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모든 것이 '정상적'이다, 사랑만 빼고!
3. “합리성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합리적인' 방식 곧 '우연을 통해' 구성되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
4. 에피쿠로스는 틀렸다. 고통의 부재는 쾌락이 아니라, 권태이다. 가령, 고통 받는 자는 권태를 모른다.
5. “진실은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상처를 주리라는 사실이다.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은 고통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 밥 멀리
6. “나란 타자이다. je est un autre.” - 아르튀르 랭보
* 이 문장을 나는 타자이다, 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것이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한국어 번역 문장을 들을 때 불어 원문의 주어와 동사가 모두 1인칭인 듯한 (도덕적?)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즉 je suis un autre가 아니란 말이다. 영어로는 i is another( i is the other)와 i am another(i am the other) 사이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되겠다. 요약하면, '내'가 타자인 것이 아니라, ''나'라고 불리는 그것'이 타자란 말이다. 시인의 말을, 더군다나 한국어와 일본어와 불어와 영어를 왔다갔다 하며 옮겨야 하니, 사실은 안 헷갈리면 그게 신기한 일일 듯하다. 철학 없는 문헌학(어학)도 없지만, 어학(문헌학) 없는 철학이란 귀여운 농담에 불과하다. 문법의 한도를 벗어난 '자유로운 의역'이란 그저 어학 실력의 부족에서 오는 '오역'에 불과하다.
7. “내가 네 입장이었다면...”라는 생각은 상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너는 내 입장이 결코 될 수 없다.
8. “동일한 일을 겪은 모든 사람이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다.”라는 생각은 '동일한 두 개의 상황'이란 전혀 없으며, 모든 상황이 그 자체로 ‘고유한 사건’(événement)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주체도, 대상도, 상황도, 맥락도, 그들의 디엔에이도 모두 전혀 다르다. 이것이 니체가 “관념(=개념)이 인간을 속인다.”고 말한 의미이다.
9. 책을 안 읽는 사람, 성실하지 않은 사람,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 때로 책을 성실히 읽는 사람,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을 비웃는 일이 있다. 양자 모두는 각자의 모순에 의해 붕괴된다. 다만 전자는 붕괴되는 것에 그치고, 후자는 그것을 감싸 안아 뚫고 나아간다.
10. 가해자란 누구인가? 피해자의 고통을 알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자,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자,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이다. 이제, 그 가해자는 누구인가? 바로 나와 너이다. 이렇게 때로 가해자이며 또 때로 피해자인 우리는 듣고자 하지 않는 자, 그리하여 듣지 못하는 자이다. 오늘날의 윤리란, 듣는 것이다.
11. 학문이란, 공부란 결국 자신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깨닫는, 알게 되는 과정이다.
12.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야말로 때로 가장 교묘한 자기 합리화의 방책이다. 이때, 그는 여하튼 자신이 고통 받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며, 이러한 자신의 고통 받고 있음을 남들이 알아줌을 알고, 더구나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지금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행하지 않고 죄책감과 고통 속으로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음을 안다.
13. “올바른 일을 올바른 동기, 올바른 이유에서 해라!” - 이마누엘 칸트
14.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령 살인을 저지른 것 정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다. 사람들은 일단 자기 일로 다들 너무 바빠서, 나를 알려고 하지 않고, 내가 누구를 속이는지는 더더욱 알려고 하지 않으며, 만의 하나, 알고자 한다 해도 사람들이 그걸 꼭 알아내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15. 사랑이란 어떤 존재에 대하여, 그것 혹은 그녀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느끼는 것이다.
16. “잘난 체하기를 좋아하는 일련의 바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한두 단어라도 말하는 것이 침묵보다는 낫다!” - o. p.
17.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만 슬픔을 느낀다.
18. 한 인간이 타인에 대하여 하는 말은 예외없이 모두 너무나 부분적 말, 따라서 그녀의 인격 혹은 그녀가 한 일을 왜곡하는 말, 부당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조건이다.
19. 나의 소원은 어린아이가 아무도 없는 한밤에 홀로 깨어나 외로움과 두려움과 목마름에 떨며 울 때, 아이의 곁에 말없이 다가가 앉아 아이의 이마를 짚어 안아주며 시원한 물을 한 잔 떠주고는, 아이의 곁에 누워 아이를, 그러니까 당신을, 나를, 안아 재워줄 수 있는 그런 글을 쓰는 것이다.
20. 그냥 부러워하고, 지면되는 것 아닐까? 사람은 모름지기 '잘 지는 법', '잘 부러워하는 법'을 배워야.
21. 약한 모습을 못 보이는 것이야말로 약한 것이다(단, 시도 때도 아무데서나, 특정 목적 하에, 혹은 그냥, 약한 모습으로 ‘징징’대는 것은 제외). 약한 모습을 드러낼 만할 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담담히 드러낼 수 있는 자야말로 강한 자이다. 달리 말해, 오직 강한 자만이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노자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 강한 자는 - 강해 보이는 자가 아니라 - 부드러운 자, 여유 있는 자, 미소를 머금은 자이다.
22. 속물이란 누구인가? 바로 '나'다!
23. 너도 합리적이며 나도 폭력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핵심은 폭력과 합리성이 너무도 당연히 '함께 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누구에게? 특히 ‘나’에게!
24. “그래, 좋다, 지옥은 내가 간다.” -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25. 무너지려는 자신을 붙잡고 관념으로 세뇌하면서 억지로 무너지지 않으려고 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무너지면 된다. 무너져서 모든 것을 잃고, 죽게 될까봐 두려운가?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무엇을 얻을 수도 살 수도 없다. 백척간두에서 한발 더 나아가란 불교의 말은 농담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한계란 내가 생각하는 한계이다.
26. 부자연스러울 때, 어색할 때,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 그럴 만해서 그렇지 않겠는가? 어색과 부자연스러움을 자신의 만남과 주변에서 추방해버려서는 안 된다. 어색함을 받아들이면 자기가 몰랐던 자연스러움의 세계가 스스로 꽃 피어난다. 아름답지 않은가?
27. 우월감의 폭발, 열폭의 뒷면. 혹은, 동전의 양면. 우폭도 열폭도 없이, 생각하고 살기.
28. '논점' 곧 '문제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 제출된 명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전제'에 대한 비판적 주장 앞에서, 논점을 이해도 못한 채,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 당연함 자체일 것'이라는 식(!)의 - 반박은 그저 무의미하다. 찬성 혹은 반대는 논점에 대한 참다운 이해가 선행된 이후에만 의미를 갖는다.
29. "나는 (너무 깊은?) 확신을 가진 사람, 자신이 틀릴 가능성 자체를 생각해보지 못하는 혹은 않기로 한 사람이 피곤하다 못해 무섭다."
30. 알고 보니 '희생자'가 - '가해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똑 같이 타인을 이용하는 - 이기적인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는 수가 있다.
31. 때로, '가해자'와 '희생자'는 실체가 아니다. 또한, 때로, 그들은 겹친다.
32. ‘모든, 항상’(전칭명제)과 ‘어떤, 때로’(특칭명제)의 구분.
33. 무엇인가에 대해, 특히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이 나아졌음을 의미한다. 너무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인간은 그것에 대해 (여하튼 적절히) 말을 할 수 없다.
34. '적절한' 고통은 인간을 성숙시킨다. 그러나 '지나친' 고통은 인간을 파괴한다.
2012년 3-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