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홀림
- 박솔뫼의 소설과 연극에 대한 단상
“우리는 신들에게, 또는 우리가 막 유혹한 사람에게 사로잡힐 것이다.”
- 미셸 푸코
1. 말과 삶
박솔뫼 소설의 등장인물들, 혹은 작가는, 끊임없이 말한다. “한축이 무너진다, 무언가 어긋나 있고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 이 ‘무너지는’, ‘어긋나 있는’, ‘한층 쑥 내려가’고 있는 것은 박솔뫼에 의해 다름 아닌 ‘무언가’ 또는 ‘뭔가’로 기술되는 그 무엇이다. 이 ‘한축이 무너지는’, ‘무언가 어긋나있는’,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것은 정확한 용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작가의 어떤 느낌이다. 이 ‘느낌’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 정확히 말해질 수 없는 것, 따라서 정확히 말해서는 안 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말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의 책에서 나의 느낌과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언어가 발견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새롭게 시작하려는 모든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박솔뫼에게는 이를 표현할 언어가 없다. 따라서 박솔뫼는 자신의 말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박솔뫼는 단순히 자신의 말을 찾아 떠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말과 그 말이 놓이게 될 상황, 말과 사물, 말과 삶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구분된다.
2. 시중(時中), 말의 때와 침묵의 때
이러한 관심 또는 인식은 필연적으로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 나아가, 언어의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것이건 또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건, 정확히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의 경계를 정확히 알기를 요구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앎에 그치지 않는 실천의 문제가 된다. 말해야 할 순간에 침묵해서는 안 되는 것이듯, 침묵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지 않고 침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곤란한 일이다. 이는 어떤 일반화된 언어로도 결코 고정시킬 수없는 구체적 상황의 문제, 미학적인 만큼이나 동시에 윤리적인 실천의 문제이다. 이 실천적 상황의 문제는 언제가 침묵해야 할 때이며 언제가 말해야 할 때인가를 정확히 아는 상황판단 곧 인식의 문제, 또 이러한 정확한 인식을 가능케 해줄 언어의 문제와 연결된다. 이는 나아가 언제 글을 쓰고 언제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 어떤 주제에 대하여 글을 쓰고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 어떤 주제를 어떻게 곧 이렇게 혹은 저렇게 써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 곧 글쓰기(라는 행위)와 그 행위가 놓이는 상황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박솔뫼의 이러한 관심 또는 인식은 결국 박솔뫼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 이러한 인식, 언어, 글쓰기와 상황의 문제에 바쳐질 것임을 알려준다. 글쓰기를 예로 든다면, 이는 언제 글을 쓰(지 않)는가의 문제, 나아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의 문제, 곧 왜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이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이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단 쓰기로 결정한 연후, 작가의 관심은 ‘언제’라는 윤리적 문제로부터 ‘어떻게’, 곧 완벽하게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내가 정확히 말하고자 노력해야만 할 무엇에 대해 어떻게 잘못 쓰지 않고 잘 쓸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미학적 방법론의 문제로 이동한다.
3. 새로운 입말, 글쓰기
박솔뫼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입말의 되살아남이다. 자신이 참여한 여럿의 대화를 녹음해서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입말로 이루어지는 일상적 대화는 우선 의사소통의 대부분이 실상은 ‘몸짓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대화의 특성, 이에 더하여 참여자들 사이의 암묵적인 상호동의에 입각한 논리적 비약과 생략으로 인하여, 심지어 대화의 참여자인 ‘내’가 들을 경우에조차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 정확하지 않은 것, 나아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곤 한다. 심지어 이 ‘대화’를 글로 적어 남에게 보여준다면, 그것은 대화가 전제하는 암묵적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표현의 막연함, 문법적 부정확성, 생략 등이 어우러져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박솔뫼가 선택한 전략, 곧 글투 문어체와 입말 구어체의 배합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남들에게 독자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입말체를 글쓰기에 도입하는가? 기존의 정형화된 문어체, 구어체가 작가의 느낌과 생각, 삶을 잘 드러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새로운 작가란 말과 글에서 자신만의 ‘투’(style)를 찾아가는 자라 할 때, 이는 필연적이다. 우연히 참여하게 된 낭독극장의 좌담회에서 작가가 구사하는 말투는 그의 글투와 거의 같았다. 물론 이렇게 작가의 문체와 그의 일상화법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심리주의적 인격주의적 관점의 한계 또한 명확하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펼치려 하는 자들이라 할 때, 한 작가가 자신의 삶과 느낌, 인식이 배어 있는 자신의 입말을 사용하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당신들의 언어가 아닌 여기 오늘 나, 우리의 언어. 나의 말은 내게 쉽다, 명명백백(明明白白)하다, 분명하다. 이것이 모든 백화(白話)운동의 근거를 구성한다. 나의 느낌과 생각, 인식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이가 내게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박솔뫼는 이렇게 종종 자신의 입말을 그대로 자신의 글말로 사용한다.
