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16.

‘세월호’의 정치철학적 인식론 [최종고]



 
2014년 4월 16일에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사건 혹은 일련의 사태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저마다 문제에 대한 이른바 ‘본질적’ 인식에 입각한 ‘올바른’ 해결책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 중 어떤 것은 타당하고 어떤 것은 그를 것이며, 어떤 것은 적절하고 어떤 것은 부적절한 것이리라. 그런데, 누가 그것을 판단해줄 수 있으랴? 이 모든 불확실성을 넘어 공정하고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있으며 따라서 문제를 해결해줄 절대적 권위와 능력을 갖춘 어떤 지고의 존재가 존재한다면, 아마도 모든 것은 달라지리라. 그러나 그러한 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존재한다 해도 누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그리고 오직 나만이’ 그러한 존재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령 누군가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인지 또는 여러 명인지에 따라, 그들 중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나아가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그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지가 다시금 문제가 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는, 비단 각자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불태우고 죽였던 유럽의 중세만이 아니라, 비록 더 이상 종교적인 외피는 쓰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 여기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오늘 여기에서도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자신의 진단과 해석이 옳으며, 그러므로 이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어야 한다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진단과 해석은 ‘처음부터 잘못된 인식’ 또는 ‘일면 타당하나 결국 부분적인 인식’이며, ‘올바르고도 온전한 인식’은 다름 아닌 나의 인식, 우리의 인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들은 때로 자신의 인식이 유일한 올바른 인식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물론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어떤 양심의 가책이나 거리낌도 없이 ‘공정하게’ 사태를 바라보았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본다. 달리 말해,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이해나 편견과도 무관하게 이 사태를 오직 있는 그대로 보았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자신의 이익이나 편견과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 사태를 바라본 사람들이 내놓는 인식이 ‘이상하게도’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이해관계나 편견을 걷어내고 바라보았다면, 있는 그대로 사태를 바라보았다면, 각자의 인식은 서로 같아야 하지 않을까? 이 말이 너무 강한 의미를 갖는다면, 적어도 서로 상당히 비슷하거나 닮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이러한 가장 기초적인 사실 위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왜 있는 그대로 사태를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태를 서로 ‘다르게’, 아니, 때로는 ‘전혀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이제, 아래에서는 이러한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철학적 논제들을 차례로 검토해보자.
 
 
1. 사실들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나열해볼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들을 포함하여 공식적으로는 476명의 승객을 태우고 가던 청해진 해운 소속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다. 침몰 직전 구조된 174명을 제외한 300명 이상의 인원이 사망한다. 정부는 부실 대처의 책임을 물어 해경의 해체를 결정하고, 각종 비리의 근원으로 지목되는 이른바 ‘해피아’의 척결을 선포한다. 박근혜 정부가 주무부처인 해경, 해양수산부를 비롯한 관료, 관련 집단의 비리 및 그 척결을 추진하는 기본적인 관점은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가히 ‘전 국민적인’ 슬픔과 분노가 언론과 온라인은 물론, 가정과 직장 그리고 학교를 막론하고, 대한민국 전체를 휩쓴다. 청검찰과 경찰은 해진 해운의 실소유주로 지목되던 유병언 일가, 이른바 ‘구원파’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하여 이들을 소환하나 유병언을 포함한 핵심 인물들은 검경의 예상과 달리 출두가 아닌 도피를 결정한다. 이후 경찰은 7월22일 DNA검사 등을 통해 유병언의 은신처로부터 불과 몇 킬로 떨어진 전남 순천 서면 매실밭에서 지난 6월 12일 발견되었던 변사체가 유병언 본인인 것으로 최종 발표된다. 4월 16일 이후 대한민국의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식 언론매체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는 세월호에 관련된 애도와 슬픔, 분노의 글이 넘쳐나지만, 일부 관료와 언론인, 정치인 등이 행한 ‘세월호 유족 폄하’ 및 ‘불순세력 개입설’ 등의 발언이 물의를 일으킨다. 더하여 일부이지만, 심지어 세월호 유족들을 ‘유족충’으로 부르고, ‘유족된 것이 벼슬이냐’는 식의 언어폭력, 물리적 폭력이 유족들에게 행해져 ‘국민적 공분’을 산다. 우연히도 세월호 침몰 100일을 며칠 앞둔 7월 30일 전국적으로 치러진 재보선 선거 결과 여당이 참패할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을 깨고 ‘국민’은 여당인 새누리당의 압승에 손을 들어준다. 8월 14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후 미사에 세월호 추모 배지를 달고 나와 유가족들을 애도한다. 이미 100일이 훨씬 지난 오늘 8월 16일 현재 여야는 이른바 ‘세월호 특별법’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법치주의적 형평성, 자력구제 금지원칙 등의 이유를 들어 유가족과 야당의 요구처럼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유가족들은 이를 요구하며 8월 16일 현재 국회와 광화문 광장에서 30일째 단식농성 중이다.
 
