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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7.

manet 1832-1883



georges bataille, 1955
 
 
 
 
thomas couture, Romans of the Decadence, 1847

 
thomas couture 1815-1879
 
 
*
 
 
 
edouard manet, 1832-1883
 
 
 
 
1859, the boy with cherries
 


 
1861, a boy with a dog
 
 
 

Giorgione [Giorgio Barbarelli da Castelfranco] 1478-1510
or, Tiziano Vecelli or Tiziano Vecellio (1488/1490-1576), known in English as Titian
1508-1509 Pastoral Concert (Fête champêtre)
 
 
 
1862 luncheon on the grass
 
 
 
 
Tiziano Vecelli or Tiziano Vecellio (1488/1490-1576), known in English as Titian
1534 or 1538 The Venus of Urbino (also known as Reclining Venus
 
 
 
1856 olympia
 
 
 
1873 Masked Ball at the Opera
 
 
1877 nana

2014. 10. 2.

그림과 홀림 - 여명희의 그림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안다고 생각할 때,

당신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 로버트 프립 Robert Fripp

 

 

0. 사람들은 삶을 살아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그림을 그린다. 이렇게 사람들은 삶과 그림을 분리시킨다. 마치 그들이 삶과 삶이 아닌 것을, 그림과 그림 아닌 것을 분리시키듯이. 마치 그들이 행복과 불행을, 구상과 비구상을 분리시키듯이. 마치 그들이 진리와 거짓을, 빛과 어둠을 구분시키듯이.

 

 

1. 마르셀 뒤샹은 예술가가 무엇인가를 예술로 지칭하는 순간, 그것은 예술이 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뒤샹의 선언이 자신의 행위를 예술로 변형시킨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예술이라 이르는 행위, 이러한 이름의 행위에 의해 정의되지 않은 예술이란 실상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구분은 이름과 관계된, 가히 권력의 행위에서 나온다. 존 케이지는 음악과 음악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를 파괴한다. 케이지는 침묵과 음향과 화음으로 나누어지는 삼분법을 파괴한 것이다. 완전한 침묵도, 소음과 화음의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음악은, 예술은 서양의 바깥으로 나간다. 자크 데리다는 존재와 예술이 존재가 아닌 것과 예술이 아닌 것에 의해 사후적으로 규정되는 발명된 허구임을 잘 밝혔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구이다. 이제 예술은, 이 세계는 진리와 서양의 바깥으로 나간다. 미셸 푸코는 앎과 진리가 알지 못함과 허구 모두에 의해 구성되는 장(場)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게 됨을 밝혔다. 오늘, 이제 앎과 알지 못함은, 진리와 예술은 다만 서로를 모르기에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쌍둥이임이 잘 알려져 있다.

 

 

2. 모든 사람은 삶을 살고, 모든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삶과 그림이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 구분되나, 그렇게 지칭하여 구분하는 한에서만 그렇다. 삶과 그림은 두 개의 구분 가능한 실체가 아니다. 지칭과 구분은 인식을 위한 유형화 작업에 기초한 도구, 편리를 위한 도구이다. 그런데 이름과 지칭은 단순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이름이 없으면 세상이 없다,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無名無物). 이름이 존재이다. 당신이 당신의 사랑을 사랑이라 이르기 전에 당신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당신이 느끼는 무엇을 사랑이라 이르기 전에 당신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당신은 당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르는 것이 아니라, 늘 특정한 관점, 방식에 따라 이를 수밖에 없다. 당신은 이 손, 저 불, 이 종이를 보지 않고 저 총, 이 칼, 이 창을 볼 수 있지만, 어떤 것도 보지 않으면서 보는 행위 혹은 작용을 수행할 수는 없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 보는 행위 혹은 작용은 분리 불가능한 오직 연결된 것들이다. 관점 없이, 볼 수가 없다(There is no view without a point of view). 관심과 관점만이 이름을 낳는다. 이름은 홀린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말했으므로, 이 모든 것은 세계와 예술에 대해서도 똑 같이 적용된다.

