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7.
잠언 18
0.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못하면 자신의 인격적 성숙이 불가능하듯, 자신이 사람하는 사람에 대한 근본적 실망을 느끼지 못하면 자신의 삶이 시작되지 않는다.
1. 복음 1 - 내가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없듯이, 당신도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
2. 그렇게 적당히 타협적으로 징징대지 마라. 징징대려면 확실히 철저하고 전적으로 징징대거나, 아니면, 남탓 상황탓 하지 말고, 고개를 똑 바로 들고 네 인생을 살아라!
3. 기대에의 부응 - 자기 중심주의와 담론 효과가 만나면 모든 것을 관계망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관계망상은 자신과는 관계 없는 어떤 하나의 사실을 자신과의 관계 하에서만 해석하는 질병이다. 이건 분명히 나 들으라고 한 말이야, 이건 나 보라고 쓴 거야 운운 ... 이는 인식론적 자기 중심주의의 극단적 버전이다. 하지만 이는 실상 정도의 차이일 뿐 망상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일반적인 인간의 일반적 경향인데, 가령 내가 이곳에 올리는 글이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 느끼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들에게는 내가 어떤 경우에도 특정 개인을 겨냥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나와 가까운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내게 '버림 받으려면' 남의 뒷얘기를 내 앞에서 하면 된다는 사실을 얘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여하튼 이 글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쓰는 글이다. 이 글이 '나'를 겨냥하여 쓴 것이라 생각되는가? 그렇다, 이 글은 바로 당신을 겨냥하여, 그리고 오직 당신만을 겨냥하여 쓴 글, 당신에게만 해당되는 글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관계망상이 실로 얼마나 황당한 자기 중심주의의 병적 형식인가를 알 수 있다.
4.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분석이 다만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인식은 실로 타자에 대한 모든 대상화, 주체화 과정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다. 청년 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권고와 질타는 실로 '청년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독백'이다.
그리고 이는 이후의 푸코가 깨달은 바로 그대로 기성세대의 담론 권력, 곧 자기 정당화 장치의 핵심적 일부를 이룬다.
나는 청년 세대가 아니며, 학벌부터 계급적 기반까지 그들과 모든 것이 다르고, 실상 그들을 잘 알지도 못한다. 기성세대의 급선무는 그들을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들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것, 자기 생각으로, 제멋대로 청년들의 삶을 규정짓지 않는 것이다.
나이와도 상관없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로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상상과 실천은 상대에 대한 경청과 정직한 내 생각의 토로, 그리고 서로의 생각에 대한 토론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실천 방안의 하나로 나는 모든 정치적 제도적 개혁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기 정직의 실천을 들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래, 어차피 남들은 속여도 된다, 그러나 나를 속이지는 말자! 우리나라에는 실로 데카르트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없다는 것, 이것이 근본문제이다. 자생적 데카르트의 탄생이 개인주의와 정당정치와 민주주의의 선결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묻자. 과연 우리에게는 내가 없는가? 과연 그런가? 이 부족한 나, 못난 나, 지지고 볶는 내가 이미 완전한 충만한 나의 또 다른 형식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더 나아가 관념적으로 완전한 이상보다 현실 안에서 불완전한 오늘의 내가 이미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서구가 17세기에 도달한 데카르트적 근대성이 한반도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어떤 모델도 비교대상도 없으며, 따라서 나 자신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의 삶은 내가 만들어나갈 바로 그 삶이라고, 서구적 근대성은 서구의 근대성일 뿐이고, 근본적으로는 근대성 자체가 서구의 지배를 위해 작동하는 완벽한 지배의 장치-기계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는가?
데카르트에게서 나는 좋은 부분을 배울 것이되, 나는 데카르트가 아니고 따라서, 그의 삶을 존경하고 존경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으로 나의 삶을 살 뿐, 데카르트는 내가 따르고 모방해야 할 내 삶의 모델이 아니라는 이 생각이야말로 참으로 데카르트적인 생각이 아니겠는가? 나는 데카르트가 나의 이런 생각을 지지하고 응원해주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설령 데카르트가 나의 이런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데카르트를 존중하고 배우되 동시에 무시하고 경멸하며 데카르트를 가르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믿는 바대로, 그리고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배우고 타인을 경청하며, 어떤 경우에도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대상화/주체화의 동시적, 상관적 과정'이라 일컫는 것이다.
5. 내가 어떤 누구에게도 조종당하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어떤 누구도 조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6. 즐거운 자기 긍정 -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7. 복음 2 - 네가 나의 구원을 위해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도 너의 구원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8. "모든 사람들이 고대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 또는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특히 자기 자신을." - 프리드리히 슐레겔
9. 한국사회의 인식가능조건 곧 에피스테메는 겉다르고 속다른 이중성이다. 다만 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이 이중적이라면 그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아가 이중성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본다. 다 이중적일만 하니까 이중적이 된 것이 아닐까? 실로 생각과 말과 삶의 분리라는 이 이중성의 태도는 우리시대 인식과 실천, 생각과 삶의 가능 조건이다.