 
2. 선택된 사실들
 
 
당신은 방금 내가 적어놓은 ‘사실들’을 읽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사실들의 나열’에 동의하는가? 우선, 위에 내가 적어놓은 것들은 모두 글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인가? 이미 일정한 ‘해석’이 들어간 것이 있지 않은가? 당신이 생각하는 ‘마땅히 들어가야 할’ 사실들 중 빠진 것은 없는가?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 들어간 것은 없는가? 이러한 지적이 옳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이 준수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해석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사실들만을 적어야 한다. ‘순수한’ 사실이 아닌 특정한 ‘해석’이 가미된 내용이 들어있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관련 사실들 전체를 적어야 한다. 사실들에 대해 말할 경우, 사실들 전체가 아닌 특정 사실, 또는 사실의 특정 부분만을 적어놓고 그것이 사실들의 전체인 양 칭하는 것은 ‘오류’이며, 무엇보다도 사실을 ‘왜곡’시키는 행위이다. 그런데, 2014년 4월 16일에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이 사건 혹은 일련의 사태들에 관련된 ‘사실들’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는 생각보다 무척 중요한 일인데, 그것은 우리의 두 번째 요구, 곧 사실들 전체를 적어야 한다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들’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자연적인 범위에서 바다의 일기와 기상, 파고와 수심 등은 불가항력적인 부분이 있으므로 주어진 기초적 여건으로 이해하도록 하자. 사람들이 말하는 ‘인재’(人災)의 범위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실로 논쟁의 대상이다.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의 부도덕성이 근본원인인가, 청해진 해운의 비리가 문제인가, 그것을 용납한 해피아가 문제의 근원인가, 이제까지 쌓인 우리 사회의 적폐가 문제인가, 관료주의의 적폐가 문제인가, 특히 해수부와 해경이 문제인가, 낡은 배를 톤수를 늘려 사용할 수 있게 법을 고쳤던 이전 이명박 정권의 책임인가, 근본적으로 박근혜 정권의 안이한 대응이 문제인가?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에 해당되는 범위를 정하는 일 자체가 이미 사실의 범위를 넘어선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가를 정하는 일 자체가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들에 대한 나열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련의 판단들이며, 모든 판단은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은 덜 중요하다는 가치 기준의 존재가 선행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마도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들 전체를 적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실들 전체란 무엇인가, 어디까지 적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이 이미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용되는 용어의 정의에 달린 것이기는 하지만,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 서로서로 연결된 세계라는 전체에서 어디까지가 세월호와 연관된 사실들이며, 어디서부터가 연관되지 않은 사실들인가? 그러나 방금 보았듯이,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들 전체의 범위를 정하는 일 자체가 - 사실의 나열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 하나의 판단 행위이며, 판단이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는 가치 판단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행위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다음이다. 사실들 전체를 적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때, 그리고 우리가 그런 시도를 한다고 할 때, 그러한 시도가 실제로 사실들 전체를 적었는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당신, 또는 적어도 당신이 믿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그러한 판단에 늘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당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대답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판단은 없다고. 맞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물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결점에도 불구하고 ‘옳은 것’으로 결국 받아들여야만 하는 판단이 나의 판단이 아니라, 당신의 판단이어야 하는가? 왜 당신의 결단은 옳고, 나의 결단은 그렇지 않은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나만이 예외가 된다.’고 주장하려는 사람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줄 합리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좋다. 관련된 모든 사실의 범위를 정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이런 현실적 대안을 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적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은 사실들 전체가 아니다. 우리가 적으려 노력해야 하는 것은 ‘빼놓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들 전체’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사실들이란 결국 당신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사실들일 수밖에 없다. 당신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누가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진실이? 역사가? 그러나, 진실과 역사는 아쉽게도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진실임을 밝힐 수가 없다. 이는 마치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사랑하는 이들의 믿음과도 같다. 우리의 만남이 운명이라는 판단은 운명 스스로가 내린 것인가? 그렇게 믿은, 믿기로 결정한 내가, 우리가 내린 것이 아닌가? 결국, ‘사실들 전체’에서 ‘중요한 사실들 전체’로 범위를 좁힌다 해도,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가를 판가름해 줄 기준, 곧 가치의 제시가 선행되지 않는 이상, 이러한 말들은 모두 무의미한 말들이 된다. 우리가 말하는 사실들이란,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들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실들이란 오직 선택된 사실들일 따름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의 기준이다. 선택의 기준은, 어떤 경우에도 초연한 사실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당신과 나의 가치 판단에서 나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선택된 사실들이며, 그 자체가 객관적 세계의 거울 같이 투명한 중립적인 반영이 아닌, 우리 가치관과 관심의 반영이다.
 
 
 