 

 

3. 여명희의 그림과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 물론 여명희의 그림과 삶은 분리된다. 어리석은 이들이 ‘역설’이라는 이름 아래 간단히 처리할 이 언어철학적 주장은 한 작가의 그림을 알려면 그의 삶을 알아야 한다는 철지난 심리주의ㆍ인격주의 비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그림이 단지 그렇게 지칭하여 구분할 할 때에만 구분되는 관계된 요소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림과 삶을 구분하지 않기로 한 경우, 사실은 모든 사람의 그림과 삶이 다 늘 그런 것처럼, 여명희의 그림과 삶이 뒤섞인다. 여명희 삶의 기쁨과 고통, 무덤덤함이 그림으로 온전히 쏟아져 들어온다. 여명희 그림의 기쁨과 고통, 무덤덤함이 삶으로 온전히 쏟아져 들어온다. 그림과 삶은 같은 하나도 아니지만, 다른 두 개도 아니다(不二). 이제, 당신은 당신이 그리는 대로 세상을 보게 된다. 관심과 관점만이 그림을 낳는다. 그림은 홀린다.

 

 

4. 여명희의 그림은 삶과 그림이 뒤섞이는 상징들, 기호들의 우주, 축제를 보여준다. 상징과 기호의 일반적 의미는 여명희의 그림 속에서 의미를 잃지만,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 그것은 상징과 기호들이 빚어내는 하나의 내면적 우주, 사적 우주이나, 여명희가 우리에게 자신의 그림을 전시한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동시에 하나의 보편적 우주, 적어도 보편을 지향하는 우주이다. 앎과 무지가 서로의 쌍둥이이며 서로의 존재 조건을 이루듯, 소통과 불통은 서로의 쌍둥이이며 서로의 존재 조건을 이룬다. 여명희의 그림은 소통과 불통을 동시에 원한다. 겹겹 그림 속으로 사라졌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송전탑과 부모님, 애도하며 우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웃겨 죽는 박장대소의 순간을 그린 것인지도 모를 이 천사들, 그들의 손에 들려 혹은 허공에 뜬 채 우리를 향해 반짝이는 저 칸타타, 견딤과 환자를 동시에 의미하는, 결국 손에 들린 병이자 삶의 병일 터인 저 칸타타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동시에 말을 거두어 간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양자를 섞거나 융합하지 않고, 두드러진 채 내버려두는, 면밀히 그리고 무심히 그려진, 놓인 이 모든 형상들이 추구하는 것은 구상과 추상, 그림과 삶,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어떤 새로운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관계는 교차, 이접(離接), 사이, 틈에 거주하는 그러한 관계, 생성의 파동 위에 존재의 집을 짓고 때로는 편히 때로는 불편하게 존재하는 그러한 관계이다.

 

 

5. 여명희의 작품 세계를 따라온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번 출품작들이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무엇인가 더 밝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고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옳다. 그러나 웃음과 울음이, 행복과 불행이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닌’ 이 세계에서는 어둠이 빛과 밝음의 결여도, 차가움이 따뜻함과 온화함의 결여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차라리 우리는 밝음과 빛이 어둠의 결여이고 따뜻함과 온화함이 차가움의 결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빛과 어둠은 그저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인간은 차가울 수도 따뜻할 수도 있는데,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은 서로 동전의 뒷면인데, 인간은 이것들을 인간화ㆍ인격화하여, 결국은 심리학화ㆍ도덕화해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본질이 아닌, 그렇게 보는 자, 곧 인간 관념의 속성이다. 보통,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말과 그림은 세상이 아니라 나에 대해, 내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주기 마련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명희는 더 차가워지기 위해 더 따뜻해지며, 더 어두워지기 위해 더 밝아질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명희는 더 따뜻해지기 위해 더 차가워지며, 더 밝아지기 위해 더 어두워질 뿐이다.

 

 

6. 여명희가 지향하는 세계는 인식과 언어, 넓게는 기호와 상징, 심지어는 이미지에 대한 신뢰를 넘어선 어느 곳에 닿아있다. 물론 여명희는 언어와 기호,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 생각하고 그릴 수밖에 없다. 이제 여명희의 그림이 이미지와 텍스트, 앎과 무지의 이분법을 가로지르기를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명희의 그림은 이렇게 앎과 모름, 확실성과 불확실성, 소통과 불통이 어우러져 춤추는 세계, 아름다움과 추함의 우주로 우리를 초대한다.

 

 

 
 
 

 
 
포스코 미술관'
 
 
 
 
 

 


 

 

 

 

 

 

2014. 1. 6.

logique de la sensation

 
 

 
 
 


  

 
 
 
 
 
 
"과거 회화에서보다 구상을 포기하기가 유희로서의 현대 회화에서 훨씬 쉽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오히려 현대 회화는 화가가 그의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화폭 위에 자리 잡아 버리는 사진들과 이미 고정된 것들에 의해 침범당하고 포위되어 있다. 사실 화가가 순백의 처녀지 위에서 작업한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표면은 화가가 단절해야 할 온갖 종류의 이미 고정적인 것들에 의해 미리 완전히 잠재적으로 덮여 있다."(21)
 
 
 
 
 
 
 

2013. 7. 15.

