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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

프로이트, <히스테리 연구>,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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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mund Freud(1856~1939) mit Josef Breuer(1842~1925), Studien über Hysterie, 1895; 지그문트 프로이트, 히스테리 연구, 김미리혜 옮김, 열린책들, 1997[초판]/2003[재간].
 
 
히스테리 현상의 심리기제에 대하여: 예비적 보고서(브로이어와 프로이트)
 
사례연구
 
안나 O. (브로이어)
에미 폰 N.부인(프로이트)
루시 R. (프로이트)
카타리나(프로이트)
엘리자베트 폰 R. (프로이트)
 
이론적 고찰(브로이어)
 
히스테리의 심리 치료(프로이트)
    
 
 
* 히스테리 현상의 심리기제에 대하여: 예비적 보고서(브로이어와 프로이트)
    
 
우리는 놀랍게도 환자가 히스테리의 원인이 되는 사건을 다시 완전하게 기억해 내고 동시에 그 기억에 얽혀 있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하면, 그리고 환자가 그 사건에 대하여 가능한 한 상세하게 진술하고 감정들을 말로 표현하게 된다면, 개개의 히스테리 증상은 곧 소멸되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이 치료법에서 회상에 감정이 개입되지 않으면 대체로 전혀 효과가 없다.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의 심리적 과정이 가능한 한 생생하게 재생되어야만 성공을 거둘 수가 있는 것이다. 발생 당시의 상태status nascendi’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어야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 / 우리는 이상의 관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즉 원인이 되고 있는 사건은 수년 동안 어떤 형태로든 계속해서 작용을 미친다. 더욱이 이 작용은 중간 인자의 연결고리를 매개로 하는 간접적 형태가 아니라 직접적인 원동력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마치 의식 속에 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는 정신적 고통이 사건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눈물이 나게 하는 현상과 같다. “히스테리 환자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인 기억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17~19).
 
 
외상(外傷)적 사건에 대한 모욕당한 사람의 반응은, 그 반응이 적절한 경우에만,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인정된] 복수 따위의 경우에만 카타르시스Katharsis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언어가 행동을 대신할 수 있다. , 언어의 도움만으로 행동과 거의 마찬가지로 효과적으로 감정을 소산(消散, Abreagieren[=해소(解消)])’시킬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말하는 것 자체가 적절한 반사인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통곡과 비밀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고백 따위가 그것이다. 만약, 행위로건 말로건 그러한 반응을 하지 못했다면, 하다못해 눈물이라도 흘리지 않았다면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최초에 경험했던 감정과 똑 같이 강한 색조를 띤 채 남아 있게 된다. [...] 여기서 우리가 말해 두어야 할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이 히스테리 현상을 일으킨 체험들은 환자가 정상적 심리 상태에 있을 때는 그 환자의 기억 속에서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기껏해야 매우 개략적인 형태로만 존재한다.”(20~21)
    
 
충분한 소산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들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생각할 수 있다. / 첫 번째는 외상의 특성상 환자가 심리적 외상에 반응하지 못한 경우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는데,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경우라든지 사회적 상황이 반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든지 환자가 그냥 잊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의식적 사고로부터 억압되어(Verdrängung) 억눌려지고 억제된 경우들이다. 최면 상태에서 우리가 찾게 되는 히스테리 현상의 근원은 이런 유의 고통스런 것들이다. (이러한 히스테리 현상의 예로, 성자나 수녀, 품행이 단정한 부인, 예의범절 교육이 잘된 아이들에서 보는 히스테리성 착란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기억이 해당 사건을 경험할 당시의 환자의 심리 상태에 의해 규정된다. 최면 상태에서 발견되는 히스테리 증상의 원인들 중에는 그 자체로서는 히스테리 증상을 일으키기에 미약한데도 그 사건이 예를 들어 공포와 같은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극한 정서에 처했을 때 일어났기 때문에, 혹은 공상이나 자기 최면 따위가 막 깨려는 반 최면 상태따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게 된 것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 있어 사건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은 바로 환자의 상태이다. / 물론 두 가지 조건이 한꺼번에[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 / 두 가지 조건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 어떠한 조건 하에서건 반응에 의해 해결되지 못한 정신적 외상은 연상이라는 작업으로도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조건에서는 환자가 그 고통스런 경험을 잊겠다고 작정하고 가능한 한 연상으로부터 멀리 내쫓아 버린다. 반면 두 번째 조건에서는 정상적 의식 상태와,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병적인 의식 상태 간에 연상을 가능케 하는 연결이 없기 때문에 연상 작업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 / 결론적으로, 병을 유발하게 되는 관념들은 억압되지 않은 연상 때의 재생과 소산을 통해 정상적으로 바래어지는[희미해지는]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그처럼 생생하고 강한 감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22~23).
    
