi comme pratique de la liberté'(1984), Dits et Ecrits IV, p. 715, Paris: Gallimard, 1994) 따라서 이에 따르면 우리가 자신을 배려하기 이전에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악한 행위이다.
18. 이때의 나를 사랑하고 배려한다는 이기주의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이기주의란 내가 이득을 얻으며 동시에 반드시 나의 그러한 행위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건강을 위하여 담배를 끊는 것은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그것은 이기주의가 아니다. 이러한 구분을 위해 도덕 철학(The Elements of Moral Philosophy, 1986)의 저자 제임스 레이첼스(James Rachels)는 ‘자기 이익’(self-interest)과 ‘이기주의’(selfishness) 사이의 구분을 도입했다.
19. 이와 비슷하게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자기애’(self-love)와 ‘이기주의’(selfishness) 사이의 구분을 도입했다.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기주의자가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마저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자기를 찾는 인간: 윤리학의 정신분석학적 탐구, 116쪽, 박갑성ㆍ최현철 옮김, 종로서적, 1985)
20. 나는 왜 나 자신을 사랑하는가? 나에 대한 사랑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윤리이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사랑이며, 긍정이다. 다만 문제는 나란 누구인가? 나란 어디까지인가? 나란 누구까지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21. 또한 모든 인간이 동일한 DNA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에서 그러한 윤리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김용옥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동일한 원리를 따르는 동일한 몸(Homo Mommiens)을 가진 것이다.
22. 그러므로 윤리란 인간의 정신에 관여하는 의학이다. 이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절대적으로 진실하다. 그가 생물학적으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그의 절대적 진실성을 보장한다. 인간은 진실에서 벗어날수록 아프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생존을 위한 필연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때의 진실이 어떠한 관점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있는가 하는 점일 뿐이다.
23. 이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방식은 무한하며, 나는 그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존재들 중 단 하나에 불과하다. 나의 느낌과 나의 생각과 나의 존재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말대로, 인간의 고통이 중요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너이기 때문이다.
24. 인간의 고통 혹은 느낌이 소중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공리주의의 주장대로 그것은 오직 인간이 유정적(有情的, sentient)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흑인이, 한 여성이 학대받는다면 그것은 왜 나쁜가? 그가 고통 받기 때문이다 ... 이제 윤리의 대상은 나의 행위에 의해 영향 받는 모든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로 확대된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의 아픔만이 아니며, 모든 존재의 느낌이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1995.
존재론적 윤리학에 대한 11개의 노트
존재론적 윤리학에 대한 11개의 노트
“나는 인간을 이해하고픈 정열을 가지고 있다.”
(J'ai la passion de comprendre l'homme)
- J.-P. 사르트르
1. 이 글의 ‘나’는, 물론, ‘너’이다. 아래의 글들은 칼 마르크스 씨가 좋아했다는 라틴 속담 “인간의 것 중에 나와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Nihil humanum a mihi alienum puto)라는 말에 대한 적극적인 동의에서 나온 것이다.
2. 함석헌 씨는 “윤리는 삼각형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로써 윤리가 어떤 단순한 계약 혹은 거래 이상의 것임을 말하고 했을 것이다. 물론 윤리에서 이기(利己)의 측면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나는 윤리가 그 이상의 어떤 것임을 믿는다.
3. 나는 윤리학의 제1원리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참다운 윤리는 무엇보다도 존재에 기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윤리가 그 자체의 본질에 있어서 (존재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존재에 대한 긍정임을 뜻한다. 따라서 나는 나의 윤리학을 존재론적 윤리학이라 부른다. 그러한 나의 윤리 사상이 갖는 윤리의 실천적 제1원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이때의 ‘이해(理解)한다’라는 동사는 물론 영어 understand 혹은 독어 verstehen, 불어 comprendre의 일역(日譯)이다. 이 understand, verstehen, comprendre 세 단어는 공히 그들 언어의 상식적 사용법 안에서 이해하는 주체와 이해되는 객체의 존재를 각기 하나의 실체들로서 전제한다.
따라서 이해란 바로 또 하나의 실체인 ‘(참다운) 인식’이다. 인식이란 그 그리스어의 어원 épistémè가 잘 보여주듯 바로 ‘진리’이다. 하지만/따라서 위에서 내가 제시했던 윤리학의 제1원리는 김용옥 씨의 다음과 같은 언명에 의해 보충될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김용옥, 「求原諒」, 老子哲學 이것이다(上), 20쪽, 통나무, 1989) 얼핏 보아 이렇게 전혀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위의 두 언명은 다음과 같은 전제들에 의해 서로를 보완하게 된다.
첫째, “만약 내가 너와 똑 같은 입장이었다면(if I were in your shoes ... ), 나도 너와 똑 같이 행동했으리라”는 가정(=대전제)에 대한 신뢰가 있다. 이것이 하나의 가정이며, 또한 대전제에 대한 신념인 이유는 ‘모든 것이 똑 같은 상황’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모든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reason)가 있음을 믿는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 대해 합리적(rational)이다 - 윤리에 있어서의 ‘숫자’의 문제. 이는 그러한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정상, 사이코, 변태, 기형이란 오직 타인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 속도의 윤리학.
