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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10.

maurice merleau-ponty, l'oeil et l'esprit


 

 

 


 


 

 

 











46(쪽). 프랑스 남서부 라스코(lascaux) 후기구석기(기원전 15,000-13,000년 전) 벽화.







위키: http://en.wikipedia.org/wiki/Lascaux







49. 알베르토 자코메티, <에메 마그의 초상>(1960)











58. 렘브란트, 야경꾼(1642)











63.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1434)













68.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1892-1896)











110. 니콜라 드 스탈, 녹색 아틀리에(1954)













112. 폴 세잔, 발리에의 초상(1906)











113.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1895-1900)







126. 앙리 마티스, 긴 머리의 목욕하는 여자(1942)













127. 파울 클레, 루체른 근교의 공원(1938)











135. 테오도르 제리코, 엡섬 더비(1821)













144. 카라바조,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1593-1594)











148. 도미니크 앵그르, 그랑 오달리스크(1814)











149. 조르주 루오, 나부(1925)











150. 제르멘 리시에, 메뚜기(1945)













151. 오귀스트 로댕, 웅크린 여인(1882)




















눈과 마음                                    

_Maurice Merleau Ponty

                         정태종

 

 

1.     과학과 예술에 관한 질문

 

 

과학에 있어서 사유는 사유에 의해서 고안된 취사선택의 총합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통제가 있어야 한다.(26) 과학은 가공되지 않은 세계, 존재하는 세계를 토대로 그 위에 세워진 구성물이며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28) 과학의 사유는 사유에 앞서는 현장 즉 우리의 삶에서 펼쳐지는, 현실태의 몸이 만나는 감각과 일하는 나날의 세계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30) 과학과 다르게 예술 특히 회화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의미를 길어낸다. 그렇다면 화가가 찾고 있는 은밀한 과학, 그 바탕은 무엇일까?

 

 

 

2.     화가의 역할

 

 

화가는 기능의 몸이 아닌 시지각과 움직임이 뒤얽힌 몸을 세계에 빌려주며 이로써 세계를 회화로 바꾸는 몸을 가지고 있다. 세계를 봄으로서 시지각이 형성되며 그것은 사유작용으로 내재성과 관념성의 세계를 마음 앞에 세우며, 내 움직임은 시지각의 자연스러운 결과요, 성숙이다.(37)  내 몸은 세계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어서 보는 능력의 이면을 인식할 수 있는 사물들 사이에 잡혀 있는 하나의 자아다.(39) 인체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때는 봄과 보임 사이에 만짐과 만져짐 사이에 이 눈과 저 눈 사이에 손과 손 사이에 일종의 재교배가 일어나는 때이다.(43) 사물들은 내 안에 자신의 현존을 불러일으켜서 사물의 내적 조응물, 곧 현존의 관능적 공식을 마련한다. 우리 눈은 살로 이루어진 단순한 수신기가 아닌 세계의 컴퓨터이다. 사물이 화가를 거쳐 간다는 것은 마음이 눈을 통해 밖으로 나와서 사물들 사이를 거닌다는 것이다.(55) 화가의 역할은 자기 내부에서 가시화되는 것을 포착하고 투시하는 것이다.(60) 화가와 보이는 세계 사이에는 역할의 역전이 일어나며 사물들이 자기를 본다고 한다. 화가는 거울이라는 기계적 트릭을 통해 보는 이와 보이는 것의 탈바꿈 즉 자기가 보는 것에 사물들이 보는 것을 덧붙여 총체적, 절대적 시지각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회화는 우리가 갖고 있는 온갖 범주들을 뒤섞어 시지각이 보이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것들로 하여금 보이는 존재가 되게 한다..

 

 

 

3.     데카르트의 예술론

 

 

데카르트의 빛은 우리가 보는 빛이 아니라 외부에서 우리 눈에 들어오는 시지각을 작동케 하는 기능적인 빛이며 데카르트의 시지각 모델은 빛을 접촉작용으로 간주하는 촉각이다.(70) 거울로 대표되는 반영이나 이미지의 유사성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유이며 사물들의 개념화를 유도하는 형상이며 기호나 언어와 같아서 몸에게 주어진 기호들을 엄밀하게 해독하는 사유이다.(75) 데카르트에 있어서 회화란 존재로 다가감을 정의케 해주는 중추적 작용이 아니라 사유의 한 양태, 한 변종이다.(76) 데생과 동판화는 대상의 형식을 보여주는 기호를 우리에게 제공하며 연장의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조작이다.(78) 회화에 있어서 깊이는 높이와 너비에서 파생된 제 3의 차원인데 이는 우리가 깊이를 보는 것이 아닌 사물들의 겹쳐짐으로 표현될 뿐 실제 사물들은 서로의 밖에 있는 즉자성의 공간에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구상한 공간은 사유가 관점을 초월하여 내려다보는 공간이다.(83) 이것으로 구축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었고 문제는 공간을 전적으로 실증적인 존재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원근법을 포함한 그 어떤 표현 수단도 회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회화를 테크닉으로 변형할 수 없다.(87)