10. 내적 현실의 외적 대상을 향한 투사
11. "현상이 실체를 가리듯, 실체가 현상을 가린다." - 선림고경총서
12. 도덕주의적 인격주의는 지적 현학주의를 훨씬 능가하는 악을 생산한다.
13. 대화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일이지만, 버림 받는다.
14. 현실이라는 이미지 - 어떤 인간도 현실 자체, 현실 전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현실이란 내가 보는 현실, 내가 느끼는 현실, 내게 당연하게 보이는 현실이다. 따라서 모든 '현실'은 현실에 대한 누군가의 표상, 파편적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관념이 현실을 가리듯이, 이 '현실'이 현실을 가린다.
15. '질서'란 늘 이미 그 뒤에 존재론적 위계를 전제하는 사물의 배치행위, 곧 권력 정당화의 장치이다.
16. "토마소 캄파넬라에 의하면 세상은 사악하거나, 죄악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것도 적재적소에 위치하지 않고, 모든 게 비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에는 개인적 자유, 우연 그리고 개별 사항들이 너무 많은 반면 질서가 너무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관리되어야 하고, 모든 사항들은 제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캄파넬라의 사고 속에는 스페인의 복고주의 외에도 분명히 중세의 특징이 엿보입니다. 가령 여러분, 조토의 벽화에 묘사된 위대한 질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대상들은 각자의 처지에 상응하는 대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등급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질서를 생각해 보세요. 고립된 모든 존재들은 단테의 작품에서는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이라는 정해진 공간에 소속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스콜라 철학의 질서 체계를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제반 사고는 마치 건축물의 부속품처럼 본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역시 상기한 내용과 유사합니다. 작품 내에서 모든 것을 질서 잡고 연결시켜 주는 것은 지상에 머물고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질서는 개별적으로 파고 들어 가서, 모든 개개인들의 삶을 규정합니다."(326쪽)
- 에른스트 블로흐, <서양 중세르네상스 철학 강의(1950-1956, 1962-1963)>(1977), 열린 책들, 2008.
17.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인식의 내용은 인식대상보다는 차라리 인식주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내가 보는 세계는 실상 세계보다는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세계에 대한 연구는 나라는 인식주체에 대한 연구가 된다. 신학과 형이상학은 물론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이 인간학이고, 인간의 인식이며, 인간과학이라는 칸트, 포이에르바흐, 니체, 푸코의 말은 이런 뜻이다.
18. 사람들이 너의 열등함이라 부르는 것을 열등함이 아닌 너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건, 나아가 자긍심으로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19. 들뢰즈는 '오리엔탈리스트'가 아닐까?
20. 한문과 일본어를 모르면 21세기 대한민국의 '국학'은 태어나지 않는다.
21. 효도와 마마보이는 실로 차이가 미묘하여 거의 대부분의 경우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22.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와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북한의 구호는 주체사상이 성리학의 마르크스주의적 변용, 곧 '충효 마르크스주의'임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들이다.
23.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은 한 마디로 전망의 부재, 곧 철학의 부재이다!
24. 산티아고 순례길은 아랍과 유대인과 스페인인이 공존하던 70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을 쥐기 위한 왕권과 가톨릭의 배제 기능, 곧 이른바 가톨릭 '스페인'의 정체성 형성을 위한 주체화, 자기의 테크놀로지 장치이다.
25. 철학은 볼성상 불온한 것이다. 혹은 불온하지 않은 철학은 체제순응을 위한 자기 정당화의 논리이다.
26. "말은 거짓말을 해도, 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2015.11.4.-2015.11.17.
희생양 만들기의 정치학 - 르네 지라르 타계에 부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 1923~2015)가 4일 타계했다. 내가 이 프랑스 사상가의 이름과 사상을 처음 접한 것은 1987년 출간된 김현의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를 통해서였다. 그 후 그의 책들을 읽으며, 나는 그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로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책은 많이 읽었지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고 말하는 책들 중 나는 지라르 이상의 탁견을 보여준 책을 별로 알지 못한다. ‘희생양’, 아마도 요즘말로 ‘이지메’ 혹은 ‘왕따’ 현상을 포함할 법한 이 끔찍한 현상에 대한 이 이상의 탁월한 분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쉽지 않을 것이다. 이후로 나는 이 탁월하고도 정교하며, 실은 대단히 서구중심적이고 가톨릭적인 분석을 기회가 닿는 대로 글에서, 강의와 강연에서 소개했다. 지라르는 누구이며, 그의 이론은 어떤 것일까?
르네 지라르는 1923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났다. 지라르는 ‘15세기 후반 아비뇽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논문을 내고 파리의 명문 그랑제콜 국립고문서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의 인디아나대에서 ‘1940-1943년 미국인들의 프랑스관’으로 역사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줄곧 미국의 존스홉킨스대, 버팔로 뉴욕주립대, 스탠포드대 등에서 프랑스문학을 가르쳤다.
