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22.

잠언 08

 
 
 
 
 
 
 

0. 하나의 언명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놀이임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언명 혹은 이러한 언명들의 집합을 담론(談論, discours)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세상에 언표된 말 중에 담론이 아닌 것은 없다.



1. 메타적 층위의 문제 - 주어진 하나의 진리 놀이들 안에서는 참과 거짓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진리놀이들 사이의 선택에는 결단만이 존재할 뿐 참과 거짓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놀이들 사이에 그것들을 갈지르는 또 다른 메타적 층위의 보편이 존재한다고 보는 순간, 그는 다시 근대(modernity)의 진리관에 빠져든다.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이러한 메타적 층위의 보편을 인정하지 않는 다원주의를 의미한다.



2. 구성주의(constructionism)는 재현주의(representationalism)를 파괴하려는 운동이다. 구성주의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 '나의 선택과 관심에 상응해서' 구성되었다는 적극적 개입의 입장, 재현주의는 '있는 그대로' 곧 '나는 아무 것도 안 하고 100% 수동적으로 기술한다'는 순수주의의 입장이다.



3. 사람들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무섭다고 말한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었던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이유가 도덕적으로 게으르거나 노력 혹은 결단력의 부족으로 보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모든 걸 자기 기준으로만 바로본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적절한 제한만 주어진다면, 때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우리 모두가 - 어떤 의미에서는, 혹은 자신이 성공한 영역들에서는 -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4. 무엇이든 너무 집착하면 오히려 안 된다. 가령, 행복하려고 환장해서 발악을 하면  오히려 될 일도 안 된다. 푸코는 블랑쇼에 관한 자신의 글 <바깥의 사유>에서 블랑쇼의 글이 보여주는 '이끌림'(attirance)의 비결을 '게으름 혹은 무심함'(negligence)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생각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조금은 무심하고 조금은 게을러져야, 그럴 수 있는 여유와 거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5. 한 어리석은 정치인 때문에 '실용주의'라는 말이 폄하되곤 하고, 때로는 실용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있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실용주의를 지지한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방식이 실용적이지도 못하다는 것, 사실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1960년대 당시에도 인권을 유린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위해 주창되던 그러한 비민주적인 '조국근대화'의 방식이 이른바 '선진국'을 지향한다는 오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통용될 것 같은가? 같은 이야기이지만, 가령 우리나라 기업이 유럽이나 미국에 진출해서, 그곳의 현지인 직원들에게 과거의 대한민국이나 오늘의 중국과 같은 방식을 강요하고 그것이 어떤 '실용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어리석인 사람이 있을까?



나는 실용적이고 싶다. 관건은, 실용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실용주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여 그러한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실용주의란 어떤 것이며, 나와 우리의 어떤 행동이 실제로 실용적인 결과를 낳는가에 관심이 있다.



6. 노력이란 실로 때로는 자기합리화의 일종이다. 노력하는 것은부족하기 짝이 없다. 노력을 하는 것에 그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으로 얻어려는 바가 실제로 얻어져야 한다. 사랑을 해도 상대를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나의 사랑이 전달되어야 하고, 효도를 해도 나 혼자 힘들어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들이 실제로 기쁨을 느껴야 하고, 직장에 취직을 하려해도 노력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합격을 해야 한다.



7. 애니어그램들을 왜 그렇게 열심히들 하는가? - 자기 얘기니까! 연애가 재미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둘이서 자기 얘기, 자기 사랑, 결국 자기가 관심있는 얘기만 하기때문이다. 사주든 궁합이든 타로든, 점을 열심히 보는 이유도 자기 얘기라서. 이런 관심은 적절하면 애교로 보아줄 수도 있지만, 지나치면 좀 끔찍한 부분이 있다.



8.  점과 관련하여 꼭 나오는 얘기가 점이 통계학이라는 것이다. 그시대에 통계가 있지도 않았고 이 때의 통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인간 유형을 유형별로 나눌 수 있다고 보는 것도 한계가 확실하고, 질문과 점괘의 내용 자체도 중의적이라 읽는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이다(물론 이 점이 점의 묘미이고, 가치이다).



9. "미국의 스티븐스 판사는 논쟁적인 도덕적 주제가 걸려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임신중절의 여부는] 입법부가 아니라 여성 개인이 스스로 겨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법원이 주장하는 것은 - '법원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가치관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어떤 개인도 단순히 그가 '선호하는 가치'가 다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자유를 포기하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스티븐스가 생각한 근본적인 질문은 - 생명에 관한 어떤 견해가 옳으냐가 아니라 - "임신중절의 결정을 개인이 내려야 하느냐 아니면 다수가 내려야 하느냐"이다." - 마이클 샌델, <<왜 도덕인가?>>(한국경제신문, 109쪽)



10. 남을 "걱정해주면서" "상대를 위해서" 상대의 삶에 간섭하며,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관전평을 때로는 도덕적 훈계를 일삼는 행동이 실로 달콤한 간섭(intervention), 곧 권력행위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드물다.