 
* 히스테리의 심리 치료(프로이트)
 
 
발견. “우리가 개별적인 히스테리 증상을 일으킨 사건에 대한 기억을 뚜렷하게 상기시켜 그에 얽혀 있는 감정들을 다시 불러일으킨다면, 그리고 환자가 가능한 한 상세하게 사건을 묘사하고 감정을 말로 표현한다면, 그 증상은 즉각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사라진다.”
 
 
설명. “우리의 치료법은 처음에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소산되지 않은 관념의 작용력을 제거해 준다. 질식되어 있던 감정이 언어를 통해 표출되도록 함으로써, 그리고 그 관념을 정상의식 상태(가벼운 최면)로 끌어들여 연상에 의해 수정할 수 있게 함으로써, 아니면 치료자의 암시를 통해 관념을 제거함으로써(건망증을 수반한 몽유상태라고 해도)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333)
    
 
따라서 브로이어의 방법에서 출발하여 나는 신경증의 일반적 병인(病因)과 기제(機制)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운이 따라준 탓에 나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선, 신경증이 생기게 된 결정 요인은 성적인요소 내에서 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일반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다양한 성적 요소가 다양한 신경증 증세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 나는 불안 신경증이 신체의 긴장이 계속 축적되어 생기며 또한 성적인 근원을 가진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335~337).
    
 
환자의 동의와 완벽한 주의가 필요한데, 무엇보다도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분석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가장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심리적 사건들을 털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치료법에 적합한 환자라고 할지라도 대다수는 치료자의 분석방향에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금방 치료를 그만둔다. 이러한 환자들에게 치료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의 인물로 남을 뿐이다(345~346).
 
 
맨 처음 나를 만났을 때 환자에게 현재의 증상이 나타나게 된 최초의 계기를 기억하는지 물어본다. 그러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환자도 있고 막연히 기억하고는 있지만 그 이상 생각해내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환자도 있다. [...] “나의 심리적 작업을 통해서, 환자들 속에서 병인이 되는 관념이 의식화되는 것(즉 생각하는 것)에 대항하는 심리적 힘을 극복해야 한다.” [...] 병을 일으킨 관념들은 모두 마음을 상하게 하는 성질을 띠고 있었고 수치감, 자기 비난, 심적 고통 그리고 피해 받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그것은 모두 사람들이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들, 차라리 잊혀 졌으면 좋았을 것들이었다. 이 때문에 자동적으로 방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 검열과정 [...] 내가 그 [심리적] 흔적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면 그 때마다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힘이야말로 증상이 발생할 때 거부의 형태로 나타났던 바로 그 힘이었다. 그리하여, 거부와 억압 때문에 관념이 병을 유발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제 보니 그 생각이 옳은 것 같다(349~350).
    
 
정신적인 힘, 즉 자아 쪽의 혐오는 원래는 병을 일으키는 관념을 연상으로부터 몰아내고 그것이 기억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한다. 히스테리 환자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실상은 알고 싶지 않다’, 즉 그 소망이 크건 작건 의식화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치료자의 과업은 심리적 작업을 통해서 이러한 연상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는데 있다. 우선 치료자는 거의 강요’(우기는) 방식을 사용한다. [...] 그러나 곧 보게 되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 ‘당연히 알고 계십니다’, ‘그래도 말씀해 보시지요’. ‘곧 생각이 날 겁니다같은 단순한 보증은 별 효과가 없다. [...] 압박술 [...] 환자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 광경이나 관념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거나 말로 표현하기에 불쾌하다고 숨겨서는 안 된다. 기억에 얽힌 감정 때문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든 그 관념에 대해 비판하지 말 것이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가 구하는 바를 착오 없이 발견할 수 있다. [...] 이 절차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어김없이 그 목적을 달성하곤 했다. [...] 내가 찾던 것이 내 손의 압박 아래 항상 나타나더라는 사실에서 내가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병인이 되는 관념이 겉으로는 잊혀진 것 같지만 사실은 항상 바로 가까이에 대기하고 있으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연상 작용으로 그 관념에 다다를 수 있다. 이때 어떤 장애를 제거시켜주는 것이 관건이 된다. 이 장애는 주체의 의지인 것 같다. 그리고 정도는 다를지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을 의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과정에 대해 완전히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350~353).
 
