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7.

“교육은 교정이 아니다” -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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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57년, 다미앙의 처형


1757년 2월 3일, 국왕살해미수범 다미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 와, 공개적으로 사죄를 할 것.” 다음으로 “앞의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 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버린다.” <암스테르담>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드디어 그는 네 갈래로 찢겨졌다. 이 마지막 작업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왜냐하면, 동원된 말이 그러한 견인 작업에 익숙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마리 대신에 여섯 마리의 말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불충분해서 죄수의 넓적다리를 잘라내기 위해 할 수 없이 근육을 자르고 관절을 여러 토막으로 절단해야 했다 ... 평소에는 지독한 저주의 말을 퍼붓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에서는 어떤 모욕적인 말도 전혀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만 극도의 고통 때문에 그는 무서운 비명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이따금 ‘하느님, 제발 자비를, 예수님 살려주십시오’하는 말을 되풀이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사형수를 위로해 주기 위해 약간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던 생 폴 주임 사제의 정성을 다하는 태도는 구경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2. 1838년, 파리 소년감화원을 위한 규칙


1838년 역시 프랑스의 레옹 포쉐가 작성한 ‘파리 소년감화원을 위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제17조. 제소자의 일과는 겨울에는 오전 6시, 여름에는 오전 5시에 시작된다. 노동시간은 계절에 관계없이 하루 9시간으로 한다. 하루 중 2시간은 교육에 충당한다. 노동과 일과는 겨울에는 오후 9시, 여름에는 오후 8시에 끝내도록 한다. 제18조. 기상. 첫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재소자는 조용히 기상하여 옷을 입고 간수는 독방의 문을 연다. 두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재소자는 침상에서 내려와 침구를 정돈한다. 세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아침기도를 하는 성당에 가도록 정렬한다. 각 신호는 5분 간격으로 한다. 제19조. 아침기도는 감화원 소속신부가 주재하고, 기도 후에 도덕이나 종교에 관한 독송을 한다. 이 일은 30분 이내에 마치도록 한다. 제20조. 노동. 여름에는 5시 45분, 겨울에는 6시 45분에 재소자는 마당으로 나와 손과 얼굴을 씻고 제1회의 빵을 배급받는다. 뒤이어 즉시 작업장별로 정렬하여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데, 여름에는 6시, 겨울에는 7시에 시작해야 한다. 제21조. 식사. 10시에 재소자는 노동을 중단하고 마당에서 손을 씨소 반별로 정렬하여 식당으로 간다. 점심식사 후 10시 40분까지를 휴식시간으로 한다. 제22조. 학습. 10시 40분에 북소리가 울리면 정렬하여 반별로 교실로 들어간다. 읽기, 쓰기, 그림 그리기, 계산하기의 순서대로 한다. 제23조. 12시 40분에 재소자는 반별로 교실에서 나와 마당에서 휴식을 취한다. 12시 55분에 북소리가 울리면 작업장별로 다시 정렬한다. 제24조. 1시에 재소자는 작업장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노동은 4시까지 계속한다. 제25조. 4시에 작업장을 나와 안마당으로 가서, 손을 씻고 식당에 가기 위해 반별로 정렬한다. 제26조. 저녁식사 및 휴식시간은 5시까지로 하고, 재소자는 다시 작업장에 들어가야 한다. 제27조. 여름에는 7시, 겨울에는 8시에 작업을 종료하고, 작업장에서 하루의 마지막 빵을 배급받는다. 교훈적인 뜻이나 감화적인 내용을 담은 15분간의 독송을 재소자 1인 혹은 감시자 1인이 하고, 이어서 저녁기도에 들어간다. 제28조. 여름에는 7시 반, 겨울에는 8시 반에 재소자는 마당에서 손을 씻고 복장 검사를 받은 뒤 독방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북소리가 울리면 옷을 벗고, 두 번째 북소리가 울릴 때 침상에 들어가야 한다. 각 방의 문을 잠근 후 간수들은 질서와 침묵을 확인하기 위해 복도를 순회한다.”
 

3. 감시와 처벌, 모두가 모두를!

