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19.

내 삶의 진정한 영웅, 한창기



내 삶에 영웅이란 것이 있다면 고등학교 시절 이래의 로버트 프립과 브라이언 이노, 대학교 이래의 러셀과  사르트르 그리고 존 케이지와 마르셀 뒤샹, 그리고 우리것과 국악에 눈뜬 이십대 중반 이래의 김소희, 박동진, 황병기, 박경리, 김유정,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바로 한창기이다. 그의 생애를 듣고 본 순간, 70년대 주변에서 늘 보았던 뿌리깊은 나무가 바로 그가 발행한 책이며, 바로 그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을 낸 사람이고, 바로 그가 훈민정음에서 따온 우리말 한글 서체를 만들어낸 사람이며, 바로 그가 뿌리깊은 나무 민중구술 자서전을 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바로 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빔 벤더스의 말대로 실로 미국은 우리의 무의식을 식민지화시켰다. 영문과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팝송과 서구문학과 서양철학에 사로잡혀 살던 내가 이 모든 것은 물론 인간의 것이나 결국 내가 권력 관계에 의해 내게 학습된 남의 것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이십대 후반이었다. 소외가 깊지 않으면 깨달음과 해방이 없듯이 나는 서양에의 함몰된 소외의 가히 바닥을 쳤던 것이다. 나는 김소희의 판소리를 듣고 내 몸에 내장된 '우리'와 '편함'과 '전통과 근대' 따위의 주입된 모든 개념을 어느 누구도 아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시 생각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결국 '합리성'과 '근대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편성'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나 자신, 나의 말, 나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서른셋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도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실상의 머리속의 구획개념에 불과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실상은 국수주의자이면서 스스로를 민족주의자인줄 알고 실상은 제국의 노예로 뼛속까지 식민화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코스모폴리탄인 줄 착각하는 그런 퇴물이되고 싶지 않았다. 종종 어떤 이들이 우리나라가 싫고 이민가고 싶다, 우리나라를 버린다,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어 따위의 말을 한다. 좋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는 쏙빠지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우월주의적 시선에 기초한 생각을 가진 이들을 볼 때마다, 그 이유도 짐작되고 그것이 갖는 수사학적 기능도 이해되지만, 나는 그들을 경멸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백인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인가? 역사를 안다면 자부심과 더불어 부끄러움 또한 느낄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민 간 것이 너의 탁월한 선택인가? 이민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과정이 아니라 열매만을 탐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야말로 속물적 사고방식이 아닌가? 서구의 훌륭한 교육을 받아 인권의식이 탁월한 것이 네 생각인가? 이는 실로 문화정치학에관련되는 정치적 역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학을 가서 열심히 공부하여 어리석은 한국인들을 깨우쳐주고 계몽시켜주어야 하는가?


소위 '선진국'에 가서 살아보면 가령 15년전에 이민을 와서 15년 전 한국말의 화석을 구사하면서 15년전 자신의 인식수준으로 바라보던 한국이 오늘의 한국 자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이 이민간 나라 사람들이 1등 시민, 자신이 2등시민, 한국인들이 3등시민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한국을 폄하하며 평생을 우월감에 젖어 사는 비극적 캐릭터들이 꽤 있다. 구역질나게 가련한 존재들이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생각하며 한국인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확신하는 저 이방인들, 자기 전공에 파묻혀 인간을 못보는 고상한 학자들, 자기 전공학자와 학문만이 진리라고 외치며 오직 보편적 인간, 보편적 학문을 외치는 신식민지의 전도사들. 자신이 대상화하는 사람들의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고 오직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그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저 어리석은 폭력적 군상들, 속물들, 그것이 바로 부정하고 싶은 경망스럽고도 고상한 속물로서의 내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이십대의 끝자락에서 결심했다. 내가 유학 갔다와서 미국미국미국(요즘은 프랑스프랑스프랑스)을 외치며 자신을, 우리나라를 부정하는 저런 인간만은 되지 않겠다. 이민을 가고 싶은 사람, 우리나라를 버리고 싶은 사람은 제발 빨리 이민을 가라, 그리고 우리나라를 버려라. 그리고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고 다시는 관심도 갖지 말고, 특히 우월한 시선으로 가련하다는 듯이 나를 우리를 쳐다보지 마라. 네가 그렇게 경멸하고 가런하게 생각하는 이곳에도 인간이 있고 고통과 좌절과 꿈과 노력이, 한마디로 삶이 있다. 나는 네가 버린 이 땅, 이 사람들과 여기서 살것이다. 내가 바로 그들이며, 나는  바로 나 자신인 이들을 도대체가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불이법문을 기억하라. 그 못난 네가 나이며, 네가 말하는 거기가 바로 여기가 아닌가!


