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춤이 시작될 때, 아이들은 집에서 바늘을 가지고 논다, 바늘과 핀을.’ 이현은 이제 법당에 홀로 앉아 방금 읽은 시구(詩句)를 나직이 읊조려 본다. 짧은 한숨을 내쉰 이현은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긴다. 이현은 고개를 들어 허공에 떠있는 푸른 바늘을 말없이 쳐다본다. 이현은 눈을 감고 손을 뻗어 조심스레 바늘을 돌린다. 잠시 후 이현은 살며시 눈을 떠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다. 바늘 끝은 이현이 앉아 있는 맞은편 허공을 가리키고 있다. 잠시 말없이 허공의 바늘을 바라보던 이현은 이윽고 손가락을 뻗어 바늘 끝이 자신을 가리키도록 조금 아래쪽으로 돌려놓는다. 푸른 바늘과 바늘집을 챙겨 법당 앞 나무 그늘에 앉은 이현은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는 부처이다. 모든 것이 조용하다. 오직 법당 뜰 앞의 잣나무만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 이결, 『고려초 高麗抄』, 생각길, 2017, 1쪽.
0. 나는 구글 동영상 검색창에 씨피카(cifika)를 쳐 넣는다, 오른손 검지를 이용하여. 검지(指), 또는 집게손가락(index)은 잡는 손가락이자,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집게손가락은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 사이의 둘째손가락이다. 오른손으로 쳤으므로 검지는 오른쪽으로부터 네 번째, 왼쪽으로부터 두 번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방금 알았다. 다섯 번째 곡이 ‘ooh-ah-ooh’이다. 나는, 여전히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노래를 가리켜 클릭한다.
1. 당신은 이 책을 든 이래로, 실은 책을 집어 들기 전부터, 여하튼 이 글은 핑거프린트의 끝부분에 실리게 될 터이므로, 나는 당신이 아마 한참 전부터 머릿속에 바늘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 그 바늘은, 가령 당신의 어머니가 쓰시던 초록 뜨개바늘과 같은, 특정 바늘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어떤 특정 바늘이 아닌 그냥 바늘 ‘일반’의 이미지와도 같은 어떤 바늘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당신게 질문을 던진다. 그 바늘은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 당신이 바늘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다면 그 바늘이 지금 사방팔방 온갖 방향으로 뱅뱅 돌고 있지 않은 이상 그 바늘은 분명히 어떤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위, 아래? 왼쪽, 오른쪽? 이쪽, 저쪽?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해서 어떤 바늘도 아닌 바늘 그 자체의 이미지에 다른 방향이 아닌 하필 그 방향을 부여하게 됐을까?
0. 좀 더 생각해보면, 생각 속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바늘이든 실제의 바늘이든 그것이 바늘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한 그 바늘은 어떤 특정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혹은 때로, 관념 속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바늘은 어떤 방향을 막연히 가리키지 않고 그냥 바늘로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나,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혹은 여러 방향을 가리키며 뱅글뱅글 돌고 있을 것이다. 여하튼 바늘의 형상을 하고 있는 한!). 피와 살을 가진 모든 실제 바늘은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수밖에 없다.