2의 공화국

 
 
 
 
 



 
 
미궁이 낳은 미노타우로스

 



1. 2의 공화국
 

너와 나, 곧 두 사람이 모여서 일을 한다. 당연히 말을 한다, 대화를 한다. 우리의 거의 모든 개념어들을 만들어낸 19세기 메이지(明治)의 일본 학자들의 번역대로, 대화(對話)란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와 라틴 문헌학자였던 니체는 이런 의미에서 dialogue는 둘(dia) + 말(logos)이며, 따라서 대화에 참여하는 세 번째 사람은 필연적으로 대화의 깊이를 방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대화는 근본적으로 둘이 하는 것이다.

 
2. 무한의 공화국


그러나 물론 대화는 반드시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둘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서 하는 대화도 결국은 어떤 생각과 어떤 생각이 하는 대화라는 점에서 결국은 둘이, 아니 셋이, 아니 그 이상의 모든 생각들이 하는 것이다. 이 생각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목소리를 가질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가질 수도 있으며, 또 혹은 그저 막연한 어떤 이미지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내 안의 생각들 그리고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대화는 내 안에 존재하는 내가 때로는 알고 또 때로는 알지 못하는 여러 개의 혹은 무한(無限) 가지의 목소리와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너와 나, 우리는 모두 다중(多重) 인격자들이다.

 
둘이, 곧 네가 나와 이야기할 때, 우리는 둘이지만, 그 각각은 필연적으로 무한한 인격을 갖는 다중 인격체들이다. 따라서 너와 나의 대화, 곧 마주 보며 말하기는 하나의 무한한 다중 인격과 또 하나의 무한한 다중 인격이 마주 앉아 서로에게 말을 하는 하나의 사태이다. 무한 더하기 무한, 혹은 무한 곱하기 무한은 무한이다. 너와 나의 무한한 인격들, 세계들, 우주들이 만나고 화해하고 충돌할 때 무슨 일이 생길지는 가히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만남의 결과가 결코 우리 둘의 만남 이전에 확정된 어떤 사태가 아니라, 오직 만남과 동시에 그리고 서로에 대해 상관적으로만 탄생한다, 혹은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3. 1의 공화국

 
결국 무한과 무한의 만남은 하나의 만남인 동시에 무한한 만남이다. 무한한 하나의 만남, 하나의 무한한 만남. 3세기 중국 위(魏)나라의 철학자로 약관 23세에 사망한 왕 필(王弼)은 저 유명한 『노자』(老子) 42장의 ‘길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 가지 것을 낳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라는 아리송한 문장을 대략 다음처럼 해설했다.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은 없다, 곧 존재하지 않는다(無). 이 이름 지을 수 없는 것, 이름 없는 것(無名)에 억지로 이름을 지어 이름이 생긴다(有名). 그리하여 그것이 생겨난다, 곧 있다(有). 다시 말하면,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엇도 결국은 무엇이라 불러야 말을 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에 억지로 이름을 지어 붙이게 되는데, 그것이 길(道)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길이라는 이름이 생기면, 있는 것(有) 곧 ‘하나’(一)가 생긴 것이고, 이 하나는 원래 이름 붙이기 전의 그 무엇(無)에 억지로 이름을 지어 붙인 것(有)이므로 이제 둘(二)이 생겨난다. 이렇게 둘이 생기면 원래의 그것과 이름 지어진 그것 사이의 관계가 생겨나므로 이제 셋(三)이 생겨난다. 이렇게 셋이 생겨나는 모든 과정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것(萬物)이 생겨났다.