4. 생각말, 몸말
또한 박솔뫼의 ‘입말’은 박솔뫼의 생각과 관계 맺고 서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한 사람이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혼자 하는 말을 보통 생각이라 하는데, 아마도 몸 전체의 느낌이 관여되었으며 한 사람이 혼자 하고 혼자 아는 이 생각은 흔히 말이라는 형식 아래 우리에게 드러난다. 이렇게 말로 드러난 생각은 물론, 생각 일반이 아닌, 나에게 이렇게 또는 저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난, 현상(現象)된, 생각이다. 이렇게 각자의 생각 안에서, ‘나의 말’이라는 구체적 형식을 빌어 나타난 무엇을 ‘생각말’이라 하자(아니면 ‘마음말’, 또는 우리말의 전통적 의미를 존중하여 몸(=마음+몸)이라는 의미의 ‘몸말’이라 해도 좋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으며 알게 모르게 말하고 듣는 이 생각말이 내게 늘 정확히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생각말은 지나가는지 아닌지 모르게, 나도 모르게, 나를 지나간다. 아니, 내가 생각이, 말이 되어 나를 지나간다. 가령, 데카르트처럼, 나와 내가 하는 생각을 분리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생각이, 그 말이 아닐까? 말씀과 육체는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두 개의 자기 원인적 실체가 아니라, 가령 말씀이 육화(肉化)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정신과 육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지(不二, 不異) 않을까? 여하튼, 내 머리를, 내 생각을, 내 마음을, 내 몸을 오가는 이 말은 어떤 하나의 기준 아래 통합가능한 동일자(同一者)가 아니다. 이 말, 보다 정확히는 이 말들은, 흔히 하나의 생각이라는 형식 아래, 내가 하고 있다, 또는 하나의 목소리라는 형식 아래 나를 지나간다, 내게 들려온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이 ‘하나의’ 목소리란 실상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다수의 ‘목소리들’일 뿐이다. 이 생각들, 목소리들이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가로질러, 나의 정신과 육체를 가로질러, 나의 마음과 몸을 가로질러, 내게 들려오는 것이다. 아니, 이 목소리들, 이 생각들이 ‘나’이다. 늘 생겨나고 흘러가는 이 목소리들, 생각들이 늘 생겨나고 흘러가는 나, 자아를 만든다. 우리가 저항하고자 하나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 목소리들의 다수성(多數性)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이중인격자, 다중인격자들로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차라리 하나의 통일적 실체로 가정되며, 따라서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이 ‘인격’의 일원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버려야 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의 통일된 실체라고 가정되어 있는 이 ‘인격’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저 이름, 우리를 홀리는 이름,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생각들, 목소리들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인격이란 이 ‘묶일 수 없는’ 목소리들, 생각들을 ‘묶기 위해’, 사후적으로 그리고 방편적으로, 생겨난 하나의 인식론적 도구, 규합 개념에 불과하다. 일원론적인 정상적인 불변의 통일된 인격이 허구이며, 혼돈된 비정상적인 늘 변화하는 분열된 ‘그 무엇인가’만이 존재한다. 랭보의 말처럼, 그리고 이후의 해석들처럼, 나란 다른 것, 붙잡히지 않는 것, 하나의 타자이다(Je est un autre). 이렇게, 포스트구조주의와 불교는 만난다.