1. 이는 바늘이 바로 그렇게 생긴 사물을 지칭하는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늘은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물건에 붙은 이름이다. 바늘의 기능은 찌른다, 꿰뚫는다, 꿰맨다, 낚는다, 치료한다, 아프게 한다, 함께 묶는다, 엮는다, 붙인다, 잇는다, 가리킨다, 홈을 따라 지나간다 등등이다. ‘가리킨다’는 찌른다, 꿰뚫는다, 이어 붙인다 등의 초기 기능에 비해서는 상당히 후대에 파생된 기능이었을 것이다. 가리킨다와 관련된 사물의 형상은 무엇보다도 ‘뾰족함’이다. 그런데 한 사물이 여러 방향으로 다 뾰족하면 이는 한 방향을 가리키기에 적당한 모양이 아니므로, 이 물건은 한 방향으로만 뾰족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처음부터 잘 가리키기 위해 고안된 이 물건은 한쪽으로 뾰족한 물건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둥글고 한쪽으로 뾰족한 물건 역시 가리킨다는 기능을 수행하기에 불편하거나 불필요한 부분이 있으므로 바늘이라 불리는 이 물건은 간소화 작업을 거쳐 길고 가느다랗고 한쪽으로 뾰족한 물건이 되었을 것이다. 이 바늘은 나침반처럼 양쪽이 다 뾰족할 수도 있고, 시계바늘처럼 한쪽만 뾰족할 수도 있다. 여하튼 이제 바늘은 길고(1) 한쪽 혹은 양쪽이 뾰족한 물건을 지칭한다. 바느질할 때의 바늘은 실을 꿰어넣어야 했으므로 길고 한쪽이 뾰족하고(반대편은 굳이 뾰족할 필요가 없다) 반대쪽의 끄트머리에 구멍(0)이 있어야 한다(이런 면에서, 바늘의 생김새는 그 자체로 주역(周易, the book of change in zhou dynasty, 주나라 때 만들어진 변화에 관한 책)의 언어, 음양(陰陽, 그림자와 빛)의 언어, 컴퓨터 연산의 디지털(digital, digitus, digitalis, finger, 손가락)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모두 이항대립(二項對立, opposition binaire)의 언어들이다).
0. 시계, 적어도 해시계가 발명된 이래, 그리고 수천수만 년이 흐른 후대에 우리가 아는 시침, 분침, 초침을 가진 시계가 발명되고,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나침반이 발명되고 시계와 나침반에 바늘들이 특정한 시각 혹은 지점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게 되었다(나침반은 받침 위의 약속된 특정 방향 곧 공간을 가리킴으로써 공간을 가리키나, 시계는 특정 방향 곧 공간을 가리킴으로써 시간을 가리킨다. 시간의 공간화, 실로 놀라운 발상이다!).
1.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가령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모두 어떤 방향인가를 가리키고 있다. 이는 피와 살을 지닌 이 세상의 모든 실제 바늘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왼손 새끼손가락이 반드시 어떤 방향인가를 가리키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과 꼭 같은 이치이다. 당신의 몸은 늘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위치해 있을 수밖에 없고, 당신의 머리가, 손이, 발 역시 늘 특정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수밖에 없다. 관념 속 이미지의 바늘이 아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실제의 바늘은 특정 시간과 장소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원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바늘들이 위치하는 장소의 위도와 경도로 이루어진 좌표를 추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존재한다, 일어난다는 말을 의미하는 영어 표현 중에 take place라는 말이 있다. 불어로는 같은 뜻의 avoir lieu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의 영어로 옮긴다면 have place의 뜻이다. 관념 속에 존재하는 사건은 실은 일어난 적이 없다. 따라서 일어난 장소가 없다, 장소를 갖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의 바늘이 그것이 존재하는 실제의 특정 시공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은, 당신의 탄생 사건처럼, 1993년 7월 21일 아침 9시 반, 대구 약전거리에서처럼, 특정 시공간 속에서 일어난 일일 수밖에 없다.
