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2.

잠언 12

 
 
montserrat figueras, lux feminae 900-1600, 2006
 
 
 
 
 
 
 
 
 
 0. 모든 진리는 전혀 하나로 통하지 않는다. 이른바 절대진리를 주장하는 진리들 사이에 설정 가능한 관계는 근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단죄와 살육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진리들의 전쟁'만이 가능하다. 니체의 말대로, 그러나 니체와는 다른 의미로, '진리'가 문제이다.
 
 
 
 
 
 
 
 
1. 고통받는 이들의 심정이 보여주는 일반형식 -  "화가 난다. 억울해. 왜 하필이면 내게만 이런 일이. 재수가 없다." 그리하여 이제 고통받는 이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나는 불행하다."

고통과 불행이 등가로 이해된다는 점 이외에도 이러한 담론에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에 의해 (때로는 합당하게 때로는 성급하게) 정당화된 수많은 논리적 비약이 포함되어 있다.
 
 
 
 
 
 
 
 
 2. 천천히 걸어라. 서두르지 말고. 네가 도달해야 할 유일한 장소는 네 자신이다. 그렇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어디까지 어디에서부터 네 자신이고 그것을 네가 어떻게 아는지만이 문제이다. 산티아고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장소인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허명이며, 산티아고란 그저 마음의 상태이다. 산티아고는 네가 걷는 등굣길이자 출퇴근길며 슈퍼에 가는 길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바로 그 길이다. 섬과 섬 사이에 바다가 있지만 그 바다 밑에는 섬들이 원래 둘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땅이 있고, 그 땅은 한번도 이어져 있지 않은 적이 없다. 신토불이. 생각이 이러하니 산티아고길을 끝까지 걸을 이유가 내게는 원래 없었다. 산티아고는 치유의 길이고 성찰의 길인 만큼이나 고통의 길이고 집착의 길이다. 산티아고를 도대체 왜 걷는가? 이것이 이 길의 물음이며 화두이다. 산티아고를 온전히 끝까지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그 끝에 도착한다면 상상치 못한 성취감이 있고 그것을 바라는 사람을 그것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바로 이것, 진정성의 문제가 산티아고를 어린시절부터 막연히 꿈꾸게 만든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한걸음 한걸음 무소의 뿔처럼 남들 쳐다보지 않고 나만의 길을 나만의 걸음으로 걷는다는 이 유가의, 불가의, 그리스도교의,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의 진정성 담론이야말로 나의 성실-죄책감-자기 처벌으로 이어지는 정체성 형성의 핵심으로 작용한 가공할 이데올로기 담론, 주체의 해석학임을 알겠다. 산티아고라는 이 이름이 그저 하나의 이름임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내가 산티아고길을 걸은 것은 무슨 거창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도 얻지 않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내가 산티아고길을 걸은 것은 아무도 없는 들길 산길에서 만나는 가녀린 벚꽃, 산마루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손을 흔들면 반갑게 흔들어주는 운전자들의 밝고 짧은 인사, 고통과 행복이 둘이 아님을 말해주는 부르튼 발, 그리고 마음을 흔들며 문득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고통과 비참과 행복과 불행, 사랑과 사람들과 삶의 기억 때문이었다. 나는 산티아고길에서 아무 것도 버리지 못했으며, 모든 것을 버렸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산티아고 길을 걷지 않는다.
 
 
 
 
3. 악인이 그렇게 악한 줄 아는가?
 
 
 
 
4. 모욕이 준비되었을 때 인생이 시작된다 - 그런데 인생에 대한 순진한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것이 인생의 조건임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것을 인생의 끝이라 생각한다. 인생의 모욕을 받아들이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 비극의 탄생이다. 비극이 없는 혹은 인정되지 않는 세계가 완벽한 세계, 순수한 세계이며, 라캉이 말하는 어머니와 나의 완전한 유대가 가정되는 상상계이며, 이러한 충만하고도 완전한 상상계가 파괴되지 않는 한 그는 한 개인으로서의 독립적인 건강한 인격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5. "나는 자기와 자기의 관계가 자기와 타인에 대한 관계에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 한, 윤리적으로도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 미셸 푸코

자기를 배려하기 이전에 타인을 배려해서는 안 된다. 이기주의도 희생도 아닌 자기 배려는 자기 인식과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 이루어진다.
 
 
 
6. 언어의 흥미로운 역설적 현상 - 당신은 이유가 무엇이든 당신이 속한 모임의 누군가가 좀 맘에 안 든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당신은 문제를 일반화하여 공개적으로 '그런 종류의 인간들'을 신랄히 비난한다. 그런데 당신이 비난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완벽한 자기 방어기제를 발동시켜 신경도 쓰지 않는 반면,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당신의 말을 자신의 상황에 대입시켜 스스로를 비난한다. 따라서 우리는 직설과 우회의 상황을 적절히 구분하고 판단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인간의 언어상황 일반이 바로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당신의 말은 늘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에 의해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마치 지금 이 글을 당신이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 것처럼.
 
 
 
7. 인간 실존의 가장 보편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 상황 -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8. 미셸 푸코는 합리성과 폭력이 양립불가능하거나 상호배제적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폭력이 양립불가능하거나 상호배제적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9.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삶의 원칙을 지키고 산다. 마치 그것이 삶 자체의 원칙이기라도 한 것처럼.
 
 
 
 
10. 17살 때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 실존 무의식의 일반적 상황이 바로 그렇다고 해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늘 사후(afterwards)에 가서이다. 바로 여기에 사건에 대한 선택과 해석의 중요성이 놓여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지금이 아니라 사후의 관심과 해석에 의해 '사후적으로' 규정된다. 인간이란 이처럼, 자신의 의지와도 무관하게, 수동성과 중립성을 넘어서서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해석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존재이다.
 