 
작업을 하다가 자꾸 중지될 때면 그들[환자들]은 계속, 이번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노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들이 한 말을 믿지 말고 항상 그들이 무엇인가를 억누르고 있다고 가정해야 하며, 또한 그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 그들이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은 그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매우 불쾌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은 이러한 점을 명심하고 되풀이해서 압박을 가하면서 우리 자신이 옳음을 믿어야 한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들을 때까지 말이다. [...] / 저항은 흔히 핑계 뒤에 숨어 있다. [...] 물론 압박법을 써도 무엇 하나 드러나지 않는 상황들도 있다. 예를 들면 이미 우리가 완전히 알아낸 증상의 병인을 더 찾아본다든지 실제로 통증 등 신체적인 증상의 심리적 계보를 탐구하려 한다든지 할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도 역시 환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고 이번에는 환자가 옳을 것이다(362~365).
    
 
치료자는 자신의 힘을 최대한 사용해서 일을 한다. (무지로 인해 공포가 생겼다면) 계몽가로서, 교사로서, 세상을 더욱 자유롭고 더욱 우월하게 보는 사람으로서, 참회 후에 동정심과 경의로 사면을 주는 고해 신부로서. 치료자의 성격이 갖는 한계가 허락한다면, 또 치료자가 그 특정 사례에 느낀 동정의 양에 따라 인간적인 조력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심리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그 사례의 성질이나 그 사례에서 작용하고 있는 방어 동기를 대강이라도 간파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 이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환자는 오직 그 병인이 된 인상을 재현하고 그에 얽힌 감정을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히스테리 증상에서 벗어나며, 따라서 치료 상의 과제는 오로지 환자가 그렇게 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367~368).
    
 
숨겨진 무의식적 동기의 존재. [...] (무의식 안에 있는 경우가 많은) 숨겨진 동기를 일단 발견하여 그것을 신중하게 고찰해보면 히스테리성 사고 결합에도 의외로 수수께끼 같은 것이나 법칙에 반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즉 정상인의 사고 결합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380~381).
    
 
[환자에게 말해준 우리의] 추측이 올바르면 분석 과정이 단축되고, 혹 그 추측이 틀리더라도 역시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즉 환자에게 추측이 맞는지 여부를 말하고자 할 때 강하게 부인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환자가 분명히 어떤 것을 더 잘 알고 있음을 추측하게 해주는 것이다(382).
    
 
전환 히스테리. 이 증상(구토의 욕망을 예로 들자)의 강도는 병인이 된 기억 중의 어느 한 가지에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점점 더 커지는데, 이 회상에 대해 말하기 바로 직전에 절정에 이르게 되고, 말을 끝냄과 동시에 급격히 줄어들거나 아니면 잠시 후에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다. 환자가 저항함으로써 오랫동안 말을 안 하고 주저한다면 감각의 긴장, 즉 구역질이 나오려는 긴장감을 견디기가 힘들어 도저히 이야기할 것을 강요할 수 없게 되면 정말로 구역질이 시작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구토가 심리적 행위(이 예에서는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를 대치하며 이것은 히스테리의 전환 이론이 주장하는 것 그대로라는 인상을 얻는다(384).
    
 
나 스스로는 종종 카타르시스에 의한 정신 요법을 외과적 수술에 비유하여 심리 치료적 수술이라고 명명하였고, 고름이 찬 화농 부위의 절개나 부식된 환부를 긁어내는 것 등과 유사점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점은 병적인 요소를 제거한다는 데 있기보다는 오히려 회복의 방향으로 진행 과정을 이끌 만한 상태를 만드는 데 더욱 큰 의의가 있다.
 