0. 이처럼 당신 책상 위의 파란 색 볼펜, 당신의 오른발 네 번째 발가락, 핸드폰의 스케줄러, 부엌 선반 위의 과도, 나아가 당신의 시선, 관심은 반드시 어딘가, 언젠가를,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指/志向性, intentionality). 그런데 꼭 이렇게 생각해야만 하는 걸까? 그런데, 보다 근본적으로, 바늘이 어떤 방향을 ‘가리키기는’ 하는 걸까? 가령 침팬치에게 화살표를 보여주면 침팬지들은 이 화살표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걸 알까? 신라인에게 시계를 보여주면 이것이 시간을 측정하는 기계, 장치라는 걸 알까? 침팬치에게 시계를 보여주면 이것이 시간을 측정하는 기계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듯이, 신라인 역시 이 물건이 시간을 측정하는 기계라는 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말일까? 우리가 시계라고 인식하는 벽에 걸린 동그란 저 물건은 시계이므로 우리가 시계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시간이라는 관념과 숫자, 12진법, 60진법, 시침, 분침, 초침 등의 기호를 읽는 관념과 개념, 방법이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고, 이를 시간을 가리키는 알려주는 기계, 곧 시계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을 가리킨다, 알려준다, 읽는다, 라는 관념 자체가 본질적으로 비시각적ㆍ비공간적 시간의 시각화ㆍ공간화 작업, 기호학적 형상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 뱀발 하나. 칸트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식에 앞서 감성 형식으로서의 시공간과 지성 형식으로서의 범주가 미리 주어져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했다는 것은 결코 있는 그대로의 무엇인가(물物 자체)를 인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감성/지성 형식이라는 근본적 ‘필터’를 통해서만 그렇게 인식할 수 있다. 칸트의 작업은 시공과 범주에 의존하지 않는 ‘보편적 필터’를 찾으려는 자기 모순적 작업이었고, 이를 니체가 통렬히 비판한다. “자기 이론에 대해서 자신만을 예외로 놓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그 해결책은 자기 이론도 다른 이론들과 똑 같은 다만 하나의 이론으로 상대화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게 신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은 나지, 신이 아니다. 신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줄 신이 인간들 중에 없다, 있는 것은 인간들뿐이다. 이게 ‘신은 죽었다’는 말의 의미이다. 결국, 절대적ㆍ보편적인 신은 없고, 있는 것은 각자가 믿는 신들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신이고 옳고 합리적이라고 믿는 기준은 누가 정하나? 바로 내가! 그러므로 신이 죽었다는 말은 결국 각자가 누가 신인지를 결정하는 존재라는 말이 되고, 이는 결국 각자가 신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신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어떤 존재가 신인지 아닌지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인간은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신이다!
1. 그런데 바늘의 가리킨다는 속성과 시계, 나침반 바늘의 가리킨다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논증일까? 이는 이 글을 외국어로 번역해보면 우리는 이러한 관념의 연결이 적합한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의 시계바늘은 영어로 hand, 독일어로 Zeiger, 프랑스어로 aiguille, 스페인어로 aguja, 일본어ㆍ중국어로 時針ㆍ时针이다. 보시다시피, 영어는 손, 그 외의 언어는 글자 그대로 바늘이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둥그런 판이 있고 숫자가 있는 시계보다는 나침반이 훨씬 먼저 발명되었는데, 나침반(羅針盤, 바늘을 놓은 쟁반)은 나반(羅盤, 펼친 쟁반), 침반(針盤, 바늘쟁반) 등으로도 불렸다(나침반은 원래 중국에서 발명된 것이지만 유럽으로 수출되었다가 근대에 중국으로 역수입된 물건이다. 이 과정에서 나침반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시계바늘은 시침(時針)ㆍ분침(分針)ㆍ초침(秒針)에서 보이는 것처럼, 앞의 서양어를 중국어 혹은 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영어를 제외한 서구어의 대세를 이루는 ‘바늘’(針)을 그대로 번역한 말일 것이다. 이미 서구어의 경우에도 나침반과 시계의 바늘은 실제의 바늘이 아니라, 뾰족한 무엇인가가 ‘가리키는’ 기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비유였다. 바늘은 가리킨다, 곧 가리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0. 