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4.

칼 마르크스, 「영국의 인도 지배」 , 1853


 
 
-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박종철출판사, 1992.
    
 
1853610, 금요일, 런던
 
 
판에 박힌 형태의 이 자그마한 [인도의 촌락이라는] 사회 유기체는 영국의 징세관과 영국의 병사가 자행한 야수적 간섭에 의해서라기보다 영국의 증기력과 영국 자유무역의 작용에 의해 대부분 해체되고 소멸되었다. 이러한 가족 공동체들은 가내 공업, 즉 손()노동에 의한 방적, 손노동에 의한 경작의 독특한 결합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결합이 이 공동체들에 자급자족의 힘을 가져다주었다. 영국의 간섭은 방적공을 랭카셔에, 직조공을 벵골에 가져다 놓으면서 혹은 인도인 방적공과 인도인 직조공을 일소하면서, 반은 야만적이고 반은 문명적인 이 자그마한 공동체의 경제적 기초를 폭파시켜 버렸고 그리하여 이 공동체를 해체시켰다. 그리하여 영국의 간섭은 아시아 최대의, 아니 실은 아시아 유일의 사회 혁명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이 수많은 근면하고 가부장제적이며 무해한 사회 조직이 해체되고 각 구성단위로 분해되어 고통의 바다에 던져지는 과정, 그리고 그 개개의 성원들이 자신들의 고대문명 형태와 자신들의 전래의 생활 수단을 동시에 상실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인간의 감정을 아무리 애절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무해한 것처럼 보이는 이 목가적 촌락 공동체가 언제나 동양 전제 정치의 견고한 기초를 이루어왔다는 것, 이 촌락 공동체가 인간 정신을 있을 수 있는 가장 좁은 틀에 제한하였고 또한 인간 정신을 미신의 온순한 도구로, 전통적 관습의 노예로 만듦으로써 그 웅대함과 역사적 정력을 앗아 버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야만의 이기주의 때문에 촌락 공동체 주민들은 땅 조각에만 신경을 쓸 뿐이지 제국들의 멸망이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잔학 행위들 또는 대도시 주민들의 학살 따위는 강 건너 불 바라보듯이 방관하게 되어, 결국 그들 자신은 자신들에게 시선을 돌린 정복자들의 제물이 되고 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간적 존엄을 모르고 정체해 있으며 식물과 다름없는 이 생활, 이 수동적인 삶의 방식이 다른 한편으로 대조적으로 난폭하고 맹목적이며 멈출 줄 모르는 파괴력을 불러일으켰으며 살인을 힌두스탄의 종교적 의식(儀式)으로 만들기까지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자그마한 공동체가 카스트 제도에 의한 차별과 노예제라는 오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인간을 환경의 지배자로 올려 세우는 대신에 외적 환경에 예속시켰다는 것, 자기 발전하는 사회 상태를 결코 변하지 않으며 자연에 의해 부여되는 운명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리하여 자연의 지배자인 인간이 원숭이 하누만과 소 삽발라를 숭배하여 그 앞에 무릎을 조아리는 사실에서 인간을 어마나 값어치 없게 만드는가를 볼 수 있는 자연 숭배를 낳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영국이 힌두스탄에서 사회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게 된 동기로 작용한 것이 천하기 그지없는 이익일 뿐이었고 또 그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취한 방법도 우둔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아시아의 사회 상태에 근본적 혁명 없이 인류가 그 사명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이 저지른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러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영국은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세계의 붕괴 광경이 우리의 개인적 감정에 아무리 애통함을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역사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괴테와 함께 다음과 같이 외칠 권리가 있다.
    
 
이 고통이 우리의 쾌락을 늘리거늘 /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번민할 까닭이 있는가. / 티무르의 지배도 / 무수한 생명을 유린하지 않았던가?”
 
 
Sollte diese Qual uns quälen / Da sie unser Lust vermehrt; / Hat nicht Myriaden Seelen / Timurs Herrschaft aufgezehrt?(416~418)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줄레이카에게>(An Suleika)[티무르 시편(Timur Nameh: Buch des Timur) ], 西東詩集(West-östlicher Divan, 1819/1827), 418.
    
 
- 뉴욕 데일리 트리뷴3804, 1853625일자. 맑스엥게스 저작집, 9, 127-133. 영어 원문으로부터 김태호 번역.
 
 
 
 
 
줄라이카에게
 
 
아름다운 향내로 그대를 애무해서
그대를 더욱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미꽃 봉오리들이
먼저 불길에 스러져야 한다.
    
 
향기를 영원히 보존하는
조그만 병 하나, 그대 손가락 끝만큼이나 날씬한
병 하나를 얻는 데에도
하나의 세계가 희생되어야 한다
 
 
솟구치는 그리움 속에서
이미 꾀꼬리의 사랑을,
그 황홀한 사랑의 지저귐을 예감하며
힘차게 움터 나오는 생명의 세계 하나가!
    
 
우리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이 꽃봉오리들의 수난을 우리가 괴로워해야 할까?
티무르의 지배가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령들이 죽어가야 하지 않았던가?
 
 
Sollte jene Qual uns quälen,
Da sie unsre Lust vermehrt?
Hat nicht Myriaden Seelen
Timurs Herrschaft aufgezehrt?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서동시집, 안문영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