 
이는 얼핏 다음처럼 들린다. 가령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혹은 내가 어제 이상한 꿈을 꾸었다면) 언어화되기 이전의 그러한 내 마음 자체(혹은 어제 내가 꾼 꿈의 내용 자체)가 있고, 그 마음(꿈)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가 그 다음에 생겨나고, 그에 따라 내 원래의 진심(꿈)과 그 언어 사이의 관계가 또 그 다음에 생겨나고, 그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관계가 생겨났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리고 왕필의 해석은 표상된 언어가 원래의 진심을 얼마나 잘 재현(再現, representation)하는가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왕 필의 논의는 같은 『노자』의 2장에 나오는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는다.’(有無相生)라는 말에 입각해 해석되어야만 한다. 곧 말할 수 없는 것(내 사랑 혹은 어제 내가 꾼 꿈)이 원래 있고 그다음에 이 말할 수 없는 것에 억지로 이름을 지어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것과 이름 있는 것이 서로에 의해 동시에 탄생된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인식하고 말하기 전에 이른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어제 꾼 그 이상한 꿈의 이미지와 함께 아마도 거의 생리적이라 해야 할 어떤 반응의 총체를 내 육체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꿈에 대해 말하고자 시도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그 꿈을 결코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으며, 오직 어떤 ‘왜곡된’ 방식으로만 묘사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언어란 원래 왜곡하는 어떤 것, 처음부터 불완전한 어떤 것일까? 그럴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노자는 이 이른바 ‘왜곡 현상’을 왜곡으로 보지 않는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꿈과 꿈에 대한 나의 묘사는 오직 서로에 의해서만 동시적으로 탄생한다. 이른바 ‘원래 있는 그대로의 꿈’과 ‘꿈에 대한 묘사’는 동시에 서로를 낳는다. 말과 사물은 동시에 서로에 의해서만 탄생한다(有無相生). 따라서 꿈을 묘사하는 내 언어가 보여주는 이른바 ‘왜곡 현상’은 왜곡이 아니라 말의, 따라서 사물의 본질이다. 그래서 노자는 같은 책 1장에서 말의 대상(내 사랑의 감정 혹은 꿈)과 말(사랑 혹은 꿈에 대한 나의 묘사)은 둘은 아니라 같은 것인데 사람의 앎으로 나와서만 다른 이름을 갖게 된다, 곧 둘로 인식된다(此兩者同, 出而異名)고 말한다. 결국, 2의 공화국은 1의 공화국이다.

 
4. 0의 공화국


이는 도올 김용옥의 말처럼 통합의 원리로서의 1이 0으로, 구분의 원리로서의 2가 1로 환원될 수 있음을 말한다. 완벽하게 동일한 흰 벽 위의 특정 지점 a는 같은 벽 위의 어떤 다른 지점과도 구분되지 않는다. 곧 동일성의 원리 혹은 무차별의 원리로서의 0이다. 그러나 그 위에 파리가 앉아 있든 혹은 어떤 물감이 튀어 얼룩이 졌든 이 지점을 다른 모든 지점과 구분시켜주는 어떤 표식(index)이 존재한다면, 이 지점 a는 이제 우리에게 ‘구분 가능한 것’이 된다. 이는 차이와 구분의 원리로서의 1이다. 그리고 이 통합과 구분의 원리로서의 0과 1의 논리는 고대 중국의 음양(陰陽)과 주역(周易)의 효(爻)들로부터 현대의 2바이트 컴퓨터 연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는 하나의 근본적 틀이다. 1과 2는 문명을 가능케 한 가장 근본적인 인식의 틀이며 그것을 인식하는 방법은 물론 가히 무한하다. 0 곧 공(空)과 마찬가지로 1과 2도 자연수(自然數)가 아니라, 이미 하나의 인식론적 해석을 거친 문명수(文明數)이다. 이른바 자연수가 정말 인간이 저절로 인식하게 되는 자연적인 수라면 말을 모르는 어린이도 모든 숫자를 알아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1에서 무한(∞)까지의 모든 ‘자연적’ 숫자를 모르는 어떤 문명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0도, 1도, 2도 자연적인 구분이 아니라, 이미 문명의 인식틀이다. 자연과학은 자연이 아니라, 가령 16세기 이래의 서양인들에 의해 해석된 특정 문명의 자연 개념에 입각한 자연만을 탐구한다. 자연과학은 자연 자체의 구조가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 관념의 구조를 다루는 것이다. 자연이란 없으며, 오직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된 자연’만이 존재한다. 결국 0 곧 없음(無)이란 없으며, 오직 이미 있음(有)만이 존재한다. 없음조차 이미 있음이다. 그러나 노자의 말대로,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동시에 탄생시킨다(有無相生). 없음 없이 있음이 없고, 있음 없이 없음이 없다. 있음과 없음은 2, 곧 둘이 아니라, 하나 곧 1이다. 그것은 실상 구별되지 않는 0이다. 이 ‘말할 수 없는 것’(道)으로부터 ‘모든 것’(萬物)이 태어난다.

