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5.

환상의 사슬을 넘어서 -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나의 만남





 
 
erich fromm, 1900-1980
Beyond the Chains of Illusion: my encounter with Marx and Freud [1962]
 
 
 
 
 
 
 
 
 
 
 
 
"인간적인 것 중에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Homo sum,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17)
 
 
 
 
 
 
 
 
 
 
 
 
"어떤 상황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싶다는 소망은 그러한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 자체를 버리고 싶다는 소망이다(마르크스)."(20)
 
 
"정신분석을 받는 환자가 분석가를 사랑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또는 미워한다 해도, 그것은 모두 분석가의 현실적 인격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프로이트는 관찰하였다. 그래서 그는 환자가 어린아이였을 때 부모에 대해 체험한 사랑이나 두려움 또는 미움의 감정을 분석가에게 옮긴다(전이, 轉移)는 가정에 따라 이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55)
 
 
"사람이 무의식을 발견하는 일은 정확히 개념적 행위에만 머무르지 않는 하나의 감정적 체험이며 언어화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 무의식적 체험이나 사고, 감정을 자각한다는 일은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체험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호흡을 자각하는 일이 호흡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이다. 무의식의 자각은 자발적으로 갑자기 일어나는 일로 특징지어지는 체험이다. 그 사람의 눈이 갑자기 열리고 자기와 세계가 다른 빛으로 비치며 다른 관점에서 보이게 된다. 이 체험이 일어나면 커다란 불안이 생기지만 이는 곧 사라지고 그에 이어 새로운 힘이 느껴진다. 무의식의 발견 과정은 항상 확대되는 일련의 체험으로 기술할 수 있는데, 이는 깊이 느껴지는 것이며 이론적 개념적 지식을 초월하는 것이다."(96)
 
 
"어떤 체험이 자각되기 위해서는 그 체험이 의식적 사고를 구성하는 범주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의 안팎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이해 가능한 범주 체계와 관계와 있을 때뿐이다. [...]
 
더욱이 어떤 체험이 자각되는 것은 그것이 자각 체계나 그에 대한 범주로서 이해되고 관련되며 질서 속에 위치를 부여해주는 조건의 내부에 존재할 경우뿐이다. 더욱이 이 체계 자체가 사회적 진화의 산물이다. [...] 이 체계는 사회에 의해 조건지어진 필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하나의 체험은 이 필터를 거치지 않으면 자각되지 않을 것이다.
 
 
[...]
 
 
마음에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체험이 자각되느냐의 여부는 그 체험이 그 문화에서 중요시되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감정적 체험 중에는 일정한 언어에서 그에 해당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언어에서는 그 느낌을 표현하는 많은 단어가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서로 다른 감정적 체험을 표현하지만 해당 단어를 갖지 않는 언어문화권에 속하는 사람이 그 체험을 명료히 자각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한 언어가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를 갖고 있지 않은 체험을 거의 자각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지적 합리적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 체험과 특히 관계가 깊은 말이다. [...] 우리의 언어에는 어떤 종류의 신체적 체험을 기술하는 말이 없는데, 그 까닭은 이러한 체험이 우리의 사고 도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 언어 전체는 삶에 대한 태도를 포함한 것이어서 일정한 방식으로 체험되는 삶을 결정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
 
 
 
자각을 가능케 하는 필터의 제2의 측면은 일정한 문화로 사람의 사고를 인도하는 논리이다. 자신들의 언어는 '자연'스러우며, 다른 언어는 같은 것을 그저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법칙이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의 문화 체계에서 불합리한 것은 자연의 논리에 위배되므로 다른 문화에서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
 
 
언어와 논리는 일정한 체험을 자각하는 일을 어렵게 하고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필터의 일부분인데, 이 필터에는 가장 중요한 제3의 역할이 있다. 이 역할은 어떤 종류의 감정이 의식에 도달하는 것을 허용치 않으며, 설령 도달하더라도 의식 영역으로부터 배제해 버리는 경향을 갖는다. 이 필터는 사회적 터부에 의해 형성되는데, 일정한 관념이나 감정을 부당하고 금지된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이 의식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방지하려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먼저 원시 종족의 예를 들어 보는 게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먼저 다른 종족을 죽이거나 강탈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종족의 어느 누군가는 죽이거나 약탈하는 일에 충격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른 모든 종족원의 생각과 따를 뿐만 아니라 용납될 수도 없는 이런 감정이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적으로 모순되는 감정을 자각하면 그는 완전히 고립되고 추방될 위험성이 있다. 그 때문에 이러한 정신적 충격을 체험한 사람은 이 감정을 자각하는 대신 구토 등의 다른 신체적 증상을 나타낼 것이다. 또 평화로운 농경 종족의 일원이 도망하여 다른 종족을 죽이고 약탈하고 싶은 충동을 갖는다라는 전혀 반대되는 경우에도, 이 충동은 아마도 자각되지 않은 채 대신 그에게 격렬한 공포 등과 같은 증상을 낳을 것이다.
 