지라르는 라캉과 데리다 등을 초청해 미국에 최초로 포스트구조주의 사유를 소개한 것으로 평가 받는 1966년 존스홉킨스대 콜로키움 ‘비평언어와 인간과학’을 주관한 인물 중 하나다. 미국에 거주함으로써 동시대 프랑스 주류 사상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대서양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던 지라르는 2005년 엄격한 회원 선출 규정으로 유명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종신회원에 선출돼 학문적 업적을 프랑스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지라르의 대표작으로는 그를 문학비평가로 세상에 널리 알린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년, 한길사), 『폭력과 성스러움』(1972년, 민음사), 『희생양』(1982년, 민음사), 대담집 『문화의 기원』(2011년, 기파랑) 등 30여 권이 있으며, 이들을 포함한 주요 저작 몇 권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지라르의 사상은 문학비평으로 시작하여, 일종의 ‘사변적 인류학’을 거쳐, 문화와 종교의 기원에 관한 가히 문명비평적 연구로 끊임없이 확대되며 진화한다. 초기작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모든 욕망은 모방적이다’ 곧 ‘욕망의 삼각형’의 테제를 세르반테스, 사드, 스탕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등의 문학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입증하려 한 작품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충족되면 일정기간 동안 사라지는 동물적 ‘욕구’에 비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모든 인간적 ‘욕망’은 모방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중간의 ‘매개자(매개물)’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지라르는 이를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라는 테제로 정리한다. 지라르는 이러한 ‘불변의’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아의 유치한 욕망을 ‘낭만적’이라 부르면서 ‘참다운 소설’은 이러한 ‘끔찍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우리 앞에 드러내어 보여준다고 말한다.
지라르는 대표작 『희생양』에서 이러한 주장을 전 인류와 문명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희생양 이론’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온전히 희생양 곧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된 유일한 책인 그리스도교의 『성서』를 제외한 이제까지의 모든 책들은 가해자의 기록이다. 모든 인간사회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결정적 한 걸음에 해당되는 ‘초석적(礎石的, fondateur)’ 폭력을 숨긴다. 달리 말해, 모든 인간 사회는 자신의 유지와 생존, 나아가 안정과 번영을 위해 사회 구성원들 중 일부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이 희생자는 다수와 다른 자인 동시에 약한 자, 곧 ‘실은 죄가 없으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자이다.
이 경우 가해자들이 ‘희생양’은 ‘실은 죄가 없는 희생양’임을 인식한다면 그를 ‘희생양’으로 몰 수가 없으므로, 가해자들의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 ‘무지’는 필수적이다. 가해자인 나는 피해자가 실은 죄가 없는 자라는 것을 몰라야 한다. 이제 사회의 불안정은 이 희생양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간주되고, 전체는 희생양을 희생시킴으로써 사회의 불안정한 상태를 타개하고 나아가 안정을 도모한다. 이러한 상태는 다음 번 위기가 올 때까지 유지되지만, 위기가 발생하면 사회는 또 다시 희생양을 선택하여 위기를 넘어선다. 이것은 물론 폭력의 구조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끔찍한 진실을 직시하고 이를 ‘있는 그대로 기술한’ 가톨릭의 입장만이 진실을 적어 내려간 것이다. 성서는 예수가 아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며, 이러한 일이 결코 반복될 수 없도록 그 실상을 기록한 책, 실로 유일한 진리를 담은 책이다. ‘문화의 기원’은 바로 이러한 ‘성스러움의 초석적 폭력’으로 작용하는 ‘희생양’의 논리에 의한 것이다. 오직 가톨릭의 진리, 예수만이 이러한 폭력의 만연 상태를 근본적으로 타파할 수 있는 구세주임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만이 진리이다.
서양인도 아니며, 더구나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가톨릭과 관련된 지라르의 논의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인간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바깥 혹은 안에 자기와 다른 것, 곧 ‘악’으로서의 타자를 발명하여 그에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돌리고 마치 자신은 죄가 없는 듯이 행동한다는 지라르의 통찰은 받아들인다. 지라르의 ‘타인을 악한 희생양으로 만드는’ 세상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순수’가 나와 다른 모든 타자들을 ‘불순한 악’으로 만든다는 통찰이다.
한국일보 2015년 11월 6일 자
잠언 17
0. 어떤 이들은 잘못된 믿음을 위하여 순교한다.
1. "올바른 일을 올바른 동기로 행해라!" - 칸트
2. 카뮈는 자신의 희곡 <칼리굴라>에 대한 노트에서 '여동생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칼리굴라가 죽음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적었다. 이는 깊은 고통을 품은 자들에게는 실로 당연하게 가히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통의 사유를 자신의 개별 경험을 넘어선, 심지어는 보편적인 것마저도 넘어선 곳까지 밀고 나가는 이는 드물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사회가 깔아준 정상적 도덕감정의 한도 곧 '정상성'의 한도 내에 머무르고야 만다. 물론 정상성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나, 두려움에 떨며 사회가 설정해준 틀 안에서 생각하고 사는 인간을 성숙한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면에서 사유란 참으로 존재에의 용기와 관련된 것이라 말해야 한다.