 
 
11. 네 욕망을 소중히 해라.
 
 
 
 
12. 한 집단의 의사결정을 위한 최선의, '잡음'이 일어나지 않는 사실상의 유일한 방법은 구성원들에게 적절한 시간과 상황을 제공하여 그들이 자신의 의견을 모두 제시하고 충분히 토론한 이후에 자유롭게 이루어진 다수결에 따르는 것이다.
 
 
 
 
13. 객관성과 보편성을 말하는 이들의 저 지독한 폭력적 자기 중심주의 - 누군가가 자기 생각의 '객관적 합리성'을 말할 때 실상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대로, 자신이 결정한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가 칸트이든 하버마스이든 나든 당신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이로부터 합리성과 보편성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이 나온다. 합리성과 보편성이야말로 권력의지의 가장 강력한 도구이자 그 실현수단이며, 이는 '자신도 모르는 이기주의'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기 때문에 대부분 가장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된다.
 
 
 
 
14. 인식주체의 자기인식 - 자신에게 옳은 것으로 보이는 '진리'의 보편타당성, 나아가 절대성을 믿는 이들은 어떤 상황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항상 상황 외적으로, 곧 인식주체로서의 자신의 판단을 인식대상의 상황에 대하여 외적인 것, 인식대상과 무관한 것, 상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이들에게 진리는 그야말로 객관적인 절대진리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자신의 상황 외적인 '객관적' 진리와 다른 관점은 모두 '오류'와 '교정대상'으로 취급된다.  철학이 보통사람들의 일상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큰 부분도 바로 이런 '인식주체의 자기 인식'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일이 될 것이다.
 
 
 
 
15. 남성적 보편성의 보편성 문제
 
 
 
 
 
16. "아무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17. 마음이 열려 있지도 않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지도 배우려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주장만 강한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그는 당신의 평화와 성장을 현격히 방해하며, 나아가 시간이 지나갈수록 불편함과 갈등을 조장한다. 결국 당신이 그와 보내는 시간은 가장 좋은 경우에도 '시간 낭비'이다.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과 굳이 안 되는 일을 도모할 하등의 필요가 없다. 그러나 때로 세상에는 보지 않을 수 없는 관계 역시존재한다. 이 경우 가능한 현실적 최선은 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의 특별한 관심을 끌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소한의 형식적 관계만을 유지하는 것이다.

 
 
 
 
18. 정체성의 정치성 - 미셸 푸코의 탁월한 통찰처럼, 모든 정체성 곧 자기 동일성(identity)이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배제와 거부에 입각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정체성보다 정치적인 것은 없다. 내가 나인 이유는 내가 너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정체성과 동일성은 그 자체로 다름과 타자성에 대한 거부와 배제에 의해 구성된 결과물이다. 푸코의 모든 논의는 다름과 타자성에 대한 긍정에 입각하여 기존의 동일성과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이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예외없이 오로지 '정치적'이다. 정치라는 용어를 국가와 정당과 같은 거대정치의 의미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정치라는 용어의 정의 자체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다.
 
 
 
 
19. 나의 자부심 -  내가 이십대 말미에 정한 내 학문의 3가지 방향성을 나는 오늘도 여전히 지키고 있다. 첫째 더 쉽게, 둘째 더 낮게, 셋째 스스로 그러하게.
 
 
 
 
20. 잠언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면 놀랍게도 글을 읽는 거의 모든 사람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하나의 글을 자신에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읽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나의 글과 말은 나와 남 '사이'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내 말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는 실상 그저 당연한 현상인데, 언어 자체가 이미 어떤 '누가' 아닌, 우리들 '사이'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21. 미필적 고의 -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안 할수는 없으니 해야지' 하는 식으로 그것을 의무화하여 자신이 원래 하고싶었던 바를 정당화하며 행한다.  이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가족, 사랑, 직장, 인간관계 등 인간 사회생활 일반에 공히 통용되는 진리이다. 이는 실상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가 못 견뎌서 말하지 않고 행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 하는 일을 의무라는 식으로, 나는 하고 싶지 않지만 상대를 위해서 할 수 없이 한다는 식으로 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일은 한편으로 매우 흥미로운 측면을 갖는데 그것은 행위와 사고의 당사자가 단순한 현상적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가 일어나고 정당화되며 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조건 자체의 변경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사태는 그것의 정신분석적 철학적 차원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대부분이 그렇듯 자신의 이런 측면을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2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살해자의 편이다."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III, 167) 
 
 
 
 




 
23. "작은 투쟁들 속에서 많은 위대한 행위들이 이루어진다. 궁핍과 치욕 들의 피할 수 없는  침입에 대하여 어둠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저항하는 남모를 끈덕진 용맹들이 있다. 어떤 눈도 보고 있지 않으며 어떤 명성도 얻지 못하고 어떤 갈채도 받지 않는 고결하고 은밀한 승리들. 실생활, 불행, 고립, 고독, 빈곤은 그들의 영웅을 가지고 있는 싸움터들인데, 이 영웅들은 때로는 고명한 영웅들보다 더 위대한 이름없는 영웅들이다."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III, 189)
 
 
 
 
 
 
 
 
 
21. 사랑과 아름다움이 우리를, 생명을 살린다. 그것은 우주의 진화론적 생성에 관련된 동어반복이다.
 
 
 
 
 
2015.03-04. 스페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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