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6.

잠언 13

 
 



1. 기억의 물질성 - 스페인에서 쓰다 가져온 치약이 다해가 듯 스페인의 기억도 점차로 희미해져 간다.


2.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적 소망을 방해하는 외적 저항에 붙이는 이름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41쪽.


3. "삶은 언제나 사후적인 판단을 통해서만 미래의 가치를 여실히 깨달아 간다." - 조용섭


4. 평생에 걸친 푸코 작업의 지향점들 중 하나는 세계관, 가치관의 독점과 그에 따르는 일방적 재단, 세뇌, 교정, 처벌의 정당 근거 자체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독점의 주요한 개념 장치가 절대, 객관, 중립이며, 그리고 이런 모든 개념들의 궁극 근거로서의 보편성의 관념이다. 따라서 푸코가 수행하는 모든 작업은 보편성의 관념에 대한 공격, 곧 계보학적 제도적 분석으로 수렴된다.


5. 프랑스철학을 왜 공부하는가? 내가 타인들과, 우리가 그들과 잘 살기 위해서.


6. 우리나라 축구 피파랭킹은 이번 달에 57위다. 사람들이 말하듯 나의 꿈은 대한민국이 피파랭킹 1위 하는 날까지! 이렇게 말하자면 스무살 중반 이래 나의 꿈도 이렇게 적어볼 수 있을 거다. 우리 국악 가요가 빌보드 1위 하는 날까지!

백인 배우들을 쓰는 광고들 촌스럽지 않은가? 우리 국악을 듣는 젊은이 멋지지 않은가!


7. 누군가가 말하는 이른바 '현실'이란 다만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믿는 자기 '당연함'의 일반 구조를 일컫는 말이다. 이때 이 누군가는 '자신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의 구조, 곧 자신이 어쩔 수 없다고 믿는 '현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8. "진리의 적은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9. 큰 착각 - 어떤 사람이 나와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하는 오류.


10. "위험은 똑바로 노려보면 사라지는 법이다." - 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


11. 낭만주의와 정신분석의 위대한 통찰 - 주인공이 바라보는 '외적 현실'은 그의 내면 세계가 바깥으로 투사된 것이다.

이리하여 나와 나의 적이 서로에 대한 거울, 쌍둥이로 태어나고 자라난다.


12. 동아시아 학문의 메이지 효과, 유럽 학문의 고대 그리스 효과.


13.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른 사람, 곧 다른 사람들, 나의 과거 혹은 미래와 비교하지 않는 것,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내가 되었어야만 하거나 또는 되어야 할 그런 상태의 나와 비교하지 않는 것. 지금의 이 현실을 어떤 가능성, 잠재성, 또 혹은 당위성과도 비교하지 않는 것.

나는 학생이거나 배워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족적이며 지금 이대로 그 자체로 충만한 존재이다.

불완전이 완전보다 상위의 가치이며, 카오스가 코스모스를 포용한다.


14. 네가 고민하는 문제는 네 어머니의 문제다.


15. 네가 감히 스스로 행할 수는 없으나 일어나주기를 바라는 '그 일'은 무엇인가?


16. 번역이 철학이다.


17. 네가 너 자신 그리고 모두를 위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궁금한가?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네 주변의 사람들이 '꽃 피고 있는지, 아니면 시들어 가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라. 특히 네 자신이.


18. 이른바 사람들이 믿는 보편적  진리, 객관적 합리성이란 무한히 다양한 세계의 특정 부분이 배타적으로 강조된 것이다. 니체적 힘관계의 논리.


19. 신 - 신은 deus 혹은 god이란 서구어를 번역하기 위해 메이지 일본인들이 채용한 번역어이다. 신, 메이드 인 저팬.

20.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 존재를 향한 용기 - 사람은 누구나 때로 이유없는 막연한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실로 '이유 없는 불안'이란 없다. 모든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적이기 때문에 모든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다 그럴만해서' 느끼는 불안을 무작정 어거지로 누르려고 해봐야 오히려 불안만 가중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방법은 오히려 불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안을 느낄 때, 특히 신체 반응이 수반되는 극심한 불안을 느낄 때, 잠시 동안이라도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고 그것을 차분히 바라보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결코 둘이 아니므로, 모든 불안은 어떤 느낌, 생각, 신체적 반응을 동반한다. 다시 한번 나의 경험을 돌이켜본다면, 바로 이때가 내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기회이다.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생각들을 피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생각에는 적어도 나만의 합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생각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며 찬찬히 바라보는 것이다. 인정이 반드시 긍정은 아니다.