일례로, ‘전원구조’라는 희대의 오보를 내보냈던 언론을 생각해보자. 오늘 청해진 해운에서 구원파로 이어지며 유병언 추적, 사망 보도에 이어, 장남 유대균과 같이 도피생활을 했던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저 ‘선정적’ 언론은 공정ㆍ중립ㆍ객관 보도를 하고 있는가? 이 사건 이후 언론에 대해 생겨난 ‘기레기’라는 표현이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언론이야말로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에 맞게 사태를 알아서 사태를 ‘왜곡’하고 ‘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금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공정ㆍ중립ㆍ객관 보도라는 이념 자체가 이미 오래 전에 파기된 19세기적 과학관의 소산이다.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 이래, 쿤과 푸코 이래, 오늘날 아직도 과학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주장하는 과학자가 있는가? 이른바 ‘객관적’ 사실 보도란 오직 주어진 관심, 곧 선택된 특정 관점 내에서의 ‘객관적’ 사실 보도일 따름이다. 뉴스의 전체 방송 시간이 정해져 있을 때, 보다 중요한 내용은 결국 우선순위로 선택되어 보도되고, 덜 중요한 내용은 뒤로 밀리거나 보도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윗선 또는 청와대의 눈치를 보든 개인적인 판단이든, 어떤 것을 보도하고 어떤 것을 보도하지 않을 것인가를 판단하는 행위 자체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는 - 이 경우에는 가히 정치적 - 선택행위이다. 만약 객관 진실 중립 보도라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방송, 신문, 뉴스는 보도될 사건의 선택은 물론, 보도 내용에서도 토씨 하나까지 완벽히 똑 같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관점과 뉘앙스에 따라 보는 이에게 모두 다른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뉴스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똑 같은 사람들일 경우에나 가능한 말일 텐데, 모든 면에서 생각과 의견이 똑 같은 두 사람이란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언론인도 언론을 듣고 보는 사람들도 모두 인간이므로, 언론에 관계된 어느 누구도 이제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인간의 인식론적 조건을 벗어날 수는 없다. 언론에 보도되어 당신과 내가 읽고 들은 모든 ‘사실들’은 이미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관심에 입각하여 선택된 사실들, 곧 해석된 사실들이다. 아래에서는 작은 예를 통해 인간의 인식론적 조건에 관련된 몇 가지 기초적 사실들을 검토해보자.
 
 
3. “당신은 스스로는 몰랐지만 정직하지 않았다.”
 
 
우선 합리적이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각자가 ‘같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인식을 얻었다면, 그 이유는 다음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첫째, 비록 스스로는 알지 못했지만,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경우가 존재한다. 이는 당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수한 개인적 사회적 또는 여타의 편견과 이익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따라서 스스로는 있는 그대로 사태를 바라보았다고 진심으로 정직하게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경우이다. 물론 이 경우 ‘당신’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나’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경우 자신이, 어떤 이익 또는 편견과도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이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것이다. 곧 당신은 사실 당신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이를 용기 있게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당신이 정직하고, 스스로 자기를 기만하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경우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우리는 당신에 대하여, ‘당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여전히 말할 수 있으나, 이 경우에는 이렇게 묻는 우리 자신도 똑 같은 경우에 처하게 되어(우리도 지금 우리는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왜 그러한 질문이 나와 우리가 아닌, 당신에게만, 곧 타인들에게로만 향해야 하는지 합리적으로 대답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사실상 단순히 처음부터 그저 ‘나는 틀릴 수 없고, 당신은 그럴 수 있다’라는 식으로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우기는 것에 불과하다.
 
 
‘당신은 몰랐지만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는 주장은 당신과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나와 우리에게도 똑 같이 제기되고 대답되어져야 하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런 주장을 나와 우리가 아닌, 당신과 그들에게만 제기한다는 사실 자체, 이렇게 ‘당신의 정직성’만을 문제 삼는 나의 동기 자체가 이미 나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함을, 또는 가장 좋은 경우라 할지라도, 스스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
 
 
 
정리해보자.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첫 번째 경우는, 당신과 나를 막론하고, 스스로가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믿는 경우이다. 이러한 가정은 그 대전제로서 우리가 알면서, 곧 의도적으로 나와 남을 속이고 있는 경우를 처음부터 제거한 연후에 성립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자신을 속이고 있고 또 이를 스스로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경우,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 심지어 자신과 남을 속이고 있는 당사자가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가의 여부와도 무관하게 - 하나의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이 경우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우선 당사자가 스스로 반성하고 이를 인정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된다. 다음으로, 당사자가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객관적 증거를 찾아내고 이로써 해당 당사자가 스스로와 남들 모두를 속이고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당사자가 이를 인정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이 경우, 실제로 그런 증거를 찾아낼 수 있는가, 그것이 실제로 객관적인 증거인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실제로 자신을 속이는 경우만을 가정했으므로, 이러한 자기기만을 당사자가 실제로 인정하는가의 여부는 지금 다룰 필요가 없다.
 
 
 
이제, 당신과 내가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믿는 경우, 달리말해, 우리가 모두 정직하게 스스로의 주장을 진심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믿고 있는 경우, 사태는 논리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우선, 당사자의 정직성과 믿음 여부와 무관하게 그 사람의 인식이 잘못된 경우가 존재한다. 당사자가 정직하게 진심으로 어떤 것을 믿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믿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가 그것을 진심으로 정직하게, 더 나아가 강렬하게 또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늘 옳은 것인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진심으로 정직하게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믿음이 갖는 정직성, 절대성만을 보장해줄 뿐, 그 사람이 믿고 있는 것의 내용적 옳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개연적인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어도 사실은 그를 수 있고, 절대적으로 그르다고 믿어도 사실은 옳은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믿고 그것이 실제로 옳은 것일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이 절대적으로 그른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 실제로 그른 것일 수도 있다. 믿음과 사실은 서로 어떤 절대적 논리적 필연성도 갖지 않는 두 가지 다른 성질의 사태들이다.
 
 
4. 완벽한 정직성?
 