 
내가 카타르시스 요법을 가지고 환자에게 어떤 도움이나 개선을 약속하면 나는 다음과 같은 이의에 부딪치는 일이 종종 있다. “아니, 지금 선생님은 제 병이 아마도 제 삶의 사건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말씀해주시는데, 이런 것들은 결코 바꿀 수 없는 것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를 어떻게 해서 나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러면 나는 보통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 “저보다는 운명이 당신의 병을 낫게 해주는 것이 쉽겠지요. 그렇지만 당신의 히스테리로 인한 비참함을 보통의 일상적인 불행 정도로 바꾸는 데 우리가 성공한다면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다고 자신을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정신생활이 건강을 되찾는다면 그러한 불행에 대해 더 잘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393~395)
    
 
* “히스테리 환자가 상징화를 통해 감정이 강하게 얽혀 있는 관념에 대한 신체적인 표현을 만들어낼 때, 여기에 개인적 요소나 자의적인 요소가 좌우하는 부분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는 점이다. 그녀가 언어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처 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을 에인다거나 얼굴을 한 방 맞은 것 같은감각을 정말로 느낄 때에는, 히스테리 환자가 기지에 넘치는 언어를 정확히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 표현에 기반이 되는 감각을 새롭게 소생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에 이러한 언어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그 모욕을 실제로 심장부의 감각으로 느끼지 못했다면, 혹은 그러한 감각과 동일시될 수 없다면, 어째서 모욕 받은 사람을 두고 그것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라고 말하겠는가? 굴욕을 감수하는 태도를 묘사하는 무엇을 눌러 삼킨다라는 표현도, 아무 말도 못하고 모욕에 대해 억눌린 감정을 풀지 못했을 때 목구멍에 생기는 신경 감각에서 실제로 꾹 눌러 참는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정말로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이러한 감각과 신경의 지배는 전부 감정의 표현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윈의 이론대로, 기원적으로는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행위로 이루어진다. 현재는 이것이 너무 많이 약화되어 이러한 언어적인 표현이 우리에게는 단지 비유적인 전달로만 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 예전에는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히스테리의 강렬한 신경 지배를 묘사할 때 언어의 근원적 의미로 복귀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히스테리가 상징화에 의해 그 같은 감각을 만들어 낸다는 표현은 어쩌면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 히스테리가 그러한 용법을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히스테리와 언어용법이 똑 같은 근원에서 자신들의 소재를 끌어낸 것이리라.”(지그문트 프로이트, 사례연구: 엘리자베트 폰 R. (프로이트), 히스테리 연구(1895), 김미리혜 옮김, 열린책들, 1997[초판]/2003[재간], 244~245)
 
 
 
 
 

2015. 2. 20.

전이 - 프로이트, <정신분석 강의>

 

 

Sigmund Freud, Vorlesungen zur Einführung in die Psychoanalyse (1915-1916[1916-1917]); A General Introduction to Psychoanalysis, 1920; 정신분석 강의, 프로이트 전집 1, 임홍빈홍혜경 옮김, 열린책들, 1997[초판]/2003[신판]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05096

 

 

서문

1부 실수 행위들

2부 꿈

3부 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

 

스물일곱 번째 강의. 전이

 

전이(轉移, Überträngung, transfert, transference): 전이는 정신분석에서 무의시적인 욕망이 어떤 형태의 대상관계-특히 분석적 관계-의 틀에서 어떤 대상에 대해 현실화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확연히 체험되는 유아기적 원형의 반복이다. 분석가들이 별다른 수식어 없이 전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대개 치료 과정에서의 전이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전이는 정신분석 치료의 문제가 드러나는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전이의 정착, 양태, 해석, 해결이 정신분석 치료의 특징을 구성하는 것이다(장 라플랑슈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공저, 다니엘 라가슈 감수, 정신분석 사전(1967), 임진수 옮김, 열린책들, 2005, 397).

 

우리[정신분석가]에게 쓸모가 있는 것은 아마도 무의식을 의식으로 대체하는 일이며, 이는 무의식을 의식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과 같습니다. 이는 당연히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억압들과 함께 증상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조건들을 제거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병인(病因)으로 작용하는 갈등 역시 어떤 형태로든 해결책이 강구될 수 있는 정상적 갈등으로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자의 다른 상태가 아닌, 심리 상태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영향력이 미치는 만큼 우리들도 환자를 도울 수 있습니다. 억압 혹은 억압과 유사한 정신 과정을 되돌릴 수 없다면, 우리의 치료를 적용할 대상도 없어지는 것입니다(583-584).

 

건강해진다는 것은 환자가 정신분석의 힘겨운 작업을 거친 후에 어떤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환자는 자신의 내부에 무의식적인 요소 전보다 덜 지니는 대신, 의식적인 것은 더욱 많이 지니게 되며, 이것이 치료가 가져온 모든 결과라고 여러분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마도 그런 내적 변화의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치유된 신경증 환자는 실제로 다른 사람이 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584).