 

 

시지각은 조건화된 사유 즉 시지각에는 사유가 필요하나 보기 위해서는 사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몸에 닥친 일을 계기로 생겨난다.(88) 시지각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행위들이 사유를 빚어내며 이를 위해 영혼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영혼이 거하는 몸은 최초의 공간으로 다른 공간의 모체이며 이 공간이 있어야 비로소 영혼은 사물들에게로 연장할 수 있다. 시지각은 이중화되는데 사유의 대상인 시지각은 사유, 큰마음 탐구, 판단, 기호읽기이며, 사건으로 발생하는 시지각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영혼과 몸의 결합체로 실행하여 보는 것에 대한 사유에서 시지각 행위로 넘어간다.(91) 그러나 시지각을 실행하고 이를 통해 존재케 할 수는 있지만 사유의 대상이 아니며 실재적인 것을 끌어낼 수는 없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그것을 그만둬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고 모든 자명성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제약을 가한다. 과학과 철학은 데카르트주의의 두 결과물이다. 우리는 영혼과 몸이 혼합된 존재이며 그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몸은 시지각이나 만지기의 수단만이 아니며 몸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의 기관이다.(97) 이제 새로운 공간은 나라는 원점을 기준으로 측정되는 공간성의 영도이며 공간과 세계는 나를 둘러싸고 있다. 시지각은 자기 자신 이상을 보여 줄 수 있고 화가는 자신의 시지각을 몸짓으로 만들며 세잔의 말대로 그림으로 사유한다.

 

 

 

4.     회화과 시지각

 

 

사건과 위대한 작품을 끝없이 재해석 하는 것은 정당하며 재해석을 하여도 작품 자체는 언제나 자기자신이다.(103) 겉으로 드러난 것 이면의 능동적 존재 방식으로 회화를 살펴 볼 수 있다.

깊이는 입체감과 관련되며 현장성의 경험이다. 외형은 부차적이며 색은 보이는 세계의 비법이 아니므로 사물들의 심장은 공간-표피, -표피를 초월한 곳에 있다. 색면들의 가변이동으로 공간성이 나타난다.(114) 화가는 보이는 세계의 자기복귀에 의해서 사물들 틈에서 존재하며 그림은 자가형상적, 마치 스스로 생성된 것 같은 것들 이어야 한다. 예술은 구축, 조작이 아니고 외부와의 좋은 관계도 아니다. 예술은 알아듣기 힘든 외침이며 그 외침은 숨겨진 힘들을 간직한 일상적 시지각 속에서 존재 이전의 비밀을 일깨운다.(116) 회화와 데생과 조각 사이에 등가체계가 있다.(119) 그 자체로 가시적인 선은 없다. 선은 가시적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화하는 것이며 사물들의 탄생의 청사진이다. 선을 긋는 순간 선의 수준, 선의 양태가 정립된다. 선은 클레의 예처럼 절대 회화의 생성원리를 지키거나 마티스의 데생처럼 산문적 표식과 형태 구성을 함께 표현한다.(124) 회화는 내적 부조화를 통해 움직임을 가시화한다. 회화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지만 공존 불가능한 것들을 맞붙일 때 움직임은 나타난다. 공간과 결부된 몸의 정지장면은 시간지속과 결부된다. 회화는 언제나 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의 바깥에 있을 수 없다. 시지각은 내가 나로부터 부재하는 방법이며 내부에서 빠져 나와 큰존재의 핵분열을 목격하는 방법이고 이를 거친후 나는 비로소 나 자신으로 복귀한다.(136) 외재적 존재들이 서로 다름에도 온전하게 공존하는 것은 오직 시지각을 통해서이다.(139) 시각이 느끼는 질이란 보편적 가시성, 곧 유일무이한 큰존재가 응고된 것으로 마치 질감과도 같다. 존재하는 것이 내가 보고 보이게 만드는 것에 앞서고 내가 보고 보이게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에 앞서는 것, 이것이 시지각이다.(145).