그런데 어떤 것이 어딘가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쉽게 말해서 가리키는 바늘과 가리켜지는 방향이다. 그러나 칸트의 예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동서남북을 모르는 자가 나침반을 볼 수는 없다. 12진법을 모르는 자가 오늘날의 시계를 읽을 수는 없다. 곧 나침반과 시계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미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식의 틀이 선행하고 있어야 한다. 가령 동서남북을 정하기 위해서는 방위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1. 기준. 동서남북(東西南北)이라는 설정과 명명(命名)에는 자연과 당연에 입각한 어떤 필연적인 기준이 존재하는가? 왜 동남서북이 아닌가(시계 방향), 왜 동북서남은 아닌가(고돌이 방향)? 그런데 보통 시계나 나침반은 위쪽이 기준이 아닌가? 왜 북동남서, 또는 북서남동이 아닐까? 지금 현대 한국어는 ‘동서남북’이다. 그렇다면 왜 동서북남, 또는 서동남북은 아닌가? 일본과 중국은 공히 동서남북을 사용한다. 일본과 중국이 만든 서구어가 들어오기 이전인 조선 초기 수도를 중심으로 사면(四面)의 방위(防衛)를 맡은 관청명은 ‘동서남북도감’(東西南北都監)이었는데(현대의 ‘수도방위사령부(首都防衛司令部) 느낌), 이는 적어도 고려 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면도감’(四面都監)을 이어받은 명칭이다. 이는 당대의 제국을 구축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당시 동아시아 문화권의 ‘보편적’ 기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4방인가? 3방, 5방, 6방, 7방, 8방은 안 되는가? 그리고 동서남북은 왜 +자 형으로 이름을 붙였나? ×자 모양으로 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이 모든 것은 누가 정한 것일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과정을 거쳐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0. 어떤 지도를 한 장 떠올려보라. 당신은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지도 자체를 떠올릴 수도 있고, 어떤 특정 지역을 담은 구체적인 지도 한 장을 떠올릴 수도 있다. 지도 자체를 떠올린다는 것은 가능할까? 지도 일반, 지도 자체의 관념, 개념이 떠올려주는 이미지를. 또는, 언어를, 인간을, 사랑을 떠올려보라. 언어, 인간, 사랑 그 자체를. 가능한가? 당신은 언어 자체가 아닌, 오직 어떤 특정 언어들, 영어, 라틴어, 중국어, 한국어만을 떠올릴 수 있다. 당신은 인간 자체가 아닌, 오직 어떤 특정 인간들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일단 그 인간은 성별을 가질 것이다. 당신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닌, 오직 어떤 특정한 사랑의 사례들만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 사랑은 적어도 둘 이상의 주인공들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 자체, 인간 자체, 사랑 자체를 이야기한다. 이것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불가능한가?
* 뱀발 둘. 가능하다고 믿는 입장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플라톤이 기술한 이데아(idea)론이다. 플라톤의 철학(philosophia)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실제 사물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케 한 근원이자 본질로서의, 원본(paradigma)으로서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활동이다. 플라톤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 지도가 이데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실재(reality)라고 믿는 이 세계가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 곧 가짜라고 말한다.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이 세계가 가짜 복사본, 그것도 불완전한 지도이고, 그 지도가 베끼고자 했던 진짜가 이데아의 세계이다. 진짜 현실은 저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이고,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이 세계가 가짜이다(니체가 ‘대중들을 위한 플라톤주의’라고 불렀던 그리스도교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된다.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교에서는 이승보다 다가올 내세, 영생(永生)이 훨씬 더 중요하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된’ 이승은 오직 영생을 위한 준비와 수행의 과정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플라톤주의의 기준은 이승이 아니라 내세, 곧 영생이다.