 
물론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들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전혀 기만하지 않는 ‘완벽한’ 정직성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과 전혀 무관한 완벽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선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이해관계나 편견이 완벽히 제거된 전적으로 중립적인 시선이 인간에게 가능할까? 이상의 질문들은 ‘어떤 경우에 그러한’(some)이라는 특칭명제가 아니라 ‘모든 경우에 예외 없이 그러한’(all) 전칭명제로서 제기된 것들이다. 이 경우,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인간은 그럴 수 없다. 도대체 누가 오늘 ‘나는 개인적 시대적 계급적 편견이 전혀 없는 완벽히 객관적이고 공정한 중립적 인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역시 예외가 전혀 없는 논리적 전칭명제의 형식으로 제기된 질문이므로, 이에 대해 ‘나는 그런 절대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 내 인식은 절대적이므로 틀릴 수 없고, 절대적 인식은 하나이므로, 나와 다른 인식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틀린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서양에서 말하는 ‘하느님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럽 중세도 조선도 아닌 이 시대에,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이 이런 인간의 인식론적 조건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절대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설령 누가 그런 주장을 편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아무런 이견 제시 없이 그대로 믿고 섬기며 따라야 하는가? 니체가 이미 19세기에 신이 죽었다고 말한 것은 신이 어디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론적 조건을 벗어난 어떤 존재도 존재할 수 없다는(또는 설령 존재한다 해도 각자의 해석만이 존재할 뿐, 누구의 해석이 실제로 그 존재의 뜻인지를 결정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완벽한 정직성, 완벽한 객관성, 완벽한 중립성이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불완전한 인간’은 이러한 ‘완벽한 인식’을 이상으로 삼아 이를 추구해 나아갈 뿐, 결코 그러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인간이 이러한 인식에 도달했다면, 그 사람은 그 자체로 서양에서 말하는 전지전능한 ‘신’일 수밖에 없다. 완벽한 인식을 가진 그에게는 오류란 것이 도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이 가능했다면, 모든 종교와 학문의 역사 역시 이미 끝났을 것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밝혀진 완벽한 진리를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 경우, 어떤 개혁, 발전, 진보도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완벽한 정직성, 완벽한 객관성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면, 인간에게 가능한 현실적 대안은 ‘적절한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정직성 및 그에 입각한 ‘적절한’ 판단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다시 어디서부터가 ‘충분한’ 정직성인지, 어느 정도가 ‘적절한’ 판단인가라는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이는 다시 누가, 어떤 근거로, 어떻게 이러한 ‘충분함’과 ‘적절함’을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이끌려 간다.
 
 
 
5. “당신은 정직하지만 당신의 무지로 인하여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제, 다음으로 우리가 검토해보아야 할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당신의 정직성이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의 진실성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정직성도 내가 믿고 있는 것의 진실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는 정직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보편적 공리이다. 나는 당신의 정직성을 의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인식이 옳은 것이 아님을, 나의 인식이 옳은 것임’을 확신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옳고 당신이 그르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에 대하여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칠 수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정직성에도 불구하고, 무지로 인한 인식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논리는 다른 말로 이렇게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정직성과 진지함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당신의 인식은 틀렸다. 그 이유는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곧 당신의 무지로 인하여 당신은 그릇된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신의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당신의 무지 때문이다. 당신의 그릇된 인식은 당신의 도덕적 부족함이나 어떤 악의(惡意)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당신이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의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실제로 당신은 내가 아는 어떤 기초적인 사실이나 논리, 또는 전체적인 정황,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는 것일 수 있다. 이 경우, 당신은 당신의 순수한 진심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오류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나는 당신의 진심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인식은 당신의 무지에서 기인하는 하나의 오류에 불과하다.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위 첫 번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두 번째 경우 역시 이 논증은 당신에게만이 아니라, 내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나의 인식은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충분한 지식과 논리에 입각한 참된 것으로, 당신의 인식은 무지에서 기인한 오류로 규정하고 있다. 나는 어떤 근거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물론 내가 정직하지 못하여 당신을 속이려는 경우도 존재하지만, 우리는 첫 번째 경우 이래로 이러한 부정적 자기기만의 경우를 이미 양자 모두에게서 제거하였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실제로 당신이 무지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경우가 가능하다. 이 경우는 제외하도록 하자. 그런데 실제로 당신이 그런 줄은 사실상 알 수 없지만, 내가 그렇게 진심으로 주장하는 경우,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 당신의 주장이 당신의 무지로 인한 오류로 내게 보이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리고, 이미 가정된 것이지만, 이러한 나의 느낌 또는 인식을 내가 진심으로 믿는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나는 내 인식의 옳음과 당신 인식의 그름을 어떻게 아는가? 내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기만하지 않았다. 결국 이 논리는 이렇다. “나는 나와 당신의 정직성을 믿는다. 그런데 내게는 당신의 논리가 오류로 보인다. 당신은, 나와 마찬가지로, 정직하므로 당신이 자기기만을 행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당신의 오류는, 어떤 도덕적 문제가 아닌, 당신의 인식론적 문제, 곧 무지오류에서 기인한 것이다. 당신이 정직하다고 해서, 당신의 인식이 늘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논증은 앞의 경우와 똑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러한 논리가 왜 당신이 지적하는 ‘나’의 무지와 오류에 대해서는 아니고, 내가 지적하는 ‘당신’의 무지와 오류에 대해서만 적용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논증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정직에 관련된 논증과 똑 같은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 나의 주장은, 처음부터 그리고 어떤 근거의 제시도 없이, 당신의 주장에 대해 옳은 것, 우월한 것으로 가정되어 있다.
 