이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 생각들 중 어떤 것은 내 머리 바깥의 현실과 일치할 것이고 또 어떤 것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이다. 내 머리 바깥의 현실과는 일치하지 않는 '불합리한' 생각이라 해도 그것은 '나 자신이 믿는' 나의 현실과는 일치하는 것이므로 완전히 비현실적인 '불합리한' 생각은 아니다. 실상 그것은 내가 믿는 현실, 내가 걱정하는 현실과 일치하는 아주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생각이다.

모든 인간들 곧 '나'는 다른 어떤 누구와도 다른 고유한 존재이므로  이른바 사람들이 말하는 객관적 현실의 차원 이외에도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현실이라는 차원을 갖는다. 불안은 때로 전자와 후자의 차이에서도 나오지만, 대부분의 경우 후자의 차원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다.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내'가 불안한 이유는 '나'만이 알 수 있다. 내가 불안한 이유를 네가 설명할 수도 네가 풀어줄 수도 없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따라서 주어진 한도 내에서의 보편성을 갖지만, 동시에 그만큼 홀로 서 있는 자 곧 단독자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 인간과 홀로 있는 단독자가 모두 언어라는 그물망이 빚어낸 효과라는 것이 라캉의 복음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고, 언어의 동일성은 타자성과 동시적 상관적으로 구성된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동물과 달리, 인간인 내가 불안한 이유, 내 몸이 불안에 떠는 이유는 내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며 내게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생각이 내게는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믿는 합리성의 구조를 내가 모르거나 부정할 경우, 나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파르헤시아 곧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것을 말하는 용기'란 이렇게 스스로에게 '스스로가 믿는, 스스로의 지금 있는 그대로'를 알리는 행위이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정직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그 결과를 두려워 하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말하는 자기에 대한 정직은 감당도 못할 진실을 스스로에게 폭로하고 붕괴되라는 말이 아니다.

공자가 말하는 학이시습지란 배우고 '때로' 익힌다가 아니라 배우고 '때에 맞게' 곧 내가 들은 바를 내 몸과 상황에 맞게 잘 응용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깨우치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나를 아끼고 섬겨라. 인간은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라는 두 날개로 난다. 모든 공부는 내 몸에 이 자기 배려를 실천하는 나만의 방법을 스스로 깨우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나의 불안을 치유하는 방법이란 내가 듣고 읽고 배운 말을 내가 내 몸에 적용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는 방법에 다름 아니다.

객관적 합리성, 우리의 합리성만큼이나 나의 합리성, 내가 믿는 합리성도 중요하다.

나의 불안, 내 몸을 떨게 만드는 이 불안은 나의 합리성, 내가 믿는 합리성의 구조를 드러내주는 고마운 메신저이다. 남들이, 아니 내가 '비합리적'이라 말하는 내 믿음의 합리성 구조는 바로 내가 느끼고 믿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사는 세계, '진심'의 세계이다. 나의 진심을 모르는 내가 내게 잘해주기란 불가능하다. 이처럼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는 함께 간다.

그리고 그 결과를 두려워 하는 이에게 나는 오직 나 자신이 경험한 나의 진심구조를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 말은 노자에 나온다.

"하늘의 그물은 성기어 빈틈투성이처럼 보이지만 빠져나가는 것이 없다."

노자에 좋은 길과 나쁜 길은 서로 기대어 있고 내 몸이 망한 것도 이 길이지만 이  길에서 나가는 길도 이 길이므로, 내가 어찌 어리석고 악한 사람을 남이라 비웃고 탓하기만 할 수 있으랴. 흥해도 이 길로 흥하고 망해도 이 길로 망하니, 불행의 조건이 행복의 조건이며, 죽음의 조건이 삶의 조건이니, 두 길은 다른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길이 귀히 여겨지는 것이란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남과 나를 모두 너그럽게 바라보되, 남과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조작도 없이 내가 믿고 보고 그 안에서 사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삶을 살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지옥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단 말인가?


21. 때로 사랑과 외로움은 같이 걷는다. 쓸쓸함 역시.


22. 나의 참다운 행복과 너의 참다운 행복은 모순되지 않으며 실로 일치한다. 이것은 인식이나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믿음과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23. 어떤 위로도 위안도, 변명도 상황의 조작도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렇게 나는 '오늘'을 견딘다.







vaughan williams, lark ascending, hilary hahn



2015.05-20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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