 

결국 우리는 환자의 무의식을 의식으로 대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 무의식은 기억 속에서 억압에 의해 그것이 발생했던 곳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 이제 그런 억압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과제는 여기서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합니다. 먼저 억압을 찾아내고, 이 억압을 유지하는 저항을 제거하는 일이 그것입니다(585-586).

 

우리는 이런 저항이 포기되고 리비도 반대집중의 상태가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데, 이는 해석을 통해서 자아가 동일한 사태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만들 때 가능합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어떤 충동의 힘들을 움직여야 합니까? 첫째로 건강해지고 싶어 하는 환자의 노력이 있으며, 이 노력이 환자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하는 공동 작업에 참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해석을 통해 밑받침하는 환자의 지적 능력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586-587).

 

여기서 우리는 모든 개개의 저항을 극복하게 위해서 환자의 심리 속에서 얼마나 심각한 투쟁이 전개되는지에 관한 명확한 인상을 지니게 됩니다. 즉 여러분은 리비도 반대 집중 상태를 유지하려는 동기와 이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동기들 사이에 동일한 심리적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정상적인 심리적 갈등에 대해서 뚜렷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전자는 과거에 억압을 관철시켰던 오래된 동기들입니다. 후자는 나중에 새롭게 첨가된 동기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갈등을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그러한 동기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로써 오랜 억압의 갈등을 다시 새롭게 부각시켜서 당시에 이미 결판이 났던 갈등의 해결 방식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새로운 자료로 언급할 내용은 과거와 같은 해결의 방식이 질병을 초래했다는 충고와 함께 다른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할 경우에는 치료의 길이 열린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과거에 처음 충동들을 거부한 다음부터 모든 정황들이 엄청나게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합니다. 당시에 자아는 어리고 연약했으며 아마도 리비도의 요구를 위험한 것으로 비난할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서 자아는 강해지고 경험도 풍부해졌습니다. 그리고 자아는 의사라는 조력자를 곁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롭게 재생된 갈등이 억압보다 나은 결과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587-588).

 

우리가 검토한 히스테리 환자들과 강박 신경증 환자들을 계속 살펴봅시다. 그러면 곧 우리가 전혀 예비하지 못했던 두 번째 사실이 드러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곧바로 이 환자들이 우리에 대해서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 우리는 결국 자신의 고통스러운 갈등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는 환자가 한 인간으로서의 의사에 대해서 아주 특이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 사람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이 그에게는 자기 자신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며, 그 결과 환자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따라서 일정 기간 동안 의사와의 관계는 아주 순탄하게 형성됩니다. 그는 특별히 상냥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감사의 표시를 하려고 합니다. 또 환자는 세련되게 행동하고, 아마도 우리가 그에게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장점들을 보입니다. 의사 역시 이때 환자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지니게 되고, 바로 이처럼 아주 훌륭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우연한 기회가 주어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의사가 환자의 친척들을 면담하게 될 경우, 그는 이 같은 호감을 자신과 환자 모두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만족감을 느낍니다. 환자는 집에서도 계속해서 의사를 칭찬하며 항상 그에게서 새로운 장점들이 발견된다고 추켜세웁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그는 선생님에게 완전히 빠졌습니다. 그는 선생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내용은 그에게 일종의 계시와도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로 환자의 가족들은 합창을 하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사태를 좀 더 예민하게 주시하는 사람들의 다른 목소리가 나옵니다. 즉 그가 다른 모든 일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선생님에 관한 말만 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주위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사가 자신에 대한 환자의 이런 평가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즉 그런 평가는 환자가 의사에 대해서 품는 희망에도 기인하지만, 치료가 진행됨에 따라 자신의 지적인 차원이 놀라울 정도로 넓어지고 해방되는 체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분석은 이런 조건에서는 아주 탁월한 진전을 보입니다. 환자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암시하는 말을 잘 이해하고, 치료 요법이 지시하는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골몰합니다.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나 돌연한 착상이 그에게 샘솟듯 떠오르고, 정확하게 사실에 부합하는 자신의 해석을 통해서 의사를 놀라게 만듭니다. 바깥세상의 건강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다지도 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곤 했던 모든 심리학적인 새로운 사실들을 환자가 기꺼이 수용하는 것을 의사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분석 작업이 진행되는 도중에 의사와 환자 사이의 협조가 잘 이루어진다는 것은 질병의 상태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좋아졌다는 객관적 정황을 말해줍니다(588-591).