4. 내가 위에서 말한 명제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비관적 혹은 냉소적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또는 그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 혹은 제한의 의미에 더 가깝다. 그것은 차라리 임마누엘 칸트 씨가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에서 행했던 바와 같은, 인간의 감성 혹은 인식 능력의 한계에 대한 주장이다 - 완벽히? 충분히?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에 가장 근접하는 이는 오직 나 자신일 것이다 - 이것이 J.S. 밀 씨가 자유론(On Liberty, 1859)에서 “모두는 그 사람 자신, 즉 그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서 주권자이다”라고 말한 의미이다.
5. 이러한 말이 윤리학의 영역에서 의미 있게 주장되어 질 수 있는 이유들 중 하나는 모든 시대의 폭력은 그것이 사랑과 이해와 이성의 이름 아래 저질러져 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우리와 그들의 ‘현실’에 대한 약간의 냉정한 고찰만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사랑의 최소 요건 혹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하나의 사랑에서 사랑받는 이의 의견과 느낌과 감정을 존중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집착이며 또한 이른바 사랑받고 있다고 말 되어지는 이에 대한 사실상의 인격 모독이며 궁극적으로 폭력이다. 사랑이란 그의 말,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love is listening to his words, his voice) - 聖人. 따라서 ‘나는 너를 이해한다.’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면 하나의 폭력에 불과하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 말은 무지, 오해, 왜곡, 위증이다. 보다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이해한다고 말하는 이 자신의 주장보다는, 이른바 ‘이해받는다.’고 주장되어지는(혹은 ‘이해당하는’) 이가 갖게 되는 느낌이다. 이러한 점이 적절히 이해되지 못한 경우, 이제 나의 진실은 ‘나를 이해하는 이들’에 의해 그들의 웃음꺼리가 된다. 나의 느낌은 왜곡 당한다(너를 위해서!). 가해자란 무엇보다도 피해자의 고통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자이다. 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제를 설정함으로써 현대적 인권(human rights)의 개념을 확장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신의 느낌과 생각과 의견을 왜곡 당하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
6. 이제 이러한 전제에 입각해 우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 필연적 결론은 아무도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나 자신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이외에 나의 욕구와 소망을 알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심지어 타인에 대한 배려를 향한 나 자신의 최소 요건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진심으로 기쁘지 않고는 너를 기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 씨는 이를 “나 자신에 대한 배려 이전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행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 대한 배려는 윤리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우선합니다. 그 근거는 나와 자신의 관계가 존재론적으로(=본질적으로) 나와 타인의 관계보다 우선하기 때문이죠.”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우리가 자신을 배려하기 이전에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악하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친교와 이해가 깊어지는 만큼만, 그리고 바로 그 만큼만 타인들에게 참으로 잘 해줄 수 있다(너무 절망하지 말자. 참으로 만나고자 한다면, 이미 만난 것이다 ... 정말 그럴까?).
7. 이때의 나를 사랑하고 배려한다는 이기주의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이기주의란 내가 이득을 얻으며 동시에 반드시 나의 그러한 행위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건강을 위하여 담배를 끊는 것은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그것은 이기주의가 아니다. 이러한 구분을 위해 도덕 철학(The Elements of Moral Philosophy, 1986)의 저자 제임스 레이첼스 씨는 ‘자기 이익’(self-interest)과 ‘이기주의’(selfishness) 사이의 구분을 도입했다. 이와 비슷하게 에리히 프롬 씨는 ‘자기애’(self-love)와 ‘이기주의’(selfishness) 사이의 구분을 도입했다.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기주의자가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마저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자기를 찾는 인간: 윤리학의 정신분석학적 탐구, 116쪽, 박갑성ㆍ최현철 옮김, 종로서적, 1985)
8. 나는 왜 나 자신을 사랑하는가? 나에 대한 사랑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윤리이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사랑이며, 긍정이다. 다만 문제는 나란 누구인가? 나란 어디까지인가? 나란 누구까지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또한 모든 인간이 동일한 DNA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에서 그러한 윤리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김용옥 씨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동일한 원리를 따르는 동일한 몸(Homo Mommiens)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란 인간의 정신에 관여하는 의학이다. 이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절대적으로 진실하다. 그가 생물학적으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는 그의 절대적 진실성을 보장한다. 인간은 진실에서 벗어날수록 아프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생존을 위한 필연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때의 진실이 어떠한 관점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있는가 하는 점일 뿐이다.
9. 이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방식은 무한하며, 나의 세계 해석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무한한 해석의 방식 중 단 하나에 불과하다. 나의 느낌과 나의 생각과 나의 존재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알베르 카뮈 씨의 말대로, “인간의 고통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너와 나의 ‘몸’으로 인하여, 나는 바로 너이다(그런데, 정말 나는 너일까?) - “만약 우리가 남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려 한다면 그것은 전쟁으로 가는 길이요, 우리로부터 남들을 보호하려 한다면 그것은 평화로 가는 길이다.”
10. 인간의 고통 혹은 느낌이 소중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공리주의의 주장대로 그것은 오직 인간이 유정적(有情的, sentient)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흑인이, 한 여성이 학대받는다면 그것은 왜 나쁜가? 그가 고통 받기 때문이다 ... 이제 윤리의 대상은 나의 행위에 의해 영향 받는 모든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로 확대된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의 아픔만이 아니며, 모든 존재의 느낌이다 - 이는 말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이며, 행동․실천의 문제이다. ‘냉정한 객관성’은 인식론적 오류다. 더구나 한편으론 이 세상에는 말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11. 나는 왜 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더구나 나는 왜 너를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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