 
6. 진리, 재현의 논리
 
 
 
이제 이 ‘옳은 것’을 진리(眞理)라고 불러보자. 우리가 앞서 살펴본 이 모든 논증들의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 나의 정직성은 진리를 보장하는 반면, 당신의 정직성은 - 그것이 나의 진리와 다른 것인 이상 -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러한 인식을 갖는데 있어 아무런 인위적 조작도 하지 않았고, 따라서 내가 본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참다운 인식, 곧 진리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간인 자신에 대해서는 적용되는 이 인식이 나와 꼭 같은 다른 인간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정직성은 진리를 보장하며, 너의 정직성은, 이상하게도 또는 안타깝게도, 다만 오류를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러한 ‘자기중심적’ 논증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진리의 인식론적 비밀은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가 정직하고 사심 없이 세계를 대하여 얻은 인식과 당신의 인식이 같으면, 당신의 인식도 진리이지만, 그렇지 않고 당신의 인식이 나의 인식과 다를 경우, 당신의 인식이 어떤 태도와 방법을 통해 얻어졌는가와 무관하게, 당신의 인식은 오류이다. 이 모든 논의의 대전제는 하나이다. 나의 인식과 다르다면, 당신의 인식은 오류이다. 이러한 논리는 나와 다른, 그리고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의 부정과 살해로 이어진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이 ‘나’의 진리를 보장해주는 최우선적 요소가 나의 진심과 정직성이라는 사실이다(나의 악의와 권력의지도 물론 존재하지만, 전자는 도덕성의 문제로, 후자는 힘의 문제로 우리를 이끌어가므로, 이 단계에서는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 내가 진심으로 정직하게 어떤 조작도 없이 세계를 보았을 때 내게 비추어지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 자체이다. 나의 인식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 곧 세계의 재현(再現, représentation)이다. 그렇지 않은가? 세계는 하나이고, 이 같은 하나의 세계를 우리가 바라보았을 때, 내가 사심이 없고 정직하다면, 내게 주어진 세계에 대한 인식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올바른 반영(反影, refléxion)이 아니겠는가? 세계가 하나밖에 없으므로,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역시 하나밖에 없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사심 없이 정직하게 세계를 바라본 나의 이 인식이 아니겠는가? 재현의 논리는 바로 이러한 방식의 인식론적 자기중심주의이다. 세계에 대한 올바른 재현인 진리가 하나밖에 없으므로, 나의 인식과 다른 인식은 단순히 나와 다른 것을 넘어 세계에 대한 틀린 인식일 수밖에 없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나의 인식과 다른 너의 인식은 올바른 인식이 아니다. 나는 진리를, 너는 오류를 갖게 된다. 이처럼 세계의 재현에 입각한 진리의 이론은 살인의 이론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진리에 입각한 우리의 세계 이해를 ‘이치에 맞다’, 곧 합리적(合理的, rational)이라고 부른다. 이제 당신과 내가 각자 자신의 진리와 합리성을 갖고, 사심 없이 정직하게 얻은 자신의 진리를 의심치 않으며, 각자의 진리, 각자의 합리성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가히 진리의 전쟁, 합리성의 전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진리들의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차라리 이렇게 물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스스로 정직하게 얻은 진리를 의심 없이 믿으며, 자신의 본의와도 무관하게, 진리들의 전쟁을 펼친다. 서로 자신의 배타적 옳음만을 주장하는 이 다수의 진리들 중 어떤 것이 ‘진짜’ 진리일까? 누가, 어떤 근거로 그것을 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혹시 진리 자체가 아닐까? 보다 정확히 말해, 문제는 이른바 유일성, 객관성, 절대성을 가정하는 기존의 진리 개념 자체가 아닐까?
 
 
7. 진리들?
 
 
 
그러나 이렇게 여러 개의 진리들, 합리성들을 인정해도 되는 것일까? 진리란, 합리성이란 그 자체로 이미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무엇,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엇이라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여러 개의 진리들, 합리성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은 유일무이한 절대적 진리를 믿는 절대주의자인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진리관(觀)밖에 없는 것일까? 또, 완전한 상대주의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 내에서의 일정한 진리-규칙을 갖는 상대주의라면? 다시 말해,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그런 진리들이 사실은 주어진 영역 내에서만 유의미한 그런 진리들, 곧 진리놀이들이라면? 그리고 이 진리들 모두를 가로지르는 단 하나의 진리, 또는 메타-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각자는, 스스로 그것을 인식했든 아니든, 자신의 관점에 입각하여 선택된 사실들만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각자의 주장에 합치하는 사실만을 보게 될 뿐이라면? 이제, 당신은 말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 있으나, 나의 지식이 그렇게 모여 구성된 지식임을 믿기는 정말 어렵다고. 나는 어떤 인위적 조작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모았을 뿐이며, 이렇게 모여진 나의 지식이 지식의 전체는 아니더라도 진리임을 의심하기 어렵다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른 관심에서 다른 사실들을 모아 다른 진리를 구성한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고. 나와 모든 당신들의 이 모든 진리들을 모아놓은 절대적 진리의 집적체, 곧 진리 자체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고. 나의 것과 다른 진리, 나의 것과 다른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고.
 