3. 모든 남자는 자신만의 매력을 갖는다.
4. 사랑이 구원과 고향을 찾기 시작하는 순간, 그 사랑은 사랑에서 어긋난다.
5. 글쓰기 혹은 삶 - 담백한 실력으로 채워야 할 자리를 노력의 양으로 메꾸려는 경우가 있다.
6. 모든 것을 자기가 받은 인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실제로 그 대상이 어떤지 또는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관심이 없으며 오직 자신의 주관적 확신 구조에 의거해 모든 것을 심판한다. 이들에게 이런 사실을 지적하면 이들은 자기 사정을 대며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강변하는데, 자기 자신과의 거리두기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극히 명확한 형태로 보여주는 이런 대답이야말로 이들의 끔찍함을 배가 시킬 뿐이다.
7.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해 철학을 한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상식'만 빼고.
8. 철학함이란 내가 학습받은 모든 당연함, 정상성, 상식의 안팎에서 스스로 생각하는것인 것만큼 '불온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부모에서 선생님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력자들이 철학을 반기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철학은 고분고분하고 길들여진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9.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 수줍어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야기의 모순이나 한계보다 그 선의와 순수함을 알아주며 호응해준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말이 옳은 말이어서 타인들이 공감하고 호응해준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타인의 너그러운 공감과 호의를 옳고 그름의 문제와 뒤섞어서는 안 된다.
10. 말라르메의 언어와 시 - 해설을 대신하여 옮긴이가 아들에게 보내는 네 통의 편지
네게 보내는 편지를, 또는 이 번역에 붙이는 해설을, 여기서 끝낸다. 네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은 말라르메나 그의 <시집>과는 크게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내가 이 시집을 번역하면서 시인에게 바쳤던 존경심을 네가 기억해주기 바란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간다는 것이리라. 생각한다는 것의 끝에까지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없다. 게다가 지금 인간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항상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극도로 비정한 삶을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시는, 패배를 말하는 시까지도, 패배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정황에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시의 행복이며 윤리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이 행복과 윤리가 너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2005년 겨울, 아버지
- 스테판 말라르메, <시집>, 문학과지성사, 45쪽.
11. 유년의 끝 - 철학에 입문한다는 것, 곧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로 마음 먹는다는 것은 자신이 이제까지 그 안에서 커왔으며 따라서 바로 오늘의 자기 자신이기도 한 자신의 '순수'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일, 그것을 검토해보는 일이다. 이러한 거리두기와 검토 행위는 실로 자신의 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두려운 일이며, 바로 이것이 참다운 철학자와 소설가가 그토록 드문 이유이다.
12. 완벽히 멸균된 세계 - 순수란 글자 그대로 '순수하지 못한 것'을 제거하는 배제와 거부의 장치이다. 순수는 허구적인 동일자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불순한 타자성'을 솎아내는 권력기제이다. 순수는 '순수한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내 주변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로부터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선별의 기제이다.
13. 다른 사람은 다른 삶을 산다(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이 다 다르다는 말이다).
14. 자신이 해야만 하지만 감당할 수 없어서 '못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병, 강박관념일 뿐이다.
15. 내가 인류학적 코드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을 때 나는 이른바 '합리성'만이 옳교 그름의 유일한 기준인 줄로만 알았다. 이러한 관점 아래에서 젊은 날의 나는 나와 다른 합리성의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줄로만 알았다. 그 결과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을 하고 관계를 맺게 될 때 나의 말이 그들의 신뢰를 얻지도 설득력을 갖지도 못한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훗날 푸코를 공부하게 되었을 때 나는 에피스테메가 바로 이러한 주어진 특정 시점에 있어서의 한 사회가 작동시키고 있는 인식 가능조건들의 집합, 곧 인식론적 장임을 바로 이해했다. 이러한 에피스테메의 이해가 중요한 이유는 마치 패션 디자이너가 소비자의 (자신이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만 심지어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무의식적 심성구조, 행동패턴을 정확히 이해하면 옷이 잘 팔릴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같다.
16. '현실'로 보이는 것이 가장 비현실적인 관습적 관념이다.
17.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해 철학을 한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진실'만 빼고.
18.
「바다의 미풍」 - 스테판 말라르메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
달아나리! 저곳으로 달아나리! 미지의 거품과 하늘 가운데서
새들 도취하여 있음을 내 느끼겠구나!
어느 것도, 눈에 비치는 낡은 정원도,
바다에 젖어드는 이 마음 붙잡을 수 없으리,
오, 밤이여! 백색이 지키는 빈 종이 위
내 등잔의 황량한 불빛도,
제 아이를 젖먹이는 젊은 아내도.
나는 떠나리라! 그대 돛대를 흔드는 기선이여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
한 권태 있어, 잔인한 희망에 시달리고도,
손수건들의 마지막 이별을 아직 믿는구나!
그리고, 필경, 돛대들은, 폭풍우를 불러들이니,
바람이 난파에 넘어뜨리는 그런 돛대들인가
종적을 잃고, 돛대도 없이, 돛대도 없이, 풍요로운 섬도 없이……
그러나, 오 내 마음이여, 저 수부들의 노래를 들어라!