 
이 두 가지 너무나도 대조적인 기록은 공히 프랑스에서 각기 1757년과 1838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다. 두 기록이 사이는 정확히 81년인데,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점은 신체형의 소멸이다. 이제 국가 혹은 행형기관은 더 이상 범죄자에게 육체적 고문을 포함한 어떠한 직접적 육체적 고통도 가하지 않으며, 다만 도덕과 종교적 목적을 갖고 재소자의 영혼과 정신에 작용하는 교화, 감화, 교정적 재교육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변화를 법학자와 행형학자들은 이제까지 18세기의 계몽주의적 휴머니즘에 입각한 잔인성의 배제, 형벌의 인간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이제는 고전이 된 1975년 저서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이러한 시각을 전적으로 뒤집는다. 이러한 육체적 고통, 신체형의 소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범죄자를 사악한 선천적 악마가 아닌, 부조리한 사회적 모순구조의 희생자로 보는 것일까? 그것은 범죄자를 더 이상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교화하려는 인도주의적 행동일까? 푸코의 대답은 명쾌하다. 그것은 덜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효과적으로 잘 처벌하기 위한 것이다! 이전과 같은 공개적 장소에서 범죄자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일벌백계식의 처벌 방식은 민중들의 인식이 올라가면서 그리 잘 먹히지도 않고, 오히려 반발심만 키운다. 육체적 고통을 주는 방식은 이제 효용성도 떨어지지만, 처벌의 장소가 예상치 못한 폭동의 장소로 변하는 등 정치적 부담도 크다. 따라서 이제 처벌의 대상은 더 이상 육체가 아니라, 당신의 정신, 영혼이며, 그 수단은 도덕, 양심이자, 철학과 종교, 윤리이다. 이러한 영혼과 정신의 통제 관리를 통한 통제에 집중하는 권력을 푸코는 규율 권력이라 부른다.


4. ‘양심의 가책’이 병이다
 

근대 규율 권력은 당신의 영혼, 정신, 내면을 감시하고 처벌한다. 규율 권력은 더 이상 육체에 대한 폭력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그렇다고 육체적 폭력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근대 규율 권력은 영혼과 정신을 철학적,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통제, 관리한다. 푸코가 말하는 규율 권력은 외적 강제의 내면화를 통해 정신과 영혼에 직접 작용한다. 이 외적 강제의 내면화란 이른바 양심의 가책이란 이름 아래 작동하는 죄책감, 자책감이다. 이는 저 유명한 19세기 말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주장으로, 니체는 인간은 자신의 분노를 외부의 정당한 대상에게 건강한 방식으로 해소할 수 없을 때, 이 부정적 에너지, 분노의 투사 방향을 안쪽으로 돌려 자기 자신을 탓하고 괴롭힌다고 말한다(이것이 『도덕의 계보』(1888)의 내용이다). 이는 일단 개인의 내면에 죄책감이 심어지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알아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가령, 미국 인구 중 흑인의 비율은 대략 10% 정도인데, 실제 범죄자, 사형수, 그리고 자살하는 사람들 중 흑인의 비율은 10%를 훨씬 상회하여 20-30%에 이른다. 이러한 통계 결과를 보고, 가령 어느 백인 우월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마도 이를 흑인의 인종적 열등성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말 흑인의 인종적 열등성, 위험도를 나타내는 지표일까? 오히려 그것은 미국의 백인 중심 사회가 얼마나 흑인을 차별하고 범죄와 죽음으로 몰고 가는가, 백인 중심 사회의 지배 권력이 얼마나 잔혹하고 비인간적인가를 나타내는 지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제시대 자살과 범죄, 사형수들 중 조선인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아마 조선인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지 않을까? 이는 조선인들의 인종적 열등성을 나타내는 지표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5. ‘내 탓이오!’ 혹은 도덕주의 - 사회적 모순의 개인화ㆍ파편화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미국의 흑인들, 일제하 조선인들 중 거의 대부분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이러한 일의 이유를 자신의 개인적 과오와 부족함, 도덕적 성실성의 결여에서 찾을 확률이 대단히 높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죄책감, 자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이 사회적 모순을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로 잘못 환원할 위험성을 갖는다는 점이다(이러한 관점은 물론 이들 개인 각각이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거나, 그들에게 개인적 도덕적 잘못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분명히 개인적 결함과 도덕적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한 집단에서, 가령 100명으로 구성된 집단에서 10-20명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가령 80-90명이 유사한 현상을 보인다고 할 때, 이는 이미 어떤 개인의 도덕적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문제이다. 결국 잘못의 개인적 부분을 강조하는 도덕주의는 사회적 모순을 가리고, 문제의 초점을 잘못된 방향, 즉 오로지 ‘개인적 도덕성과 성실성’의 문제로 몰고 간다. 네게 일어난 문제의 근원을 밖에서 찾지 말고, 네 안에서 찾아라!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무조건 안에서, 내 안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상황에 따라, 안에서 찾을 것은 안에서, 밖에서 찾을 것은 밖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무조건 모든 것에 대해 늘 항상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분노할 것은 분노해야 하지 않을까? 무조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볼 것은 긍정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볼 것은 부정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눈 감은 맹목(盲目)이 아니라, 눈 뜨고 세상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6. 감시와 처벌, 내가 나를!