 
 
그렇다. 세월호 사태를 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검토하기 위하여 길고도 먼 길을 돌아온 우리 앞에 놓인 하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나의 합리성과 다른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대답이 가능할 것이나, 궁극적으로 그 대답들은 긍정과 부정 그리고 양자 사이에 놓인 무수한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들의 숫자는 몇 개나 될까? 성실, 정직, 효도, 신의, 사랑 등등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이러한 가치들 전체의 개수란 ‘가치’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근본적으로 그 개수는 유한한 것일 수 없고, 따라서 각 개인에게 현실적으로 무한한 것으로 나타난다. 더하여 당신과 나를 포함한 각자는 이렇게 무한한 가치들이 충돌하는 현실적 상황에서 이 가치들 사이의 경중을 가리게 된다. 나는 가령 정직, 성실, 효도 ... 이런 순으로 가치의 위계질서를 규정할 것이다. 그런데 나와 다른 당신은 사랑, 신의, 성실 ... 이런 순서로 위계질서를 규정한다고 해보자. 내가 정직을 최우선 순위의 가치로 규정한다는 말은 내가 성실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직과 성실이 상충하는 상황에서 내가 성실이 아닌 정직을 선택하리라는 의미이다. 당신 역시 당신의 가치 기준에 맞추어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가령 당신과 내가 각자 10개의 가치들을 나열하고 그 위계순서를 정했을 때, 당신과 내가 선택한 가치들이 동일하고, 더구나 그 경중의 위계질서까지도 동일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현실적으로는 물론 무수한 수의 가치들이 있기 때문에, 가령 10개의 동일한 가치를 고를 확률조차도 대단히 낮다. 더구나 그 순서마저도 일치할 확률은 거의 없다. 하물며 100개의 동일한 가치들을 고르고, 그 가치들 사이의 위계질서마저 같을 확률은 현실적으로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이 문장들에서 가치들을 사실들로 바꾸어본다면, 당신은 이제까지의 논의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은, 이것이 우리가 ‘세상 사람들은, 당신과 나는 다르다’고 말할 때,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이 세상에는 무한 가지의 사실들이 있으며, 우리는 다만 우리의 관심과 관점에 입각해서 이들 중 단지 유한 개수의 사실들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모은 ‘우리의 사실들’에 입각해, 다시금 우리의 관심과 관점 아래 그 사실들을 해석한다. 선택된, 곧 해석된 사실들을 다시금 해석한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실들’이다. 내가 믿는 합리성은 무한히 가능한 합리성의 형식들 중 단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더구나, 평생을 언론과 대중의 선택에 극도로 비판적인 관점을 취해오지 않은 한, 아마도 내가 믿는 합리성은 우리시대의 지배적 관점이기 십상일 것이다. 내가 믿는 합리성은 합리성 자체가 아님은 물론, 아마도 이 시대의 지배적 합리성이 내면화된 것이리라. 나의 합리성과 다른 합리성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8. 합리성들의 전쟁
 
 
 
