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8.

노자의 윤리학


요즘 푸코와 노자 그리고 해월을 강의하고 있다. 이는 고백컨대, 나의 실존적인 구원의 여정이다. 나는 노자가 없었다면, 그러니까 노자를 읽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나는 기원전 5-2세기 경 어느 땐인가 남중국의 어느 곳에 살았던 '노자'(늙은 선생)라 불리는 한 사람 혹은 여러 명의 저자들이 없었다면, 오늘 미쳤거나 죽었을 것이다.



내가 노자로서 하려고 하는 일은 노자와 불교, 그리고 선불교와 수운 혹은 해월의 사상에 입각하여, 서양 철학사 전체를 다시 해석하는 것이다. 이 때 서양 철학 내의 지렛대는 니체와 푸코 혹은 들뢰즈가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선불교 혹은 노자 사상에 입각한 현대적인 반 파시스트 사회 혹은 정치 윤리학'을 설립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정리하건대, 일찍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땅의 생성론이자 과정 철학, 가히 참다운 페미니즘이자 휴머니즘이며, 모든 불교와 이른바 현금의 '포스트' 담론을 꿰뚫는 철학 혹은 사상으로서의 노자의 윤리학은 우선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의 그것이다. 이 때의 무위, 자연은 사람들이 고전 중국어는 문법적 기초의 기초도 모른 채 근대 일본어로 생각하는 그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자연(nature)으로 도피한다."는 그런 개소리가 아니다.



우선 무위는 노자 본문을 보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헛된 욕망에 사로 잡힌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위무위(爲無爲)이다. 또한 고대 중국어의 自然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어 번역어 '자연'(nature)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게' 혹은 '저절로'라는 부사이다! 문헌학 혹은 언어학이 없이는, 철학 혹은 학문이 없다(there's no philosophy without philology)!



우선, 그리하여, 오늘 한 마디만 부연해 본다면, 쉽게 말해, 내가 이해하는 노자 윤리학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일을 글친 것이 내가 해야할 어떤 일을 하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자는 달리 말한다. 내가 일을 그르친 것은 어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굳이 할 필요가 없었던 어떤 불필요한 일을 욕망 혹은 객기에 못 이겨 굳이 힘들게 몸 버리고 돈 들이며 힘들여 찾아서 해서 그런 것이라고.



이는 가령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일을 그르쳤을 때 나의 자아 혹은 자아 혹은 자존심은 그 일을 만회하기 위하여 어떤 방책을 도모하려 한다. 그 일을 우선 일어난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 일을 어떻게든 새로운 인위 혹은 작위(이는 중국 철학에서 반드시 나쁜 의미인 것은 아니다)로 무마해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생각해보자. 바로 노자에 나오는 그 비유 그대로, 진흙이 섞인 물이, 그러니까 진흙탕물이 흔들리고 휘저어져서 속이 보이지 않고 물과 진흙이 잔 속에서 뱅뱅 소용돌이를 치며 돈다. 그때 물을 가라 앉히려는 나의 모든 시도는, 가령 젓가락으로 물을 좀더 조용히 저어보거나 혹은 잔을 천천히 흔드는 식의 시도는, 오히려 가라앉으려는 물의 파동을 더욱 키우고 확대시키는 일일 뿐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어떤 행동 곧 인위로 물의 파동을 가라 앉히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곧 보다 정확히는 물을 흔들어 휘젓고 싶은 나의 마음을 달래며, 그 물이 스스로 가라앉아 자기 자신을 정화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병이 깊을 때 그 병을 고치려는 우리의 시도는 대개 그 병의 또 다른 증상이며, 결국 병을 더 악화시킨다.



그리하여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길은 넓고 편안하며 밝은데, 사람들은 좁고 어둡고 험난한 길을 더 좋아한다. 누가 자신의 기(氣) 곧 몸과 마음을 다스려 스스로를 쉬게 하고 안정케 하며, 누가 자신을 흐리게 만들어 자신과 다른 이들 그리고 세상 만물이 스스로 맑아지게 할 것이며, 누가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을 것인가, 라고. 그리하여 노자 윤리학의 핵심적 명제는 "세상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돕고, 감히 무엇을 행한다고 하지 않는다."는 말로 정리 가능하다.



20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