0. 하나의 바늘이 어딘가를, 무엇인가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바늘과 방위와 이 방위를 구성하는 관념과 개념, 곧 인식의 체계가 선행해야만 한다. 일단 바늘을 고정시켜야 한다. 실은 경계가 없는 지구를 균등히 분할하여 위도와 경도로 나누어야 한다. 지구가 거대한 하나의 자석인 듯이, 자전축을 따라 각각 북쪽과 남쪽의 끝, 극단이라 불리는 북극(北極, arctic)과 남극(南極, antarctic)을 설정해 위도(latitude, 緯度, 가로ㆍ동서로 놓인 줄)를 만든다(영어의 명명은 북극을 기준으로 하여, 그 맞은편을 남극이라 불렀다). 양 극단의 정중앙을 지나는 선이 적도(equator, 赤道, 양극단의 균형을 잡아주는 상상의 길, 한자 ‘붉은 길’은 고대 중국의 천문학에서 태양이 바로 위를 통과하는 지점을 천구도(天球圖)에서 붉은 선으로 표시한 것에서 왔다. 태양이 지나는 황도(黃道), 달이 지나는 백도(白道)와 같은 유래를 갖는다)이다. 이제 경도(longitude, 經度, 세로ㆍ남북으로 놓인 줄)를 만들기 위해서도 어떤 기준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구는 둥글고 지구상의 어떤 지점도 그 자체로 우월한 ‘자연적’ 기준을 제공할 수 없으므로, 1884년 26개국이 참여한 워싱턴국제회의에서 파리와 뉴욕을 물리치고 투표를 통해 이른바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 greenwich meridian)의 지위를 획득했다(1차 투표에서 탈락한 미국이 같은 영어권의 영국을 밀어주어 영국 그리니치로 자오선이 확정되자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는 자신들의 기준인 ‘파리 자오선’(méridien de paris)을 1911년까지 계속 사용한다).
1. 세계지도를 한 장 떠올려보라. 그리니치 자오선은 당신 마음속 지도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가? 당신이 영국인 혹은 미국인 혹은 프랑스이라면 자오선은 분명이 당신이 어릴 적부터 보아온 세계지도의 정중앙, 곧 영국과 대서양을 지날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당신이 본 유일한 세계지도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일본인이나 중국인 혹은 한국인이라면 당신의 세계지도에는 자오선이 왼쪽 끝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도의 한 가운데에는 태평양과 하와이가 있을 것이다. 자, 이 두 지도 중 어떤 지도가 먼저 그려진 지도일까? 물론 정답은 대서양이 가운데 그려진 지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태평양이 가운데 그려진 지도를 보고 자란 것일까? 앞의 지도를 누가 뒤의 지도로 바꾼 것일까? 확실한 것은 그것이 한국인이 아니며, 중국인, 혹은 아마도 일본인이리라는 사실이다. 이 ‘주체적’ 변경의 주체가, 중국인도 아니고, 일본인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일중한(日中韓) 삼국 중 하필이면 일본이, 라는 생각, 혹은 왜 명명의 순서가 한중일(韓中日)이 아니라, 혹은 심지어는 중한일(中韓日),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일한중(日韓中)도 아니고, 하필이면 일중한이야,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차라리 이 생각을 품은 주체가 암암리에 품고 있는 자연(自然)과 당연(當然)의 구조, 곧 무의식의 구조를 드러내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0. 이제 지도의 좌우가 아닌 위아래를 보자. 당신이 상상한 마음속의 지도에는 어떤 대륙이 가장 위쪽에 그려져 있는가?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 대륙일 리는 만무하다. 그것은 아마도 남극이 아닌, 북극일 것이다. 북쪽이 위쪽인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것이 자연의 위아래(上下)가 아닌가? 그런데 자석(磁石, 끌어당기는 돌)은 왜 지북철(指北鐵)이 아니라 지남철(指南鐵)일까? 서울에서 대구로 여수로 광주로 내려가는가? 서울로 올라가는가? 우주와 지구에 위아래가 있을까? 그리니치를 자오선으로 정한 것이 서구인들일 수밖에 없듯이, 서울을 수도로 정한 것은 서울사람들이고, 서울말을 표준말로 대구말과 여수말 광주말을 사투리로 규정한 것이 서울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지도가 발생시키는 담론효과이다. 권력 정당화의 궁극적 형식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사실, is)에 대한 해석의 지배와 이를 통한 ‘마땅히 그래야 할’ 당연(가치, should)에 대한 해석의 지배이다. 자연과 당연에 대한 해석의 지배를 위한 기준, ‘표준’을 제공하는 것이 보편성이다. 보편성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으며, 오로지 정치적이다. 