나는 곤혹스럽다. 나는 이제까지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갖는 ‘저들’의 말이 그저 비합리적인 말, 부도덕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당신이 이제까지 정치에 무관심했든, 새누리당을 지지했든, 새정치연합을 지지했든, 노동당, 통합진보당, 심지어 북한 정권을 지지해왔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정당을 찍는 저 사람이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으며, 나 역시 합리성 자체가 아니라 나름의 합리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나는 묻는다. 도대체 합리성, 진리의 기준이 무엇인가? 이렇게 합리성과 진리를 마음대로 새로 규정해도 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말장난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에게보다도 먼저 당신이 믿는 이 진리관을 발명한 자, 곧 진리를 ‘영원불변하는 절대 진리’로 규정한 플라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진리관이 승리를 거두고 이제까지 서구와 세계를 지배해왔다고 해서, 그리스인도 아닌 21세기 오늘의 우리가 그러한 진리관을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무조건 지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령, 노자와 공자와 부처, 원효와 퇴계와 다산은 이러한 진리관에 동의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하나의 진리, 절대적인 하나의 합리성을 부정한다는 말이 필연적으로 무조건적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 동안 무엇을 믿고 있었던 간에,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저 사람들은,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것처럼, 부도덕한 동기를 가진 비합리적 인간들이 아니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었다. 바로 내가 나름 그래왔던 것처럼. ‘나름’이란 말이 걸리는가? 나의 합리적 선택이 ‘나름의’ 합리성이 아니라 합리성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의 선택도 역시 ‘나름의’ 합리성이 아닌 합리성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보면, 내가 ‘그들’이다. 그들이 나이고, 내가 그들이다. 이제까지 내기 전개한 합리성과 진리에 관한 이 모든 번쇄한 논의가 아마도 당신에게 복잡하고 이상한 것으로 보였다면, 그 이유는 나의 논의가 합리성을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따라서 유일무이한 것으로 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파괴해야 할 것은 진리와 합리성에 대한 이런 기존 관념이다. 진리와 합리성은 복수(複數)이다. 우리가 하나의 동일한 사태를 하나의 동일한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진리도 합리성도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한 것처럼, 하나의 동일한 사태도 하나의 동일한 관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관점이 유일한 객관적 사태 파악이며, 따라서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은 나의 해결책이라는 주장만이 있었을 뿐이다. 당신과 나는 동일하지 않은 사태에 대하여 각자 다른 관심과 관점에서 사태에 대한 다른 진단과 다른 해결책만을 말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도 당신도 비합리적이지 않다(물론 우리가 같은 합리성 놀이를 수행하고 있을 경우에는 정답이 존재한다. 이 자리의 논의는 각기 다른 합리성 놀이들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입장 차이를 조정해줄 정답, 곧 메타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관련된다). 나는 당신이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나와 다른 합리성의 형식을 가진 사람임을, 당신이 합리적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9. 세월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제, 합리성들을 가로지르는 절대적인 메타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남은 것은 합리성들의 전쟁뿐이다. 사태의 분명한 책임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모두의 책임, ‘내 탓이오!’를 외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월호의 선원, 선주, 청해진해운에 대한 처벌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를 근본적으로 선원과 선주의 개인적 부도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단순히 어리석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경과 ‘해피아’ 및 관료사회 일반에 대한 비판과 처벌 역시 분명히 수행되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도덕주의적 관점은 선원과 선주, 해경과 ‘해피아’ 등의 개인적 처벌에 만족함으로써, 그러한 사태를 가능케 했던 근원적인 원인, 곧 구조적 모순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모순의 척결은 어떤 일개 공무원, 행정가가 할 수 있는 영역 이상의 것이다. 이러한 모순의 척결, 이른바 ‘적폐’ 타파의 실제적 결행 여부는 정치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헌법에 의해 이러한 일을 수행해야 할 의무와 권한을 부여받고 있는 존재는 우리나라에 대통령 일인밖에 없다. 따라서 세월호에 관련된 문제는 단순한 행정적 처리가 아닌 정치적 결단의 문제, 통치 행위의 문제이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대통령의 개입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까지 대통령은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선택이며, 분명한 정치적 개입의 또 다른 형식이다. 나는 선원들과 선주가, 청해진 해운이 학생들을 처음부터 죽이려고 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대통령과 정부 여당, 그리고 관료와 언론이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들을 처음부터 괴롭히고 죽이려고 아무런 개입도 대책도 내놓지 않으며 나아가 망언을 일삼은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해 모든 것을 제쳐놓고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할 아무런 절실한 이유가 없으며, 설령 그렇게 하고 싶다 해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는 단순한 사실의 지적일 뿐, 냉소의 힐난의 언사가 아니다.
 
 
 
좋다. 세월호와 관련된 이른바 ‘적폐’를 정말 그 근원에서부터 발본색원하여 척결한다고 하자. 적폐의 원인과 근원, 그 뿌리와 가지는 어디까지일까? 정권과 여당, 관료집단은 물론 언론에서 학계, 기업에 이르기까지, 이 기득권자들, 이 적폐들은 스스로 조용히 물러날까? 아니, 자신이 적폐라는 것을 인정할까? 아마도 대한민국 기득권 집단 전체일 이 ‘적폐’는 결코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 예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한 적이 없다. 어떤 일개인이 양심과 도덕적 반성에 의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혁한 경우는,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몇 십만에서 몇 백만을 헤아리는 기득권 집단이 모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도덕적으로 반성하여 알아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자는 여전히 ‘순진한 자’란 말을 듣지 않기 어려울 것이다. 기득권자들은 언제 자신의 기득권을 내놓는가? 내놓지 않으면 죽게 될 때이다! 아니, 역사는 심지어 죽게 되는 경우에도 기득권을 내놓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임을 증명하고 있다. 어떤 정부도 자신의 권력 기반을 흔드는 개혁을 알아서 먼저 하지는 않는다. 개혁하지 않고 관례와 관행에 따라 행동하면, 내가 구속된다는 것을, 우리 회사가 망한다는 것을, 나의 권력이 흔들린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시켜줄 때, 인간은 움직인다. 인간이 안 해도 되는 개혁을, 더구나 그러한 개혁이 자신의 권력 지지 기반 자체를 흔들 때, 권력자가 먼저 알아서 개혁에 나서기란 만무한 일이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국민이 오늘 해야 할 일은 관료가, 기업이, 정부가 개혁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들을 압박하는 일이다. 이러한 압박을 현실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헌법상 대통령 일인밖에 없다. 따라서 국민은 대통령이 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철저히 압박해야 한다. 이것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왕조가 아닌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존재 이유와 주권은 국민인 나와 당신에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의 보호와 앙양이 민주공화국의 존재이유이다. 국가가, 정권이, 이를 착각할 때, 이를 최우선적 가치로 간주하지 않을 때, 국민은 국가와 정권에게 이를 각성시킬 권리와 의무가 있다.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고, 그러한 국가에서 공직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진리-놀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수한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적 합리성의 궁극적 근거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오늘 이 땅에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민주주의 참칭 세력이 일부 정치 영역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좌파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우파를 우리의 정치 영역에서 추방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공직자와 정치인은 자신이 일제시대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쿠데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는, 공화국의 공직에 진출하는 것은 물론,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아서도 안 된다.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자유를 말하는가? 이 자유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 곧 당신에 반하여 느끼고 믿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자유, 국가와 정부의 공식의견과 다르게, 때로는 반하여, 느끼고 믿고 생각하고 말할 자유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런 자유와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을 때, 그 국가에는 자유도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의 선구, 로크의 말대로,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어떤 자유도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면, 이는 처음부터 계약 위반이라 볼 수밖에 없다. 상호 간의 계약을 이미 한쪽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경우, 나머지 한쪽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계약을 파기한 자에게 계약의 준수를 강요하고, 불가피할 경우, 그러한 세력의 타도에 나서는 일이다. 이것은 서구 역사상 최초로 ‘혁명’을 정당화한 로크의 논의이다.
 