 
 
 
* 원주 17) [...] 사회적 무의식의 개념은 사회적 억압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일정한 사회가 자각을 허용하지 않는 인간 체험의 특수한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무의식은 그 사회가 인간으로부터 멀리 하려 한 인간성의 일부이며, 보편적 마음속에서 사회적으로 억압된 부분이다."(114-121)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 학교, 교회, 영화, 텔레비전, 신문 등으로부터 이 모든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관찰한 것처럼 생각해 버린다. 이러한 과정이 우리와 적대되는 사회에서 행해지면 그것을 '세뇌', 혹은 보다 완화된 표현으로 '교화' 혹은 '프로파간다'라 부르며, 우리의 사회가 동일한 일을 행할 경우 그것을 '교육' 혹은 '보도'라 부른다."(124)
 
 
 
"인간은 단순히 한 사회의 구성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 사회의 일원이기도 하다. [...] 자기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은 그 사람이 어느 만큼 자신이 속한 사회의 한계를 넘어 세계 시민이 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126-127)
 
 
 
"일반 사람들은 자기의 문화형에 맞지 않는 사고나 감정을 자각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이를 억압하게 된다. 형식적으로 말하면, 무엇이 무의식이 되고 무엇이 의식이 되는가는 사회 구조와 그것이 낳는 감정과 사고의 패턴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내용에 대한 법칙은 없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의 내용은 선악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가진 인간의 전부를 항상 대표하며 주어진 문제의 온갖 해답의 바탕이 된다는 점이다. 동물적 존재로 되돌아간 듯한 가장 퇴화된 문화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동물적 욕망은 우세해져 의식화되지만 이 수준을 넘어서는 모든 노력은 억압된다. 퇴화한 데서부터 정신적이고 진보적인 목표에 도달한 문화에서 암흑의 힘은 무의식이 된다.
 
 
그러나 어느 문화에서든 인간은 자신 속에 모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은 원초적 인간이고 맹수이며 식인종이고 우상숭배자인 동시에 이성과 사랑과 정의를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합리적인 것도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며, 양자를 모두 겸한 것이자, 이들 모두는 다 같이 인간적인 것이다. 무의식은 인간 전체로부터 그 사회에 적합한 부분을 제거한 것이다. 의식은 사회적 인간, 즉 개인이 우연히 내던져져 있는 역사적 조건에 의한 제한 속에 있다. 무의식은 우주 속에 나타난 보편적 인간 곧 인간 전체를 나타내며, 인간 속에 있는 식물, 동물, 정신을 나타내고, 인간의 과거 곧 인간적 존재의 새벽을 나타내는 것이자, 더욱이 인간이 충분한 인간성을 획득하여 자연이 '인간적으로' 되고 인간이 '자연과의 조화를 다시금 획득하게 될' 날에 이르는 인간의 미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무의식을 자각하는 일은 완전한 인간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사회가 인간 사이에 구축했기 때문에 생겨난 인간과 그 동포들 사이의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일이다. 더욱이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사회적 조건 때문에 생겨난 자기 자신과 인류로부터의 소외 상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127-128)
 
 
 
 
"과거 2,000년 동안 서양사를 특징지어온 것은 희망의 원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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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는다 - 인생이나 역사에는 개인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그 고통을 정당화해줄 만한 어떤 궁극적 의미도 없다. [...] 어떤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의상을 걸친 신이라 할지라도 인간을 구원하거나 심판할 수 없다. 단지 인간만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172-173)
 
 
 
"나는 믿는다 -  설령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신 결단을 내려준다 해도 우리가 그 사람을 구원해줄 수는 없다. 사람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진실과 애정으로 감사이나 환상에 빠지는 일 없이 그의 앞에 양자택일을 제시해주는 일일 뿐이다. 진정한 양자택일에 직면하면 그 사람의 모든 숨은 에너지가 깨어나며 그 사람은 죽음에 반항하여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삶을 선택할 수 없을 때, 타인이 그에게 삶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려 한다 해도, 그것은 다만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173)


 
"나는 믿는다 - 인간성은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 있다. 우리는 지능, 건강, 재능 등의 면에서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이다. 우리는 모두 성자이고 죄인이며, 어른이자 어린아이이기도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이들보다 우월한 자이거나 심판자일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부처와 함께 깨달은 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자이고, 칭기즈칸이나 스탈린, 히틀러와 함께 살육하고 약탈한 것이다."(175)
 
 
 
"나는 믿는다 - 이성도 인간이 희망과 신념을 갖지 않을 때는 무력하다. 괴테가 말한 것처럼 역사상 여러 시기의 가장 큰 차이는 신념과 불신의 차이이다. 신념이 지배하던 모든 시대는 눈부시게 고양되고 풍요했던 것에 비해, 불신이 지배한 시대는 퇴색해 있는데, 그 이유는 공허한 것에 자기를 바칠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19세기는 신념과 희망의 시대였다. 그러나 20세기의 서양 세계는 희망과 신념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인간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기계에 대한 신앙이 우리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이 '신앙'이 '종말'을 재촉하게 될 뿐이리라. 그러므로 서양 세계가 생산이나 산업이 아니라 인간성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는 휴머니즘의 부흥을 이룩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중심 문제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위대한 문명처럼 '서양' 역시 소멸될 것이다."(176-177)
 
 
 
"나는 믿는다 - 서양 자본주의 및 소련과 중공의 공산주의는 모두 미래를 해결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관료주의를 만들어내고 인간을 물건으로 전환시켰다. 인간은 자연이나 사회의 힘을 자기의 의식과 합리적 통제 밑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물건과 인간을 관리하는 관료주의의 통제가 아니라, 만물의 척도로서의 인간을 위해 물건을 관리하고 복종시키고 자유롭고 협동적인 생산자에 의한 통제이어야 한다. 양자택일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료주의'와 '휴머니즘' 사이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이 갖는 모든 힘윽 개화시키는 일이 최종적 목표가 되는데, 이에 필요한 조건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ㅇ 민주적이고 지방분권적인 사회주의 밖에 없다."(177-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