5. 엄마말, 엄마나라말, 나의 말
물론 내게 들려오는 이 말들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느 특정한 나라의 말, 곧 ‘우리나라 말’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 말들이 나의 모국어(母國語)임을 의미하나, 이러한 규정은 이미 ‘국’(國), 보다 정확히는 서구어 nation을 번역한 메이지(明治) 신한어(新漢語)로서의 ‘국가(國家)’, ‘국민(國民)’, ‘국어(國語)’라는 삼위일체가 전제되어야 하는 근대적 관념이다. 더구나 한 사람이 반드시 한 나라의 말로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김용옥이 『여자란 무엇인가?』에서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엄마나라의 말(母國語)’과 ‘엄마말(母語)’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구분을 따르자면 차라리 우리는 적어도 처음 어린시절에는 엄마말을 사용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앞서 언급한 국가ㆍ국민ㆍ국어라는 삼위일체와 분리 불가능한 학교(국민[國民]학교)라는 제도에 의해 모국어, 곧 ‘표준어’를 배우게 된다. 표준어란 곧 한 언어 공동체에 의해 규정된 기준이며, 이를 확정하는 행위 자체가 다름 아닌 한 사회 언어 사용자들의 이른바 ‘바른 말, 옳은 말’과 그렇지 못한 말을 구분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언어의 사회성은 이렇게 언어의 정치성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학습의 과정, 달리 말하면 사회적 기준의 내면화 과정을 거쳐, 내게 안착된 또는 나를 언어의 주체로 구성하는, 최초의 엄마말, 또는 이후의 엄마나라말은 글자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준다. 자, 사람이 말을 만들고, 말이 사람을 만든다. 그럴까? 차라리, 푸코 혹은 바디우의 말대로, 사람과 말은 동시적 (비)상관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닐까? 이연숙이 ‘근대 일본’이라는 국가와 언어의 동시적 탄생 과정을 다룬 『국어라는 사상』에서 탁월하게 밝힌 것처럼, 국어가, 언어가 사상(思想, 생각하고 상상한 것), 곧 생각이다. 국어와 언어는 사상의 표현 또는 그 수단에 그치지 않는, 사상 그 자체이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그 나름으로 옳지만, 우리는 차라리 인간이야말로 언어를 실어 나르는 배(船)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촘스키의 지적대로, 이 ‘나’는 언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운 유한한 언어로 매번의 상황에 적합한 무한한 나만의 상황적 변양(變樣)을 만든다. 이는, 한 인간이 자신이 배운 언어를 ‘사용’하는 과정은 그녀가 그 언어를 ‘변형’시키는 과정과 구분 불가능한 사실상 동일한 과정임을 말해준다. 나는 내가 배운 말을 한다, 그런데 나를 구성해준 이 말이 때로 나를 가둔다. 늘 변해가고 변할 수밖에 없는 세계와 나를 불변하는 관념 속에 고정된 언어가 늘 정확히 드러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엄마의 말도, 엄마나라의 말도, 내가, 곧 내 말이 아니다. 이리하여 배 자체이자, 선장이자, 승객이자, 선주인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아직 없는, 이제 와야 할, 자신만의 말과 글을 찾아 떠난다. 우리는 이 어떤 이들을 작가라 부른다.
6. 들어맞음/어긋남, 이접(離接)
때로, 내 말, 내 글이 나를 가둔다, 버린다, 죽인다. 내가 하는, 나를 배신하는, 나를 소외시키는 이 말, 이 글이 나를 잘 드러내도록, 나를 살리도록, 나는 노동을 한다. 글쓰기라 불리는 이 노동은 내 진정한 뜻과 어긋나는 이 말들을 나의 생각말, 몸말에 맞추려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다. 박솔뫼 글쓰기의 참다운 의미는 작가가 이런 ‘글로써 있는 그대로의 내 생각을 재현(再現)한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맨 앞에서 인용한 ‘한축이 무너진다, 무언가 어긋나 있고 뭔가 한층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라는 말,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내가 글을 잘 썼다, 완전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것 등은 모두 작가가 갖고 있는 언어의 이러한 근본적 한계를 자기 글쓰기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즐거운 인식’을 보여주는 징표들이다. 모든 참다운 작가처럼, 박솔뫼는 기존의 말들을 자신의 생각 안에서, 몸 안에서, 컴퓨터 안에서 새로이 조합하여, 자신의 말을 만든다. 박솔뫼에게 글쓰기 행위는 문학의 언어를 만드는 행위이자, ‘나’를, ‘우리’를, 나와 우리의 말을, 우리나라말을 새로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러한 글쓰기, 말 만들기의 행위는 기존의 언어와 세계에 대한 재현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제 말과 사물, 말과 삶은, 잘 들어맞음, 연접(連接)이 아닌, 어긋남, 이접(離接)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연접/이접’ 또는 ‘연접/이접의 이접’은 기존의 것을 인정하고 사용하고 받아들이고 버리고 파괴한다. 이 이접은 ‘잇기(移接)/잊기’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있음’, 곧 생성의 글쓰기가 된다. 