번역: 황현산
19. 한 사회에서 작동하는 인류학적 코드를 모르고 혼자 생각하는 사람과 이러한 코드를 정확히 알고 더하여 생각하는 사람은 큰 차이를 보인다. 단적으로 전자는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한다. 후자가 주의해야 할 점은 코드의 작용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구분하는 일이다.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자신의 속한 사회의 인류학적 코드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그러한 코드에 대한 복종과 타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포함된 이 세계의 작동원리를 모른 채 학교에서 배운 서양적 합리성으로 한국사회가 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는 자는 가장 좋게 보아 순진한 자에 지나지 않으며 실상 대화가 불가능한 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뜻한 바를 실제로 이루어 내려는 긴 호흡 혹은 새로운 합리성을 만들어가는 화이부동은 다만 비겁한 자기 합리화로만 비칠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타인들을 자신의 합리성에 입각한 도덕적 심판구조 내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실상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다만 자신이 홀로 외롭고 힘겨우나 '올바른' 싸움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이들은 현재 자신의 합리성이 합리성의 유일하고도 보편타당한 형식이라고 진지하게 믿는다.
20.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해 철학을 한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현실'만 빼고.
21. 가령 세 사람이 있고 그들이 대화를 한다고 하자.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오직 자신의 사정과 관심에 대해서 말할 뿐 셋 모두를 위한 대화의 주제나 공통의 관심을 찾으려는 생각조차 못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과는 즉물적 현상에 대한 감상의 토로만이 가능할 뿐, 어떤 공통의 관심과 미래에 대한 차분한 대화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최악은, 그런 이야기가 나올 경우 자신의 자격지심과 열등감으로 대화를 가로 막으며 다시 예의 그 자기 중심적 세계관으로 돌아가고 마는 경우이다. 쉽게 말해 그들과는 그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이 가능할 뿐, 나 혹은 더 나아가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도대체 이들에게는 무엇이 결여된 것일까? 나는 그것이 모두 곧 공통의 이익에 대한 감각, 공공선에 대한 관심, 한 마디로 보편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결여라고 말하겠다.
나는 물론 그들을 다만 아직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여길 뿐 미워하거나 단죄하지는 않는다. 악의도 없이, 몰라서, 자기 열등감 때문에, 자기보호, 자존감 유지 차원에서, 안 돼서, 못해서 못한 일에 화를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과의 친교는 실로 '일방적'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의 컨디션이 좋아 내가 그들의 관심에 맞추어줄 수 있으면 우리 사이는 좋다. 그러나 내가 피곤하고 괴로운 인생의 날에 나는 그들로부터 내가 필요한 지지와 이해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이는 대등한 두 인격의 만남이 아니라, 어처구니 없게도 일방적 '보살핌'의 관계에 가까워진다. 이건 당연히 친구가 아니다. 사람은 너무 어린아이와 놀아줄 수는 있어도 같이 '친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2. 나이가 어리면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좁을 수밖에 없도록 젊은이들을 키우는 사회에서 자란 젊은이들의 거의 대부분은 나이가 어릴 경우 실제로 이해의 폭이 좁다.
2015.10.19.-2015.11.04.
잠언 16
0. 혼자 있는 것이 외롭고 무섭고 싫은가? 그럼 천천히 벗어나라. 나도 혼자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10년이 걸렸고, 혼자 있는 것을 즐기게 되기까지 또 다른 10년이 걸렸다.
1. 푸코 1 - 당신이 할 수 없다고 믿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은 오직 당신이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된 것들이다.
2. 푸코 2 - 자신의 진심을 말하지 않으면(혹은 적어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어떤 참다운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3. 늘 지나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순진한 얼굴로 타인에게 과도한, 실은 무례한 관심을 보이는 이런 사람들은 설령 악의가 없다 해도 상당히 난감한 사람들이다. 이들과의 만남은 사회적 센스(혹은 컨센서스)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낮아 최소한의 인격적인 배려는 고사하고 종종은 봉변을 당할 우려마저도 있다. 나는 물론 이런 사람들과의 자리를 가급적 피한다.
4. 감시와 처벌은 악한 권력만 강자만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무조건 행하게 되는 삶의 조건과도 같은 것이다. 감시와 처벌은 악한 의도만이 아니라 선한 의도로도 혹은 (가령 피아노 배우기와 같은) 이른바 '선악과 무관한' 여하한 목적 의식적 행위에서도 수행된다. 실상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 나아가 눈짓 손짓 생각 하나가 모두 감시와 처벌의 주체화 대상화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제 권력에는 중립도 바깥도 없으며 따라서 권력이 본질적으로 악한 것조차 아니다. 권력을 수행하는 주체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 곧 '나'다. 권력은 권력관계 곧 복합적인 전략적 상황이 발생시키는 전반적 효과이며, 궁극적으로 매번의 수행 작용에 의해 자신의 규칙을 새로이 구성하는 하나의 놀이이다.