전선은 서구와 비서구, 미국 혹은 프랑스와 한국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한국인들도 자신과 똑 같은 존엄한 인간들이며 한국인들 중에서도 미국의 뜻있는 사람들과 똑 같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 방외자로 자처하면서 훈수나 두는것이 아니라 - 자기 몸을 던져서 자신과 자기 주변의 삶을 조금씩 개선 시켜나가려는 이들과, 미국은 우월하고 한국은 열등하다고 믿는 국가주의자들, 인종차별주의자들, 본질주의자들, 운명론자들 사이에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미국도 프랑스도 가야만 할 이유도 안 갈 이유도 없으며 방글라데시든 북한이든 소말리아에든 그 어느 곳에도 나와 똑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곳에도 그 땅을 버릴수없어 그곳에서 오늘도 작은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 국회이든, 언론이든, 경상도이든 또 어디에든 다 마찬가지인 진실임을 안다.


나는 주어진 제도 밖에서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며 천리를 가는 것보다 제도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그들과 함께 한 걸음을 나아가는 일이 때로는 더 어렵고 소중한 일이라고 믿는다. 나는 사람을 버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나는 남들이 나를 버리지 않기를 바라고, 따라서 나도 남을 버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내가 스무살 중반 경에 생각하고 결심하여 그저 그렇게 살기로 결정한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렇게 스스로의 존재를 못나면 못난대로 잘나면 잘난대로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그것에 충실하며 나아가 주어진 조건 자체의 변화를 모색하면서 자신의 존재와 삶, 아름다움의 새로운 문법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이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모든 것은 삶의 길,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라는 말로 귀결된다. 진정한 영웅은 삶의 영웅, 곧 문화의 영웅이다. 문화의 영웅이란 새로운 삶과 생각의 방식을 제공하는 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진정한 문화적 영웅들 중 하나, 플라톤이 꿈꾸던 철인왕에 더하여 예술왕 문인왕이 인류역사에 단 한번 있었다면 그것은 세종이라고 생각한다. 세종은 메디치와 다빈치와 루터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한 사람 안에 구현되었던 존재이다. 그리고 그의 불멸의업적은 한글창제다. 생각해보라. 완벽하게 한자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던 세종과 동시대의 양반들은 한글따위를 만들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한글창제라는 사실에 대한 재인식은 어리석고 교만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휴머니즘에 대한 새로운 정의 아래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할 역사적 사실이다. 전혀 다른 층위의 것이겠지만 19세기 중후반 다산 정약용이나 수운 최제우,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해월 최시형이 행했던 일이 바로 이것이다. 나의 사소한 일상과 관심에서 출발하여 세계와 우주를 품는 일이야말로 보편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20세기의 세종대왕이 있다면 그것은 전형필, 황병기, 박경리, 한창기 선생님 같은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의 영웅이란 자신이 전수받고 배운 다양한 전통을 바탕으로 삶의 새로운 문법을 제출하는 자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령 70년대의 김지하나 김민기 그리고 박경리 같은 이들의 간난의 신고를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와 '근대성'의 개념 자체에 대한 재검토와 새로운 민주주의, 인권, 아름다움. 문화의 개념을 창출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남의 것만으로 나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는 없으므로.


고대의 소크라테스와 공자 그리고 부처, 육산상과 왕부지, 근대의 데카르트와 로크, 그리고 리카도와 마르크스, 해월 최시형과 동무 이제마, 가장 최근의 들뢰즈와 푸코가 바로 그렇게 했듯이, 오늘날 철학을 하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삶과 인간,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에 입각한 인간과 삶, 아름다움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보잘것없고 평범한 나의 오늘, 나의 생각, 내 삶의 작은 일상 하나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런 학문이란 아직 남들의 것을 주워들은 앵무새의 읊조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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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창기 특집기사
http://m.hani.co.kr/arti/culture/book/265739.html



2015.04.06.
스페인 마드리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