보편성이야말로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한 독점적 해석을 통해 세계의 기존 지배 시스템을 유지하는 핵심적 장치이다. 자연(nature)에 대한 해석, 곧 시간과 공간의 해석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인간을 지배한다. 그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nature)에 대한 해석을 홀로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 뱀발 셋.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출신의 스튜어트 맥아더는 12세이던 1970년 학교에 남반구를 위쪽에 두는 지도를 과제로 제출했다. 지리 선생님은 숙제를 다시 해오라고 시켰다. 21세가 되던 해 그는 이 작업을 다시 시도했다. 그리고 『맥아더 개정 범세계 지도』(McArthur's Universal Corrective Map of the World, Artarom, 1979)는 35만부 이상 팔렸다. 이 지도의 원본에는 다음과 같은 항의의 글이 적혀 있다. “마침내 최초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영광스러우나 무시되었던 우리나라[오스트레일리아]를 세계 권력투쟁의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끌어내 정당한 위치로 올려놓기 위해 오래전부터 무르익은 성전(聖戰)이 첫발을 내딛어졌다. 오스트레일리아가 북반구의 이웃 국가들 위로 우뚝 솟아 우주의 지배적인 위치에 당당히 군림하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부분의 제국주의적 함축(?)은 배제하더라도 맥아더의 지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당연’과 ‘정상’ 혹은 ‘자연스러움’이 사실은 역사적ㆍ정치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즐거운 철학적 깨달음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당ㅅ긴이 이 지도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이 지도의 모든 대륙들이 ‘거꾸로’ 그려진 것 같고 자꾸만 ‘원래’ 방향대로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면, 이는 당신이 지금 얼마나 세계를 지배하는 보편성, 곧 ‘서양적 보편성’에 의해 가히 완벽히 조건화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기준점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연에는 기준점이 없다. 따라서 이른바 스스로를 보편적인 ‘자연적’ 기준, 당연, 필연으로 가정하는 모든 기준은 실은 ‘인위적’ 기준이다. 이 인위적 기준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결정된다. 기준은 보편이고, 보편은 통일을 낳고, 보편적 통일은 제국을 낳는다. 기준은 하나로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이다. 무한 가지의 보편성 중에 이 보편성, 곧 나의, 우리의 보편성만이 진짜 유일한 자연적 절대적 객관적 있는 그대로의 과학적 중립적 보편성이라는 말은 차라리 하나의 농담이다. 보편성은 실체가 아니라, 도구이다. 방위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나침반이 필요하고, 나침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방위가 필요하다. 방위와 나침반 모두의 기준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는 방위가 없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선을 그어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나침반과 시계가 잘 보여주듯이, 바늘이 어떤 특정 방향 혹은 시각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바늘이 고정되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바늘을 위한 ‘고정점’(point de capiton)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는 고정점이 없다. 따라서 경쟁하는 고정점들이 생겨난다. 고정점의 목적은 잘 기능하는 것, 곧 방위와 시각을 (여타의 경쟁 고정점, 체계보다) 좀 더 잘 가리키는 것이다. 라캉이 말하는 고정점은 전통철학에 의해 ‘보편성’이라 불려온 것이다. 이는 이른바 ‘진리’를 실체가 아닌 관계 속의 유용한 도구, 장치로 바라보는 것이다. 도구란 그 자체가 절대적이거나 목적이 아니므로 불편하거나 더 유용한 도구가 나오면 버리는 것이고, 더 편리한 도구가 나오기 전까지 지금 우리가 편의상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 혹은 보편성과 마찬가지로, 오직 파괴하고 버리기 위해서 오늘의 기준, 보편성, 진리를 습득한다.