 
10. 국가와 정치의 존재이유
 
 
오늘 광화문에서 단식 논성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을 보라. 피해자들이 안 괜찮다고, 고통스럽다고 말하는데, 이를 해결해야 할 의무를 지닌 관료와 정치인들은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것은 법치주의에 어긋난다,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은 준수되어야 한다는 반박은 물론 옳은 것이며, 합리적인 지적이다. 그러나 이를 법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려는 시도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이의 처리는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이미 원칙적으로 끝난 일이므로 우리에게는 법적인 어떤 책임도 없다는 일본정부의 논리와 동일한 것이다. 물론 세월호와 위안부 문제는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양측 모두 법치와 행정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리고 현 정부와 일본 정부의 논리는 분명히 옳은 것이며 근거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미 제정된 법, 이미 합의된 국제협정을 사후적으로 발생한 사태를 처리하기 위하여 다시 개정하거나 예외를 둔다는 것은 그리 합리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 대하여 법치와 행정을 넘어서는 정치와 통치의 논리가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행정과 법치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해석관점의 문제, 곧 정치와 통치의 문제이다. 이는 국가의 존재이유 및 정당성의 근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해석과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일본정부가 법치와 행정만을 내세우는 한, 위안부 할머니들과 한국인들의 마음을 얻기는 요원한 일이다. 현정부가 법치와 행정만을 내세우는 한, 세월호 유가족들과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는 요원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와는 달리, 7.30 재보궐 선거에서 세월호 사태가 100여 일에 가깝게 이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아닌 여당이 압승을 거두는 ‘이변’이 일어났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개혁 피로감’과도 같은 ‘도덕성 피로감’의 결과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국민이 정부 여당과 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기만당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공천 파동을 비롯한 지리멸렬한 야당의 문제였다고 말하며, 누군가는 경상도 천만 인구의 힘이라는 말을 한다. 아마도 모두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월호 사건이 노무현이나 김대중 정권 하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이보다 더 나은 구조(救助) 성과가 있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다만 가령 ‘특별법’의 제정을 비롯한 정부의 사후 대처라는 측면에서는 상당 부분 다를 수 있었음을 인정한다). 이 부분은 그야말로 과거부터 켜켜이 쌓인 ‘적폐’의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측면 때문에, 현 정권의 지지자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단순한 정치 공세로 치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국민들이 속은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국민이 새누리당’이라는 말을 지지한다. 새누리당이 총칼로 직접 정권을 잡은 것도 아닌 이상,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것이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문제가 될 것도 없으며, 나는 이를 폄하의 의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날 국민들의 정서와 도덕감정을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집단, 아니 파악하고 있는 수준을 넘어 국민의 정서 및 도덕감정과 ‘일체가 되어’ 국민을 ‘리드’하고 있는 집단은 - 가령 야당과 <한겨레신문>, 또는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치>가 아니라 - 새누리당과 <조선일보>라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민주진보’ 진영이 80년대식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관념론/유물론’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국민 대다수의 정서를 이해하지도 리드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패배하기도 어려운’ 객관적 정세 속에서도 선거를 포함한 매번의 싸움에서 ‘판판이 패배하고’ 있다고 본다. 나는 방금 ‘국민 대다수’의 정서라고 말했다. 정치는, 선거는 숫자 싸움이다. 아무리 옳은 주장을 펼쳐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표를 받지 못하면 현실 정치에서는 질 수밖에 없다(이는 근본적으로 ‘혁명’의 경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맹자의 말대로, 왕과 신하가 잘못되었으면 그들을 죽이고 바꾸면 되지만, 국민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국민을 죽이고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정치는 국민의 인식과 행동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를 규정하는 조건을 바꾸려 노력할지언정, 국민 자체를 죽이고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폴 포트나 스탈린, 마오, 김일성이 했던 일이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국민을 알고 이해한다는 뜻이며, 나아가 국민을 알고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정치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2014년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는 이제껏 국민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인식의 틀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준엄한 자각이다. 국가와 정치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말을 듣는 것,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국가와 정치는 오직 그럴 때에만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 나는 세월호 사태와 관련하여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4년 6월호에 <‘해석권력’의 주체는 국민이어야>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그 자매편이라 할 수 있으며, 두 글의 논의 내용이 겹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