5. 폭력의 가장 끔찍한 유형은 스타일의 강요이다. 가령 직설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나도 직설적으로 말할 테니 너도 직설적으로 말하라'며 직설적으로 말하는 경우. 이러한 경우가 진짜 끔찍한 폭력으로 전화되는 이유는 그 말의 발화자가 자기 말의 폭력성을 꿈에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6. 폭력의 또 다른 형식은 이른바 도덕의 강요이다. 성실, 효도, 정직으로부터 신뢰와 이해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도덕적 가치의 종류는 많고도 많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무한 개의 도덕적 가치들 중에서 자신의 도덕적 가치들을 고르고 자신이 판단한 경중에 따라 이들 사이에 위계의 순서를 설정한다. 그리고 어느 두 사람이 이렇게 고른 도덕적 가치들과 그들 사이의 위계가 같을 확률은 실상 전무하다. 그런데 각자는 자신이 고른 도덕적 가치와 위계에 입각하여 타인들의 도덕적 가치와 위계를 심판하고 힐난한다. 가령 성실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사람은 정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사람이 조금은 불성실한 존재로 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은 직장에의 성실을 우선으로 삼는 사람을 무엇인가 소외된 가정적이지 못한 사람처럼 보게 될 것이다. 이제 정직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도덕적 덕목들 밎 그들 사이의 위계가 실은 자신의 자의적인 선택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의 대부분은 그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조차 아니라는 점에서 실로 자의적이다. 결국 이제까지 정당한 도덕적 권리 혹은 심판으로 생각되었던 판단과 행동의 대부분은 자신의 자의적인 취향 곧 자기 스타일의 강요에 불과하다. 이 모든 심판의 밑바닥에는 나의 생각과 다르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의 보편주의, 나의 느낌과 다른 것들이 싫다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악의적 권력의지가 놓여 있다.
7. 그러나 폭력이 갖는 최악의 형식은 - 니체의 정확한 지적처럼 - 정의와 나의 복수가 일치할 때이다. 실제로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피해자의 복수가 아니라 정의의 실현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을 획득한다. 이때 가해자는 온전히 피해자(혹은 피해자를 대리하는 자)의 처분에 맡겨진다. 아무리 부당한 피해자의 보복도 가해자의 죄에 의해 덮히게 되고 따라서 가해자가 '받아 마땅한 것'이 된다. 피해자의 권리는 하나의 권력이다. 우리가 권력을 쥐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게 된다. 가해자란 정의상 나에게 부당한 해를 입힌 사람 곧 불공정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한다. 나는 나에게 부당한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공정해야 하는가? 타인의 불공정함은 나의 불공정함을 정당화하는가?
8. 배은망덕 혹은 적반하장 - 내가 네게 나의 비밀스런 진실을 말했으니 너도 나에게 너의 비밀스런 진실을 말해주어야 한다는 생각.
9. 죄책감과 열등감이 인간 행동의 결코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강력한 동기가 될 때가 있는 것처럼, 지적 허영심도 때로는 처음으로 한 인간을 학문으로 이끌어주는 강력한 동기가 될 때가 있다.
10. 인간은 자신의 수준에서 모든 것을 바라본다, 세상과 타인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11.
"166. 어려운 일은 우리 믿음의 무근거성을 통찰하는 것이다."(53)
"256. 언어놀이는 시간과 더불어 변한다."(70)
"559. 당신은 말하자면 언어놀이란 미리 볼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 말뜻은 언어놀이가 근거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언어놀이는 이성적 혹은 비이성적이지 않다. / 그것은 거기에 있다-우리의 삶처럼."(134)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확실성에 관하여(1949-1950)>(1969), 책세상, 2006.
12. 이른바 '정상적'이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13. 학문적으로는 엄격한 사람이, 인간적으로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학문과 인격을 혼동하면 학문과 삶이 분리된 '선남선녀'로 삶을 마칠 뿐이다.
14. 푸코의 파르헤시아 - 상대에게 자신의 '진실'을 말하고, 결과를 감수하는 것.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것이 실제 '진실'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아는 것.
15. 조언
1. 삶은 살되 고통은 피하고 싶다고? 온몸을 던져 삶을 살고, 삶의 비극과 고통마저도 받아들여라!
2. 사랑은 하되 상처는 받기 싫다고? 진심으로 사랑을 하고, 사랑의 상처마저도 받아들여라!
16. '어른'이 되는 법 - 사정도 모르는 남 얘기, 지나치게 일반화된 책 속 얘기는 듣지 말 것. 네게 맞지도 않는다! 잘 듣되, 어디까지나 네가 생각하고 네가 판단해라, 그리고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만큼이나 그 책임도 네가 져야만 한다.
17. 폭력의 근거와 기원 - 관심과 공감 그리고 배려가 없다면 실로 이 세상은 지옥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반드시 '사랑'이라 불러야 한다고 보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근본 문제이다. 이러한 '사랑'은 때로 네게 무엇이 참으로 좋은지를 네 의견, 네 기분, 네 생각과도 상관없이 내가 정해준다. 왜냐하면 나의 판단은 나로서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나의 확실한 체험과 삶에서 나온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리'는 늘 자기가 수행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또 가능케 만드는 인식론적 장치이다.