 

그러나 이처럼 좋은 날씨가 항상 계속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굳은 날이 오게 마련입니다. 치료하는 과정에서 이제 어려운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환자는 자신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환자는 더 이상 분석 작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환자는 자신의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말하고 절대 자신의 그런 행동을 스스로 비판하고서 말하기를 꺼려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쉽게 위반해 버립니다. 환자는 마치 자신이 치료를 받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며, 의사와 앞서 맺은 계약 자체를 부정하는 듯이 보입니다. 분명 환자는 자신만을 위해서 간직하고 싶어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치료를 위해서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다시 한 번 상황을 규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환자가 강렬하고 애정 어린 감정들을 의사에게 전이시킴으로써 장애 요인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의사의 태도나 치료 과정에서 형성된 관계 등이 환자가 그런 감정을 가지도록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정감이 표시되는 방식이나, 그런 애정 어린 감정을 품게 된 목적은 두 당사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약 젊은 처녀 환자와 젊은 의사의 관계라면 정상적인 연인 관계와 같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한 처녀가 젊은 남자와 단 둘이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내밀한 세계를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보다 우월하고 유리한 위치에 서서 도움을 베푸는 남자에게 빠지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신경증에 걸린 처녀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장애가 문제된다는 사실이 간과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와 환자의 개인적 관계들이 여기서 가정하고 있는 사례와는 동떨어진 경우에도 동일한 감정적 관계들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만약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더욱더 우리에게 이상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만약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부인이 아직도 독신으로 있는 의사에 대해 심각한 연정을 품게 되면, 그녀는 의사의 여자가 되기 위해 이혼을 결심하거나, 혹은 사회적 장애가 작용할 경우에도 망설이지 않고 그와 비밀스러운 애정 관계를 맺으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정신분석이 아닌 다른 관계에서도 발생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여자와 소녀 들이 하는 말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치료 상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특이한 입장을 표명합니다. 이들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합니다. 치료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들은 의사와의 교류를 통해서 자신들이 지금까지의 인생이 가져다주지 않았던 선물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합니다. 단지 이런 희망 때문에 그들은 치료 과정에서 그렇게 많은 수고를 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는 다음과 같음 말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아마도 믿기 어려웠을 모든 내용들을 그렇게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같은 고백은 우리를 놀라게 만듭니다. 그런 고백은 우리의 계산을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어떻게 그렇게도 중요한 요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591-592)

 

더 많은 경험을 할수록, 우리는 학문성과 관련해서 수치스럽다고 할 정도로 자신들의 견해를 수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례들을 처음 접했을 때, 분석 치료가 원래부터 의도하지도 촉발시키지도 않은 우연한 결과에 의해서 장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환자가 의사에게 그런 애정을 품는 일이 규칙적으로 모든 새로운 사례에서 반복된다면, 그리고 만약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날 법하지 않은 망측스러운 상황에서도 계속 되풀이 된다면, 가령 우리의 판단에 따르면 전혀 유혹 운운할 수도 없는 나이가 많은 여성 환자나 수염이 하얗게 난 남자에게도 그 같은 애정 관계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이를 치료의 장애를 가져오는 우발적 요인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질병 상태의 본질 자체와 아주 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현상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결국 인정하기를 꺼려했던 새로운 사실은 전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한 사람으로서의 의사에게 감정들이 전이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치료 상황에 의해서 그런 감정들이 발생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환자의 그런 감정 상태가 모두 다른 곳에서 유래한 것이며, 환자가 미리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석 치료를 받을 기회가 주어지자 바로 그 의사에게 그 감정을 전이시켰던 것으로 봅니다. 전이는 격정적 사랑의 요구로 나타나거나, 혹은 좀 더 온건한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어린 처녀와 의사 사이에는 애인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대신해서, 의사가 자신을 사랑하는 딸로서 받아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리비도적 충동은 떨어질 수 없는, 그러나 이상적이며 감성을 초월한 우정의 관계를 맺자는 제안과 같은 완화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은 전이의 감정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때까지 승화시키거나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그런 감정을 거칠고 가다듬어지지 않은 형태로, 그리고 대개는 달성될 수 없는 방식으로 표출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근본적으로는 항상 동일할 것이며, 같은 연원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지 묻기 전에, 이를 더욱 완전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자 환자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경우에 사람들은 성적인 차이와 성적인 매력을 혐오스럽게 혼동함으로써 빚어지는 사태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여자들의 경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대답이 나옵니다. 가령 의사에 대해 집착하거나, 그의 성격의 장점들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모두 같습니다. 또 의사가 관심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 같은 관심을 보이거나, 의사의 삶에 더욱 밀착된 모든 사람에 대해서 질투를 보이는 현상도 여성 환자들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는 전이의 승화된 형태들이 훨씬 더 자주 나타나는 만큼, 직접적인 성적 요구는 더욱 드물게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충동의 요소들이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며, 오히려 명시적인 동성애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의사는 전이의 특정한 형식이 여자 환자보다 남자 환자에게서 더 자주 나타나는 것을 관찰합니다. 이는 언뜻 보기에 지금까지 서술했던 내용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적대적이거나 부정적인전이입니다(593-594)