* 뱀발 넷. 일본인들의 번역에 의하면, the 정관사(定冠詞, definite article)로, a나 an과 같은 용어는 부정관사(不定冠詞, indefinite article)로 번역되었다. 번역은 원래의 서구어 형식에 따라 부정관사를 정관사의 부정으로 간주했다. 정관사는 ‘정해진’ 관사이고, 부정관사는 ‘그렇지 못한 곧 정해지지 않은’ 관사이다. 관사란 ‘얹음씨’라는 순우리말 번역이 잘 보여주듯, 사모관대(紗帽冠帶)할 때의 그 관, 곧 ‘얹는’ 관(冠)이다. 따라서 관사란 ‘얹어서 사용하는’ 품사이다. 곧 명사 앞에 ‘얹어 놓아’ 가볍게 제한 곧 한정(限定)하는 말이다. 일허게 보면, 특수한 개별적 사물 한 개를 지칭하는 a와 an은 정관사로, 특정되지 않은 일반적인 사물 전체을 보편적으로 지칭하는 the는 부정관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일본어 번역뿐만 아니라, 원어인 서구어 역시 반대로 되어 있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우선 the는 이런 보편적 지칭 이외에도,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앞서 나왔던 바로 그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한정해주는’ 관사, 곧 정관사라 불린다. 마찬가지로, a, an 역시 앞서 말한 것과 같은 특정 사물 한 개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특정하지 않은 사물 일반을 지칭하는 ‘부정관사’로 사용된다(부정관사는 사실상 비(非)-정관사 혹은 미(未)-정관사로 불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실상 오늘날의 느낌으로는 the와 a, an을 순서대로 특정(特定)관사, 비특정(非特定)관사 정도로 번역해보면 더 쉽게 이해된다).
0. ‘가리킨다’는 말은 그에 앞서는 ‘앎’, 곧 인식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한 말이다. 누가 내게 동화사 가는 길이 어디인가를 묻는다면, 내가 절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동화사라는 절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 혹은 동화사 가는 길을 모를 때, 나는 그 사람에게 동화사 가는 길을 가리켜 줄 수도, 알려줄 수도 없다. 가리킴은 늘 그에 앞서는 앎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앎은 늘 ‘특정’ 시대와 공간의 ‘특정’ 방식을 따라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그 방식으로’ 인식된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지도와 달력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지도도 달력도, 곧 자신이 탄생한 구체적인 특정 장소와 시간을 갖지 않는 인식이란 이 세상에 없다. 당신 앞에 놓인 바늘의 방향이 이미 항상 어떤 특정 관심과 가치의 반영이듯이, 당신의 삶 앞에 놓인 모든 인생의 방향과 지침(指針) 역시 이미 항상 어떤 특정 관심과 가치의 반영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앎은 결코 ‘일반적인’ 앎 자체일 수 없으며, 오직 특정인들의 특정 관심에 의해 특정 방식으로 구성된 ‘특정’ 인식일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나는 다른 모든 이들과 모든 면에서 다르므로, 어느 누구도 내 삶의 가이드, 나침반이 되어 줄 수가 없다. 내 삶의 나침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이란 오직 나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이었을 뿐이다. “이 하늘 위, 이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天上天下唯我獨尊).
“오직 법당 뜰 앞 잣나무만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조용하다. 인간은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는 부처이다. 푸른 바늘과 바늘집을 챙겨 법당 앞 나무 그늘에 앉은 이현은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잠시 말없이 허공의 바늘을 바라보던 이현은 이윽고 손가락을 뻗어 바늘 끝이 자신을 가리키도록 조금 아래쪽으로 돌려놓는다. 바늘 끝은 이현이 앉아 있는 맞은편 허공을 가리키고 있다. 잠시 후 이현은 살며시 눈을 떠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다. 이현은 눈을 감고 손을 뻗어 조심스레 바늘을 돌린다. 이현은 고개를 들어 허공에 떠있는 바늘을 말없이 쳐다본다. 짧은 한숨을 내쉰 이현은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긴다. 이현은 이제 법당에 홀로 앉아 방금 읽은 시구(詩句)를 나직이 읊조려 본다. ‘노래와 춤이 시작될 때, 아이들은 집에서 바늘을 가지고 논다, 바늘과 핀을.’”
- 이결, 『고려초 高麗抄』, 생각길, 2017, 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