특히 의식적(意識的) 주체가 갖는 모든 종류의 ‘일원성’에 대한 파괴를 주된 기능으로 갖는 이 생성적/파괴적 이접의 글쓰기는, 따라서, 기존의 논리에서 바라볼 경우, 이해되지 않는 것, 딱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해와 구분, 인식의 문제점을 충분히 기억하며 글을 쓰는 박솔뫼 글의 가치는 그것의, 니체를 따라 말하자면, 이해되지 않음, 나를 따라 말하자면, 기존 장르 구분에 잘 들어맞지 않음, 바디우식으로 말하자면, 식별불가능성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박솔뫼를 역사가 없는 개인의, 파편화된, 체험 없는, 새로운 세대의 가벼운 글쓰기라는 식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모두 일견 맞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가령, 박솔뫼의 글쓰기를 사(私, private)소설의 계보에 넣고자 하는 시도는 일견 그 의미를 인정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오류이다. 사소설이란, 가령 공(公, public)소설이 아닌 어떤 소설일 것이다. 그러나 공/사의 이러한 구분 자체가 칸트, 헤겔 이래의 철학적 보편/개별의 구분에 대응하는 문학적 구분이며, 박솔뫼의 소설이 들려주는 이 목소리의 현상학은 바로 이러한 공/사의 구분을 뛰어넘은 곳에서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내용/형식의 구분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서구 근대 인식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무반성적 개념이다). 무엇보다도, 가상의 공간인 해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은 물론, 일본 츠나미와 원전사고, 가상의 고리원전 폭발 사고 등 박솔뫼의 소설은 그것이 다루는 내용과 형식의 어느 측면에서도 이른바 개인적, 사적인, 몰역사적 인식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 박솔뫼 글쓰기의 가치는 오히려 이러한 보편/특수, 공/사, 내용/형식, 의식/무의식, 사회/개인 사이에 설정된 기존의 구분 자체를 뛰어넘어 스스로의 구분을 제시하는 행위에 있다.
7. 이름 - 봄과 보임
이 생성적이고 파괴적인 시바 여신의 그것과도 같은 박솔뫼의 글쓰기는 결국 글 쓰는 자 자신의 의식적 일관성, 플롯상의 논리적 정합성, 등장인물 또는 발화자가 보여주는 말투와 성격에 있어서의 일관성, 기존 한국어 문법 구조에 있어 발화자의 문장 구조 및 이렇게 발화된 언표가 갖는 의미의 일의성 따위를―일정부분 인정하면서도―궁극적으로는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우리에게’ 그들 사이에서 인정/파괴의 놀이, 합리성/비합리성, 정합성/비정합성의 놀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가? 이 모든 말들은 개념으로 고정된 언어이며, 인간은 언어로 생각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으므로,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조건이므로. 따라서, 모든 글쓰기가 소설이며, 삶의 모든 행동이 연극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란 사실과 허구, 참다운 진실과 근본적 거짓말, 말이 되는 것과 말이 되지 않는 것 사이를 넘나들며 놀이를 하는 자이다. 수용, 계승이든, 파괴, 창조이든, 작가란 결국 자신의 전통과 놀이를 하는 자가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문학이란, 가령 철학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시대가 스스로의 ‘보편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작가란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과 자기 시대의 보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자, 아직 이름 없는 무엇인가에 이름을 붙여주는 자, 그것에 목소리와 행동을 부여해주는 자, 이를 허구/현실의 구체적 상황 속에, 우리의 마음과 몸 위에, 펼쳐놓는 자이다.
이름은 우리를 홀린다(spelling spells). 우리는 이름 없는 자를 홀릴 수도, 그와 사랑에 빠질 수도 없다. 나는 그를, 나를, 부르는 대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이름 붙여준 것, 자신이 부른 것, 곧 자신이 홀린 언어에, 이제 다시금, 홀리게 될 것이다. 작가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럼 무얼 부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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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울림소극장은 2014년 4월 23일부터 27일까지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연출로 ‘단편소설 입체낭독 극장 2014’라는 제명 아래 박솔뫼의 세 작품, 「우리는 매일 오후에」(김한내 연출),「도미의 나라」(성기웅 연출),「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강민백 연출)을 무대 위에 올렸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루어진 공연은 박솔뫼 소설에 나타나는 의식의 분열 및 비현실성을 화자의 분리, 다양한 매체의 사용, 관객의 참여 등과 잘 결합시킨 실험적이면서도 즐거운, 좋은 공연이었다. 나는 27일 공연 이후 이루어진 ‘관객과의 대화: 무대 위의 라운드 테이블’에 패널 겸 사회자로 참여했다. 이 글은 이를 계기로 박솔뫼 글쓰기의 다양한 측면을 짚어본 글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되는 잡지 <f>에 실린 글의 최종고이다.
*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