11. "내 몸의 느낌을 내가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야!"



12. 푸코의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해석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황당한' 언명이다(그런데 푸코는 물론 이런 점을 당연히 알고 있다).



13. 지식인과 인민은 둘이 아니다(不二).



14. 일본에는 사소설(私小說)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에 사소설이란 없다. 그것은 철저한 '보편소설'의 한국적 양상이다.



15. 미시사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기원 5세기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아테네에 사는 한 평범한 성인남성의 사랑이 갖는 다양한 측면들을 문화인류학적으로 재구성해보라.




16. 모든 정치적인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는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며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이다. 실로 이보다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란 없다!



17. 요즘 기자들과 쓰레기를 결합하여 '기레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물론 기자들 개개인에게 그러한 사태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러한 사태의 궁극적 원인은 19세기적 과학관, 진리관의 무비판적 반영, 곧 중립보도, 사실보도, 공정보도라는 관념 안에 존재한다. 간단히 말해, 문제는 이러저런한 편집권의 문제가 아니라, 편집권 자체이다. 편집권은 편집권력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한국말'이라는 말처럼 기자들이 이런저런 말을 편집하는 그 행위 자체가 중립이 불가능한 선택의 행위이다. 취재 대상과 아닌 대상을 나누는 일, 중요한 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사를 나누는 일 자체가 이미 도저히 중립적일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의 행위이다.



모든 기자들은 사실 어린 시절 이러한 편집권력의 무시무시한 힘을 깨닫고 적어도 두 번은 전율에 떨게 된다. 한 번은 이 힘의 강력함에, 두 번째는 아무도 이 부당한 '중립적이지 않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는 사실에.



18. 인생에서 종종 찾아오는 연극무대는 그녀의 오늘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결혼식장과 상가집, 혹은 강의실, 혹은 팀발표 등에서 그녀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녀의 행동을 보라.



19. 사람들은 보통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어서 (가령 자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어떤 이의 글을 읽을 때 이것이 자신에 대해 말한 글이 아닌가 생각하고 또 의심하곤 한다.



20. 푸코는 지식인, 부르디외는 상식인이다.



21. 루소와 알튀세르가 이른바 정말 '미친 사람'임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들이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 어떤 단 한 가지 사건 혹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으로 말한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다른 사람들의 오해와 시기와 모함에 의해, 후자는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그'라고 붙였다는 그 사실에 의해.




22.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문제가 자신의 '정상성'임을 알지 못한다.



23. 안티기독교인은, 물론, 기독교신자다. 그녀의 사고는 여전히 모든 것이 기독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24. 스스로 오랜 기간 동안 기자였던 카뮈가 <이방인>에서 그리고 있는 법정과 언론의 모습은 실로 탁월하다. 그들 모두는 재판이나 보도와는 다른 무엇인가를 행하고 있다. '용의자' 혹은 '피의자'인 뫼르소가 하는 모든 행동이 자신들이 뫼르소를 바라보는 관점에 입각해 재단되고 판정된다. 가령 평상시 이웃들의 증언이 그를 순수한 사람으로 보았다면 '저렇게 치밀한 두 얼굴의 완벽한 이중인격자', 조금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역시 이 사람은 원래 저런 인간, 파렴치한 범죄자'라는 식이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근대의 사법제도는 '범죄행위'에 대한 재판 이외의 어떤 것, 그 이상의 어떤 다른 것, 곧 한 인간의 '품행'을 심판한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탁월한 통찰이다. 가령 오늘 푸코가 살아 있어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고, 어느 기자가 푸코의 수첩에서 <<감시와 처벌>>의 논지와 비슷한 글을 발견한다면, 그녀는 아마 '이렇게 치밀하고 간교하게도 푸코는 이런 경우에 대비해 자신에게 유리한 이런 책을 미리 써놓았던 것이다!'라며 비분강개하는 어조로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경우의 참다운 문제는 무엇인가? 자신이 원래 믿고 있는 해석에 준하는 증거는 자신의 생각이 '옳은' 증거로, 반하는 증거는 범죄자 혹은 용의자의 '교활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하는 것다. 결국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틀릴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해석권력'이라 부르기에 가히 부족함이 없는 행동이다.




25.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런 해석권력을 행사하는 기자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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