18. 급하고 쫓기면 쉬어라. 쉬어야 보인다. 그러나 언제까지 어느 정도 쉬어야 하는가? 보일 때까지. 이것이 '쉬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의 참뜻이다.
19. 나의 글쓰기 수업을 듣던 한 학생이 이런 글을 써온 적이 있다. "나의 부모님은 이러저러한 현실적인 문제로 수많은 갈등을 겪었고 그런 와중에서 두 분이 여하한 방식으로든 관계를 유지하는 자신들만의 길을 찾아낸 것 같다. 그러나 두 분은 자신들의 문제가 너무나도 엄청나고 엄중하여 자신들의 삶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는 나름의 방식을 찾아낸 듯 싶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낸 이 방식은 자신들 각자와 자신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유지해주는 것에는 성공하였는지 몰라도 정작 가족의 또 다른 구성원인 나와 오빠의 삶을 잘 츠스리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또 실은 폭력적인 것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 구성원 전체를 살리려는 이러한 인식과 관심의 결여야말로 모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20. "인식 자체가 인식 대상을 변화시킨다!" - 헤겔
21. 회고적 주체화의 한 형식 - "너한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22. 기억의 법칙 -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더 선명해지며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2015.10.12~2015.10.19.
2015. 10. 12.
잠언 15
1. 글쓰기는 평생을 바쳐야 하는 과업이다.
2. 타인들과 잘 지내는 방법, 실은 무엇보다도 내가 내 삶을 잘 사는 방법들 증 하나는 혼자 있을 때 남들에게 의존하거나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내 시간을 즐겁게 잘 보내는 기술을 터득하는 일이다.
3. 항상성(homeostasis) - 철학 혹은 공부란 내 마음과 몸의 컨디션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기술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4. 삶이 어려울 때 못난 생각을 품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은 그러한 현상 자체에 함몰되지 않고 그러한 현실을 낳은 자신과 세계의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생각을 하고 책을 읽고 대화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의지가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적절한 방향을 잡아주기 위해서이다. 결국 나의 모든 성심성의와 노력은 '나'를 위한 것이다. 적절한 인식 없는 적절한 행동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 세계가 인식을 바꾸듯 인식이 세계를 바꾼다. 실로 세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세계를 변경시킨다. 헤겔의 놀라운 점은 세계와 인식이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할 뿐만아니라 세계와 인식 사이의 괴리 곧 소외가 나쁜 것도 아니라는 통찰에 도달한 것이다. 소외는 차라리 세계와 인식의 존립 조건 자체이다. 이러한 소외를 도덕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려는 관점 자체가 하나의 소외된 현상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오직 충만히 소외된 자만이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는 놀라운 선언이다. 가령 이러한 인식 자체가 인식하는 자의 자기 인식을 변경시킨다. 이러한 인식 안에서 이제 소외는 차라리 하나의 축복이다.
6. 네 광기와 환상 곧 신화를 억압하지 마라. 신화라는 일본어는 이야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mythos의 번역어이다. 이야기란 이때 내러티브 곧 요소들의 배치를 통해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야기, 내러티브, 맥락이 없다면 개별 요소들의 특성 곧 의미가 발생되지 않는다. 너의 광기와 환상은 온전히 너의 일부분이다. 실상 로고스가 하나의 미토스이다. 이성과 현실, 로고스는 놓아두고 광기와 환상, 미토스만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좋은 바이러스와 좋은 콜레스테롤만을 남긴 채 나쁜 바이러스와 나쁜 콜레스테롤만을 제거하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시도 자체는 무익한 일이 아니나 그러한 시도가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할 경우 그 결과는 끔찍한 것일 수밖에 없다. 불행과 행복의 조건은 다른 것이 아니므로 양자를 모두 감싸안고 나아가야 한다. 비극이 없는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비극마저도 받아들이는 불완전한 세계를 살고자, 다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7. 싼초가 말했다. "나리, 참으로 용감한 심장을 가진 자들은 번영할 때 즐거워할 줄 알 듯이 불행해지면 아픔을 느낄 줄 알지요. 이건 제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겁니다요."
"대단한 철학자가 되었네그려, 싼초." 돈 끼호떼가 대답했다. "아주 사려 깊은 말이야. 누가 자네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는지 모르겠구먼. 내가 자네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운수나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는 걸쎄.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좋은 것도 있고 나쁜 일도 있지만 특별히 하늘의 명이나 운명의 섭리로 오는 것들은 없다는 게야. 여기에서 우리가 늘 하는 말의 진실이 나오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운명의 창조자라고, 내가 내 운명을 만든 사람이지."
- 세르반떼스, <기발한 기사 라 만차의 돈 끼호떼 2>, 민용태 옮김, 창비, 2012, 776~777쪽.