 

일단 우리는 전이가 치료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환자에게 발생했다는 사실과 함께, 한동안은 분석 작업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전이의 존재 자체를 감지할 수 없으며, 전이가 환자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분석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한 그것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이가 저항으로 전환될 경우, 우리는 이를 죽목하게 되고, 다음 두 가지 서로 다르며 상반된 조건들 하에서 치료에 대한 자신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첫째 전이가 애정 충동으로 지나치게 강하게 표출될 경우, 환자의 내부에서 이에 반대하는 충동이 촉발됨으로써 전이가 성적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증거가 노출됩니다. 그리고 둘째, 전이는 애정 충동이 아닌 적대적인 충동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적대적인 감정들은 대체로 애정의 감정보다 나중에 등장하고, 애정의 배후에서 나타납니다. 이 두 감정들은 동시에 병존함으로써 우리들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지니는 지배적 감정인 감정의 이중성을 훌륭하게 반영합니다. 적대적인 감정들은 애정 어린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적인 집착을 의미합니다. 이는 복종심과 마찬가지로 반항심의 감정적 종속을 의미하며, 단지 후자와는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만 다를 뿐인 사태와 동일합니다. 의사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들이 전이로 불릴만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치료 상황에 의해서 적대적 전이가 발생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전이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견해를 표명함으로써 우리는 긍정적인 전이나 애정 어린 전이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도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이는 어디에서 비롯하며 어떤 어려움을 안겨 주는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며, 어떤 유용한 결과들을 이로부터 궁극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관한 모든 문제들은 분석의 기술적 지침들을 논하는 과정에서 상세하게 다룰 수 있으며, 오늘은 다만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전이에서 비롯하는 환자의 요구사항들에 굴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그런 요구들에 대해 불친절하게 대하거나, 혹은 화를 내면서 거부한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환자가 품고 있는 감정들이 현재의 상황에서 발생하거나 의사라는 개인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나타났던 것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 자신에게 입증해 보임으로써 전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같은 방식으로 환자가 지닌 감정들의 반복이 회상의 형태로 바꾸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애정의 감정으로 나타나건 적대적인 감정으로 나타나건 관계없이 그 어떤 경우에도 치료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위협으로 여겨졌던 전이가 바로 치료의 가장 훌륭한 수단으로서 정신생활의 닫힌 부분들을 여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같은 예상치 못한 현상이 등장함으로써 여러분이 느꼈던 당혹감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 몇 마디 첨가할 생각입니다. 우리가 분석하려 했던 환자의 질병은 완결되거나 경직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성장하면서 마치 일종의 살아있는 생물처럼 계속 진전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치료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이 같은 진전이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치료에 의해서 환자가 제압당한 후에는 질병의 모든 새로운 결과물들은 오직 단 하나의 부분, 즉 의사와의 관계에 집중됩니다. 전이는 그렇게 해서 나무의 목질(木質)과 피질(皮質) 사이에 있는 형성층과 같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형성층에서부터 조직들이 새로 생겨나고, 나무둥치가 두꺼워집니다. 전이의 의미가 이처럼 확장되어야 환자의 기억을 소재로 하는 작업이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더 이상 환자의 오래된 질병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대체하고 새롭게 형성되고 변형된 신경증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래된 감정이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추적한 결과 그 감정이 발생해서 계속 성장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분석하는 사람 자신이 대상으로서 그 질병의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질병을 특히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의 모든 증상은 그 본래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이와 관계가 있는 새로운 의미를 지향하게 됩니다. 혹은 그와 같이 성공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던 증상들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이 새롭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신경증을 해결하는 과정은 치료 요법에 의해서 비로소 그 존재가 알려진 질병을 치료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치료 요법이 설정한 과제를 해결하는 작업과 동일합니다. 의사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억압된 충동의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의사가 만약 다시 개입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을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589-597).