 

 

 

5.     회화의 지속성

 

 

보편회화, 회화의 총체화, 온전히 실현된 회화 같은 개념은 의미가 없다. 화가는 언제나 세계를 그리고 그가 찾아낸 것을 계속 찾아야 하며 세계는 미완성 상태로 끝날 것이다. 회화의 말없는 사유를 만날 때면 헛된 의미화라는 인상을 받는다. 사유, 언어, 회화, 과학의 질문, 모색의 불완전성에 이성의 정점이라 하는 것에 실망한다. 이런 실망은 공허를 보충해줄 실증성이 결여에서 오는 실망이다. 회화나 문명들 사이에 서열이나 진보를 매길 수 없다면 최초의 회화들이 이미 먼 미래에 도달해 있다는 의미이며 어떠한 그림도 회화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각각의 작품이 다른 작품에 영향을 주며 다른 물건처럼 마모되며 세월을 지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157)

 

 

 

6.     몸과 세계 그리고 상호관계성

 

 

전통 철학은 형이상학적 주제에 관심을 갖고 구체적 세계와의 관계는 소홀해 왔다. 근대의 자아개념은 몸을 절제와 억압의 대상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메를로 퐁티는 감각은 감각하는 주체가 감각하기로 결단을 한 후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므로 몸과 마음은 분리되지 않으며 의식은 몸 속에 내재되어있다고 본다. 즉 정신적 활동도 몸 속에 있으며 몸의 활동에 의해 나타난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은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방사시키면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나의 몸이 대상을 취하기도 하지만 대상이 나의 감각을 취하기도 한다. 몸은 상호감각의 주체이며 몸과 세계는 교류, 지향적 관계를 가지므로 어느 한쪽이 능동적이고 다른 한쪽이 수동적인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감각적 다양성이 주어지고 정신에 의해 구성된다는 지성주의에 대립한다. 경험주의처럼 미리 알고 있는 것만을 주고 받고 그 이외의 것은 전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폐쇄적인 체계 내에 갇히고 말 것이다. 동작이 가지는 의미는 지적 사유 작용의 결과가 아닌 표현이며 완전히 사유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육화된 것 즉 신체의 사유이다. 나의 몸은 나는 사고한다는 사유의 주체로부터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즉 능력의 체계로서 자신의 부분들을 세계의 상징적 체계로 사용하고 전개함으로써 세계에 출현하고 세계를 파악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감각 덩어리인 살인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세계는 논리나 개념으로 정당화 될 세계가 아니라 합리성이 체험되는 세계 속에 이미 원초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계를 제대로 지각하는가 묻지 말고 세계는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것 그대로라고 해야 하며 우리에게 있어서 실재하는 것은 기술되어야 할 뿐이지 구성되어서는 안 된다. 지각은 모든 형태의 합리적 사고나 의미 구성물이 형성되어 나오는 그런 앞서 있는 로고스이다.

 

 

지각과 정신을 나누었던 것을 몸과 살로 통합하여 세계를 지각하는 행위로 설명하는 것은 직접적 지각인데, 그럼 영화, tv, 인터넷과 같은 매스 미디어와 디지털을 통한 지각이 많은 현대는 제대로 지각되지 않는 것일까? 사회가 변화하고 생활이 달라지면 지각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7.     더 생각해야 할 것들

 

 

1. 메를로 퐁티는 의미와 무의미에서 대상의 부드러움, 단단함을 촉감으로서가 아니라 눈으로 보며 심지어 냄새도 눈으로 본다고 주장한다. 감각에서 시각의 중요성은 다른 감각에 비해 절대적인가?

 

 

2. 몸이 지각하는 세계의 구체적인 상황들을 구조화하는 것은 경험 이전의 선험적인 것인가, 경험으로부터 획득하는 실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둘의 총합인가?

 

 

3. 시지각을 종합하는 구성력과 통일적 원리를 결정하는 인식 주체인 화가가 스타일을 만들고 손을 이용해 세계를 표현한다면 화가의 역할은 세계를 표현하는 도구일 뿐인가? 표현물의 선택은 화가가 결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세계가 결정하는 것인가?

 

 

4. 나의 몸이 대상을 취하기도 하지만 대상이 나의 감각을 취하기도 한다면 사르트르가 의식의 유무로 분류한 즉자, 대자와 대타존재로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5. 메를로 퐁티의 시지각은 회화에 가장 적합한 설명인데 다른 분야에도 같이 적용 가능한 것인가?

 

 

6. 대상의 구별은 시지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 차이는 언어에 있어 기호들의 변별성, 대립성과 같은 의미인가?

 

 

 

8.     참고문헌

 

 

1.     눈과 마음, 모리스 메를로 퐁티, 김정아, 마음산책, 2008

 


 

3.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조광제외 2, 알렙, 2013

 

4.     메를로 퐁티의 몸과 세계 그리고 타자, 김종헌, 범한철학회, 2003

 

5.     지각과 진리의 문제, 김희봉, 한국현상학회, 1999

 

6.     실내공간에 빛과 그림자의 표현 특성과 숭고미에 관한 연구, 김용섭, 이정욱, 한국실내디자인학회, 2012



7. Beauty and the Sublime, Patrick Healy, SUN,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