8. 일어난 불행한 일 자체보다 더 큰 '진짜 불행'은 현실의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두려움, 실은 무능력이다. 이 모든 것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삶의 조건 그 자체인 불행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인데 불행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가령 훌륭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교통사고를 안 당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불행해야 할 때 불행하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는 불행마저도 은총이라고 말하는 경우조차 있다. 불행은 은총이 아니라 그저 불행이다. 불행을 받아들여라.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불행과 고통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이유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불행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힘들면 되는데 말이다! 이제 당신은 묻고 싶을 것이다. 과연 이 글을 쓰는 너는 삶의 진정한 고통과 불행을 피하지 않고 겪어보았는가?
9. 누가 내게 인생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최대의 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안이함이라고 대답하겠다.
10. 그러나 실패와 불행, 비극에 매혹된 인간들이 또한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은 이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면 이 비극에 결코 매혹되지 않았을 것이다.
11. 비극과 마찬가지로 자기 혐오와 자기 연민은 실로 삶을 미학화하는 (의식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인) 연극화 작업이다.
12. 삶을 망치는 세 가지 기술 - 비교, 희생 그리고 자기 연민.
13. 은총 효과 - 은총이 발생시키는 효과. 은총의 발명. 은총은 어떤 세계, 어떤 개인을 만들어내는가? 은총의 기능.
14. 한 사회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 혹은 달리 말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느끼는 사람은 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너는 우리와 다르다'는 끊임없는 지적을 받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생각이 골수에 사무쳐 그녀가 의기소침해지고 자신감을 잃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그녀는 한 가지를 잃게 된다. 삶의 안정성. 이제 그녀는 이후에 자신에게 일어날 여러가지 사건에 의해 흔들리게 되고 때로는 무너지겠지만, 이 모든 것은 실로 그녀가 온생애 동안 쉼없이 맞아온 가랑비의 축적이 낳은 최종적 결과에 불과하다.
15. "어떤 텍스트가 희생양 효과에 대해 덜 언급할수록 또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를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수록, 그것은 희생양 효과에 더 지배받고 있는 것이다."(197)
"인간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 없는 법이다. 어린아이들은 무엇을 욕망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남들이 그것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216)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행동하면서 십자가에 못질을 하는 것이다."(256)
"어떤 사람에 대한 심리학을 수행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조서(調書)를 꾸미는 일이다."(256)
"자신이 해방자라고 믿었던서구는 오늘날에 와서 자신이 박해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333)
- 르네 지라르, <희생양>, 민음사, 1998/2007.
16. 사랑을 하면, 네가 늘 품고 있던 그러나 한번도 알지 못했던 온갖 무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도 아니지만 사랑인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이든, 너는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한다.
17.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 사랑을 너무 오래 못받은 사람들, 한번도 혹은 너무 적게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은 실제로 사랑을 받게 되면 두려움에 떤다. 사랑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이 두려움은 사랑하는 자를 시험에 빠뜨린다. 길고도 안정적인 사랑은 이 두려움에 굴하지 않는 용기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자 보상이다. 용기있는 이들만이 아름다움을 얻는다(only the brave takes the beauty)는 말은 실로 옳은 말이다.
18. 라 로쉬푸코적 잠언 - 여성의 허영과 남성의 허세에 대한 치유책으로서의 소박함과 진실함.
19. 믿음을 얻으면 마음도 얻는다.
20. 충고는 백해무익이다. 스스로 망하게 내버려두어라.
21. 너를 받아줄 그릇이 안 되는 사람, 조직에 정성과 충성을 바치지마라.
22. 가장 매력없는 인간 유형들 중 하나는 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에서 그치며 '어떻게' 하자는 방법론도, 하려는 의지도 결여된 사람들이다. 실은 인식의 결여.
23. 지나침이 모자람만 못하다.
24. 더 젊었을 때 더 많은 보르헤스가 번역되지 않았던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다행스럽게도 나는 보르헤스가 아니다.
2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의무는 단 하나이다. 그것은 부모의 말을 잘 듣거나, 부모를 존경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유일한 의무는 스스로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26. 더 젊은 시절에 보르헤스를 더 많이 읽을 수 없었던 것은 나의 불운이었다!
27. 나는 전화받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정말 예외적인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화를 하는 것이나 받는 것이나 무척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나는 불가피한 공무가 아니라면 늘 문자를 한다. 수신벨은 늘 무음으로 해놓고, 전화 통화도 어림잡아 모두 합해서 한달에 열 통화도 되지 않을 것이다. 편집자들부터 친구들까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이런 내 습벽을 알아서 아무도 내게 전화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생각에 메일이나 문자로 해도 될 일을 한국은 보통 전화로 한다. 물론 그것은 자기 선택이지만, 이 글을 보는 분들께 내게만은 문자로 해주길 부탁한다. 이유는 알고 싶지도 말해주고 싶지도 않다(여러분도 이런 자신만의 '비사회적인' 습벽이 있으면 내게 알려주길 바라본다). 그런데 이런 나의 습벽은 괴상한 것일까?
28.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곧 상상도 하지 못한다.
29. 너그러움은 능력이다.
30.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가령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 모든 일들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2015.9.29.-201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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