 
5. 이 모든 공화국들


이 모든 공화국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너와 나, 곧 우리 둘이 일했고 말했고 그리하여 어떤 작품이 태어났다는 것은 네가 있고, 그리고 내가 있고, 그리고 그런 너와 내가 만나서 ‘우리’ 작업이 나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너와의 만남에 의해서만 내가 생겨났고, 너 또한 나와의 만남으로 인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으며, 너와 나와 우리와 우리의 작품이 서로서로에 대해 동시적이고 상관적으로만 함께 태어났다는 것, 이 모든 공화국들이 서로가 서로를 함께 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미궁이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 그 반대가 아니다.” 미노타우로스가 혹은 디달로스가 미궁을 만든 것이 아니다. 개별적 주체인 너와 내가 만나서, 우리를 이루고, 그다음에 이 우리가, 이 작품 혹은 저 작품을 낳은 것이 아니다. 이 작품과 우리와 너와 나는 함께 태어났다. 마치 내 사랑과 사랑에 대한 말들처럼, 마치 꿈과 꿈에 대한 말들처럼, 마치 꿈과 현실처럼, 둘은 둘이 아니라, 어떤 다른 하나이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 지금 글을 읽는 이 순간에.








Minotaur Born out of the Labyrinth

Kyoung, Huh

 

 

1.      The Republic of Two

 

 

You and I, shortly two people gather and work. Naturally we talk, we have a dialogue. As translated by the 19th century scholars of Meiji(明治) Japan who created almost all conceptual terms in modern Korean language, the word dialogue(對話) means words exchanged between two people facing each other. In this sense, Friedrich Nietzsche, a classical Greek and Latin philologist, once stated that the word ‘dialogue’ is a compound of two(dia) and word(logos) and that therefore, the third person joining any dialogue inevitably prevents it from gaining profundity. Dialogues are for two people.

 

 

2.      The Republic of Infinite

 

 

However, it is not necessary that dialogues, or conversations, should involve only two people. In fact, since even a conversation by oneself eventually becomes a conversation between one thought and another, all conversations involve two, three, and even more participants in the form of thoughts. Each of these thoughts could bear a voice of a specific individual or an unknown man, or each could appear as a vague image of some kind. In a sense, conversations are created by multiple or perhaps infinite(無限) numbers of both known and sometimes unknown voices and images within. You and I, we all have multiple(多重) personalities.

 

 

When you and I, we two converse, we are two people; but each one of us unavoidably has multiple, infinite personalities within. Therefore, the conversation between you and me, or our talking as facing each other, is a state of one infinite multiple personalities talking in front of another infinite multiple personalities. Infinite plus infinite equals infinite; infinite times infinite equals infinite as well. Surely nobody knows what will happen when our infinite personalities, the worlds, and the cosmoses meet, reconcile, and collide. However, what is important here is the fact that the consequence of this encounter is not a preordained state but an effect born or formed with the encounter, at the moment, by the interrelation only.

 

 

3.      The Republic of One

 

 

In turn, the encounter of one infinite and another is one encounter, but at the same time, it is an infinite encounter as well. It is an encounter of infinite one and of one infinite. Wang Bi(王弼), a 3rd century Chinese philosopher of the Wei() Dynasty who died at the early age of 23, interpreted the ambiguous sentence ‘The way begets one, one begets two, two begets three, and three begets all things’(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from Chapter 42 of the famous book Lao-tzu(老子) as in the following. Unnamable things are not there, that is, they do not exist(). This unnamable, nameless thing(無名) is forcibly given a name(有名). Thus it is begotten; it exists(). In other words, since even this unnamable something has to be called something eventually to be called by people at all, people have named it against its nature, and the name they have given is Tao() or the way. With the name Tao, being() or ‘one’() is born, and this one begets two() since now there are the original non-being() before it is named and the being() after it is named. Then this two begets three(), now as a relationship between the original and the named thing arises. Everything(萬物) in the world is born through this very process of three being begotten out of nothing.

 

 

At a glance, all these could be understood in the following way. For instance, when I love someone (or have dreamed a strange dream at night), first there are my feelings of love as they are before being verbalized (or the dream just as I have dreamed it), then from this arise words to express my feelings (or the dream); then from this emerges a relationship between my original feelings (or the original dream) and the words describing them, and finally from this all things and relationships among them are born in this world. Nonetheless, consider. Are things really so? Should Wang Bi’s interpretation be understood according to Aristotelian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as how well language represents(再現) the original feelings? The answer is no.

