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안다고 생각할 때,
당신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 로버트 프립 Robert Fripp
0. 사람들은 삶을 살아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그림을 그린다. 이렇게 사람들은 삶과 그림을 분리시킨다. 마치 그들이 삶과 삶이 아닌 것을, 그림과 그림 아닌 것을 분리시키듯이. 마치 그들이 행복과 불행을, 구상과 비구상을 분리시키듯이. 마치 그들이 진리와 거짓을, 빛과 어둠을 구분시키듯이.
1. 마르셀 뒤샹은 예술가가 무엇인가를 예술로 지칭하는 순간, 그것은 예술이 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뒤샹의 선언이 자신의 행위를 예술로 변형시킨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예술이라 이르는 행위, 이러한 이름의 행위에 의해 정의되지 않은 예술이란 실상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구분은 이름과 관계된, 가히 권력의 행위에서 나온다. 존 케이지는 음악과 음악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를 파괴한다. 케이지는 침묵과 음향과 화음으로 나누어지는 삼분법을 파괴한 것이다. 완전한 침묵도, 소음과 화음의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음악은, 예술은 서양의 바깥으로 나간다. 자크 데리다는 존재와 예술이 존재가 아닌 것과 예술이 아닌 것에 의해 사후적으로 규정되는 발명된 허구임을 잘 밝혔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구이다. 이제 예술은, 이 세계는 진리와 서양의 바깥으로 나간다. 미셸 푸코는 앎과 진리가 알지 못함과 허구 모두에 의해 구성되는 장(場)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게 됨을 밝혔다. 오늘, 이제 앎과 알지 못함은, 진리와 예술은 다만 서로를 모르기에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쌍둥이임이 잘 알려져 있다.
2. 모든 사람은 삶을 살고, 모든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삶과 그림이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 구분되나, 그렇게 지칭하여 구분하는 한에서만 그렇다. 삶과 그림은 두 개의 구분 가능한 실체가 아니다. 지칭과 구분은 인식을 위한 유형화 작업에 기초한 도구, 편리를 위한 도구이다. 그런데 이름과 지칭은 단순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이름이 없으면 세상이 없다,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無名無物). 이름이 존재이다. 당신이 당신의 사랑을 사랑이라 이르기 전에 당신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당신이 느끼는 무엇을 사랑이라 이르기 전에 당신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당신은 당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르는 것이 아니라, 늘 특정한 관점, 방식에 따라 이를 수밖에 없다. 당신은 이 손, 저 불, 이 종이를 보지 않고 저 총, 이 칼, 이 창을 볼 수 있지만, 어떤 것도 보지 않으면서 보는 행위 혹은 작용을 수행할 수는 없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보는 행위 혹은 작용은 분리 불가능한 오직 연결된 것들이다. 관점 없이, 볼 수가 없다(There is no view without a point of view). 관심과 관점만이 이름을 낳는다. 이름은 홀린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말했으므로, 이 모든 것은 세계와 예술에 대해서도 똑 같이 적용된다.
3. 여명희의 그림과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 물론 여명희의 그림과 삶은 분리된다. 어리석은 이들이 ‘역설’이라는 이름 아래 간단히 처리할 이 언어철학적 주장은 한 작가의 그림을 알려면 그의 삶을 알아야 한다는 철지난 심리주의ㆍ인격주의 비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그림이 단지 그렇게 지칭하여 구분할 할 때에만 구분되는 관계된 요소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림과 삶을 구분하지 않기로 한 경우, 사실은 모든 사람의 그림과 삶이 다 늘 그런 것처럼, 여명희의 그림과 삶이 뒤섞인다. 여명희 삶의 기쁨과 고통, 무덤덤함이 그림으로 온전히 쏟아져 들어온다. 여명희 그림의 기쁨과 고통, 무덤덤함이 삶으로 온전히 쏟아져 들어온다. 그림과 삶은 같은 하나도 아니지만, 다른 두 개도 아니다(不二). 이제, 당신은 당신이 그리는 대로 세상을 보게 된다. 관심과 관점만이 그림을 낳는다. 그림은 홀린다.
4. 여명희의 그림은 삶과 그림이 뒤섞이는 상징들, 기호들의 우주, 축제를 보여준다. 상징과 기호의 일반적 의미는 여명희의 그림 속에서 의미를 잃지만,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 그것은 상징과 기호들이 빚어내는 하나의 내면적 우주, 사적 우주이나, 여명희가 우리에게 자신의 그림을 전시한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동시에 하나의 보편적 우주, 적어도 보편을 지향하는 우주이다. 앎과 무지가 서로의 쌍둥이이며 서로의 존재 조건을 이루듯, 소통과 불통은 서로의 쌍둥이이며 서로의 존재 조건을 이룬다. 여명희의 그림은 소통과 불통을 동시에 원한다. 겹겹 그림 속으로 사라졌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송전탑과 부모님, 애도하며 우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웃겨 죽는 박장대소의 순간을 그린 것인지도 모를 이 천사들, 그들의 손에 들려 혹은 허공에 뜬 채 우리를 향해 반짝이는 저 칸타타, 견딤과 환자를 동시에 의미하는, 결국 손에 들린 병이자 삶의 병일 터인 저 칸타타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동시에 말을 거두어 간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양자를 섞거나 융합하지 않고, 두드러진 채 내버려두는, 면밀히 그리고 무심히 그려진, 놓인 이 모든 형상들이 추구하는 것은 구상과 추상, 그림과 삶,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어떤 새로운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관계는 교차, 이접(離接), 사이, 틈에 거주하는 그러한 관계, 생성의 파동 위에 존재의 집을 짓고 때로는 편히 때로는 불편하게 존재하는 그러한 관계이다.
5. 여명희의 작품 세계를 따라온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번 출품작들이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무엇인가 더 밝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고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옳다. 그러나 웃음과 울음이, 행복과 불행이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닌’ 이 세계에서는 어둠이 빛과 밝음의 결여도, 차가움이 따뜻함과 온화함의 결여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차라리 우리는 밝음과 빛이 어둠의 결여이고 따뜻함과 온화함이 차가움의 결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빛과 어둠은 그저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인간은 차가울 수도 따뜻할 수도 있는데,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은 서로 동전의 뒷면인데, 인간은 이것들을 인간화ㆍ인격화하여, 결국은 심리학화ㆍ도덕화해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본질이 아닌, 그렇게 보는 자, 곧 인간 관념의 속성이다. 보통,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말과 그림은 세상이 아니라 나에 대해, 내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주기 마련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명희는 더 차가워지기 위해 더 따뜻해지며, 더 어두워지기 위해 더 밝아질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명희는 더 따뜻해지기 위해 더 차가워지며, 더 밝아지기 위해 더 어두워질 뿐이다.
6. 여명희가 지향하는 세계는 인식과 언어, 넓게는 기호와 상징, 심지어는 이미지에 대한 신뢰를 넘어선 어느 곳에 닿아있다. 물론 여명희는 언어와 기호,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 생각하고 그릴 수밖에 없다. 이제 여명희의 그림이 이미지와 텍스트, 앎과 무지의 이분법을 가로지르기를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명희의 그림은 이렇게 앎과 모름, 확실성과 불확실성, 소통과 불통이 어우러져 춤추는 세계, 아름다움과 추함의 우주로 우리를 초대한다.
포스코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