 

히스테리와 불안 히스테리, 그리고 강박 신경증에서 나타나는 전이는 치료하는 과정에서 이처럼 특이하고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며,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전이 신경증이라고 불릴 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분석 작업을 통해서 전이의 사실에 대한 완전한 인상을 확보한 사람은 억압된 자극들이 어떤 유형에 속하는 것인지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억압된 자극들은 이런 신경증 증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들이 리비도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뚜렷하게 입증해 보일 수는 없습니다. 리비도적 대리 만족들로서 증상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결정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던 계기는 전이라는 현상의 소속을 분명히 한 다음부터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치유 과정에 대해서 지난 날 지녔던 역동적인 관점을 개선하고, 새로운 통찰과 조화시켜야 하는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만약 환자가 저항과 정상적인 방식으로 갈등해야만 한다면, 우리도 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치유의 길로 이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이 내려지도록 매우 강력한 추진력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환자는 자신의 과거 상태를 반복하려고 마음먹고, 의식에 떠오른 것을 다시 억압할 수도 있습니다. 이 투쟁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환자 자신의 지적인 통찰이 아니라 환자가 의사에 대해서 지니는 관계일 뿐입니다. 환자 자신은 그런 일을 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환자의 전이가 양성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은 의사를 권위 있는 존재로 만들고 의사의 말이나 견해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됩니다. 만약 그런 전이가 발생하지 않거나 음성적인 형태로만 남아 있다면, 환자는 의사나 그의 논변들에 대해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의사에 대한 믿음은 여기서 나름대로의 고유한 역사를 반복합니다. 그 믿음은 사랑에서 파생된 것이며, 일단 논변들에 의해서 뒷받침 되거나 할 필요도 없습니다. 훨씬 후에 가서야 그런 논변들은 만약 자신에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제기할 때 비로소 검토의 대상으로 채택됩니다. 이처럼 지지해주는 힘이 없을 경우 논변들도 전혀 효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즉 그런 논변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에서 한 번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람은 오직 리비도적인 대상 집중을 할 수 있는 한에서만 지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최상의 분석적 기술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환자의 나르시시즘이 형성된 정도에 비례해서 환자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또 이를 염려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대상 리비도 집중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릴 수 있는 능력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주어져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신경증 환자들의 전이에 대한 충동은 단지 이런 일반적인 성질이 특이하게 강화된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처럼 널리 퍼져있고 또 중요한 인간의 특징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채 사용되지도 않았다면 오히려 그것이 매우 기이한 일일 것입니다(597-598).

 

나는 전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치료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 왜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에 대해서는 전혀 효과가 없는지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했습니다.

 

이것은 몇 마디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수수께끼가 얼마나 쉽게 풀리는지 그리고 얼마나 모든 내용들이 잘 들어맞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나르시시즘적 신경증에 걸린 환자들은 전혀 전이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거나, 지닌다 하더라도 단지 부족한 일부 능력만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의사를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 단지 무관심하기 때문에 거부합니다. 따라서 환자들은 이 경우 의사에 의해 영향 받지 않습니다. 의사가 말한 내용에 대해 냉담하며 어떠한 인상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에게 다른 환자들에게는 관철시킬 수 있는 치유의 메커니즘, 즉 병인이 되는 갈등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억압의 저항을 극복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그들에게는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이미 그들은 종종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병의 치유를 시도하지만 병적인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 환자들에 대한 임상적 인상들에 근거해 우리는 이들이 대상 리비도 집중을 포기하고 대상 리비도를 자아 리비도로 대체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성질 때문에 우리는 이 환자들(편집증 환자들, 우울증 환자들, 조발성 치매 환자들)을 신경증 환자들의 첫 번째 집단(히스테리, 불안 히스테리, 강박 신경증)과 구별했습니다. 치료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환자들이 보이는 태도를 보면 이 같은 추측이 옳다는 것이 입증됩니다. 이들은 전이현상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노력해도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따라서 치유도 할 수 없습니다(6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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