 
감시와 처벌이 지배하는 푸코적 규율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단순히 누군가가 누군가를 처벌하는 사회가 아니다. 이 사회는 모두가 모두를, 항시적으로 늘, 전혀 예외 없이, 감시하는 완전 통제 사회이다. 규율 사회는 사소한 것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사회이다. 규율사회는 이른바 정상/비정상을 구분하고, 정상이 아닌 것 곧 비정상적인 모든 것을 너와 내게서 무한히 제거하는 사회이다. ‘정상화하는 규율’이 무서운 점은 그 사회가 어떤 하나의 보편적 정상을 정해놓고, 그것과는 다른 모든 것을 틀린 것, 잘못된 것, 비정상적인 것, 따라서 교정되어야 할 것, 감시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따라서 너와 나 자신을 포함한 이 사회의 모든 것, 모든 사람이 감시와 처벌 그리고 교정의 대상이다! 그 시선,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너다, 네가 문제야! 너는 도대체 왜 그러니! 네가 뭐가 부족하니! 네가 지금 행복한 줄을 모르는구나! 감사할 줄을 모르고! 감히 네가, 나에게! 눈 부릅뜨지 마!” 그리고 이 비난과 힐난, 결국은 교정의 대상은 일상의 모든 것, 사소한 모든 것에 이른다. “너 신발이 그게 뭐니! 머리 스타일이 그게 뭐니! 누가 그런 옷 입으래! 귀걸이는 또 뭐고, 네가 학생이니! 다리 떨지 마라, 체신 없다! 남들이 흉본다, 똑바로 해라!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고, 눈길을 공손하고 가지런히! 걸음걸이도 복장도 단정하게! 밥 먹을 때 티비 보지 말고, 책 좀 봐라, 대답 잘하고, 핸드폰 좀 놔라, 방 청소 좀 하고, 공부 좀 해라, 대답 좀 잘 하고! 말투 봐라, 자세 좀 봐라!” 우리는 이렇게 일생 동안 혼나고, 감시받고 처벌 받고, 교정당한다.
 

7. “다르게 살자!” - 정상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이 규율 사회의 정말 놀라운 점은 그것이 이른바 ‘억압-해방의 도식’을 따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즉, 가령 이전의 마르크스주의가 본 것처럼, 이러한 규율 권력이 감시, 처벌, 교정하는 대상이 피억압자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이른바 ‘억압자’ 자신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친구를 비난하고 힐난하는 그 목소리, 그 시선이 바로 나 자신을 비난하고 힐난하는 그 목소리, 그 시선이다. ‘넌 도대체 왜 그러니’는 곧 ‘난 왜 이럴까, 난 왜 이것밖에 안 될까’로 변하고, 더 나아가 ‘아무도 내 연극을 못 알아차리는구나’에서 ‘난 역시 안 돼’를 거쳐, ‘난 왜 이렇지, 난 이것밖에 안 돼, 내가 싫다, 난 정말 혐오스러운 괴물이야, 아무도 내 진짜 본 모습을 몰라, 내 연극은 정말 완벽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아무도 내 가면 뒤에 숨겨진 나의 이 추악한 얼굴을 몰라, 하지만 내 가면 뒤의 본 모습을 보면 그들은 날 버릴 거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이 모든 자동적인 정신 과정, ‘바른 행동’을 낳는 정상화 메커니즘에 대항하여 푸코는 ‘다른 행동’을 낳는 문제화의 실천, 곧 대항품행을 제안한다. 문제화의 실천은 이토록 정상적인 그 모든 것을 문제의 대상으로 만드는 실천이다. 어떤 것을 우리가 문제로 삼기 이전에 그것은 당연한 것, 곧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왜 반드시 꼭 그래야만 하는지 문제로 삼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인간 세상의 유일한 당연, 보편적 필연이 아니라, 논쟁해볼만한 것, 문제의 대상, 문제인 것이 된다. 그것은 도대체 누가 그렇게 정한 것일까? 그것은 어떻게 당연한 것이 된 걸까? 이 모든 당연한 것들, 정상적인 것들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이토록 당연한 것이 된 걸까?
 
 
 
"교육은 교정이 아니다."
 
 
 
201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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