 

 

Wang Bi’s commentary should be interpreted based on the sentence ‘being and non-being give birth to one another’(有無相生) from Chapter 2 of Lao-tzu. It is not that the unnamable thing (my feelings or my dream) exists first and then is forced to be named afterwards; rather, the unnamed one and the named one are born out of each other at the same time. So-called ‘love’ does not exist before it is recognized and named love. Again, going back to my personal experience, I keep this mixture of almost physiological reactions in my body and mind that I have felt with the bizarre image of the dream. However, strangely enough, right at the moment I try to depict the dream ‘as it is,’ I realize that I can never describe it as is but can only ‘distort’ it one way or another. Then, does this mean that language is something that distorts, something innately incomplete? Perhaps it is. However, Lao-tzu does not view this ‘distortion’ to be distorting. According to Lao-tzu, my dream and my depiction of it are given birth only by one another simultaneously. The supposed ‘dream as it is’ and ‘the depiction of the dream’ beget each other. Words and things are borne only by one another, only concurrently(有無相生). Therefore, the ‘distortion’ phenomenon of language is not a distortion but rather the nature of words, consequently the nature of things. In this sense, in Chapter 1 of the same book, Lao-tzu says that a subject of words (my feelings or the dream) and the words themselves (the description of my feelings or the dream) are not two things and are really the same; only through human knowledge, this one and the same thing receives two names and is recognized as two different things(此兩者同, 出而異名). After all, the Republic of Two is the Republic of One.

 

 

4.      The Republic of Zero

 

 

Following the logic asserted by Kim Young-Oak, this signifies that One as a principle of unification and Two as a principle of differentiation can be reverted into Zero and One respectively. A specific spot a on a perfectly white wall is not distinguished from any other spot on the wall. However, if there is any index such as a fly or an ink stain to differentiate this spot from all other spots, the spot can be a ‘distinguishable’ spot. This explains One as a principle of difference and differentiation. These principles of Zero as unification and One as differentiation are two fundamental frames that dominate human cognition from ancient Chinese Ying-Yang(陰陽) through Yaos() of Zhou Yi(周易) to modern 2-byte system of computer operation. One and Two are the most basic cognitive frames that enable the rise of civilizations, and there are infinite ways to cognize these frames. Just as Zero or nothing() is not, One and Two are not natural numbers(自然數) but are civilized numbers(文明數) already undergone an epistemic comprehension. If so-called natural numbers are numbers humans naturally comprehend, then even children who have not yet developed their language ability should be able to understand number concepts. Likewise, all civilizations without exception should understand all ‘natural’ numbers from 1 to infinity (∞). Zero, One, and Two are not natural distinguishments; they are already the frameworks of civilization. What natural science studies is nature based on the concept of nature interpreted by Western civilization since the 16th century, not nature itself. Natural science deals with the structure of human conception of nature, not the structure of nature itself. There is no such thing as nature as it is, and the only thing that exists is ‘nature interpreted in a certain way.’ This implies that Zero() or non-being does not exist; it is being() that exists. In a sense, even non-being is already being itself. Nevertheless, as Lao-tzu teaches, being and non-being beget each other(有無相生). Without non-being being does not exist, and without being non-being does not exist. Being and non-being are not One but Two. In fact, they are Zero that cannot be distinguished. From one ‘unnamable something’() arise and thrive ‘all things’(萬物) on the earth.

 

 

5.      All these Republics

 

 

What do all these Republics suggest? They suggest that you and I, together we have worked and talked and therefore have created one thing or another; they suggest that 'our' work is not a mere creation of me being here, you being there and therefore us being together casually in this way by chance. Rather, they suggest that our work is in fact a creation possible only by me being here, only by you being there and therefore only by us being together in this very particular way. They suggest that you and I, our work, and all the Republics are born only out of all our relationships, simultaneously and correlatively. A French philosopher Michel Foucault once said that "the Labyrinth gave birth to Minotaur, not vice versa." The Labyrinth was not built by Minotaur or Deadalus. Our work is not created by you and me, nor by us, nor by our gathering. Our work, you and I, and we all are together born out of the labyrinth of our relationships. In the end, and from the beginning, two things are not Two but some other One, just as my feelings of love and the words describing it are, just as my dream and the words depicting it are, just as dreams and reality are. Just as we are now, in this moment of writing, and in this moment of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